원정팀 서포터스가 상대팀 감독을 위해 응원 현수막을 내걸고 그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경기가 끝나자 이 감독은 원정팀 서포터스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다.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바로 어제(22일) 인천축구전용구장에서 벌어졌다. 2015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인천유나이티드와 전북현대의 경기는 경기 내용도 내용이지만 바로 이 특별한 만남 때문에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다. 바로 인천 김도훈 감독과 전북에 관한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오늘은 김도훈 감독이 상대팀 서포터스를 향해 인사를 해야 했던 바로 이 이야기를 칼럼 주제로 담아보려 한다.

'신생팀' 전북 유니폼 입게 된 김도훈

울산 학성고 출신 김도훈은 1988년 청소년 대표에 이름을 올리며 한국 축구를 이끌 공격수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그는 연세대 졸업 이후 곧바로 프로팀 문을 두드리지 않고 군대에 입대했다. 1993년 버팔로 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해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던 김도훈은 상무에서 뛰며 실업리그를 경험했다. 실업무대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는 등 그의 진가는 빛났지만 김도훈은 전국체전 예선에 상무 선수로 출전해 무릎을 크게 다쳐 무려 6개월 동안 깁스를 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려 1년 가까운 재활을 거쳐 다시 돌아와 그가 1994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기록한 오버헤드킥은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로 평가받을 정도였다. 그런 김도훈은 1994년 말 군 제대를 앞두고 K리그 드래프트 시장에 뛰어 들었다.

당시 K리그 드래프트에는 대어들이 총출동했다. 김도훈(상무)을 비롯해 곽경근(고려대), 김도근(한양대), 노상래(주택은행), 김인완(한국전력), 김태영(국민은행) 등이 모두 드래프트 대상자가 된 것이다. 특히나 이전 년도 프로행을 거부하고 실업 무대를 택했던 노상래와 김인완 등의 드래프트 가세는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모든 선수를 신생팀 전남드래곤즈가 독식할 상황이 되고 말았다. 1994년 9월 제8구단으로 창단을 선언한 전남을 위해 프로축구연맹에서 대졸선수 6명의 우선 지명뿐 아니라 기존 구단에서도 베스트11을 뺀 한 명씩을 전남에 지명할 수 있도록 하고 실업 우수 선수도 자유롭게 선발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전남으로서는 드래프트 시장에 나온 유망한 선수들을 싹쓸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규정이 확정되자 언론에서는 “김도훈이 전남 선수가 됐다”고 일찌감치 보도를 할 정도로 김도훈의 전남행은 기정사실화 됐다.

그런데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전남보다 뒤늦은 1994년 11월 전북현대 다이노스가 창단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전북 버팔로를 이어받은 전북다이노스는 연맹 규정상 버팔로와는 전혀 다른 팀으로 분류된 신생팀이었다. 당연히 전남보다 뒤늦게 창단한 전북이 우선 지명권을 먼저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전남의 선수 싹쓸이는 이뤄지지 못했고 전북과 전남이 선수를 나눠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전북은 우선지명으로 김도훈을 비롯해 부산공대 출신 장철민과 인천대를 나온 김대식을 지명했고 전남은 한양대 김도근과 아주대 주홍렬, 연세대 김현수를 지명했다. 노상래와 김인완, 김태영도 이때 전남 유니폼을 입게 됐고 대학 최대어 곽경근은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일본으로 향했다. 아마 이때 김도훈이 전남으로 갔거나 김태영, 노상래 등이 전북행을 확정지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역사가 이뤄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됐건 김도훈은 25세의 늦은 나이에 프로 무대에 입성하게 됐다.

전북의 역사와 함께 한 '아기공룡' 김도훈

당시만 해도 전북은 이제 막 버팔로의 역사를 마감한 약체였다. 버팔로 시절부터 재정 문제를 겪는 등 선수들이 가기 싫어하는 팀 1순위로 평가될 만큼 허술했다. 비록 현대자동차가 스폰서 형식으로 구단 운영에 참여하며 새 팀으로 변모했지만 그래도 전북은 모든 축구인들에게는 여전히 약체에다가 언제 휘청거릴지 모르는 팀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김도훈은 신생팀 전북에 입단해 엄청난 활약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우연히도 김도훈의 프로리그 데뷔전이자 전북의 역사적인 프로 첫 경기 상대는 함께 드래프트 시장을 양분했던 ‘신생팀’ 전남이었다. 1995년 3월 25일 광양에서 이 두 팀은 역사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전북의 녹색 유니폼도 새로웠고 그 유니폼을 입은 김도훈도 어색했다. 그런데 이날 경기에서 김도훈은 펄펄 날았다. 전반 21분 김도훈은 첫 골을 뽑아냈고 후반 10분에도 페널티킥을 얻어내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특히 전반 21분 기록한 김도훈의 골은 전북 창단 후 1호골이라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녔다. 이때부터 그는 이런 별명이 따라 붙었다. ‘전북의 아기공룡.’

김도훈은 두 번째 경기였던 유공과의 홈 경기에서도 두 골을 몰아치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전주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홈 첫 경기의 첫 득점자도 김도훈이었다. 25세의 늦깎이 신인이 두 경기에서 세 골을 몰아치자 모두가 열광하기 시작했다. 전력이 바닥이라는 평가는 받던 전북이 개막 두 경기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김도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북은 1995년 8개 팀 중 7위에 그치고 말았지만 김도훈은 그 와중에도 9골 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전북을 혼자 먹여 살렸다. 하지만 이해 신인왕은 해트트릭을 한 차례 포함해 무려 15골을 넣은 전남 노상래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노상래는 득점왕과 신인왕을 한꺼번에 거머쥐며 김도훈과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자존심이 상한 김도훈은 이듬해 복수의 칼날을 갈며 시즌 초반 골 폭풍을 이어나갔다. 3라운드 안양LG전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펄펄 날았고 22경기 출장 10골 3도움의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 부상을 당하며 또 다시 불운을 삼켜야 했다.

비록 부상이 있었지만 김도훈은 어느덧 전북의 간판 공격수이자 팀의 보물 같은 선수로 성장해 있었다. 1997년 시즌을 앞두고 지난해보다 무려 80% 인상된 연봉 7,200만 원을 받을 정도로 그의 주가는 폭등했다. 데뷔 당시 연봉이 2,040만 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성장이었고 대표팀에도 꾸준히 발탁되며 전북의 유일한 국가대표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7년 꾸준히 국가대표에 발탁된 김도훈에게는 소속팀 전북에서 뛸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는 1997년 시즌 14경기에 나서 4골 1도움을 기록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물론 그가 전북에서의 활약이 부족했다고 해 그걸 김도훈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탓하는 이들은 없었다. 전북에서의 화력 지원이 부족했고 대표팀에도 워낙 자주 차출되는 바람에 그가 골을 넣을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에게 군침을 흘리는 구단도 상당히 많았다. 김도훈은 황선홍의 뒤를 이어 최용수와 함께 한국 축구를 이끌어 갈 선수임에는 틀림이 없었고 전북 역시 그가 없는 팀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J리그 생활과 복귀 후 최고 연봉 대우

하지만 그는 더 큰 무대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당시만 해도 연봉은 물론 인프라와 인기에서도 K리그를 훨씬 뛰어 넘는 J리그로 넘어가는 선수가 많았고 김도훈 역시 J리그의 러브콜을 받았다. 비셀 고베가 무려 연봉 7억 6천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제기한 것이었다. 당시 국내 최고 연봉이 포항에서 1억 2천만 원을 받는 황선홍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렇게 김도훈은 2년 임대 후 다시 전북에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비셀 고베행을 확정지었다. 첫 시즌 J리그에서 17골을 뽑아내며 득점 랭킹 8위에 오른 김도훈은 이듬해 무려 11억 5천만 원으로 오른 연봉을 받는 비셀 고베 최고 연봉자로 이름을 올렸다. 김도훈은 부상을 당하는 악재 속에서도 1999년 비셀 고베에서 10골을 기록하며 이름값을 했고 비셀 고베 측은 내심 김도훈과의 완전이적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북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김도훈이 떠난 뒤로 그를 대체할 공격수가 없는 상황에서 전북은 임대 기간인 2년 동안 김도훈의 복귀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당시 김도훈은 전북에 이렇게 말했다. “1년만 더 일본에 머물게 해주세요. 1년 뒤에는 전북에 복귀해 마지막까지 함께 하고 싶습니다.” 당시 게이오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진행 중이었던 김도훈은 홀가분하게 학업을 마치고 전북에 복귀하고 싶다고 했지만 전북은 김도훈의 사정을 이해해 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전북은 “이번에 복귀하지 않으면 더 이상 J리그에서 선수로 뛸 수 없을 것”이라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결국 김도훈은 2년간의 임대 생활을 마친 뒤 학업을 뒤로 하고 전북에 복귀해야 했다. 전북 구단도 김도훈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애를 썼다. 당시 황선홍은 세레소 오사카에서 수원으로 이적하며 연봉 2억 5천만 원으로 국내 최고 연봉자로 이름을 올렸지만 전북은 김도훈에게 “황선홍보다 1백만 원이라도 더 챙겨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김도훈은 전북에 복귀하며 연봉 2억 7천만 원에 사인을 마쳤고 여기에 현대자동차 광고 모델료와 승리수당 등을 합치면 연봉은 4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황선홍과 안정환 등을 뛰어 넘는 고액 연봉이었지만 10억 원을 넘던 일본에서의 연봉에 비한다면 절반도 되지 않는 돈이었다.

김도훈의 연봉에 대해 “황선홍, 안정환과 비교해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김도훈은 이때부터 실력으로 모든 논란을 이겨냈다. 이때부터가 바로 김도훈과 전북의 찬란한 역사의 시작이었다. 2000년 전북에 복귀한 김도훈은 곧바로 대전과의 원정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8경기 연속골이라는 놀라운 대기록을 이어나갔다. 황선홍이 종전에 세웠던 연속골 기록과 동률을 이룬 것이었다. 특히 김도훈은 이 8경기에서 11골을 뽑아내며 엄청난 골 결정력을 과시했다. 창단 초기에 비해서는 전력이 나아졌지만 좋게 평가해도 중위권 수준이던 전북에서 김도훈의 골 행진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도훈은 연속골 타이 기록인 8경기 연속골을 기록한 뒤 대기록 달성을 앞둔 상황에서 대표팀의 중국 원정 평가전을 소화하며 컨디션 관리에 애를 먹었고 결국 안양LG와의 경기에서 득점에 실패하며 대기록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전북을 위해 뛰면서도 대표팀 경기까지 소화해야 했던 김도훈으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최고 연봉자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최고 스트라이커로 우뚝 섰다.

부상을 딛고 얻어낸 창단 첫 우승

2000년은 K리그에 수 많은 스타들이 등장했던 시기였다. 특히나 고종수(수원)와 이동국(포항), 김은중, 이관우(이상 대전), 이영표(안양) 등 젊은 선수들의 인기가 엄청났고 여기에 최용수(안양)와 김태영(전남), 김병지(울산), 신홍기(수원), 이임생(부천) 등 월드컵을 경험하며 전국적으로 대단한 인기를 몰고 다니던 선수들도 즐비했다. 그런데 2000년 당시 K리그 올스타전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한 건 바로 김도훈이었다. 김도훈은 무려 13만 1,578표를 얻어 12만 8,916표의 이동국과 12만 6,899표를 획득한 이영표를 제치고 최다 득표의 영예를 차지했다.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에 비해 인지도가 다소 부족했고 이제 막 떠오르는 젊은 선수들에 비해서는 팬덤 층도 두텁지 않았지만 김도훈은 오로지 실력만으로 K리그 올스타 최다 득표자로 이름을 올리며 ‘최고의 별’이 됐다. 하지만 그는 전북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이 시기 시드니 올림픽 와일드카드에 발탁돼 팀을 오랜 시간 떠나야 했고 심지어 올림픽 본선 무대에서 5분 만에 무릎 부상을 당해 남은 시즌을 망치고 말았다.

김도훈은 진단 결과 3개월은 쉬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국내 최고액 연봉자로서 팀에 보탬을 주지 못한다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더군다나 전북은 정규리그 4위에 턱걸이해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있었고 김도훈으로서는 득점왕 경쟁에서도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든 부상을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습니다. 3개월이 아니라 3주 만에 회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결국 재활에만 3개월이 필요하다는 부상을 당했지만 약 45일 만에 복귀했다.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부천SK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기 위해 무릎에 압박 붕대를 칭칭 감고 선발 출장을 강행한 것이었다. 사실 그라운드에 도저히 설 수 없는 몸상태였지만 후반 40분 극적인 헤딩슛으로 팀의 극적인 2-1 승리를 이끄는 듯했다. 하지만 주심은 김도훈의 골을 파울로 선언했고 그의 부상 투혼도 결국 연장 터진 부천 이원식의 결승골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전북은 이 오심을 연맹에 제소하기도 했다. 비록 김도훈의 투혼에도 전북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지만 김도훈은 시즌 초반 몰아치기를 한 탓에 최용수와 이원식 등을 제치고 생애 첫 K리그 득점왕에 오르게 됐다.

무릎에 여전히 통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김도훈은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았다. 2000년 FA컵 16강 전남전과 8강 포항전에서 연이어 골을 기록하며 팀을 FA컵 결승전으로 이끈 김도훈은 여전히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제주종합운동장에서 열리는 FA컵 결승전을 준비했다. 상대는 바로 신태용과 이상윤, 박남열 등을 앞세운 성남이었다. 전년도 FA컵 결승에서 만나 성남에 0-3으로 패했던 전북으로서는 우승을 위해 반드시 복수전에 성공해야 했다. 그런데 역시 전북에는 김도훈이 있었다. 전반 26분 만에 양현정의 크로스를 오광훈이 백헤딩으로 떨궈주자 이를 김도훈이 침착하게 오른발 슈팅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이후 김도훈은 후반 14분 왼쪽에서 정확한 크로스로 양현정의 두 번째 골까지 도우며 성남을 상대로 2-0 완승을 거두고 감격적인 FA컵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추게 됐다. 지금이야 늘 우승권에서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전북이지만 이 우승이 전북 창단 이후 최초의 우승이었다. 이 우승 없이는 전북의 지금과 같은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무릎에 심한 통증을 이겨내면서까지 팀을 위해 희생한 김도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윤환 감독과의 불화, 그리고 이적

전북도 김도훈에게 또 다시 최고 대우를 해줬다. 당시 프로농구 서장훈(3억 3천만 원)과 프로야구 이승엽(3억 원)의 연봉보다 많은 연봉 3억 3천 5백만 원에 김도훈과 재계약하면서 그는 프로 스포츠 단일시즌 사상 최고 연봉을 받는 선수로 우뚝 섰다. 그러자 김도훈도 이듬해 정규리그 직전 열린 아디다스컵에서 7골을 뽑아내며 이에 화답했다. 2000년 정규리그 득점왕에 이어 바로 다음 대회인 2001년 아디다스컵에서도 또 다시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K리그 역사상 한 선수가 두 대회 연속 득점왕을 차지한 건 김도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전북이 11경기 연속 무승에 허덕이던 2001년 8월 울산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을 수렁에서 구해낸 김도훈은 이런 말을 하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모처럼만에 열대야도 모르고 두 다리 쭉 펴고 잠을 잤어요. 축구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늘 김도훈은 이렇게 중위권인 전북을 이끌어야 하는 최고 연봉자이자 에이스로서의 부담감을 안고 지내야 했다.

2001년에도 악조건 속에 무려 15골 5도움을 기록한 김도훈은 이듬해 또 한 번 J리그의 러브콜을 받았다. 2001년 J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가시마 앤틀러스에 패한 주빌로 이와타가 우승을 위해 김도훈에게 솔깃한 제안을 한 것이다. 특히 일본 대표팀의 상징적인 선수인 나카야마와 나나미가 구단에 이런 말을 했다. "우승을 위해 김도훈을 영입해 달라." 그러면서 주빌로 이와타는 직접 단장이 김도훈을 만나러 와 무려 10억 원 이상의 연봉을 제시했다. 하지만 김도훈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구단이 나를 최고 연봉자로 대우해주며 인정해 주고 있다. 전북과는 인간적인 정으로 맺어진 만큼 이 이상 돈에 대한 욕심은 없다." 무려 전북에서 받는 연봉의 두 배가 훨씬 넘는 연봉을 제안받았지만 김도훈의 전북에 대한 애정은 확고했다. 하지만 전북과 김도훈의 영원할 것 같던 사이도 이때부터 서서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성적부진으로 최만희 감독이 경질당한 뒤 남대식 기술 고문이 감독 대행을 이끌다 2001년 10월 조윤환 감독이 새롭게 정식 감독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김도훈은 서서히 입지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J리그의 유혹을 뿌리치고 전북에 남는 김도훈은 2002년 2군으로 내려가는 수모까지 겪었다. 조윤환 감독과의 불화가 원인이었다.

이렇게 2군을 오가면서도 김도훈은 무려 10골 4도움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하지만 조윤환 감독과의 불화는 점점 더 깊어져만 갔다. 김도훈을 비롯한 일부 선수들은 부천SK 시절 선수들을 중용하는 조윤환 감독에게 불만이 쌓여갔고 이 과정에서 김도훈과 박성배, 서동원 등 기존 팀의 주축 선수들은 자주 출전 명단에서 제외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김도훈은 세 경기 연속 엔트리에서 아예 제외되는 등 최고 선수로서 엄청난 수모를 겪어야 했다. 특히 그는 "득점왕을 노리고 있는데 대전이나 부산, 포항 등 정규리그 우승이 좌절된 하위권 팀과의 경기에서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제외됐다. 나를 의도적으로 빼는 게 어떤 의도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조윤환 감독이 '날씨가 춥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인다'는 등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조윤환 감독도 "도훈이가 나를 찾아와 대화를 나눴더라면 더 쉽게 풀릴 일이지만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다"며 반박했다. 결국 김도훈은 이런 결단을 내렸다. "전북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감독이 나를 쓰지 않는다면 살 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가 다시 전북과 마주하다

더군다나 김도훈은 2002년 시즌을 끝으로 자유 계약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또 다시 J리그 주빌로 이와타에서 김도훈에게 강력한 러브콜을 보냈다. 대표이사를 서울로 보내 김도훈에게 직접적인 제안을 할 계획까지 세웠고 연봉은 원하는 만큼 주겠다고 했다. 여기에 김도훈이 게이오대 대학원 과정이 1년 남아있다는 점도 그가 일본행이 유력한 이유로 점쳐지고 있었다. 김도훈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구단이 최고액 선수로 배려해준 데 대한 고마움과 전북 팬들의 사랑을 감안하면 창단 멤버로서 명예롭게 은퇴해야하는 게 선수된 도리다. 하지만 그라운드 바깥의 문제 때문에 명예와 인격을 무시당해 떠날 수 밖에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됐다." 전북도 김도훈을 대체할 선수로 카메룬의 패트릭 음보마와 협상 중이었다. 하지만 김도훈은 결국 J리그행을 포기했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선수 생활을 국내에서 마무리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김도훈은 2003년 1월 이적료 6억 5천만 원과 연봉 4억 원을 받는 조건으로 성남 유니폼을 입게 됐다. 윤정환과 데니스, 이기형 등에 이어 김도훈까지 영입한 성남은 역대 최강 전력을 갖추게 됐다. 이적 당시 김도훈은 이렇게 말했다. "축구의 고향인 전북에 애정을 갖고 있는 데 떠나게 돼 아쉽다. 떠나더라도 팀이 발전했으면 좋겠다."

당시는 지금처럼 팀을 위해 헌신한 선수를 따뜻하게 보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또한 선수가 팀을 떠날 때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도훈은 자신과 전북을 열렬히 응원했던 팬들을 전주시내로 따로 불러 모아 조촐하게 감자탕을 대접하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동안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김도훈의 친정팀에 대한 배려는 여기까지였다. 이적 후 2003년 4월 조윤환 감독이 이끄는 친정팀 전북과의 경기에 나선 김도훈은 두 골을 퍼부으며 팀의 3-0 대승을 이끌며 통쾌한 복수에 성공했다. 이후 김도훈은 성남에서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며 엄청난 기록을 쏟아냈다. 한 시즌 동안 두 차례나 득점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안양과의 경기에서는 어시스트 해트트릭을 뽑아내는 등 한해 동안 무려 28득점 13도움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둔 것이다. 단일시즌 개인 최다 득점과 최다 공격포인트는 물론 40경기에 나서 41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면서 단일시즌 한 경기당 공격포인트 획득률도 기록했다. 마그노, 도도 등 최고 외국인 선수와의 득점왕 경쟁에서도 승리하며 득점왕에 올랐고 성남의 압도적인 리그 우승에도 일등공신이 됐다.

이후 김도훈은 2004년과 2005년에도 성남에서 대활약하며 결국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뒤 성남과 강원, U-20 청소년 대표팀 코치를 거쳐 올 시즌을 앞두고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에 선임됐다. 그리고 바로 어제(22일) 김도훈은 감독이 돼 마침내 전북과 다시 만났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2015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3라운드 인천과 전북의 경기에서 바로 그 운명적인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경기를 앞두고 전북 팬들은 이례적으로 상대팀 감독을 위한 걸개를 내걸었다. "완산벌 폭격기 김도훈 감독 취임을 축하합니다." 또한 경기 직전 전광판을 통해 김도훈 감독이 소개되자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그를 응원했다. 그리고 김도훈 감독이 경기장에 등장했다. 그의 목에는 전북이 아닌 인천 머플러가 둘러져 있었다. 상대적으로 전력이 열세일 것이라는 평가와 달리 인천은 이날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선전했고 경기가 끝나자 다시 전북 서포터스석에서 김도훈을 연호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풋내기에 불과하던 전북이 도약할 수 있게 했던 바로 그 전설에 대한 예우였다. 그러자 김도훈 감독이 전북 서포터스석으로 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비록 상대팀 감독이지만 전북 팬들은 그에게 존경심을 보냈고 김도훈 감독도 그런 팬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전북 팬들은 인사를 하고 돌아서 가는 김도훈을 향해 끊임 없이 이름을 외쳤다.

참으로 특별했던 김도훈과 전북의 만남

지금의 전북은 명실상부한 K리그 최강팀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팀의 존폐가 위태로웠던 시절도 있었고 '승점 자판기'였던 시절도 있었다. 그 시절 유일한 희망이 바로 김도훈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전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북의 역사적인 창단 첫 골도 그의 몫이었고 홈 경기 첫 골도 김도훈의 차지였다. 전북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된 선수도 김도훈이었고 전북 출신 첫 득점왕도 김도훈이 해냈다. 전북의 역사적인 첫 우승도 김도훈의 발 끝에서 나왔고 여전히 이동국에 이어 전북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도 김도훈으로 기록돼 있다. 비록 그런 '전설'을 이제는 상대팀 감독으로 만났게 됐지만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가 더 특별한 것 아닐까. 김도훈이 있기에 지금의 전북이 있고 전북이 있기에 지금의 김도훈이 있는 건 아닐까. 어제 인천축구전용구장에서 마주한 전북 팬들과 김도훈은 참으로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