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이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수원블루윙즈와 상하이선화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경기 취재를 마치고 뒤늦게 나오던 길이었다. 뒤늦게 빠져 나온 경기장 주변은 한적했다. 그런데 잔뜩 화가 난 상하이 팬 30여 명이 나를 향해 걸어오며 손가락질을 했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놈 잡아”라는 뉘앙스로 한 명이 말하자 나머지 팬들이 나에게 우르르 달려왔다. 일대일로 싸워도 내가 질 것 같았는데 서른 명이 한꺼번에 달려드니 막막했다. 당황한 나는 곧장 뒤로 돌아 기자석 출입구로 들어가 몸을 피했고 출입구 밖까지 쫓아온 상하이 팬들은 출입 금지 구역 앞에서 씩씩거리며 분을 참지 못하다가 결국 돌아섰다. 알고 봤더니 경기 전 상하이 팬들이 수원 ‘블루윙즈’에 도발하기 위해 비둘기 날개를 잘라 홈 관중석에 피를 뿌려놓고 갔고 이에 격분한 수원팬 일부가 경기가 끝난 뒤 상하이 팬들에게 소화기를 뿌리며 복수를 한 것이었다.

인원수에서 밀린 상하이 팬들은 수원 팬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경기장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취재를 마치고 늦게 경기장을 나서는 나를 보고 달려든 것이었다. 이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사람이란 게 누군가에게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되지만 이때부터 나는 중국의 대다수 축구팬이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지금도 이런 선입견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실제로 인간미 넘치는 중국 축구팬을 많이 봐 왔지만 그래도 비둘기를 면도칼로 난자한 뒤 피를 뿌리며 도발하고 일대 다수의 싸움을 거는 상하이 팬들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런 행동을 한 이들은 상하이 팬 중 일부에 불과하겠지만 상하이 팬들을 자주 접할 수 없는 나로서는 대다수의 상하이 팬들이 이런 난폭한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직 상하이에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 도시 이름을 들을 때마다 ‘아 그 면도칼로 비둘기 죽여 피 뿌리는 애들이 사는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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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월드컵경기장 원정 응원석 2층에서 발견된 까치의 사체. 누군가 고의적으로 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진=강성원)

개막전에 등장한 충격적인 까치 사체

그런데 지난 주말 K리그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K리그 디펜딩 챔피언 전북과 지난 시즌 FA컵 우승팀 성남이 펼치는 2015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개막전이라는 축제에서 믿기 싫은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성남 서포터스석 2층에 누군가가 까치 대가리를 잘라 놓았기 때문이다. 까치를 상징으로 하는 성남을 향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에 대해 전북 구단에서는 이틀 동안 주변 CCTV 영상을 모두 분석했지만 워낙 이동 관중이 많은 탓에 범인을 아직까지 잡지 못한 상황이다. 프로축구연맹 관계자 역시 “연맹 차원의 진상 조사를 펼치고 있지만 범인 색출이 사실상 쉽지 않다”고 밝혔다. K리그 팬들의 축제인 개막전에서 이런 비상식적이고 몰지각한 행동이 벌어졌다는 게 참으로 씁쓸하고 충격적이다. 전북과 연맹에서 조사를 하고 있고 전북 구단이 경찰에 동물보호법 위반으로 수사 의뢰를 검토하고 있지만 이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적지 않아 보인다.

일부에서는 사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물론 아직 확증이 없으니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놓고 조사해야 한다. 고양이가 그랬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개막 전 시설관리공단에서 경기장 내 까치집 제거 작업을 해 이 영향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까치가 상징인 성남과의 경기가 열리는 날 고양이가 까치 대가리만을 잘라 경기장에 몰래 들어와 다른 관중석도 아닌 성남 응원석 2층에 정확히 이를 물어다 놓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렇게 어긋난 전북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고양이가 있을까. 또한 까치집 제거 작업 중 까치 대가리만이 잘려 피 한 방울의 흔적도 없이 관중석 2층에 떨어질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범인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이는 사람이 한 짓일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상하이 팬들의 만행을 경험하며 그들의 미개함에 혀를 차던 게 불과 몇 년 전이었는데 이런 일이 K리그 경기장에서 벌어졌다니 충격이다.

내가 상하이 팬들에게 선입견을 갖는 것처럼 이번 까치 사건을 통해 많은 이들은 전북 구단에 대해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는 정말 개념찬 단장과 최고의 감독 및 선수들, 그리고 겨우내 이 개막전을 준비하기 위해 매일 밤을 새며 고생했던 프런트의 노고를 한 순간에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행동이다. 전북과 관련해 개막전 시원한 승리에 대한 보도 이상으로 이번 ‘까치 사건’이 뉴스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건 땀 흘려 멋진 승리를 일궈낸 선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무리 구단이 선수들의 멋진 은퇴식을 열어 주고 최고급 클럽하우스를 지어주면 뭐하나. 이런 행동 하나로 많은 이들은 ‘그저 사고치는 집단’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텐데 말이다. 더군다나 범인이 개인적으로 성남에 사는 이성을 만나다 차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북 구단은 성남과 딱히 이렇게 비상식적인 도발을 펼칠 정도로 얽힌 사이도 아니다. 성남을 상대로 도발을 하려면 원정 2층 관중석에 김학범 감독이 쓰면 어울릴 법한 가발 하나 던져 놓고 가는 위트 있는 도발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축구 응원, 점잖을 수 없지만 마지막 선은 지켜야

2011년 전북은 세레소 오사카와의 AFC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6-1 대승을 거두며 축제 분위기에 사로 잡혔던 적이 있다. 그것도 AFC 챔피언스리그 4강 길목에서 거둔 의미 있는 대승이었다. 하지만 경기 내용보다 더 이목을 끌었던 건 한 전북 팬들이 내건 종이 플래카드였다. 이 플래카드에는 ‘일본의 대지진을 축하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이 플래카드는 아주 잠시 현장에 걸려 있다 곧바로 철거됐지만 세레소 오사카 측은 경기 후 AFC에 항의문을 제출했고 결국 전북 구단이 직접 사과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이미 지상파 뉴스를 통해 전북 서포터스가 집단적으로 이런 플래카드를 내건 것처럼 대단히 부풀려져 보도된 뒤였다. 골수 축구팬이야 몰지각한 한 팬의 행동이라고 받아들이지만 지상파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대중은 전북 구단 자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한 팬의 삐뚤어진 애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전북의 멋진 6-1 대승은 이렇게 한 팬이 벌인 사건으로 묻히고 말았다.

사실 축구라는 게 절대 점잖을 수 없는 스포츠인 건 맞다. 경기를 보다보면 욕이 나오기도 하고 상대팀을 향해 조롱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경기가 열리는 90분 동안 그 내부에서만 일어나야 한다. 상대를 조롱하는 노래를 단체로 부르거나 정말 아파 쓰러진 상대 선수에게 야유를 보내는 걸 조금 과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이 정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과거 나도 K3리그 고양시민구단에서 선수로 맹활약할 당시 공을 잡고 혼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야유 소리와 조롱을 똑똑히 기억한다. 하필이면 상대가 팬도 많은 서울유나이티드였기 때문이다. 속으로 욱하기도 했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경기가 벌어지는 동안 그 안에서 벌어지는 충실한 팬들의 반응이다. 경기 내내 상대팀을 향해 야유 등 부정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것쯤은 누가 들어도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쌍욕’이나 ‘패드립’이 아니면 어느 정도 용납할 수 있다. 이것도 어쩌면 축구 응원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까치의 대가리를 자르거나 비둘기를 면도칼로 난도질하는 행동은 축구 응원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 없다. 까치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나. 까치의 대가리를 잘라 원정 응원석에 던져 놓는 짓을 용감한 행동이라고 받아들일 이는 없다. 이렇다고 “성남에 한 방 먹였다”고 박수를 쳐줄 전북 선수가 있을까. 상대가 까치를 상징으로 하는 성남이어서 이런 짓을 했다면 부산아이파크와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집에 모셔둔 아이파크 아파트 집문서도 갈기갈기 찢어 원정 2층 응원석에서 날려라. 그러면 진정한 ‘용자’로 인정해 줄 수 있다. 참고로 울산현대의 상징은 호랑이다. 까치 대가리를 잘라 용맹함을 과시했던 이들은 꼭 참고하길 바란다. 헌데 더 강한 이들을 상대로 같은 행동을 할 자신이 없다면 처음부터 죄 없는 까치를 괴롭혀서는 안 됐다. 전북 최강희 감독은 경기 전 김학범 감독을 향해 머리숱을 언급하며 유쾌하게 도발했는데 일부 팬들도 잔인한 행동 대신 유쾌하게 성남에 도발할 수는 없었을까. 감독과 일부 팬들의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의 좋은 기회를 이렇게 날린 것 같아 아쉽다.

‘까치 사건’, 응원팀 향한 ‘셀프 백태클’

열혈 전북팬의 짓일 수도 있고 어쩌다 한 번 지나가다 경기장에 들른 관중의 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구단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냐를 떠나 이런 행동 하나로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어 선수를 영입하고 인프라를 확충하는 전북의 막대한 투자도 한 순간에 비호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일을 자행한 이는 구단과 연맹의 조사 결과 범인을 색출하는 게 쉽지 않다고 해 쾌재를 부르며 안도해서는 안 된다. 관중 한 명 한 명의 매너도 결국에는 그 구단의 이미지를 대변한다는 걸 잊지 말자. 해외 유적지에 가 한국어로 된 낙서를 보고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있다. 5천만 명 중 몇 명이 한 행동이지만 결국 이는 한국 전체를 깔아뭉개는 짓이다. 이번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대다수 전북팬들이 매너 있고 예의 바르다. 구단도 K리그를 넘어 아시아 최고를 넘볼 정도로 최선을 다한다. 선수들의 프로 의식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단 한 명의 삐뚤어진 행동 때문에 전체가 손가락질 받고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런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면 결국 피해를 입는 건 구단이다.

정말 고양이의 짓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적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의도적인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 구단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적어도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주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 골대 뒤 누군가와 그렇지 않은 누군가를 구분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라 나는 ‘서포터스’라는 말 자체를 좋아한다. 그저 응원만 하는 개념 이상으로 ‘지지하고 지원한다(support)’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축구에서 관중과 팀은 목표를 향해 함께 가는 존재다. 그런데 갑자기 동료를 향해 누군가 백태클을 날리면 쓰겠나. 이번 사건은 구단을 향한 명백한 백태클이었다. 자수해 잘못을 뉘우치면 좋겠지만 그럴 용기까지는 없더라도 스스로 얼마나 위험한 백태클을 그토록 아끼는 자신의 선수들에게 했는지 반성했으면 한다. 또한 다른 걸 다 떠나 죄 없고 말 못하는 동물을 학대하는 행위 자체가 명백한 범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