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컵은 우리가 출전할 수 있는 축구 대회 중 월드컵 다음으로 가장 큰 대회다. 우리가 유럽으로 편입하지 않는 이상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껏 아시안컵을 아주 하찮은 대회로 여겨왔다. 나는 55년 동안 한국이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하지 못한 걸 선수들의 기량 부족보다는 그만큼 이 대회를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껏 아시안컵보다도 금메달을 따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아시안게임에 더 목을 맸고 심지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다이너스티컵 같은 대회도 아시안컵보다 더 후하게 치기도 했다. 지금까지 아시안컵은 우리에게 찬밥 신세였다. 오늘은 우리가 얼마나 지금껏 아시안컵을 무시했는지에 대해 되짚어보려 한다.

기사 이미지

제1회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는 행방도 묘연한 상태였다가 2012년 등록문화재 제493호로 지정됐다. (사진=문화재청)

우승 트로피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나라

한국은 1956년 홍콩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안컵에서 역사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아시안컵 초대 챔피언이라는 역사에 남을 성적이었다. 그리고 AFC에서는 우승 트로피 진품이 아니라 순은으로 만든 가품을 선사했지만 선수들은 이 우승 트로피를 들고 당당히 개선했다. 하지만 이 귀한 우승 트로피는 이후 골동품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시안컵 초대 우승을 기념하는 엄청난 가치의 물건이지만 우리는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를 푸대접했다. 1985년 대한축구협회로부터 이 우승 트로피를 기증 받은 대한체육회는 2000년 태릉선수촌 내 한국체육박물관이 개장하자 이를 전시했다. 하지만 이 우승 트로피에는 아시안컵 초대 우승을 알리는 그 어떤 설명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저 여러 우승 트로피와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 사이 우승 트로피는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부식되고 있었다.

대한축구협회가 뒤늦게 이 우승 트로피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우승 트로피를 대한체육회에 기증했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1999년 협회가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으로 이사하는 도중에는 물품을 모두 꺼내 우승 트로피를 찾아봤지만 소용 없었다. 원로 축구인들이 사적으로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원로 축구인들을 만나봤지만 그들이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있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2012년 1월 결국 이 우승 트로피가 한국체육박물관 한 켠에 전시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2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1960년 서울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안컵에서도 한국이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 우승 트로피는 아직까지도 행방을 찾을 수가 없다. 제2회 아시안컵은 한국이 우승을 차지한 마지막 대회다. 아시안컵 우승 트로피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이제 아시안컵 우승은 사치 아닐까.

아마추어로 구성된 대표팀의 힘겨운 도전

아시안컵 무시 현상은 1980년대에도 이어졌다. 1988년 카타르 아시안컵을 앞두고 대한축구협회는 이런 발표를 했다. “88올림픽과 대통령배 축구대회 등 일정이 많습니다. 그러니 아시안컵 예선에는 대학과 실업 선수를 내보내겠습니다.” 당시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 A팀은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올림픽 출전에 연령 제한이 없는 터라 최순호와 이태호, 정해원, 정용환, 김주성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대표팀은 두 팀이나 더 있었다. 박수일 감독의 국가대표 B팀에는 유망주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고 당시 건국대를 지휘하던 정종덕 감독이 이끄는 아시안컵 대표팀이 따로 있었다. 그것도 아시안컵 예선이 1998년 6월 17일에 열리는데 아시안컵 대표팀은 5월 23일에 급조됐다. 프로선수라고는 포철에서 뛰는 이화열 한 명뿐이었고 연세대의 김봉길과 건국대의 황선홍 등 대학생 12명, 실업선수 5명이 포진한 팀이었다.

협회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88올림픽에 나서는 국가대표 A팀과 유망주로 구성된 국가대표 B팀을 내보내기로 했다. 아시안컵 예선과 겹치는 시기였지만 아시안컵 예선보다는 대통령배를 더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은 최정예를 구성해 중국에서 전지훈련까지하며 아시안컵을 대비하고 있던 터라 급조해 20여일 만에 아시안컵 예선에 나선 우리와 많은 비교가 됐다. 아시안컵 대표팀은 한국에서 국가대표 A팀의 평가전 파트너 역할을 하는 게 전부였다. 한국은 아시안컵 D조 예선에서 바레인, 남예멘, 인도네시아와 경기를 치러 2위 안에 들면 본선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남예멘이야 약체로 꼽혔지만 바레인도 만만치 않았고 홈팀인 인도네시아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학생과 실업 선수 위주로 선발된 팀은 참 위태로워 보였다. 지금이야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 대학생이던 황선홍과 이상윤 등이 팀을 이끌어야 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아시안컵 예선보다는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 A팀이 어떤 성적을 내느냐에 더 쏠렸다.

아시안컵 예선이 시작되자 한국은 첫 경기에서부터 믿기지 않는 패배를 당했다. 바레인을 상대로 0-2로 진 것이었다. 그리고 남예멘과의 2차전에서도 졸전을 거듭했다. 가까스로 1-1 무승부를 기록, 1무 1패로 아시안컵 우승은커녕 본선 진출도 쉽지 않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인도네시아와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후반 25분 동안 한 골도 넣지 못하며 0-0 무승부의 위기에 놓였던 한국은 이때부터 15분 동안 네 골을 몰아 넣으며 가까스로 2위를 확정짓고 아시안컵 본선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마터면 아시안컵을 무시하다 본선에도 나가지 못하는 망신을 당할 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때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팀을 구성해 1988년 12월 2일 개막하는 아시안컵을 준비해야 할 상황에서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다 11월 5일이 돼서야 이회택 감독을 사령탑으로 선임했고 11월 23일에야 선수 명단을 확정지었다. 아시안컵 본선까지 채 열흘도 안 남은 시점에서 부랴부랴 아예 새로운 선수들도 판을 짠 것이었다. 한국이 이 대회에서 승승장구하며 결승에 올라 사우디에 승부차기 끝에 패해 준우승을 차지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던 셈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다

4년 뒤에도 한국은 아시안컵을 철저히 무시했다. 1992년 6월 16일 태국에서 아시안컵 5조 예선을 치를 예정이었는데 4년 전 예선 때도 가슴을 쓸어 내렸던 한국은 또 다시 대학생과 실업 선수들로만 팀을 꾸렸다. 5월 8일과 9일 이틀 동안 수도전자공고에서 아시안컵 대표 선발 테스트를 실시해 숭실대의 노상래와 고려대의 서동원 등 대학 선수 11명, 실업 선수 9명 등 총 20명의 선수를 발탁했다. 하지만 상황은 4년 전보다도 더 불안했다. 4년 전 예선에서는 조2위까지 본선 진출 티켓이 주어져 가까스로 본선에 턱걸이했지만 1992년 예선은 달랐다. 각 조 1위만이 본선에 가는 방식이었다. 한 조에 속한 필리핀과 방글라데시는 한 수 아래라고 쳐도 홈팀 태국을 상대로 경험이 부족한 대학생과 실업 선수들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협회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본선에서는 프로 선수를 내보낼 예정이지만 예선을 아마추어 선수로만 치를 것입니다.” 협회는 프로팀 눈치를 보고 있었고 아시안컵의 중요성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방글라데시와의 1차전에서 한국은 차승룡이 두 골을 넣는 등 활약하며 6-0 대승을 거뒀다. 산뜻한 출발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승부는 2차전 태국과의 경기였다. 사실상의 결승전이나 다름 없는 승부였다. 그런데 한국은 이 경기에서 전반 시작 3분 만에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허용했고 이후 노상래가 동점골을 뽑아냈지만 결국 후반 35분 통한의 결승골을 허용하며 1-2로 무너지고 말았다. 태국이 아시안컵 본선에 진출하고 한국은 본선 무대조차 밟지 못하고 짐을 싸는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1956년 1회 대회 이후 처음으로 본선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더 배가 아픈 건 이 대회 본선에서 일본이 아시안컵 3연패를 노리던 사우디를 결승에서 1-0으로 제압하고 사상 첫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아시안컵을 개최하며 5만 명의 홈 팬들 앞에서 일본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순간 우리는 아시안컵 따위보다 다이너스티컵에서 일본에 복수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시안컵을 무시하니 이게 얼마나 배 아픈 일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이게 과거 이야기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난 2011년 카타르 아시안컵을 앞두고 일부 네티즌은 박지성 차출 반대 서명 운동까지 벌이기도 했다. “박지성이 아시안컵에 나섰다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게 서명 운동의 이유였다. ‘천하의 박지성’이 아시안컵 따위에 나갈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 황당한 서명 운동에 동참한 사람만 1천여 명이 넘는다. 단순히 과거에만 아시안컵을 무시한 게 아니라 현재에도 아시안컵을 나가도 그만 안 나가도 그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이야기다. 박지성 스스로 2010 남아공월드컵이 끝난 뒤 “일단 나의 가장 중요한 꿈은 아시안컵 우승을 내 경력에 넣는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지만 일부 팬들에게 아시안컵은 그저 부상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는 하찮은 대회 취급을 받았다. 아시안컵을 앞두고 감독을 교체해 늘 이 큰 대회를 대표팀이 다듬어져 가는 과정으로 취급한 것도 최근에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아시안컵은 누구 말대로 경험하는 곳이 아니라 증명하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아시안컵, 우리에겐 월드컵 다음 가는 대회다

아시안컵의 중요성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도 대단한 대회지만 적어도 축구만 놓고 봤을 때 이런 대회를 아시안컵과 비교하는 건 아시안컵에 대한 대단한 폄하다. 우리가 월드컵 다음으로 나갈 수 있는 큰 대회가 바로 아시안컵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월드컵에 많이 나가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축구에서 메달을 따도 진정한 아시아 축구 최강국으로 인정 받는 건 아시안컵 우승 횟수다. 여기에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면 각 대륙 우승팀이 모여 치르는 컨페더레이션스컵에 나가는 건 두둑한 보너스다. 아시안컵에서 3위 안에 입상하면 다음 아시안컵 예선을 면제 받는데 한국이 2011 아시안컵에서 3위를 차지해 2015년 아시안컵 예선을 면제 받고 그리스 등 유럽 원정을 떠난 동안 아시안컵 본선 자동 출전권을 따내지 못한 이란은 태국, 레바논, 쿠웨이트 등과 아시안컵 예선을 치렀다. 아시안컵은 우리에게 월드컵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대회일 수밖에 없다. 아시아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아시안컵 우승이 필수다. 55년 동안 아시안컵 한 번 들어 올리지 못한 나라에서 ‘아시아의 맹주’라는 말을 하는 건 너무나도 창피하지 않는가.

선수들이 제대로 뛰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지금껏 우리가 왜 아시안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는지를 잘 생각해 보자. 소중한 원년 우승 트로피가 어디 쳐박혀 있는지도 모르던 우리에게 하늘은 또 다시 우승 트로피를 선사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최고의 전력을 갖춰 죽어라 뛰어도 모자랄 판국에 아마추어로 팀을 구성했으니 굴욕을 당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에이스가 유럽 소속팀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 이 선수의 아시안컵 출전을 반대하는 서명 운동을 하는 나라에서 아시안컵 우승은 사치다. 대회 도중 술을 마실 정도로 아시안컵의 무게감을 느끼지 못했던 선수들의 잘못도 대단히 크지만 아시안컵을 그저 다이너스티컵이나 던힐컵, 메르데카컵보다도 못한 취급을 한 협회와 팬들에게도 잘못은 있다. 이렇게 아시안컵을 무시하는 나라에서 아시안컵 우승을 바라는 건 대단히 이기적인 일 아닐까. 한국의 아시안컵 우승을 위한 첫 걸음은 아시안컵을 존중하고 성대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부터다. 아시안컵을 계속 무시하는 한 우승 트로피는 우리 품으로 돌아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