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2015년 호주아시안컵에 나설 최종 엔트리를 발표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어제(22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55년 만에 아시안컵 정상에 도전하는 대표팀 명단을 공개했다. 대체적으로 예상했던 선수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지만 가장 의외였던 건 이정협(상주)의 발탁이었다. K리그 팬들조차 생소한 선수가 대표팀에, 그것도 아시안컵에 출전하게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 역시 아시안컵 최종 엔트리 발표를 앞두고 이정협의 발탁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55년 만의 아시안컵 정상 도전을 위해 모험을 감행했다. 하지만 나는 슈틸리케 감독의 이런 선택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깜짝 발탁’이 전하는 메시지가 너무나도 분명하면서 강렬하기 때문이다.

상주 백업 공격수 이정협의 ‘깜짝 발탁’

슈틸리케 감독은 고민이 상당했을 것이다. 이동국(전북)이나 김신욱(울산)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거나 박주영(알 샤밥)이 전성기 시절 기량을 유지했더라면 최전방 공격수 구성에 그리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동국과 김신욱은 부상을 당했고 박주영은 중동 무대에서도 무득점에 머물고 있다. 뽑을 수 있는 자원에 한계가 있었다. 이근호((엘 자이시)와 조영철(카타르SC)이 있지만 이 둘로는 최전방의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무게감 있는 타겟형 공격수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 주전이건 백업이건 전술적인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이동국이나 김신욱의 부상은 상당한 공백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지동원까지도 소속팀에서 경기에 나서지 못하며 방황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표팀 최전방 공격 라인을 꾸리기가 이렇게 어려웠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정협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지난 시즌 부산아이파크에서 2골, 올 시즌 상주상무에서도 4골에 머물며 그리 주목받지 못하던 선수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그가 이정기에서 이정협으로 개명했다는 사실조차 잘 알지 못할 정도다. 언론 주목도가 떨어지는 상주상무에서, 그것도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하지 못하던 선수를 주목하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과감히 이정협을 발탁했다. “배고픔과 열정을 가진 선수를 찾고 있다”던 슈틸리케 감독이 원하는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186cm의 장신으로 타겟형 공격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이정협의 능력도 높이 샀다. 단 한 차례의 A매치 경험도 없는 선수가 월드컵 다음으로 큰 대회에 나설 기회를 얻는 순간이 펼쳐졌다. 말 그래도 ‘신데렐라’의 등장이다. 이정협은 순식간에 모든 축구팬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내가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을 지지하는 이유는 꼭 이정협을 발탁해서가 아니다. 강수일이건 이정협이건 황의조건 새로운 얼굴을 대표팀에 뽑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중 그 어떤 선수가 대표팀에 발탁됐어도 마찬가지로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동안 ‘철밥통’으로만 여겨지던 대표팀이 새로운 선수의 등장으로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속팀에서 죽을 쓰고 컨디션이 엉망이어도 대표팀에 개근하는 선수가 있다면 그 대표팀은 강해질 수 없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정협을 뽑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정협은 A매치 경험이 전혀 없고 상주서도 선발이 아닌 후보로 많이 출전했다. 하지만 K리그 경기와 제주 전훈을 통해 충분히 확인했고 선발을 결정했다.” 나는 자신이 원하는 선수라면 인지도와 상관없이 과감히 발탁할 수 있는 슈틸리케 감독의 용기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아마 그릇이 작은 내가 대표팀 감독이었더라면 ‘그래도 인지도가 중요하지’라면서 박주영과 지동원을 놓고 고민했을 것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사실 나는 이정협이 아시안컵 본선 무대에서 많은 시간 기회를 부여받거나 맹활약할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는 않는다. 이근호와 조영철이 주전 경쟁에서 앞서 있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대표팀 발탁 자체가 주는 메시지와 효과는 분명하다. 어느 무명의 선수건 능력을 보여주면 대표팀에 올 수 있고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것, 그 반대로 어떤 유명한 선수라도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기회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발탁이기 때문이다. 물론 더 열심히 해 이정협이 주전 공격수로 맹활약하는 모습이 연출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정협이 아시안컵 본선 무대에서 경기에 많이 나서지 못하고 하더라도 그 등장 자체로 동료 공격수들을 긴장케 하는 효과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마도 이근호와 조영철 역시 이정협의 등장에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다. 슈틸리케 감독은 “잘하는 선수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단순히 말로 엄포를 놓은 게 아니라 진짜로 K리그에서도 백업으로 뛰는 선수를 뽑았기 때문이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내가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을 지지하는 이유는 이뿐 아니다. 정기운과 김민태, 최호주와 왕건명. 한국 축구에 대단한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조차 생소한 이름이다. 하지만 우리도 잘 모르는 이름을 ‘이방인’ 슈틸리케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지난 21일 슈틸리케 감독은 제주도 전지훈련을 마무리하는 청용팀과 백호팀의 평가전에 이들을 불러 들였다. 이들은 대학 축구 U리그 왕중왕전에서 발군의 활약을 펼친 대학생들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U리그 왕중왕전 당시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볼 때만 하더라도 허니버터칩을 옆에 낀 채 셀카를 찍고 자신의 SNS에 “U리그 왕중왕전 현장에서 힐링힐링”이라며 ‘나는 이런 경기까지 챙겨본다’고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당시 현장에서 지켜본 선수들 중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은 선수를 직접 제주도로 호출했다. 물론 이들이 당장 성인 대표팀에 합류할 수는 없겠지만 대학 무대까지 챙기는 감독 앞에서 아무리 유명 선수라고 해도 주전을 보장 받을 수는 없다. 이건 대표팀 선수들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다.

슈틸리케 감독의 이런 ‘깜짝 발탁’은 대표팀에 무한 경쟁 메시지를 전달함과 동시에 한국 축구 전체에도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다. 자신이 지켜본 U리그 경기에서도 기량이 뛰어난 선수를 대표팀에까지 부르는 감독이 있다면 그가 가는 어떤 작은 축구 경기에서도 선수들이 더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인 대표팀 감독이라는 게 단순히 그 팀 하나만 이끄는 게 아니라 한국 축구 전체를 아우르는 수장이라는 점에서 슈틸리케 감독의 행보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K리그의 백업 선수도 대표팀 감독 눈에만 들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을 수 있고 더 나아가 대표팀 테스트에서 죽기 살기로 하면 아시안컵이라는 큰 무대에 나설 수 있다는 걸 슈틸리케 감독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14 브라질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 한 달을 앞둔 상황에서 “깜짝 발탁은 없다”고 못 박은 홍명보 감독과 달리 슈틸리케 감독은 엔트리 발표 하루 전까지도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까지 고심하고 있다. 깜짝 발탁이 있을 수도 있다.”

감독은 선수를 애타게 만들어야 한다

과거에도 깜짝 발탁 사례는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깜짝 발탁한 선수가 당장 대표팀의 주전이 돼 그라운드를 휘젓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효과는 상당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차범근 감독은 당시 대표팀 엔트리를 발표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당시 실업축구 할렐루야에서 뛰던 진순진을 대표팀에 뽑았기 때문이다. 재능 있는 여러 선수를 살피던 중 당시 중앙대에 재학 중이던 최거룩과 함께 할렐루야 조병득 감독의 추천을 받고 진순진을 대표팀 테스트 선수로 선발했다. 당시 대표팀에는 황선홍과 최용수, 김도훈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차범근 감독은 빛을 보지 못한 실업 축구 선수를 가능성 하나만 보고 대표팀에 발탁했고 진순진은 대표팀에 합류한 뒤 5차례의 연습경기에서 6골을 뽑아내며 맹활약, 순식간에 대표팀의 새로운 공격 옵션으로 떠올랐다. 물론 진순진은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동료들을 긴장시키는 역할만으로도 할 일을 다 했다. 당시 진순진과 경쟁을 펼치던 최용수는 “내가 주전에서 밀릴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더 독한 마음을 품어야 했다”고 밝혔고 김도훈 역시 “이런 재능 있는 선수가 갑자기 나타나니 당황스럽다”면서 “비록 실업 선수지만 배울 점이 많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차범근 감독은 이때 이동국도 발탁했다. 지금은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라는 평가를 받는 이동국이지만 차범근 감독이 대표팀을 이끌던 당시 이동국은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새싹이었다. 아무리 고교 무대를 평정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대표팀에 발탁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은 1997년 말 “고등학생도 대표팀에 뽑을 수 있다”고 밝혔고 이 말을 실행으로 옮겼다. 포철공고 졸업을 앞둔 이동국을 대표팀으로 부른 것이었다. 아직 세상이 이동국이라는 걸출한 신인을 알아보기 전이었으니 당연히 발칵 뒤집어졌다. “차근 차근 연령별 코스를 밟아야 할 선수를 너무 성급하게 성인 대표팀에 불렀다”는 의견이 상당했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은 단호했다. 이동국이라는 성공 사례만 비춰져 있지만 이동국 말고도 양현정(당시 단국대)과 박병주(당시 한성대), 성한수(당시 연세대), 신병호(당시 건국대) 등도 함께 대표팀에 발탁하는 파격적인 실험을 했다. 결국 이 중 이동국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아 프랑스월드컵 본선에 나섰고 이동국은 대표팀이 네덜란드에 0-5로 대패를 당하는 동안 한국 축구의 한줄기 희망으로 피어올랐다.

결과론적으로만 이야기한다면 1998년 월드컵은 참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성인 대표팀 감독이라면 꾸준히 경쟁할 수 있도록 동기 유발을 해야 하고 그런 면에서 차범근 감독의 선택은 대단히 용기 있는 도전이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매번 뽑히는 선수들만 뽑혀 대표팀이 친목의 장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 점을 잘 알고 이용하는 듯하다. 결국 감독은 선수들의 심리를 다루는 사람이다. 나는 감독이 선수들을 애타게 만들고 살살 약을 올려 독기를 품게 만들고 흔들릴 때는 어깨를 두드려 일으켜 세워 주는 게 스리백이냐 포백이냐, 원톱이냐 제로톱이냐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명 선수여도 과감히 발탁할 수 있는 슈틸리케 감독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이 기회를 잡은 이정협이 아시안컵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게 바로 슈틸리케 감독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축구 밀당남’의 새로운 등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