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FC가 결국 2부리그인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되고 말았다. 경남은 지난 6일 벌어진 광주FC와의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 1무 1패로 강등이라는 믿기 어려운 결과를 받아들이게 됐다. 한때 ‘도민구단의 자존심’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K리그에서도 황금기를 구가했던 경남의 씁쓸한 현실이다. 경남은 선수단 운영뿐 아니라 내외적으로도 삐걱거리며 결국 강등이라는 쓴맛을 보게 됐다. 하지만 축구는 계속된다. 경남은 좌절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다시 한 번 그들의 부활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누구보다 찬란했던 경남의 과거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한다. ‘도민구단의 자존심’ 경남의 가장 찬란했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뜨거웠던 경남도민의 프로축구팀 창단 열기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 각 지자체마다 프로축구단 창단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경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남축구협회가 주도하는 프로팀 창단 열기는 시민들의 열띤 호응으로 이어졌다. 2002년 7월 창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경남프로축구단 창단을 위한 결의대회’에는 무려 2천여 명에 가까운 인파가 몰려 결의를 다졌다. 경남 지역 내 초·중·고 축구선수들과 지도자, 학부형, 그리고 붉은악마 회원 등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경남에는 무려 37개의 학교 축구부가 존재하고 있었고 축구 동호인 수도 4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축구 열기가 뛰어난 곳이었다. 이런 경남에서 프로팀 창단을 준비하자 반응이 뜨거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경남축구협회는 도민구단 형태로 구단 창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경남 지역에 2년 연속으로 대규모 수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한데 프로팀 창단은 현안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프로팀이 창단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경남은 프로팀 창단과 관련해서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도민구단이라는 게 도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어야 하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여기에 2004년 12월 들어 다시 한 번 창단에 박차를 가했지만 경남도의회는 축구단 창단과 관련한 예산 9천 5백만 원을 전액 삭감해 또 한 번 난항이 시작됐다. 이 돈은 창단준비위원회 행사 지원비와 구단 창단 업무 추진비, 해외 출장비 등이었다. 2005년에 창단해 2006년에 K리그에 참여하겠다던 계획도 틀어질 것처럼 보였다. 2002년 시작된 창단 움직임은 시간이 흘러도 결과물이 없었다.

하지만 2005년이 들어서면서 창단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경남연고 프로축구단 창단 타당성 조사’를 통해 도민과 기업체, 경상남도 등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컨소시엄 형태가 최적이라는 결론이 나온 뒤 구체적인 밑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2005년 9월에는 STX를 메인 스폰서로 잡으면서 창단 작업이 탄력을 받았다. STX는 유니폼 등에 회사 로고를 다는 조건으로 5년간 매해 40억 원씩을 지원받는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했다. 여기에 농협 지역본부와 경남은행 등이 매해 20억 원씩을 후원하기로 하는 등의 참여도 이어졌다. 지지부진하던 창단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팬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도민주 청약 첫날에만 1억4천만 원을 모았고 한 달 만에 목표액을 훨씬 초과하는 77억 원을 모을 정도로 경남 프로팀을 원하는 이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한 서예가는 구단에 직접 제작한 병풍 20벌을 선물하기도 했고 경남지방경찰청은 전국경찰축구대회 우승 상금 100만 원을 발전기금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파격적인 행보의 신생팀, 경남FC

이렇게 뜨거운 열기 속에 마침내 경남은 2006년 1월 역사적인 창단식을 열게 됐다. 경남FC의 찬란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김호곤, 박항서, 김호, 조광래 등을 감독 후보군으로 선정한 경남은 이중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고사한 김호곤 감독을 제외하고 나머지 감독 후보군을 놓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경남 산청 출신인 박항서 감독과 경남 통영이 고향인 김호 감독, 경남 진출 출신인 조광래 감독 모두 경남을 위해 일하기에 적합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고심이 깊어졌다. 결국 고민하던 경남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함께 4강 신화를 이끌었던 박항서 감독을 선택했다. 박항서 감독은 취임 당시 이렇게 말했다. “첫 시즌에는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내용에 초점을 둔 뒤 두 번째 시즌에는 문제점을 보완해 전력을 강화하고 세 번째 시즌에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경남 초대 감독 박항서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경남은 2006년 그토록 바라던 K리그 무대에 설 수 있게 됐다. 도민들이 그토록 원하던 경남FC의 탄생이었다.

경남이 가장 먼저 영입한 선수는 2004년 포항에 입단해 데뷔 첫해 35경기에 나서 1골 2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왕에 오른 문민귀였다. 여기에 국가대표 출신 신병호를 전남에서 데려왔고 2003년과 2004년 두 시즌 연속 K리그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렸던 경험 많은 수비수 산토스도 포항에서 영입했다. 신생팀답지 않은 파격적인 행보였다. 청소년 대표 출신 김근철(전 대구)과 골키퍼 이정래(전 전남), 콜롬비아 출신 미드필더 하리(전 성남) 등도 팀에 합류했다. 또한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김동찬(호남대)과 주재덕(연세대), 기현서(고려대), 정경호(청구고) 등도 경남 유니폼을 입게 됐다. 경남을 이끌 창단 멤버들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한 국가대표 출신 공격수 김진용을 울산으로부터 데려왔고 비록 수포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당시 J리그 주빌로 이와타에서 뛰던 최용수를 영입하기 위해 접촉을 시도할 만큼 경남의 행보는 의욕적이었다. 두 차례 입단 테스트를 통해 129명의 선수를 살펴본 뒤 성남에서 방출된 강민혁과도 계약을 마쳤다.

첫 시즌 경남은 신생팀의 한계와 희망을 동시에 느꼈다. 야심차게 영입한 문민귀는 활약을 하지 못한 채 팀을 떠나야 했고 김진용은 후반기 들어 부상으로 팀에 보탬을 주지 못했다. 첫 시즌을 7승 5무 14패 22득점 35실점하며 14개 팀 중 12위로 마무리하며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산토스가 이끄는 수비진이 특히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리그컵에서는 3위를 차지하는 등 희망도 보였다. 그리고 경남은 이듬해인 2007년부터 비상하기 시작했다. 경남의 전통 아닌 전통이 된 브라질 출신 공격수들의 등장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브라질에 간 박항서 감독이 마음에 드는 선수가 없어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켠 뒤 현지 축구경기를 보다가 무릎을 쳤다. ‘바로 저 선수야.’ 그는 곧장 해당 지역이 있는 도시로 가 이 구단을 찾아 선수 영입에 대해 문의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영입에 성공해 경남의 외국인 선수 신화를 이어간 첫 번째 주인공이 바로 까보레다.

까보레와 뽀뽀, 경남의 아름다웠던 2007년

2007년 경남은 부산에서 뛰던 뽀뽀까지 데려와 까보레-뽀뽀-산토스로 이어지는 브라질 커넥션을 완성했다. 여기에 전남에서 김효일과 박종우를, 제주에서 이상홍을 데려온 경남은 대전의 정신적인 지주 공오균까지 영입하며 전력 강화를 꾀했다. “첫 시즌의 문제점을 두 번째 시즌에서 고치겠다”던 박항서 감독의 말 그대로였다. 막상 뚜껑이 열리자 경남의 상승세는 무시무시했다. 김진용이 오랜 시간 부상으로 활약하지 못했지만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까보레는 득점왕을 향해 순항했고 뽀뽀 또한 엄청난 활약을 이어가고 있었다. 비록 스타는 없지만 이상홍과 김성길, 김대건, 강기원, 박종우, 공오균, 이용승, 정경호, 이정래, 김효일 등 당시 그라운드를 수놓았던 선수들의 이름은 지금도 경남 팬들의 가슴을 뜨겁게 남아있다. 당시 경남은 시즌 초반부터 성남과 수원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한 기업 구단과 경쟁하는 등 3위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경남은 2007년 7월 전년도 FIFA 클럽월드컵 우승팀인 인터나시오날을 안방으로 불러들여 치른 경기에서는 비록 1-2로 패하기는 했지만 만만치 않은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경남은 후반기 들어서도 무시무시한 상승세를 이어갔다. 전북과 부산, 서울, 성남 등을 잡으며 무려 5연승을 내달리는 등 파죽지세를 이어나갔다. 더 놀라운 건 이 5경기에서 11골을 넣고 단 네 골만을 내줬다는 점이다. 특히 까보레는 무려 8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26경기에서 18골을 뽑아내며 리그 득점왕과 베스트11에도 뽑히는 맹활약을 이어나갔다. 뽀뽀도 7골 9도움을 올렸고 후반기에 이적해 온 정윤성 또한 6골 3도움을 기록했다. 내심 리그 우승까지도 노릴 만큼 전력은 강했다. 하지만 2년차 돌풍의 주인공이던 경남은 결국 6강 플레이오프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포항과 치른 6강 플레이오프에서 이광재에게 선취골을 내준 뒤 후반 41분 까보레가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냈지만 결국 승부차기 끝에 패하고 만 것이다. 경남은 승부차기에서도 유리한 상황을 맞았지만 까보레와 김근철이 잇따라 실축하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비록 경남의 돌풍은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많은 이들은 쟁쟁한 기업 구단을 상대로도 전혀 물러서지 않는 경남을 이렇게 불렀다. ‘도민구단의 자존심.'

하지만 더 슬픈 건 경남이 우승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6강 플레이오프 탈락 후 20여일 만에 박항서 감독이 충격적인 계약 해지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명목상은 건강 상의 이유라고 밝혔지만 구단 수뇌부와의 불화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형두 대표이사와 불화가 있었고 결국 이 둘이 동반 사임하기로 했다는 제법 설득력 있는 소문이 돌았다. 박항서 감독은 그렇게 2년 만에 팀을 떠나게 됐고 전형두 대표이사도 물러났다. 3년 안에 상위권 성적을 내겠다던 그는 그 약속을 1년 앞당겼지만 결국 3년을 다 채우지 못했다. 박항서 감독은 구단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렸다. “원치 않던 불협화음을 낸 것은 전적으로 저의 부덕의 소치입니다. 시즌 종료와 동시에 전 사장님이 사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반쪽의 책임을 가진 제가 남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고향 팬들의 사랑을 가슴에 담고 떠나려 합니다. 운명처럼 새로운 모험에 몸을 던지겠습니다. 팬들 역시 운명처럼 경남FC를 지키리라 믿습니다.”

2008년 조광래 유치원을 열다

경남은 곧바로 안양LG 감독을 맡은 뒤 3년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조광래 감독을 발 빠르게 후임 감독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뽀뽀가 J리그로 떠났고 여기에 까보레는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거취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FC도쿄가 까보레에게 무분별하게 접촉했고 결국 경남과 조광래 감독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FC도쿄는 까보레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다. 팀 전력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까보레가 팀을 떠나자 경남으로서는 난감해졌다. 하지만 경남은 이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2008년 시즌이 개막하자마자 서상민이 혜성처럼 등장했기 때문이다. 연세대를 중퇴하고 드래프트 1순위로 경남에 입단한 서상민은 대구와의 개막전에서 경기 시작 5분 만에 첫 골을 넣더니 후반 14분에도 한 골을 더 추가하며 신인 최초로 개막전에 데뷔하여 멀티골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경남의 새로운 해결사로 등장한 것이다. 또한 까보레를 잇는 또 다른 걸출한 브라질 선수도 등장했다. 바로 인디오다. 인디오는 데뷔전인 제주와의 경기에서 1도움을 기록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비록 경남은 2008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전북에 패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지만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았다. 6위 전북과의 승점차는 2점에 불과했다. 김동찬과 김영우를 발굴했고 비록 까보레와 뽀뽀가 없었지만 인디오와 김진용, 김동찬, 서상민 등이 5골 이상씩을 기록하는 등 다양한 공격 루트를 보유하며 희망을 봤다. 특히 인디오는 21경기에 나서 6득점 5도움하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경기당 평균 관중도 11,835명으로 늘었고 FA컵에서는 사상 최초로 결승전에 진출하는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또한 경남은 FA컵 준우승 상금 1억 원을 전액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하며 훈훈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전용 연습구장도 없어 2시간씩 이동하며 훈련을 하는 등 여전히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경남은 그래도 도민구단의 자존심을 걸고 고군분투했다. 기업 구단에 맞서 경남은 늘 전혀 밀리지 않는 당당한 경기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경남은 조광래 감독의 복귀 첫 시즌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즌을 준비했다.

2009년을 앞두고 경남은 김병지를 플레잉코치로 영입했다. 경남 밀양 출신인 김병지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여기에 조광래 감독은 무명의 신인 선수들에게 줄곧 기회를 주며 팀을 개편해 나갔다. 이때 기회를 부여받은 이들이 바로 이용래와 김주영, 김태욱, 송호영, 이훈 등이었다. 시즌 초반 11경기 연속 무승을 거두는 등 극도의 부진이 이어졌지만 후반기 들어 팀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산과 인천, 전남 등을 제압하며 5연승을 내달렸고 시즌 막판에는 플레이오프 진출 자격이 주어지는 6위까지 뛰어 오르는 등 눈부시게 발전한 모습이었다. 비록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사람들은 ‘조광래 유치원’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 동안 부진을 겪던 김동찬은 무려 12골이나 넣으며 맹활약을 이어갔다. 겁 없이 뛰어다니는 ‘조광래 유치원생’들과 골문을 지키는 든든한 베테랑 김병지의 조화는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경남은 2010년을 앞두고 드래프트를 통해 ‘조광래 유치원생’들을 더 뽑았다. 바로 윤빛가람과 김인한, 이경렬 등이 그 주인공이다.

2부리그로 떨어진 ‘도민구단의 자존심’

2010년은 경남에 있어 최고의 한 해였다. 프로팀 경기장이라고는 볼 품 없던 창원종합운동장을 벗어나 창원축구센터를 안방으로 사용하게 된 경남은 2010년 기적적인 돌풍으로 K리그에서 가장 많은 이슈를 몰고 다니는 팀이 됐다. 연봉 2~3천만 원을 받는 경남 선수들이 수십 억 원을 받는 상대팀 선수들을 제압하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특히 2010년 4월 25일은 경남 축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이전까지 리그에서 4연승과 7경기 연속 무패를 질주한 경남은 안방에서 서울을 상대하게 됐다. 자신들보다 10배 이상 몸값이 비싼 서울을 상대로 전혀 물러서지 않은 경남은 후반 종료 직전 터진 김영우의 결승골에 힘입어 서울을 1-0으로 격파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6승 2무 1패 승점 20점을 차지한 경남은 구단 사상 최초로 K리그에서 1위에 등극하는 역사를 썼다. 조광래 감독과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한 선수들을 향한 찬사가 쏟아졌다. 여기에 루시오는 까보레와 뽀뽀, 인디오를 잇는 또 한 명의 ‘브라질 특급’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기적은 여기까지였다. 이후 대한축구협회에서 2010년 7월 조광래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하며 경남은 힘을 잃었다. 시즌 초반 벌어놓은 승점이 많아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게 됐지만 결국 전북에 패하면서 시즌을 마감했다. ‘조광래의 아이들’ 역시 힘을 잃었고 이후 대다수가 경남을 떠났다. 서상민과 김영우는 전북으로 이적했고 김주영은 서울로 갔다. 윤빛가람은 성남으로, 이용래는 수원으로 이적해야 했다. 김병지도 전남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경남의 돌풍을 이끌던 이 중 지금까지 경남에 남아 있는 이는 김도엽으로 이름을 개명한 김인한 정도가 전부다. 조광래 감독 이후 경남은 김귀화 감독대행을 거쳐 최진한 감독과 페트코비치 감독, 이차만 감독, 브랑코 바비치 감독대행이 연이어 지휘봉을 잡았지만 그나마 최진한 감독 시절 시·도민구단 중 유일하게 상위 스플릿에 오르는 성과를 제외한다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그저 그런(?) 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경남의 영광스러웠던 시절은 이제 다 옛 추억이 됐다. 그리고 결국 경남은 올 시즌 K리그 클래식에서 11위에 머문 뒤 승강 플레이오프에서는 광주에 밀리며 믿기지 않는 강등을 당하고 말았다. 창단 9년 만에 처음으로 2부리그로 내려가게 됐다.

과거 ‘도민구단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경남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다. 한때 우승권에까지도 근접했던 팀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결과다. 감독은 계속해서 바뀌었고 지난 시즌 주축으로 활약했던 정다훤을 비롯해 강승조, 윤신영, 조재철 등은 팀을 떠났다. 감독은 교체했지만 뾰족한 수도 없었다. 여기에 이흥실 수석코치를 2군으로 내려 보낸 것도 구단 수뇌부와 이흥실 코치의 불화에 의한 징계성 인사라는 시각도 있다. 경남은 그렇게 잔류를 놓고 싸우는 마당에 정식 감독도 아닌 감독대행을 앉혀 놓고 시간을 보냈다.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잡음도 끊이질 않는다. 이렇게 팀이 내·외부적으로 흔들리며 경기력까지 실망스러우니 한때 경기당 1만여 명이 넘게 들어차던 경기장도 텅텅 비어가고 있다. 잔류를 놓고 싸운 지난 광주전을 현장에서 지켜본 이는 1,969명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광주 원정팬을 합친 수치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기적을 만들어 내며 ‘도민구단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경남의 영광은 이제 추억 속에서나 회상 가능한 일이 됐다. 이제 경남은 내년 시즌을 K리그 챌린지에서 맞이해야 한다. 한때 리그 1위에까지 올라섰던 팀의 씁쓸한 현실이다.

찬란했던 경남의 부활을 기대한다

경남은 위대한 팀이었다. 초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팀을 창단하기 위해 목소리를 냈고 그 결과 도민주 청약으로만 80억 원을 모은 팀이다. 까보레와 뽀뽀, 인디오, 루시오 등 쟁쟁한 브라질 선수들을 배출한 팀이었고 ‘조광래 유치원’으로 K리그의 모든 이슈를 장악한 팀이기도 했다. 엄청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기업 구단을 다 자신의 아래에 두며 1위에 오르기도 했던 참 대단한 팀이었고 FA컵에서는 우승 문턱까지 두 번이나 올라갔던 팀이었다. 그런 경남이 이제 K리그 챌린지로 내려가고 말았다. 이 저력 있는 팀이 이렇게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한다니 참 슬프다. 하지만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됐다고 해 포기하지 말고 잘 수습해 대전과 광주처럼 다시 경남을 K리그 클래식 무대에서 봤으면 좋겠다. 이 대단하고도 매력적인 팀이 다시 K리그 클래식으로 올라오는 날을 손 꼽아 기다리려 한다. 나는 경남이 처음으로 리그 1위에 오르던 2010년 4월 25일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현장에서 그 멋진 장면을 봤다는 걸 지금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다시 경남이 2010년 4월 25일의 영광을 되돌릴 수 있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도민구단의 자존심’이 2부리그에 있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