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을 조금 보태 대한민국 유니폼이 아니라 독일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면 독일 팀이라고 해도 믿었을만한 경기력이었다. 한국은 어제(10일) 천안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울리 슈틸리케 감독 부임 후 치른 첫 경기에서 파라과이를 상대로 시원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2-0 승리를 따냈다. 산뜻하게 슈틸리케호가 출항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 경기를 통해 어떤 메시지와 교훈을 얻었을까. 이 경기를 바라보며 느낀 점을 정리해 보려 한다.

1. 이게 바로 외국인 감독 선임 이유

지금껏 한국 대표팀은 몇몇 선수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매번 그 선수가 그 선수였다. 아마 홍명보 감독 후임으로 다른 국내 감독이 와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자질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지금껏 대표팀을 지켜봤던 게 있던 터라 자기도 모르게 색안경을 끼고 선수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백지 상태로 등장한 외국인 감독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카드를 들고 나왔다. 대표팀에서 멀어진 것만 같았던 조영철과 남태희, 김민우를 선발로 내세울 생각을 그 누가 할 수 있었을까. 아마 한국 축구를 이미 경험한 이가 감독이었다면 선발로 이동국과 손흥민 카드를 안정적으로 쓰려고 했을 것이다. 파라과이전을 통해 선수들을 공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외국인 감독이 왜 필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지금껏 소외됐던 선수들은 기회를 부여받으니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외국인 감독 선임은 무한 경쟁 체제로 가는 첫 걸음이었다.

2. 줄어든 주전과 비주전의 격차

홍명보호의 대표팀은 주전과 비주전이 극명하게 갈렸다. 아마 많은 이들이 홍명보 감독 시절 대표팀 베스트11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경쟁이 사라지다보니 선수들의 집중력에도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의 파격적인 실험을 통해 홍명보 감독 체제에서 비주전으로 평가받던 이들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한판이었다. 이 경기를 지켜본 구자철도 남태희와 김민우의 활약에 자극을 받았을 것이고 김영권과 홍정호 역시 김기희가 선발로 나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며 분발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김승규 역시 붙박이 주전이 아니라는 걸 느끼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았을까. 이건 단순히 데뷔전 승리라는 의미 이상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번 승리를 통해 과거 비주전 선수들에게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줬고 과거 주전으로 활약했던 이들에게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제든 그 자리를 넘겨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3. 벤치에 앉지 않은 슈틸리케 감독

체력이 왕성한 20대 초반 군대에서 새벽에 외곽 근무를 할 때도 한 시간 반 동안 서 있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몰래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면서 시간을 때운 이들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만 60세의 슈틸리케 감독은 경기 내내 벤치에 앉지 않고 서서 선수들을 독려했다. 선수들이 입장할 때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나눈 슈틸리케 감독은 90분 동안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고 ‘따봉’을 날렸고 때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선수들이 쓰러지면 온몸으로 이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는 경기가 끝난 뒤에도 벤치에 남아 있는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경기에 나서지 못한 선수들까지 챙겼다. 단순히 슈틸리케 감독이 자신의 경력 한 줄을 쌓거나 돈을 위해 한국에 온 게 아니라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열정이 있다는 걸 몸소 보여준 90분이었다. 이렇게 이방인이 한국에 와 열정적으로 애를 쓰는데 태극마크를 달고 대충 뛸 선수는 없을 것이다.

4. 살아난 이청용

불과 지난 칼럼까지만 하더라도 나 역시 이청용이 과거 같은 움직임을 선보이지 못해 걱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청용은 이번 경기를 통해 완벽히 부활한 모습이었다. 이 한 경기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이청용은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선수가 돼 있었다. 주먹이 스치기만 해도 전치 4주라는 우스갯소리는 들어봤지만 움직임만으로 상대에게 부상을 입히는 축구선수는 처음 봤다. 우리는 이청용이 드리블을 하다 접었는데 상대 수비 무릎도 접히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됐다. 그만큼 이청용의 플레이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상대도 엄청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청용의 부활은 대표팀에는 엄청난 호재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이청용은 이렇게 살아나는데 그의 소속팀은 3부리그를 향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선수가 3부리그에서 뛴다는 건 재앙 아닌가.

5. ‘카타르 메시’ 남태희

남태희는 카타르 리그에서 메시로 통한다. 그만큼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며 카타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중동 리그는 우리가 접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실력을 비교하기에도 상당한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남태희는 이번 경기를 통해 ‘카타르 메시’가 그저 허울 뿐인 별명이 아니라는 걸 실력으로 입증했다. 특히나 오프사이드로 선언된 조영철의 득점 상황에서 찔러준 그의 패스는 마치 ‘신문 사절’을 붙여 놓은 우리 집에 매일 신문을 툭 던져 놓고 사라지는 신문 배달부에 버금가는 빠른 스피드와 순발력, 센스를 겸비한 엄청난 작품이었다. 남태희의 가세로 이제 대표팀은 무한 경쟁 체제에 돌입하게 됐다. 아마 이 모습을 버벅이는 인터넷으로 카타르에서 지켜본 이근호는 어제 밤 잠을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남태희는 과거 슈틸리케 감독이 카타르 리그에서 활약할 당시 성실함을 이미 인정받았고 슈틸리케 감독은 그런 남태희를 이번 경기 선발로 내세웠다. 언제나 성실하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하늘은 이렇게도 돕는다는 걸 깨달을 수 있는 한판이었다.

6. ‘캡틴’ 기성용의 존재감

나는 지난 칼럼에서 차두리를 주장으로 추천했지만 역시 내 의견은 전혀 영향력이 없었고 슈틸리케 감독은 기성용을 주장으로 낙점했다. 그런데 기성용은 슈틸리케 감독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 모습이었다.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았지만 중원에서 상대 공격을 차단하고 공격 전개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다. 이전에는 상대와의 충돌 상황에서 종종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주장 완장을 찬 기성용은 책임감을 갖고 감성적인 플레이가 아니라 이성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실력이야 워낙 뛰어난 선수였던 그가 주장 완장을 차면서 더 큰 책임감을 안고 뛰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여기에 기성용이 후반에 교체되니 중원이 번번이 뚫리는 모습을 보며 그가 대표팀 중원에서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 돼 가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게 됐다. 기성용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 주장 완장을 차게 돼 상당히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영광스러운 자리지만 그라운드 안팎에서 선수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주어진 어떤 부분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다. 파라과이전에서의 ‘캡틴’ 기성용은 만점이었다.

7. 골키퍼 김진현의 등장

경기가 끝난 뒤 빅토르 헤네스 파라과이 감독은 이례적으로 상대팀 골키퍼인 김진현을 칭찬했다. 그는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아주 좋은 골키퍼를 보유했다”면서 “우리에게 여러 번 기회가 있었지만 그 골키퍼가 모두 막아냈다”고 김진현에게 박수를 보냈다. 실제로 김진현은 파라과이전에서 위협적인 슈팅을 몸을 날려 막아내며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경기 전 “무실점 경기를 펼치겠다”던 슈틸리케 감독이 공약을 지키는데 일등공신이 된 게 바로 김진현이었다. 김진현의 등장으로 김승규 독주 체제로 굳어져 가는 듯했던 대표팀 골키퍼 자리가 무한 경쟁으로 돌입할 수밖에 없게 됐다. 김승규로서는 반갑지 않은 일일수도 있지만 대표팀에는 큰 축복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김진현의 골킥 능력은 불안하다고 생각한다. 안정적인 방어 능력이야 김승규 못지 않지만 백패스를 이어 받은 상황에서의 여러 차례 킥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건 김진현에게 남겨진 숙제다.

8. 날카롭지 못했던 세트피스

신태용 수석코치 체제로 치러진 지난 두 차례 평가전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성용은 파라과이전 세트피스 상황에서 헤딩 경합을 펼쳤다. 지금껏 세트피스 상황이면 전담 키커로 나섰던 기성용의 큰 키와 몸 싸움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파라과이전에서 기성용 대신 남태희가 프리킥을 전담했고 코너킥은 김민우가 맡았다. 후반에는 손흥민이 프리킥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성용 만큼의 날카로움을 선보이지는 못했다. 기성용을 다시 전담 키커로 돌리는 방안과 다른 전담 키커가 나섰을 때 더 날카로움을 더하는 방법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아시아권에서야 어떤 방식이건 우리의 세트피스는 위협적일 수 있지만 월드컵 등 국제 무대에서는 필드골이 쉽지 않은 우리에게 세트피스 한 번 한 번이 바람 때문에 날아간 민율이의 지도만큼이나 무척 소중하기 때문이다.

9. 실망스러웠던 파라과이의 경기력

이번 파라과이전에서 보여준 대표팀의 경기력은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의문이 드는 건 상대인 파라과이가 경쟁력을 가진 스파링 파트너였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기 하루 전 입국한 파라과이는 시종일관 몸이 무거운 모습이었다. 김민우의 첫 번째 득점 상황에서도 파라과이 수비는 뼈아픈 실책을 범했고 두 번째 득점 상황에서도 이청용의 움직임 한 번에 파라과이 수비가 홀로 넘어져 부상을 당하는 등 정상적인 컨디션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대표팀의 멋진 승리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상대의 경기력이 실망스러웠었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10. 그 와중에 여전히 잘 생긴 산타크루스

한때 전세계 축구선수 중 가장 잘 생겼다는 평가를 받던 로케 산타크루스의 외모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했다. 결혼도 했다는 데 이제 그 외모 필요 없으면 나 좀 빌려 달라. 참 쓸 일이 많을 것 같다.

아직 첫 경기이니 이 경기를 통해 모든 걸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분 좋은 출발인 건 분명하다. 파라과이전을 통해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브라질월드컵 졸전 이후 등 돌린 팬들을 다시 열광하게 하는 멋진 경기력을 선보였다. 나는 이 경기를 보며 “이게 정말 한국 축구야?”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간이 흘러 나의 이런 놀라움이 당연함이 됐으면 한다. 그때 가서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한국 축구는 원래 이렇게 한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