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2014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남과 북의 결승전은 그 여운이 남는다. 단순히 대한민국이 승리를 거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점뿐 아니라 아시아 최고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결승 무대에서 남과 북이 만났다는 것 자체로도 참 뿌듯하다. 남과 북은 아시아 여러 나라의 도전을 뿌리치고 결승전에서 마주할 만큼 강했다. 오늘은 그저 이번 남북대결의 승패가 아니라 그 오랜 역사에 대해 탐구해 보려 한다. 언론에서 이번 남북간의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을 36년 만의 맞대결이라고 자주 표현했지만 그 당시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자세히 소개한 적이 없다. 오늘은 언론에서 숱하게 표현했던 그 ‘36년 전’의 맞대결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36년 전과 지금의 남북 축구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또 그때와 지금 시대는 얼마나 변해있을까. 이제는 금메달의 감동을 살짝 뒤로하고 미래를 위해 다시 차분해져야 할 때다.

마주하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웠던 남과 북

1970년대 남북 관계는 최악의 분위기로 흘러갔다. 특히나 1976년 북한이 저지른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당장 한반도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다. 여기에 1978년 10월 열린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는 살벌한 남북 관계를 그대로 투영한 ‘작은 전쟁’이었다. 대회가 열리기 석 달 전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개최지인 방글라데시가 북한과 수교를 맺고 있었고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터라 “한국을 대회에 초청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방글라데시에 한국의 대회 참가를 유보해달라는 부탁까지 했고 대한축구협회는 외무부를 통해 방글라데시에 공식적으로 대회 초청 확인서까지 받아 우여곡절 끝에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됐다. 서로 눈치를 보느라 국제대회에서 피했던 남과 북은 이 대회를 통해 두 번째 남북 청소년 축구 맞대결을 펼치게 됐다.

당시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세 나라를 제외한 출전국 12개 팀은 전부 청소년 대회에 나설 수 없는 선수들의 나이를 속여 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대회조직위원회가 밝힌 바에 따르면 북한은 선수 절반 이상이 만20세를 넘어 가장 많은 부정 선수가 있는 팀이었다. 첫 청소년 남북대결이었던 2년 전 1976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에서도 경기에 앞서 한국 선수가 “잘해보자”고 악수를 청하자 북한의 부정 선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디 새까맣게 어린 놈이...” 이 정도로 북한의 부정 선수는 당연한 일이었고 북한은 부정 선수를 통해 한국을 제압하고 싶어했다. 1978년 청소년선수권에서 한국과 북한은 승승장구해 준결승전에서 마주했다. 그런데 주장 박항서가 경기 시작을 앞두고 악수를 청하자 북한 주장 박해금은 대놓고 악수를 거부하며 신경전을 펼쳤다. 경기 전부터 북한은 노골적으로 한국 선수를 경계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북한은 거친 플레이로 일관했고 결국 북한의 전병주는 심판이 보지 않는 사이 한국 공격수 정해원을 발로 걷어차다 걸려 퇴장 당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었다. 경기 내내 북한 선수들은 폭력적인 플레이는 물론 심한 욕설을 하며 한국 선수들을 괴롭혔다. 이날 경기에서 한국은 연장전까지 0-0으로 마친 뒤 승부차기 끝에 북한을 6-5로 제압하고 결승에 진출해 이라크와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대대적으로 이 사실을 보도한 한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자신들이 남한에 패했다는 사실을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 패배가 쓰라렸고 아팠다. 또한 북한은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농구 남북대결에서도 시종일관 거친 플레이를 펼치며 또 한 번 아시아 무대에서 비난의 주인공이 됐다. 유독 남한만 만나면 더욱 거친 플레이로 남한의 심리를 건드린 것이다. 북한은 이 농구 대결에서 점수 차가 벌어지자 경기를 포기하고 경기장을 나가버리는 일까지 벌였다.

방콕AG 축구 결승의 남북 대결

그런데 이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남자 축구에서 남과 북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남과 북은 결승 진출 전까지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였다. 차범근과 허정무 등을 앞세운 한국은 방콕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치른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와 메르데카배에서 연거푸 우승한 강팀이었다. 방콕아시안게임에서도 결승에 오르기까지 6경기에서 15득점 3실점을 기록하며 대단한 경기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중공을 상대로한 준결승전에서도 1-0으로 승리를 거뒀고 이는 2010년 2월까지 이어진 ‘공한증’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경기력도 놀라웠다. 북한은 방콕아시안게임 결승전 진출까지 치른 5경기에서 12골을 넣고 단 세 골만을 내줬다. 양 팀 모두 이 자존심 대결에서 물러설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아시안게임의 하이라이트로 폐막식 바로 직전에 펼쳐지는 남자 축구 결승전이 남북 대결로 펼쳐지니 양측은 물론 주최측도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태국 정부는 방콕국립경기장에 100명이 넘는 무장 군인을 동원해 삼엄한 경비를 펼치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 전 한국 사진 기자들이 몸 푸는 북한 선수들을 촬영하자 북한 선수들로부터 이런 말이 날아들었다. “내래 한 번만 더 사진 찍으면 그 사진기를 부숴버리갔어.” 경기 전 ‘북한이 질 경우 선수들이 모두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간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무시무시한 경기였다. 이 경기가 분단 이후 치르는 남과 북의 첫 성인 대표팀 경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4년 전 열린 테헤란아시안게임 당시에는 북한을 피하기 위해 한국이 일부러 쿠웨이트에 져 예선에서 탈락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그만큼 남과 북은 마주하기를 꺼려했는데 금메달을 놓고 싸우는 결승에서, 그것도 가장 남북 관계가 껄끄러울 때 만났으니 그 치열함이 오죽했을까. 무엇보다 아시안게임의 꽃이라는 남자 축구는 종합 메달 순위를 떠나 반드시 이겨야 하는 자존심 대결이었다. 경기장에는 축구 결승전과 폐막식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중은 물론 폐막식에 참석하기 위한 각국 선수단까지도 꽉 들어차 있었다.

한국 선수들은 경기 시작 전 모여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북한이 거칠 게 나오겠지만 절대 흥분하면 안 된다. 북한 선수들이 쓰러져 있으면 먼저 일으켜 세워 주자.”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 역시 이 경기에서 무조건 금메달이 필요했지만 워낙 보는 눈이 많다보니 이미지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 선수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북한 선수들 역시 굉장히 신사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에서는 경기 시작 전 악수도 거부하던 북한이 방콕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는 선수단 기념 촬영이 있자 먼저 자리를 섞어 한국 선수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같은 대회 농구 남북대결에서 거친 플레이로 일관하다 경기장을 떠난 뒤 지탄 받은 걸 만회하려는 듯했다. 경기 역시 굉장히 깨끗하게 진행됐다. 경기 전 약속한대로 한국 선수들이 넘어진 북한 선수들을 일으켜 준 건 물론 북한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께 서기에는 비좁았던 시상대

하지만 워낙 민감한 경기였던 탓일까. 이날 경기는 전·후반 내내 이렇다 할 기회 없이 무득점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양 팀 모두 이기려는 생각보다는 지지 않으려는 생각이 훨씬 더 강한 듯했다. 경기는 연장 30분 승부에서도 갈리지 않았다. 서로 수비를 두텁게 세우고 의미 없는 긴 패스를 남발하면서 마무리됐다. 당시 규정에 따라 이 경기는 승부차기 없이 결국 남과 북의 공동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양 팀 선수들은 공동 우승이 확정된 뒤 경기가 끝나자 양 팀 선수들은 안도하며 그라운드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경기 시작 전 “사진기를 부숴버리겠다”던 북한 선수들도 사진 기자의 촬영 요청에 응하며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결국 분단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남과 북 성인 축구 대표팀의 맞대결은 이렇게 살벌한 경기 전 분위기와 달리 큰 마찰 없이 무승부로 막을 내리게 됐다. 서로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 시상식이 벌어졌다. 당시 한국 주장이었던 김호곤은 시상대 앞에 북한 주장 김종민과 나란히 섰다. 경기 내내 서로 페어플레이를 펼친 터라 김호곤은 상대를 배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종민씨, 시상대에 먼저 올라가세요.” 그러자 북한 김종민이 시상대로 올라섰다. 그런데 이때부터 일이 터지기 시작했다. 김종민이 시상대를 완전히 차지한 뒤 김호곤이 올라갈 공간을 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김호곤이 겨우 자리를 비집고 올라가 시상대 위에 나란히 섰다. 하지만 북한의 도발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누군가 김호곤을 뒤에서 잡아 당겨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니 그를 잡아 당긴 건 북한 골키퍼 김광일이었다. 폐막식 일정 때문에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북한 선수들의 도발을 지켜본 조직위원회 관계자들도 발을 동동 굴렀다. 이때 다시 시상대에 올라선 김호곤은 사진 촬영을 요구하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김종민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전세계 언론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요. 우리끼리라면 몰라도 기자들 앞에서는 이런 모습 보이지 맙시다.” 결국 이 둘은 시상대에 나란히 서 어깨동무를 하며 웃었다. 이 사진은 지금까지도 한국 축구사를 대표하는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당시 경기에 나섰던 이들은 하나 같이 “지지 않아 다행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어느 팀이건 졌으면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기다리고 있는 경기에서 승부차기까지 벌였더라면 아마도 패한 팀은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을 것이다. 규정상 승부차기가 없어 천만 다행이었다. 36년 전 우리는 이렇게 시상대에 서는 사소한 문제 하나로도 서로 으르렁거리며 자존심 싸움을 벌였었다. 그리고 36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또 다시 같은 대회 결승전에서 마주했고 경기 도중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신경전을 펼치며 예전과 다름 없는 치열한 승부를 펼쳤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에는 승부가 갈렸다는 점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0-0으로 팽팽하던 균형이 깨지는 데는 무려 120여 분이나 필요했다. 비록 금메달은 한국 선수들의 목에 걸렸지만 36년 전이나 지금이나 남과 북의 실력은 종이 한 장 차이나 다름이 없다. 시대는 변했어도 남과 북은 여전히 아시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축구를 한다는 건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36년 뒤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공동우승도 좋고 결승전에서 남과 북이 금메달과 은메달을 나눠 갖는 것도 좋다. 하지만 훗날 펼쳐질 아시안게임에서는 한 유니폼을 입고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거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떨어져 있어도 이 정도인데 함께라면 얼마나 더 강해질까. 이번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축구는 우리에게 짜릿한 감동과 함께 또 하나의 숙제를 남겼다. 박주호의 패스를 받아 박광룡이 골을 넣는 모습, 그리고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을 언젠가는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앞으로 36년 뒤에는 36년 전 일이 오늘날 또 되풀이 되는 것처럼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아련한 추억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