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인천 아시안게임이 한창 진행 중이다. 그런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서 다른 종목과 달리 남자 축구는 연령 제한을 두고 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 나선 이광종호도 김신욱과 박주호, 김승규 등 23세 이상 와일드카드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을 모두 23세 이하로 꾸렸다. 하지만 지금은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이 제도가 어떻게, 언제부터, 왜 시작됐는지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왜 유독 남자 축구만 이런 제도를 시행하게 됐을까. 오늘은 이 연령 제한 제도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오늘 칼럼이 단순히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의 나이 제한뿐 아니라 올림픽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

아마추어리즘 중시했던 올림픽 무대

올림픽은 아마추어리즘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돈을 받고 전문적인 직업으로 운동을 하는 선수들이 아닌 순수한 아마추어 선수들을 위한 축제였다. 올림픽 초창기 당시에는 이런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는 분위기가 더욱 엄숙했다. 얼마나 아마추어리즘을 중시했는지 짐 토페의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당시 짐 토페는 10종과 5종 경기에서 연이어 금메달을 획득하며 주목받았지만 결국 이 금메달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가 올림픽이 열리기 2년 전 미국 프로야구팀과 프로미식축구팀에서 뛰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 짐 토페의 연봉은 고작 60달러였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프로는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다”며 그의 금메달을 박탈해 버리고 올림픽 우승자 기록에서도 삭제해 버렸다. IOC는 돈을 받고 직업으로 운동을 하는 이들을 배척했다.

그런데 서방 세계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1970~80년대 들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체제 경쟁을 하면서 이 불만은 더욱 커졌다. 아마추어리즘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실질적으로는 프로선수 못지 않은 각종 혜택을 누리는 ‘직업 선수’를 양성했지만 외형상 이들은 프로가 아니었다. 직접적으로 누군가로부터 운동을 하는 대가로 돈을 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선수들은 아마추어 선수들로 분류돼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고 올림픽에서도 메달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렇게 메달을 독식하는 동안 프로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아마추어 선수들만을 올림픽에 내보내야 해 메달 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자본주의 국가들로서는 불만이 생겨났다. 운동을 업으로 삼았으면서도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프로로 인정받지 못하는 무늬만 아마추어 선수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82년 1월 국제축구연맹(FIFA)은 이사회를 열고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아마추어리즘을 앞세워 올림픽에서 상위권을 독점하는 폐단을 막고자 한다. 올림픽 축구에는 일괄적으로 선수 연령을 23세 이하로 제한키로 했다.” 물론 명분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황에서 연령 제한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고 밝혔지만 속내는 달랐다. 월드컵이라는 지구촌 축구 축제가 올림픽 축구와 별로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FIFA는 월드컵을 더 키워야 하는데 올림픽에서도 연령 제한 없는 똑같은 선수들이 나서게 된다면 월드컵의 희소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FIFA는 아마추어리즘을 들먹이며 결국 올림픽에는 23세 이하만 출전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결정에 IOC는 즉각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올림픽에서 흥행 종목 중 하나인 축구가 흥미를 반감시키는 결정을 내렸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IOC는 “일단 논의를 유보하자”면서 시간을 끌었다.

연령 제한 논의 시작된 올림픽 축구

1984년 LA올림픽 당시 FIFA는 아직 축구가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예외로 하고 축구가 발전한 유럽이나 남미 등에서 월드컵 본선에 90분 이상 출전했던 선수는 아예 올림픽에 나서지 못하도록 했다. IOC의 만류로 23세 이하 선수만 참가하는 규정이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월드컵을 경험한 선수들이 올림픽에 나설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IOC는 올림픽 축구 흥행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됐다. 그런데 1984년 12월 FIFA는 IOC와의 자존심 대결에서 더 이상 물러날 뜻이 없음을 아예 못을 박아 버렸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다가올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 축구 종목 출전 연령을 23세 이하로 제한하겠다. 하지만 연령 제한 외에 과거 월드컵 출전 경험을 포함해 23세 이하는 프로와 아마추어 구분 없이 모두 올림픽 출전 자격을 주겠다.”

그러면서 올림픽과 같은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아시안게임에도 불똥이 튀었다. 아시안게임 역시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23세 이하 선수들만 나서야 할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는 총회를 열고 아시안게임 만큼은 연령별 제한 규정에서 예외로 하자고 합의했다. 당시 AFC 함자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유럽이나 남미에 비해 축구 수준이 뒤떨어지는 아시아 축구 발전을 위해서 아시안게임 만큼은 연령별 제한과 프로, 아마추어 제한 등 모든 제한 사항을 없애겠다. 이 결정으로 아시아 각국에도 많은 프로팀이 생기길 기대한다.” 당시 FIFA와 IOC, AFC와 OCA 등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 때문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또한 IOC와 유일하게 싸울 수 있는 거대 단체 FIFA가 들고 일어나자 이때쯤 서서히 다른 종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결국 1985년 3월, IOC는 축구와 테니스, 아이스하키 등 세 종목에 한해 23세 이하 프로선수의 올림픽 출전을 허용키로 결정했다. IOC의 아마추어리즘 정책이 서서히 무너진 것이다.

그러면서 IOC는 이렇게 말했다.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이 끝난 뒤 다른 종목에서도 프로선수 출전을 요청해 올 경우 검토하기로 했다.” 하지만 FIFA가 IOC와 기나긴 줄다리기 끝에 23세 이하 선수들만 올림픽에 나설 수 있도록 합의를 이끌어내자 유럽과 남미 일부 국가에서의 불평이 시작됐다. 상대적으로 선수층이 두텁고 풍부한 이들로서는 올림픽 축구 연령 제한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FIFA가 IOC는 이길 수 있었어도 유럽과 남미 축구 선진국을 이겨낼 도리는 없었다. FIFA는 한발 물러섰다. 다가올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 시행하기로 한 선수 연령 제한을 4년 유보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부터 시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 1988년 서울올림픽은 1984년 LA올림픽 때처럼 월드컵 본선에서 90분 이상 출전했던 선수는 올림픽에 나설 수 없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종전과 같이 예외로 하기로 했다.

결국 무너진 올림픽의 아마추어리즘

그런데 FIFA로부터 시작된 요구에 흔들리던 IOC는 1986년 2월 결국 올림픽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발표를 하게 됐다. 프로를 포함한 모든 운동선수에게 동,하계 올림픽을 개방하기로 한 것이다. 철저하게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해 운영되던 올림픽에 프로선수가 대거 유입되는 파격적인 일이 이뤄지게 됐다. 사마란치 당시 IOC위원장은 스위스 로잔 IOC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IOC 집행위원회에서 프로선수와 국가 관리 선수(공산권 국가의 아마추어 선수)가 모두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똑같은 기회를 주는 안을 승인했습니다. 더 이상 이들의 올림픽 참가에 문제 삼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해당 국제경기연맹이 인정하는 선수에 한한다는 것이었다. 연령 제한 등 올림픽 출전 선수 범위 문제는 각종 국제경기연맹이 알아서 정하라는 뜻이었다. 이는 23세 이하 선수들만 출전시키려는 FIFA를 위한 발언이었다. FIFA가 아니면 해당 종목에 연령 제한을 두려는 종목은 없었다.

이 결정은 올림픽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 이후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까지 헝가리를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가 8차례 연속 올림픽 축구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프로선수 출전이 허용되면서 서유럽과 남미 축구의 강세가 점쳐졌기 때문이다. 아이스하키 역시 이전에는 북미프로리그(NHL) 선수들이 올림픽에 나설 수 없어 소련이 절대 강자로 꼽혔지만 프로선수 출전 허용으로 미국과 캐나다의 강세가 예상되기 시작했다. 1924년 파리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다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테니스는 선수들이 대회 출전과 관련한 일체의 상업 광고료와 출전비를 받지 않고 데이비스컵과 페더레이션컵 등 양대 국제대회에 출전해야 올림픽에 나설 수 있다는 규정을 신설했다. 반면 프로선수 참가에 대해 논의하던 복싱은 프로선수 참가가 무산됐다. 독자적인 흥행을 노린 프로복싱이 프로선수들의 올림픽 참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1988년 서울올림픽은 프로선수들이 출전하고 연령별 제한도 없던 마지막 올림픽 축구 경기가 됐다. 올림픽 축구 역사상 가장 쟁쟁한 팀의 쟁쟁한 선수들이 대거 몰려든 것이다. 브라질은 호마리우와 베베토, 클라우디오 타파렐 등 훗날 1994년 미국월드컵 우승 주역이 대거 포진했고 서독은 위르겐 클린스만과 토마스 해슬러, 칼 하인츠 리들레 등을 앞세웠다. 이탈리아 역시 훗날 유벤투스의 주축 수비수로 성장한 치로 페라라(당시 나폴리)와 ‘AC밀란의 전설’ 마우로 타소티가 포함됐고 골키퍼 지안루카 팔류카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다보르 수케르와 드라간 스토이코비치는 유고 유니폼을 입고 ‘검은 바이킹’ 마르틴 달린은 스웨덴 유니폼을 입고 서울로 왔다. 이 대회에서 브라질 호마리우는 7경기 6득점으로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이 프로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연령별 제안이 없던 마지막 올림픽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축구 연령 제한 도입된 바르셀로나 올림픽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1년 뒤 IOC는 결국 공식적으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축구에 연령 제한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게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결국 FIFA의 주장대로 23세 이하 선수만 참가하는 첫 올림픽이 되고야 말았다. 이전 올림픽 축구 경기가 A매치로 인정받았지만 이때부터 올림픽 축구 경기는 A매치로 인정되지 않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축구에 연령 제한 제도를 도입한 것 외에도 농구 종목에서 프로선수를 받아들인 대회로도 기억된다. 당시 미국은 NBA 선수들을 모조리 데려와 ‘드림팀’을 구성해 전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92년 8월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 공식 기자회견에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올림픽 운동을 주도함에 있어서 프로페셔널리즘을 배격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복싱, 야구, 사이클 등의 프로선수 출전 허용 문제를 고려중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FIFA에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23세 이하로 출전 자격을 제한한 축구의 경기 질을 높이기 위해 FIFA 아벨란제 회장과 제한 연령 및 출전 자격 제한 요건을 다시 논의하겠다.”

하지만 FIFA는 IOC에 나이 제한 철폐 대신 그들의 불만을 다독일 제도 하나를 제안했다. 바로 ‘와일드카드’였다. 23세 이상 선수 중 세 명을 선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다. 결국 IOC는 FIFA와의 자존심 싸움에서 밀려 와일드카드 제도만을 수락하는 걸로 이 치열한 경쟁은 막을 내렸다. IOC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부터 축구에 와일드카드 제도를 도입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브라질은 노장 베베토와 수비수 알 다이르, 히바우두를 와일드카드로 선발했고 멕시코는 골키퍼 호르헤 캄포스와 공격수 루이스 가르시아, 미드필더 알베르토 가르시아 등을 선발했다. 이탈리아는 골키퍼 지안루카 팔류카 등을 와일드카드로 내세웠고 한국은 황선홍과 하석주, 이임생 등을 와일드카드로 뽑았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유럽 국가는 23세 이상이 아니라 21세 이상을 와일드카드화 하기로 자체 결정을 내렸다는 점이다. 한편 일본, 사우디 등은 아예 와일드카드 없이 올림픽에 나섰다.

FIFA의 올림픽 연령 제한 정책 이후 아벨란제 FIFA 회장과 대립각을 세우던 IOC 사마란치 위원장은 결국 복수를 노리게 됐다. 1998년 FIFA 신임 회장 선거를 앞두고 아벨란제 회장이 제프 블래터 당시 FIFA 사무총장을 차기 회장으로 밀자 사마란치 위원장은 대항마로 떠오른 요한손 당시 유럽축구연맹 회장 쪽에 가세해 선거 운동을 도운 것이다. 하지만 결국 사마란치의 보복(?)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아벨란제가 지지한 블래터가 차기 회장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자 FIFA는 이듬해 또 다시 IOC를 견제했다. U-17, U-19 등 연령별 청소년 월드컵처럼 아예 올림픽 출전 가능 연령대인 U-23 월드컵을 따로 만들기 위해 검토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서 아예 2004년 아테네 올림픽부터는 축구가 올림픽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IOC에 보냈다. 그러자 이후 축구가 아예 올림픽에서 빠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IOC는 더 이상 FIFA에 연령 제한 개정을 두고 압박하지 못하고 있다. 이후 아시안게임도 2002년부터는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23세 이하 선수들을 주축으로 하고 여기에 세 명의 와일드카드를 포함한 선수들로만 참가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올림픽 축구 흐름 바꾼 FIFA의 결정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가 연령 제한을 두게 된 건 이렇듯 상당히 흥미로운 역사가 깔려있다. 월드컵을 최고 가치의 대회로 유지하고픈 FIFA와 이슈몰이는 물론 흥행까지 보장하는 축구를 올림픽에서 제외하고 싶지 않은 IOC의 묘한 다툼이 바로 그 배경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절묘한 상황이 맞물려 떨어지면서 남자 축구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유일하게 연령 제한이라는 제도가 마련됐다. 또한 여기에 이제는 올림픽에서도 신성하게 여겨지던 아마추어리즘이 무너진 것도 한몫했다. 연령 제한이 도입된 뒤 올림픽 남자 축구에서는 나이지리아와 카메룬, 멕시코 등이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 아닌 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이 제도를 통해 올림픽 축구의 흐름이 뒤바뀐 건 분명한 사실이다. 과연 훗날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의 연령 제한 규정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