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꿈꾸는 모습이 있다. 여러 인터뷰에서 “당신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나이 먹고도 백발로 경기장을 오가며 칼럼을 쓰다가 일흔살 쯤 멋지게 은퇴를 하고 싶어요.” 난 이 꿈을 꼭 이루고 싶다. 오랜 시간 칼럼을 쓰다가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은퇴하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의 존경을 받으며 한 분야에서 평생을 바치다가 물러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내가 일흔 살까지 칼럼을 쓰다 은퇴하면 “이제까지 사고 치면서 잘도 버텼다”고 하는 분들도 무척 많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 주말 벌어진 최은성의 은퇴식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모든 이들이 꿈꾸던 은퇴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아마 현 소속팀은 물론 상대팀과 전 소속팀, 그리고 심판, 중계진 등 모두로부터 이렇게 성대하게 대접을 받은 은퇴식은 처음일 것 같다. 특히나 전 소속팀이었던 대전의 팬들이 함께 은퇴식 자리를 빛낸 건 K리그 역사에서는 앞으로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기사 이미지

전북 구단이 최은성 은퇴식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단 하나 뿐인 입장권. (사진=전북현대)

대전 팬 초대한 전북 팬들의 배려

대전 서포터스 ‘대저니스타’ 측은 전북 서포터스 ‘M.G.B’ 측으로부터 약 2주전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최은성 선수의 은퇴식을 준비 중인데 꼭 참석해 자리를 빛내달라”는 것이었다. ‘언젠가 최은성이 전북에서 은퇴하게 되면 조용하게라도 현장에 가 박수를 보내고 싶다’던 대전 팬들에게 전북 팬들이 공식적으로 은퇴식에 초청을 한 것이었다. 서로 으르렁대고 싸우는 게 이제는 익숙해진 K리그에서 참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장면이었다. 그러면서 전북 서포터스 측은 성대하게 최은성 선수 은퇴식을 준비하는 구단과 협의에 들어갔다. “최은성 선수 관련 유니폼을 입은 팬들 무료 입장 이벤트가 진행되는데 꼭 전북 유니폼이 아니더라도 대전 시절 최은성 선수 유니폼을 입은 분들께도 무료 입장을 시켜주는 건 어떨까요.” 전북 구단 역시 비록 적으로 만나던 상대였지만 최은성의 은퇴식을 빛내기 위해 흔쾌히 이에 동의했다. 사상 처음으로 대전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그들의 유니폼을 입고 전북 홈 경기장에 박수를 받으며 무료로 입장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전 서포터스 측에서는 전세 버스 대절을 추진했다. 최은성의 현역 시절 마지막 모습을 꼭 보고싶다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충 따져보니 1백여 명이 넘는 이들이 전주행을 원했다. 이건 평소 원정 응원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인원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렇게 말했다. “대전에서 전주가 멀지도 않고 주말이니 개인적으로 전주도 들러볼 겸 따로 출발할게요.” 결국 대전 서포터스 측에서는 전세 버스를 대절하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대전에서 전주까지 달려간 이는 150여 명이 넘었다. 이들은 전북 서포터스 측과 협의해 최은성의 모습이 담긴 통천과 걸개 부착에 합의했고 이를 챙겨 다들 개인적으로 전주로 향했다. 전북 서포터스 측에서는 “N석에서 최은성의 은퇴식을 함께 해도 좋다”고 했지만 대전 서포터스 측은 이를 정중히 고사하고 일반석으로 갔다. “대전 유니폼을 입고 전북 서포터스 사이에서 응원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최은성의 은퇴식을 보기 위해 그렇게 150여 명이 넘는 대전 팬들이 전주월드컵경기장 일반석에 자리 잡았다.

전북 구단은 최은성 은퇴식을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했다. 세상에서 단 한 번뿐인 특별한 입장권을 만들었다. 532번의 프로 경기 출전 횟수를 의미하는 등번호 532번 유니폼을 입은 최은성이 사진이 담겨 있는 입장권에는 'adieu! 최은성!'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또한 최은성뿐 아니라 선발로 나선 모든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설 때 532번 유니폼을 챙겨 입었다. 이날을 위해 전북 구단에서 특별히 제작한 입장권과 유니폼이었다. 전북 구단은 또한 532경기 출전수와 총 실점수(674골), 경기당 평균 실점(1.2골)을 새긴 머플러를 따로 제작하기도 했다. 만일 은퇴 경기인 상주전에서 실점을 허용하면 폐기처분하고 다시 머플러를 제작해야했지만 그래도 모험을 감수했다. 최은성 은퇴 기념 머플러가 그의 은퇴식 때 꼭 등장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전북 구단은 전설의 멋진 은퇴식을 위해 온 힘을 쏟아 부었다. 머플러에 새겨진 출전수와 실점수, 평균 시절 등은 대부분이 전북이 아닌 대전에서 이뤄진 역사였지만 전북 구단은 이마저도 전설의 은퇴식을 위해 소중히 했다. 이날은 최은성의, 최은성을 위한, 최은성에 의한 세상에서 단 한 번뿐인 특별한 경기가 준비됐다.

구단과 동료, 상대팀 그리고 심판까지 함께한 은퇴식

선수들도 경기 전부터 최은성을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이동국이 따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 누가 골을 넣건 (최)은성이형 헹가래를 해주자.” 최은성의 전,현 소속팀뿐 아니라 상대팀과 심판들도 최은성에게 존경심을 보였다. 상대팀 감독이자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코치 신분으로 최은성을 지도했던 박항서 감독이 경기 시작 전 꽃다발을 들고 그를 찾았다. “그동안 고생했다.” 짧은 한 마디였지만 박항서 감독은 상대팀 선수의 은퇴에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이날 심판진 역시 최은성에게 꽃다발을 건네며 전설의 마지막 경기에 존경심을 보냈다. 최은성은 이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수였다. 자신을 위한 입장권과 머플러, 유니폼이 준비됐고 그의 동료들은 특별한 세리머니를 준비했으며 그를 응원하는 수 많은 전주성의 팬들과 여기에 15년 동안 함께 했던 과거의 팬들까지 오직 단 한 사람, 최은성을 위해 준비됐기 때문이다. 그의 험난했던 18년 프로 생활이 마감되는 순간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수가 됐다. 경기가 시작되고 이동국의 첫 골이 터지자 동료들은 최은성에게 달려가 그를 헹가래했다. 골을 넣은 선수는 이동국이었지만 축하는 최은성이 받았다.

전반전이 끝나고 대전 서포터스 대표 자격으로 최해문 씨가 그라운드로 내려갔다. 전북 서포터스와 나란히 최은성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최은성을 만나기 전 최해문 씨는 속으로 다짐했다. ‘울지 말아야지. 절대 울지 말아야지.’ 최은성의 대전 시절부터 가장 가깝게 지냈던 팬 중 한 명인 최해문 씨는 3년 전 최은성이 대전으로부터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은 날에도 밤 12시까지 함께 구단의 연락을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대전과 최은성을 사랑했던 한 명의 팬으로서 절대 울지 말자고 다짐하고 최은성과 만났다. 하지만 결국 최은성을 마주한 최해문 씨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레전드’를 이렇게 내친 구단에 대한 원망보다는 그저 우리 홈 경기장에서 멋지게 은퇴식을 치러주지 못한 미안함이 더 컸어요. 눈물이 멈추질 않더라고요.” 함께 자리를 한 전북 서포터스 대표는 아무 말없이 이 모습을 지켜봤다. 은퇴하는 한 선수를 두고 그를 ‘전설’로 대우하는 두 팀 팬의 오묘한 만남이었다. 그는 이미 전북과 대전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가 돼 있었다.

최해문 씨는 곧바로 큰절을 올렸다. “원래 큰절을 할 생각을 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최)은성이 형이 대전 시절 항상 좋은 일이 있을 때나 의미 있는 날이면 우리 팬들에게 큰절을 했거든요. 400경기 출장한 날도 그랬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번에는 제가 대전 서포터스 대표로 그동안 너무 고마웠고 미안했다는 의미를 전하고 싶어서 덜컥 큰절을 했어요.” 최은성은 눈물을 흘리는 최해문 씨를 꼭 안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150여 명의 대전 서포터스는 이 순간 최은성의 얼굴이 담긴 통천을 편 채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골대 뒤에 모인 전북 서포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전 서포터스 측에서는 큰 걸개에 자신들의 메시지를 일일이 다 손으로 쓴 뒤 이걸 최은성에게 전달하기도 했고 전북 서포터스에서는 초록색 종이 비행기를 날리며 최은성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최은성은 대전 서포터스가 모여 있는 일반석으로 가 답례의 뜻으로 큰절을 올렸고 이후 전북 서포터스 쪽에서도 큰절을 했다. 이렇게 두 팀 팬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 성대하게 은퇴식을 할 수 있었던 최은성은 선수 생활 내내 우여곡절도 참 많았지만 행복한 사람이었다.

누가 K리그에 ‘스토리’가 없다고 했는가

전북과 대전 서포터스만 이번 은퇴식을 위해 교류한 게 아니었다. 전북 구단 측에서 직접 대전 구단으로 연락을 취해 대전 김세환 사장이 전주월드컵경기장에 방문하기도 한 것이다. 김세환 사장은 대전 시절 최은성의 21번 등번호가 새겨진 메달을 선물하며 전임 사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를 전북에 내줘야 했던 미안함을 대신했다. 한 선수의 은퇴식을 위해 두 구단이 긴밀하게 협조하며 열어준 멋진 이벤트였다. 여기에 전북 구단은 팀 동료 이동국과 김남일 등을 비롯해 박지성까지 직접 찾아가 축하 메시지를 전달 받아와 하프타임에 경기장에서 상영하기도 했고 ‘전설의 골키퍼’ 최인영 전 코치까지 초대해 최은성 은퇴식을 더 빛냈다. 또한 이 모든 장면은 SPOTV가 광고까지도 포기하고 생중계해 그 감동을 더하기도 했다. 모든 게 완벽하게 이뤄진 멋진 은퇴식이었다. 최강희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K리그에는 아름다운 은퇴, 아름다운 퇴장이 많이 없었다. 최은성은 대전에 오래있었지만 전북에서도 충분히 가치를 보여줬다. 전북에서 함께 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K리그에서 족적을 남긴 선수들에게는 앞으로도 은퇴무대를 해줘야 한다.”

이렇게 최은성을 멋지게 보내준 전북은 이제 ‘명가의 품격’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여기에 15년 동안 최은성과 함께 했던 대전 구단과 서포터스까지 초청해 감동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이제는 비록 다른 팀 선수가 됐지만 그 누구보다도 최은성을 사랑하는 대전 팬들은 전주까지 달려와 큰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여기에 상대팀 감독과 심판, 전설적인 골키퍼 선배까지 모두 이 한 선수를 위해 박수를 보냈고 이 모든 장면은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역사에 그대로 남겨지게 됐다. 지금껏 K리그에 헌신하고도 쓸쓸히 떠나야했던 수 많은 선배들을 떠올려 본다면 참 의미 있고 긍정적인 발전이다. 마지막으로 대전 서포터스 대표 자격으로 최은성 선수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던 최해문 씨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전설을 이렇게 보낸 대전 구단에 대한 분노보다도 이제는 그저 (최)은성이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들어요. 또한 전북 구단과 서포터스 측에 너무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저희가 손님 입장인데 이 정도 배려를 해주고 예의를 갖춰준 점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최은성의 아름다운 은퇴식을 함께 만든 모든 이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리도 멋진 ‘스토리’가 있는데 누가 K리그에 ‘스토리’가 없다고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