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일전이 남았다. 하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벨기에를 두 골차 이상으로 이기고 러시아-알제리전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지금과 같은 경기력이라면 벨기에를 두 골차 이상으로 이기는 것도 상당히 버겁고 알제리가 러시아를 잡고 자력으로 16강 진출을 확정지어 버릴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경우의 수’가 맞아 들어가 16강 진출이라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만들 것이라 믿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8강 진출 운운했던 월드컵 개막 전에 비하면 실패 중에서도 참담한 실패일 가능성이 높은 대회가 됐다. 이제 홍명보호는 내일(27일) 벨기에와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를 통해 모든 게 판가름난다. 물론 믿기지 않는 극적인 해피엔딩 드라마를 쓸 확률보다 그렇지 못할 확률이 훨씬 큰 상황이다.

홍명보호가 짊어진 한국 축구의 무게

이 상황에서 거창한 희망을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그건 희망이라기보다는 고문에 가깝다. 더 이상 홍명보호의 16강 진출에 대한 가능성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실낱 같은 희망조차 포기하자는 게 아니라 현실적이고 싶은 거다. 벨기에에 무참하게 패해 이전부터 내가 홍명보 감독의 선택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게 실질적인 결과로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니다. 어차피 욕 먹는 내 인생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떤가. 복잡한 ‘경우의 수’도 더 이상은 따지지 않겠다. 어차피 자력으로 16강 진출이 안 되는 마당에 이제 16강 진출을 위한 가능성은 하늘에 맡기고 싶다. 하지만 홍명보호는 지금 16강 진출을 위해 싸울 때가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가치를 위해 싸워야 할 때다. 16강 진출 여부를 떠나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에는 한국 축구의 희망과 미래가 달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홍명보호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상당하다. 지금껏 이런 대표팀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단순히 이번 월드컵이 끝난다고 끝이 아니다. 이후에도 한국 축구는 계속 되어야 하고 돌아선 팬들의 마음도 다시 돌려야 한다. 이게 바로 국가대표로서 이번 월드컵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를 벨기에전을 임하는 각오여야 한다. 홍명보호의 선수들이라면 앞으로 다시 국가대표에 발탁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맡은 임무는 다 해놓고 그 자리를 다른 이에게 넘겨주더라도 넘겨줘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태극마크를 단 선수들이 국민의 절대적인 응원을 받으며 뛸 수 있다. 사실상 16강 진출이 물 건너 간 상황에서 모든 걸 포기한 채 끝내버리면 결국 모든 피해는 한국 축구 전체가 입을 것이다. 이번 대회가 끝나고 다른 선수가 국가대표 자리를 대신한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팀을 새롭게 보지 않는다. 왜? 같은 옷을 입은 국가대표니까.

선배들을 생각해 보자.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과거 그들의 선배들은 모든 게 지금보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훨씬 더 강한 상대를 맞아 버텨왔다. 지금보다 덜 유명한 소속팀에서 뛰었고 대표팀 전용 훈련장도 없어 서울 시내 호텔을 돌며 숙식을 해결했다. 그래도 월드컵에서는 머리가 깨져도 울면서 뛰었다. 이런 선배들이 있었기에 지금 홍명보호가 있는 거다. 단순히 지금 선수들이 잘나서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선배들이 쉽게 포기했더라면 지금처럼 유럽의 좋은 팀에서 뛰는 선수도 극히 일부였을 것이고 숙식은 물론 눈만 뜨면 잔디 구장이 바로 펼쳐져 있는 대표팀 전용 훈련장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응원을 보내는 팬들도 없었을 것이다. 선배들이 이만큼 이뤄 놓았기에 우리는 늘 월드컵 무대에 설 수 있었고 세계인의 축제에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누군가의 후배로, 또 누군가의 선배로

이제 홍명보호도 누군가의 선배로 이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한다. 이대로 포기하고 무너지면 안 되는 이유다. 16강 진출이 아니더라도 뭔가는 이뤄놓고 월드컵을 마쳐야 그 임무를 절반이라도 하는 거다. 가까운 미래뿐 아니라 한국 축구의 먼 장래를 위해서도 이들은 벨기에전을 통해 반드시 감동을 줘야 한다. 통상적으로 월드컵이 끝나면 축구를 시작하는 유소년들이 급증하고 이는 10년은 지나야 그 효과가 나타난다. 지금의 홍명보호 선수들 역시 2002년 월드컵을 보며 안정환이 되고 싶었고 황선홍이 되고 싶어 축구를 시작했던 아이들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원하는 성적을 내면 더 좋았겠지만 그게 현실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마지막 경기라도 텔레비전을 통해 경기를 지켜보는 어린 친구들의 마음을 흔들어야 한국 축구의 뿌리가 이어질 수 있다. 개판 5분 전 경기력으로 또 다시 실망감만 안겨준다면 어린 친구들이 한국 축구를 거들떠 보기나 할까. 월드컵에서의 인상적인 모습은 이후 오랜 시간 한국 축구에 그 여파를 끼친다.

프로리그가 아직도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한국이 그래도 이토록 아시아에서 여전한 축구 강국으로의 위상을 떨칠 수 있는 건 누가 뭐래도 국가대표 경기, 월드컵 때문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자국리그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번쯤은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는 건 어떨까라는 아주 위험한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러면 정말 큰일난다. 아무리 내셔널리즘이 예전같지 않다고 해도 월드컵에 절대적으로 목을 매는 우리 정서상 월드컵에 단 한 번이라도 나가지 못하면 자국리그가 사는 게 아니라 아예 한국 축구 자체가 큰 위기에 빠질 것이다. 그만큼 한국 축구에 월드컵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과거 월드컵에서 16강에 못가도 국민이 박수를 보낼 수 있던 이유는 우리보다 한 수 위인 독일을 만나서도, 벨기에를 만나서도 이를 악물고 뛰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축구는 이만큼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단순히 벨기에전 한 경기가 아니라 여기에는 정말 많은 게 달려있다.

설령 지더라도 돌아선 국민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야 한다. 내가 보기에 국민의 반감을 잠재울 수 있는 건 벨기에전에서 박주영의 골이 아니라 얼마나 그들이 얼만큼 죽을 힘을 다해 뛰느냐는 것이다. 이제는 박주영이 골을 넣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홍명보호는 이미 목표 달성에 실패했어도 국민의 마음을 흔들었던 적이 있다. 지난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당시 홍명보호는 금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3·4위전 이란과의 승부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4-3 대역전극을 만들어 낸 적이 있다. 그때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는 이들은 없었고 모두가 오히려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우리 국민들이 결과만을 따지는 것 같아도 이럴 때보면 참 ‘센티멘탈’이다. 지금 홍명보호에 필요한 건 ‘경우의 수’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경기를 하느냐는 것이다. 설령 벨기에전에서 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제는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홍명보호, ‘경우의 수’ 아닌 감동이 더 중요하다

16강, 그까짓 거 못가면 좀 어떻고 벨기에한테 그까짓 거 또 한 번 지면 어떤가. 우리가 뭐 월드컵에서 밥 먹듯 16강에 가는 나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월드컵에서 벨기에를 한 번이라도 이겨본 나라도 아니다. 벨기에를 못 이기고 16강에 못가도 세상이 무너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16강 진출 여부를 떠나 홍명보호에는 한국 축구의 희망과 미래가 달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해줄 말이 더는 없다. 머리가 깨져도 뛰고 다리에 쥐가 나도 뛰어라. 그게 지금껏 그들을 있게한 선배들을 위한 길이고 그들을 보고 자랄 후배들을 위한 길이며 한국 축구를 위한 길이다. 그게 온국민이 등을 돌린 당신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다. 어부지리 ‘경우의 수’로 16강에 가는 게 중요한가. 아니면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감동을 선사하는 게 중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