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남과 북, 그리고 전설의 팀 ‘코리아’


남북 단일팀
판문점에서 걸어 북측으로 이동하는 선수들의 모습. ⓒ국가 정책기록원

세상은 온통 월드컵 열기로 가득하다. 텔레비전을 틀면 월드컵 이야기가 흘러 나오고 한국의 선전을 기원하는 응원단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모레(27일) 열릴 벨기에와의 브라질월드컵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는 극적인 16강 진출을 위해 비장한 각오로 남은 이틀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잊고 있는 게 있다. 바로 오늘이 우리 민족사에서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할 6.25전쟁 발발 64주년이 되는 날이라는 점이다. 우리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그 가슴 아픈 역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언젠가는 남과 북이 반드시 다시 하나가 되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이제 기억 속 저편에 가리 잡고 잊는 전설의 ‘코리아’ 팀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오늘 하루 종일 월드컵과 관련한 기사가 쏟아져 나오겠지만 나는 6.25 전쟁 발발 64주년을 맞아 남과 북의 화합을 기원하고 의미를 칼럼에 담고 싶다.

깃발과 노래 때문에 싸웠던 26년의 세월

남과 북이 처음으로 국제대회 단일팀 구성과 관련해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던 건 1963년이었다. 하지만 남북단일팀이라는 큰 취지에만 동의했을 뿐 서로의 의견은 너무나도 달랐다. 남한은 팀을 상징하는 깃발로 태극기를 제안했다. “남과 북이 분단되기 전부터 우리가 사용하는 국기는 태극기였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북한이 이에 응할 리 없었다. 북한은 태극기와 인공기를 앞뒤에 그려 넣자고 했다. 인공기를 인정할 수 없었던 남한으로서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따. 서로의 의견이 팽팽했다. 남한의 반응이 냉랭하자 북한은 두 번째 안으로 한반도 중심부에 올림픽 엠블럼을 넣자고 제안했지만 이마저도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 단가 또한 문제였다. 남한은 ‘아리랑’을 제안했지만 북한은 25초씩 나눠 양측 국가를 함께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그나마 북한 측이 제안을 받아들여 단가를 ‘아리랑’으로 하는 데만 합의했지만 뭐 제대로 협상이 진행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저 남북단일팀 구성의 아주 기본적인 틀에만 합의한 것이었다. 당시 분위기상 ‘빨갱이’들과 한 팀을 이뤄 국제 스포츠 무대에 나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1년에는 사회 운동가 이 모씨가 남북학생회담 시민궐기대회에서 “올림픽에 남북 단일팀을 구성해 파견해야 한다”는 연설을 했다가 북한 전술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징역 10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정부 측은 겉으로는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았지만 내부적으로는 단일팀 구성에 대한 의지가 별로 없었고 이는 북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들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남한은 때때로 무력 도발을 해오던 북한과 협상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굳혔다. 1979년 평양에서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리자 북한의 제안으로 단일팀 구성 문제를 논의했지만 결국 이마저도 무산됐다. 그저 협의한 거라고는 10년 넘게 단가는 ‘아리랑’으로 하는 것 말고는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 들면서 남북 스포츠 교류가 전기를 맞았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또 다시 남북 단일팀 문제를 논의하다 결렬됐지만 이번에는 그 성과도 있었다. 남한은 흰색 바탕에 녹색 한반도가 그려 넣은 뒤 여기에 ‘KOREA’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단기를 사용하자고 주장했고 북한은 흰색 바탕에 황토색 한반도에다 고려를 뜻하는 ‘KORYO’가 새겨진 단기를 제시했다. 그러다 결국 기나긴 합의를 통해 우리에게 지금은 익숙해진 흰색 바탕에 파란색 한반도지도가 새겨진 단기가 탄생한 것이다. 처음으로 남북 단일팀 협상 테이블에 앉은 지 26년 만의 성과였다. 또한 남과 북은 비록 베이징아시안게임에서 단일팀을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남북 합동응원이라는 역사적인 일을 성사시켰다.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사이에서 그래도 스포츠 경기의 승리를 위해 함께 응원을 보내주는 사이로 발전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경기장마다 ‘우리의 소원’과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코리아’의 시작, 판문점에서 마신 달콤한 소주

베이징아시안게임 이후 남과 북의 스포츠 교류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념은 달라도 스포츠에서만큼은 화합하자는 의미였다. 그리고 남과 북은 수 차례 협의를 거쳐 공동성명을 냈다. “남과 북 국가대표 축구팀이 서울과 평양을 각각 방문해 치르는 통일축구대회를 열겠습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라이벌전인 ‘경평전’의 부활이었다. 남과 북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축구로 하나가 됐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 스포츠사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일이 벌어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91년 2월 12일 판문점 우리측 지역 평화의 집에서 열린 제4차 남북체육회담이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회담에서 남북 단일팀과 관련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주고 받은 양 측은 문안 정리에 들어갔다가 오후 5시에 다시 모였다. 그리고는 한 장의 서류에 서로 서명을 한 뒤 이렇게 말했다. “다가올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나설 ‘코리아’ 단일팀 구성에 합의했습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던 남과 북이 하나의 팀이 된 것이다. 이미 1990년 합의했던 단기를 쓰기로 했고 단가는 ‘아리랑’으로 합의했다. 남한이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단장을 맡기로 했고 북한은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장을 맡기로 결정했다. “남과 북이 선수단 공동 단장을 맡아야 한다”던 북한이 이같은 주장에서 한발 물러났기 때문이다. 남한도 한 발 양보해 북한의 요구 조건을 들어줬다. 원래는 “축구와 탁구 모두 조직력 향상을 위해 남과 북을 오가며 합동 훈련을 하자”고 했지만 북한의 요구에 따라 탁구는 남과 북이 각각 훈련을 한 뒤 대회가 열리는 일본에 모여 합동훈련을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북한도 애초 주장을 굽혀 축구는 남한의 주장대로 남과 북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선발전을 치르고 양측 실무위원회를 통해 선수를 선발한 뒤 합동훈련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남과 북에 실시간 뉴스 속보로 보도됐다. 그만큼 파격적이고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수십 년간 한 발로 물러서지 않아 팽팽하게만 진행됐던 단일팀이 한 발씩 양보하며 드디어 성사된 것이다. 판문점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양 측 관계자들과 취재진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러자 남한 장충식 수석대표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역사적인 날 그냥 헤어질 수는 없죠. 소주 한잔합시다.” 이들은 판문점 남측 구역인 평화의 집 2층에서 회담을 마친 뒤 곧바로 3층 임시 연회장으로 올라가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이들은 “이제 단일팀에 합의만 한 단계이니 앞으로도 서로 논의할 일이 많다”면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서로 대화로 잘 풀자”며 웃었다. 늘 웃음기 없이 서로의 주장만을 내세우던 분단의 상징과도 같은 곳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고 기가 막힌 파티였다. 이날은 대한민국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펼쳐 분단된 뒤 무려 47년 만에 최초로 한 팀이 되기로 합의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리고 이주일 뒤 국제축구연맹(FIFA)에는 동시에 두 장의 문서가 배달됐다. 하나는 서울에서, 또 하나는 평양에서 온 것이었다. 남북 단일팀의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출전 참가서였다.

남북 축구
남과 북은 1990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친선 경기를 펼쳤다. 잠실올림픽경기장에서 맞붙은 남과 북 선수들의 모습.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정책방송원

시작부터 꼬인 ‘코리아’, 그리고 최악의 조편성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단일팀 구성이 어렵지 않았다. 대회 장소도 가까운 일본이었고 복식조의 호흡만 잘 맞추면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선수단 규모도 크지 않았고 선발 과정도 복잡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축구였다. 선수단 규모도 탁구에 비해 워낙 컸고 조직력을 갖추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선수단 선발 과정 역시 적지 않은 문제였다. 당시 남한과 북한은 1년 전 열린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나란히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해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참가 자격을 얻은 상황이었지만 FIFA는 자칫 남북 단일팀이 대회 직전 정치적인 문제로 무산될까봐 걱정하기도 했다. 그럴 경우 남과 북 모두 FIFA의 징계를 피할 수 없었고 일부 축구인들은 “한국이 1983년 4강 신화 이후 가장 안정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전력 약화가 우려된다”며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적어도 1년 이상 합숙을 해야 제 기량이 나오는데 몇 차례 평가전만으로 팀을 구성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었다. 더군다나 단일팀 합의 이후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조추첨까지는 딱 한 달의 시간밖에 없었다. FIFA에서도 ‘코리아’의 대회 참가를 수락했지만 영 못미더운 눈치였다.

1991년 3월 16일 포르투갈에서 열린 조편성은 최악이었다. 1979년 대회 우승팀이자 1983년 대회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한 아르헨티나와 한 조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바로 전 대회인 1989년 우승팀이자 개최국인 포르투갈도 우리와 한조였다. 나머지 한 팀은 아일랜드였다. 객관적으로 8강은커녕 1승도 어려운 조편성이었다. 문제는 더 있었다. 선수 선발 평가전을 마친 뒤 전지훈련 겸 모의고사를 치르기로 했던 프랑스 톨룽국제축구대회 조직위원회에서 ‘코리아’의 참가를 불허했기 때문이다. 애초 남한을 대회에 초청했지만 단일팀 구성 과정에서 선수 명단과 참가 등록 서류를 제때 조직위원회에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코리아’의 선수단과 임원 등이 무려 62명에 달할 것이라는 것도 조직위원회 측에서는 큰 부담이었다. 결국 ‘코리아’는 공식 대회 한 번 나가지 못하고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나가야 하는 신세가 됐다. 역사적인 합의는 이뤄냈지만 준비는 철저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선수 선발 평가전에 나설 이들을 공개했다. 남한에서는 남대식 감독과 최만희 코치를 필두로 조진호와 노태경, 서동원, 이태홍, 박철, 최익형, 장현호, 유상철 등을 선발했고 북한은 안세욱 감독과 문기남 코치, 조인철, 최철, 윤철, 정강성, 김정만, 리창하 등을 테스트 선수로 선발했다. 이때쯤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코리아’ 여자 선수들이 대회 9연패를 노리던 ‘만리장성’ 중국을 넘어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졌다. 축구도 뭔가 한민족을 감동시킬만한 성과를 내야한다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1991년 5월 6일 평양을 출발해 판문점을 통과한 북한 선수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세 시간 반이면 닿는 거리였지만 이들은 이곳에 오기 위해 40여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남한 선수들은 북한 선수들과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역시나 어색함이 감돌았다. 서로 경계심을 풀지 않았고 제대로 말을 섞지도 않았다. 단일팀이 됐지만 아직은 분단의 오랜 시간을 뛰어 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점점 하나가 되어가는 ‘코리아’

그런데 이때 남한 최만희 코치가 누군가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형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이야. 이거 남조선에서 보니 반갑고만기래.” 최만희 코치와 인사를 나눈 이는 북한 문기남 코치였다. 이전부터 서로 남과 북의 지도자로 아시아 무대에서 자주 만났던 이 둘은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두터운 우정을 과시하고 있었다. “우리 한 번 잘해 보자우. 아우를 믿갔어.” 정치와 이념을 떠나 이미 이 둘은 축구로 하나가 돼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북한 선수로 서울에 온 김정만이 남한 선수 이태홍에게 다가갔다. 이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1990년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도 만나는 등 서로 잘 알고 있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태홍은 남한의 공격수로, 김정만은 북한의 미드필더로 그라운드에서 격돌했었다. 김정만이 잔뜩 챙겨온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이태홍에게 건넸다. “이거 뱀술이야. 평양에서 아주 귀한 거야. 네가 마시지 말고 꼭 부모님 갖다 드리라우.” 이렇게 남과 북은 조금씩 하나가 돼 가고 있었다.

이틀 뒤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나설 ‘코리아’ 선수의 옥석을 가리는 1차 평가전이 시작됐다. 남과 북으로 나누지 않고 홍팀과 백팀으로 나눴다. 홍팀에서는 이태홍과 김정만이 호흡을 맞췄고 백팀에서는 남한의 한연철과 북한의 윤철이 공격을 담당했다. 하지만 경쟁을 떠나 감동적인 경기였다. 백팀 골키퍼 리창욱(북한)이 경기 도중 쓰러지자 홍팀의 이태홍(남한)이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워 줬고 백팀 수비수 정강성(북한)에게 파울을 한 홍팀 조진호(남한)는 곧바로 그에게 다가가 부상 부위가 심하지는 않은지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모습이었다. 결과는 홍팀의 2-1 승리로 끝났지만 경기장을 채운 2만여 명의 관중은 결과를 떠나 남과 북이 아닌 홍팀과 백팀으로 나뉜 선수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렇게 북한 선수들이 3박 4일간의 서울 평가전을 마치자 이번에는 남한 선수들이 평양을 방문할 차례였다. 북한 선수들이 평양으로 돌아간 다음 날인 1991년 5월 10일이었다.

오전 9시 판문점을 통과하니 북측 관계자들이 나와 있었다. 이제 막 스무살에 불과한 어린 선수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개성으로 간 뒤 특별 열차를 탔다. 평양으로 향하는 열차였다. 그렇게 세 시간 반 만에 이들은 서울에서 평양에 도착했더니 먼저 평양에 와 있던 북한 선수들이 서울에서 온 친구들을 반겼다. 며칠 사이에 이들은 친구가 돼 있었다. 김정만으로부터 서울에서 뱀술을 선물 받은 이태홍은 가방에서 화장품과 고급면도기를 꺼내 선물했다. “너도 이거 네가 쓰지 말고 꼭 부모님 드려라.” 이 둘은 서로 웃었다. 고려호텔에 여장을 풀고 이튿날 남한 선수들이 대동강 주변에서 가볍게 아침 훈련을 하자 평양 시민들이 반갑게 말을 건넸다. “반갑습네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주시라요.” 평양 5.1경기장에서 열린 2차 평가전에서는 백팀이 홍팀을 5-1로 제압했다. 북한 문기남 코치는 남한 손님들을 배려하기 위해 경기장에서 남대식 감독과 최만희 코치를 먼저 경기장에 입장하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유상철을 울렸던 북한 친구들의 ‘뱀술’

두 차례 평가전이 끝난 뒤 그날 밤 양측 감독과 코치, 실무자들이 모여 선수 선발에 들어갔다. 이전부터 남과 북이 각각 동등하게 9명씩을 선발하기도 합의가 돼 있었다. 고심 끝에 남한에서는 조진호와 서동원, 최익형, 이태홍, 박철 등이 선발됐고 북측에서는 김정만과 조인철, 최철 등 9명이 뽑혔다. 하지만 역사적인 ‘코리아’의 일원이 된 기쁨을 누리는 이들도 있는 반면 역사의 주인공이 될 기회를 코앞에서 놓친 탈락자도 있었다. 유상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양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탈락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속했다는 걸 알고 자기 자신에게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런데 이때 북한 친구들이 유상철에게 다가왔다. 짐을 싸는 그에게 몰래 뱀술을 넣어주며 아무 말 없이 뜨겁게 그를 껴안았다. 그러자 유상철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유상철을 꼭 껴안은 북한 선수들이 말했다. “왜 울고 기러니.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우.” 유상철은 아직도 이 뱀술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유상철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만큼 축구를 하면서 펑펑 울어본 적은 없어요.”

유상철을 비롯한 탈락자들은 기차를 타고 평양을 떠나 개성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고 엔트리에 발탁된 선수들은 그대로 평양에 남았다. 평양에서 곧바로 강화훈련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나 분단의 세월은 이들에게도 상당한 불편이었다. 축구 용어 자체가 달라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서서히 해결될 문제지만 당장 대회에 나서야 하는 이들에게는 훈련을 하는 데 큰 문제가 있었다. 그러자 ‘코리아’의 트레이너가 된 ‘의형제’ 최만희와 문기남이 숙소에 마주 앉아 머리를 맞댔다. 복잡한 축구 용어를 정리하기로 한 것이다. ‘슛’이나 ‘패스’, ‘태클’ 등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용어는 남한이 사용하는 영어를 그대로 쓰기로 했지만 ‘오펜스’나 ‘디펜스’, ‘볼트래핑’ 등 굳이 영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용어는 ‘공격’과 ‘방어’, ‘공다루기’ 등으로 쓰기로 했다. 이외에 크로스(넘겨차기), 오프사이드(공격 위반), 드리블(기만몰기), 부분전술(소경기), 스트레칭(긴장풀기) 등은 꼭 바꿔 쓰지 않더라도 서로의 용어에 대해 공부해 혼란이 없도록 했다.

이렇게 평양에서 강화훈련을 마친 진정한 의미의 ‘코리아’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 마지막 평가전을 치른 뒤 결단식을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던 선수들도 이제는 한 팀이 돼 있었다. 1991년 5월 17일 오전 8시 반 특별 열차편으로 평양역을 출발한 ‘코리아’는 판문점 북쪽 지역 통일각에서 간단한 다과와 음료를 마신 뒤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중립국감독위 사무실을 통해 남쪽 지역 평화의 집으로 넘어왔다. 그리고는 남쪽 지역 평화의 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다과는 북쪽에서, 식사는 남쪽에서 하는 믿을 수 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들은 이제 남과 북을 자유자재로 넘는 진짜 ‘코리안’이 된 것이다.

아르헨티나전의 기적 같았던 승리

서울에서 치러진 유공과의 마지막 평가전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한 ‘코리아’는 1991년 5월 22일 격전지인 포르투갈로 향했다. 비록 톨룽국제대회에 참가 불허 통보를 받아 공식적인 경기를 치르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그럴 바에는 빨리 포르투갈 현지로 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동복과 운동 용품은 남한이 준비했고 단복은 북한이 준비했다. 남한에서는 태릉선수촌 주방장과 조리장을 지원했다. 그렇게 대한항공편을 이용해 ‘코리아’는 영국 런던을 경유, 18시간의 비행 끝에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했다. 북한 선수와 임원이 남한 항공편으로 해외에 가는 건 사상초유의 일이었다. 그런데 리스본에 도착하니 감동 그 자체였다. 조광제 주포르투갈 대사와 김경락 북한 대사가 나란히 ‘코리아’ 선수들을 맞이하러 나왔기 때문이다. 남과 북 교민 1백여 명도 열렬히 하나된 ‘코리아’에 환영 인사를 보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코리아’는 작은 통일을 이뤄냈다. 한반도 깃발이 펄럭였고 여기저기에서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하지만 선수단은 완전히 정비되지 않았다. 고민하던 북한 안세욱 감독은 남한 남대식 코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같은 인원으로 대회에 나가는 걸 고집하면 안 되갔어. 이건 북과 남의 자존심을 따질 문제가 아니지. 전력 강화를 위해 남조선의 선수들을 수혈해야 하갔어.” 안세욱 감독의 결단은 곧바로 대한축구협회에 전해졌다. 처음에는 올림픽팀 김삼락 감독이 거부했지만 결국 긴 논의 끝에 ‘코리아’ 선수단이 요구한 곽경근, 이임생, 강철 등 세 명 중 곽경근을 제외한 두 명의 선수가 ‘코리아’로 긴급 수혈됐다. 그렇게 남한이 10명, 북한이 8명의 선수로 ‘코리아’는 구성을 마쳤다. 리스본으로 바로 합류한 강철은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남한 선수와 북한 선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다. 한민족이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이슈를 만들어보자.” 점점 ‘코리아’는 위용을 갖춰 나가고 있었다. 단순히 단일팀이라는 이슈가 아니라 실력으로 보여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 전혀 교류를 할 수 없었던 남과 북의 포르투갈 대사관 역시 응원 준비를 위해 수시로 만나 협력했다.

1991년 6월 1일 리스본에서 운명의 첫 경기가 열렸다. 상대는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는 당시 최고의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으며 레알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은 후안 에스나이더를 비롯해 이후 인디펜디엔테 주전 골키퍼로 활약한 레안드로 디아즈, 에스파뇰과 파리생제르망에서 활약한 수비수이자 현 토트넘 감독인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전 발렌시아 감독 마우리치오 펠레그리노, 보카 주니오스의 전설 마르셀로 델가도 등 지금 들어도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코리아’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골키퍼 최익형을 비롯해 이태홍과 강철, 이임생 등이 포진한 남한의 수비는 무척이나 탄탄했다. 특히 이임생은 에스나이더를 꽁꽁 묵었다. 조인철과 최철, 정강성 등 북한의 빠른 선수들은 전방에서 끊임없이 아르헨티나를 괴롭혔고 중원에서는 서동원과 김정만, 조진호가 한 팀이 돼 호흡을 맞췄다. 그렇게 팽팽한 0-0의 흐름이 깨진 건 무승부로 경기가 막을 내리려던 후반 종료 2분 전이었다. ‘코리아’의 역사에 남을 멋진 한방이 터진 것이었다.

조진호가 얻어낸 프리킥을 최영선이 강력한 슈팅으로 연결했고 이게 아르헨티나 수비를 맞고 흐르자 달려들던 조인철이 통렬한 30m 중거리슛을 날렸다. 그리고 조인철의 발을 떠난 공은 그대로 아르헨티나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코리아’ 선수들은 정치와 이념을 떠나 한데 엉켜 기쁨을 나눴다. 이대로 경기는 끝이었다. ‘코리아’가 ‘최강’이라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믿기지 않는 1-0 승리를 따낸 것이었다. 비기기만 해도 엄청난 선전이라는 평가였지만 ‘코리아’는 무승부에 만족하지 않고 기적을 일궈냈다. 수십년 간 갈라져 살아야 했던 이땅의 어린 선수들이 해낸 것이다. 단일팀 결성을 합의한 뒤 전력 약화를 우려하던 일부의 반응도 쏙 들어갔다. 새벽 시간 ‘코리아’의 경기를 숨죽여 지켜보던 한반도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남과 북이 따로 업었다. ‘코리아’를 이집트, 시리아, 호주 등과 함께 대회 최약체로 분류했던 외신의 평가를 무색케하는 짜릿한 한방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 매를로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조직력에서 ‘코리아’에 완전히 졌다.”

그들의 짧지만 강렬했던 추억

2차전 상대는 아일랜드였다. 아르헨티나전에서 끈질긴 수비로 에스나이더를 꽁꽁 묶었던 이임생이 징계로 결장하게 됐고 서동원도 부상으로 빠지게 돼 전력누수가 상당했다. 역시나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아일랜드에 밀리기 시작했다. 전반 20분 ‘코리아’는 아일랜드의 헤딩슛이 크로스바를 맞고 나와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결국 후반 11분 전세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오른쪽 페널티 박스에서 강철이 내준 프리킥 상황에서 매카시가 득점에 성공한 것이었다. 경기는 답답한 양상으로 계속됐다. 후반 35분 결정적인 찬스에서 조진호가 날린 헤딩슛은 골대를 살짝 스쳐 벗어나고 말았다. 당시 신문선 해설위원은 엎어져 땅을 치는 조진호를 보며 감정에 복받쳐 이렇게 말했다. “조진호의 저 모습이 지금 남북 7천만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지키려는 아일랜드에 맞서 ‘코리아’는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 경기를 중계하던 송재익 캐스터의 간절한 말처럼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후반 종료 직전 맞은 마지막 기회였다. 오른쪽 측면에서 정강성이 연결한 패스를 최영선이 크로스로 연결했고 최철이 골문으로 달려들며 때린 슈팅이 그대로 아일랜드 골문을 뚫은 것이다. 아르헨티나전에 이어 두 경기 연속 극적인 승부였다. 1-1 동점골이 들어가고 선수들이 부둥켜 안은 채 환호하는 순간 주심의 시계는 후반 45분을 알리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두드리는 ‘코리아’ 선수들에게 결국 제대로 한 방 얹어 맞은 아일랜드는 마치 경기에서 진 것처럼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이후 ‘코리아’는 3차전에서 포르투갈에 0-1로 패했지만 1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감격적인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경기에서는 졌지만 당시 카를로스 퀘이로스 감독이 이끌던 포르투갈은 루이스 피구와 조르제 코스타, 주앙 핀투, 루이 코스타 등 ‘황금 세대’가 모두 경기에 나섰음에도 ‘코리아’의 선전에 가까스로 승리를 거둬야 했다. 이후 ‘코리아’는 8강전에서 에우베르와 세르지뉴 등을 앞세운 브라질을 맞아 1-5로 대패했지만 이렇게 한 팀이 돼 멋진 승부를 펼친 ‘코리아’에 7천만 겨레는 많은 박수를 보냈다.

8강 진출도 대단한 성적이지만 매 경기 포기하지 않는 투혼을 선보이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코리아’는 그렇게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고 1991년 6월 27일 포르투갈 리스본을 떠났다. 출발한 곳은 서울이었지만 도착한 곳은 바로 평양이었다. ‘코리아’ 선수들이 평양에 도착하자 공항에는 그들을 환영하기 위한 이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곧바로 평양체육관에서 해단식을 가진 뒤 함께 보낼 수 있는 마지막 하루가 주어졌다. 서로 애인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기회가 되면 서로의 애인을 소개하자.” 이태홍이 말하자 김정만이 답했다. “꼭 그러자우. 통일 되면 더 많은 친구가 생길 것 같고만 기래.” 이렇게 8강이라는 역사를 쓴 ‘코리아’는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뒤 작별했다. 다음 날인 1991년 6월 29일 오전 8시 반 ‘코리아 선수’에서 이제 ‘남한 선수’가 되어야 하는 이들은 준비된 버스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남한 선수’들은 또 한 번 감동했다. 김정만과 조인철, 최영선, 최철 등 ‘북한 선수’ 네 명이 평양에서 출발해 개성을 거쳐 판문점까지 환송을 온 것이었다.

남과 북, 그리고 전설의 팀 ‘코리아’

이들은 판문점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꼭 다시 한 팀이 돼 만나자”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제 가야할 시간입니다.” 관계자의 말에 결국 뒤돌아 ‘남한 선수’들은 판문점을 넘어 남한으로 돌아왔다. 이후 이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서로 애인 사진을 보여주며 꼭 만나자고 약속했던 스무 살의 어린 선수들은 이제 마흔이 넘은 아저씨들이 됐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당시를 회상하며 강철은 이렇게 말했다. “정강성이라는 친구가 형이라고 하면서 저를 무척이나 잘 따랐어요.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항상 궁금합니다. 보고 싶어요.” 이념을 넘어 하나가 됐던 ‘코리아’의 어린 선수들은 축구라는 스포츠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몸소 보여줬다. 남과 북을 떠나 극적인 골에 한 덩이가 돼 울고 웃던 그 순간이 다시 오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정치와 이념이 못하는 걸 축구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6.25전쟁 발발 64주년을 맞아 남과 북이 이제는 하나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비록 이제는 다들 배나온 아저씨가 됐지만 “애인과 함께 꼭 만나자”고 하던 이 어린 선수들의 약속이 언젠가는 지켜졌으면 한다. 전설의 팀 ‘코리아’는 계속되어야 한다.

#에필로그

1. 1961년 시민궐기대회에서 남북 단일팀 구성을 주장하다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이 모씨는 2012년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재판부는 “당시 궐기대회는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 학생이 비정치적 영역에서 상호 교류해야 한다는 취지로 개최됐을 뿐”이라면서 “이씨 행위가 반국가단체인 북한 활동을 찬양, 고무하거나 이에 동조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없고 이씨도 당시 자신의 행위가 북한에 이익이 된다고 인식했다고 볼 증거가 없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모씨는 1973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내가 2012년 87세의 나이로 재심한 청구한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아낸 것이었습니다.

2. 1991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남과 북 트레이너로 활약했던 ‘의형제’ 최만희 트레이너와 북한 문기남 트레이너는 이후 극적으로 상봉했습니다. 북한 축구대표팀 사령탑을 맡기도 했던 문기남 감독이 지난 2004년 귀순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만희 전감독이 곧장 달려가 이 둘은 뜨거운 포옹을 나눴습니다. 문기남 감독은 울산대를 거쳐 울산과학대 여자축구팀 고문으로 활동했고 최만희 감독은 광주FC를 지휘한 뒤 현재는 파주트레이닝센터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 둘은 현재에도 ‘의형제’ 이상의 우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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