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이 2014 브라질월드컵 조별예선 러시아와의 첫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승리를 거두지 못한 건 아쉽지만 불과 며칠 전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던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이 발전한 경기력이었다. 또한 경기 내용 역시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많은 이들이 걱정스럽게 지켜본 경기였지만 한국은 러시아에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직 두 경기나 더 남아있어 속단하기에는 이르지만 충분히 가능성을 보여준 경기였다. 결과를 떠나 끝까지 뛰는 모습을 통해 아마 많은 이들이 홍명보호에 박수를 보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결과에 마냥 만족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오늘은 러시아전에서 보여준 홍명보호의 만족스러운 점과 아쉬웠던 점을 꼽아보려 한다.

만족1. 안정적이었던 정성룡

골키퍼 정성룡은 그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다. 소속팀에서는 물론 대표팀에서도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김승규와의 대표팀 주전 경쟁 역시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정성룡은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안정적인 활약을 펼치며 소중한 무승부를 이끌어 냈다. 유럽에서도 인정 받는 상대팀 골키퍼 이고르 아킨페프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며 골을 내준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습한 그라운드 사정 때문에 두 골키퍼 모두 슈팅을 잡아내지 못하고 펀칭하는 플레이를 자주 선보였는데 결국 정성룡이 아킨페프에 비해 훨씬 더 안정적이었고 실수도 없었다. 보통 멍하게 상대 슈팅을 바라보다 실점을 내준 뒤 나라 잃은 표정을 지었던 정성룡이었지만 이번 경기 실점은 그의 탓이라기보다는 수비수들의 전체적인 조직력이 무너졌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정성룡의 재발견이었다.

만족2. 새로운 진공 청소기 한국영

김남일이 2002년식 진공 청소기였다면 한국영은 2014년 최신식 진공 청소기였다. 보통 수비형 미드필더 중 상대를 적극적으로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선수를 지우개로 표현하는데 그렇다면 러시아전 한국영은 ‘점보 지우개급’ 활약을 펼쳤다. 특히 전반 두 차례 연속으로 상대 공을 차단한 뒤 아군에게 건네주고 당당히 자기 자리로 돌아갈 때의 모습은 순간 내 성 정체성을 의심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투혼을 발휘해 상대 공격을 차단한 한국영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다른 선수들도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한국영은 경기가 끝난 뒤 이렇게 말했다. “경기 끝나고 내 유니폼이 가장 더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흙으로 범적이 되어야 한다. 난 빠르고 공을 잘 차는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니폼은 가장 더러워졌지만 가장 눈부셨던 선수가 바로 한국영이었다.

만족3. 다시 찾은 자신감

한국은 이전 두 경기에서 최악의 플레이에 머물고 말았다. 출정식을 겸해 국내에서 열린 평가전에서 튀니지에 일격을 당했고 이후 가나와의 마지막 평가전에서도 0-4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친구들과 경기 결과 내기를 하는데 한국보다 러시아 승리에 돈을 건 친구들이 더 많았을 만큼 이번 대표팀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가 컸다. 구심점 역할을 해줄 베테랑 선수들이 부족한 대표팀이 이대로 추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한국은 가나전 졸전이 연막 작전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며칠 만에 전혀 다른 팀으로 변모했다. 아마 러시아전을 그르쳤다면 대표팀은 전의를 상실한 채 나머지 두 경기를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만큼 중요했던 경기에서 다시 자신감을 찾았다는 건 엄청난 수확이다. 하지만 대표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모의고사를 못 봐도 수능은 잘 볼 수 있다고 믿는 고3은 없었으면 좋겠다. 수능과 축구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족4. 새로 찾은 공격 옵션

그동안 많은 이들은 박주영이냐, 이동국이냐를 놓고 싸웠고 이 논란이 잦아들자 논쟁의 화두는 박주영이냐 김신욱이냐로 바뀌었다. 대표팀의 제1 공격 옵션은 박주영이었고 플랜B는 김신욱이 차지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첫 골의 주인공은 박주영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김신욱도 아니었다. 바로 1년에 178만 원을 벌어 이번 월드컵 최저 연봉자가 확실시 되는 이근호가 첫 골의 주인공이었다. 비록 행운이 따른 골이었지만 이근호는 득점 이후에도 활약한 움직임으로 남은 두 경기에 대한 기대를 심어줬다. 박주영과 김신욱만을 놓고 공격 옵션에 대해 고민하던 많은 이들이 무릎을 칠 만한 경기였다. 이제 홍명보호는 더욱 다양한 공격 옵션으로 남은 두 경기를 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근호의 발견은 러시아전의 큰 수확이었다. 참고로 네이트 스포츠 POLL에서 실시한 첫 골을 기록할 선수에 대한 설문 보기에는 아예 이근호가 있지도 않았다. 네이트 스포츠 POLL 담당자는 경위서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족5. 선수들의 뛰려는 의지

전반 킥오프가 선언되는 순간을 다시 잘 돌려보라. 박주영과 구자철이 이와 동시에 상대 진영으로 무섭게 질주한다. 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선수들이 지난 두 차례 평가전과는 전혀 다른 자세로 경기에 임하고 있음을 느꼈다. 만약 행운의 골에 의한 1-1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도 경기 내용 자체가 실망스러웠다면 지금과 같이 대표팀에 호의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경기 결과를 떠나 이번 러시아전은 선수들이 뛰려는 의지를 제대로 보여준 한판이었다. 선수들 유니폼에 새겨진 ‘투혼’이라는 글자가 전혀 아깝지 않은 경기였다. 이런 의지와 투혼이라면 설령 러시아에 패했다고 하더라도 그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대표팀의 투혼과 의지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진작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아쉬움1. 아쉬운 옐로우 카드

주전 선수가 세 명이나 경고를 받은 건 참 아쉬운 대목이다. 한국은 기성용과 손흥민, 구자철이 러시아전을 통해 경고를 한 장씩 받아 다가올 알제리전에서 경고를 한 장 더 받으면 마지막 벨기에전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셋은 알제리와의 경기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손흥민은 경고를 받을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고 구자철 또한 경고 판정이 다소 과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날 주심이 경기당 5장이 넘는 경고를 부과해왔다는 성향을 따져 봐도 이 둘의 경고는 아쉽다. 어차피 알제리전에서 16강이 확정되지 않고 벨기에전까지 가야한다. 그런데 벨기에전에 이 셋 중 누군가가 경고 누적으로 빠져야 한다면 이것만큼 뼈아픈 것도 없다. 이제 이 셋은 카드가 한도초과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다음 경기에서는 카드를 긁어서는 안 된다. 부담스럽겠지만 슬기롭게 이겨나가야 4년을 준비해온 월드컵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걸 명심하자.

아쉬움2. 부진했던 박주영

논란도 많지만 현 상황에서 대표팀 원톱은 누가 뭐래도 박주영이다. 하지만 박주영은 러시아전을 통해 이렇다 할 강렬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전반 내내 중원까지 빠져 유기적인 플레이를 펼쳤고 몇 차례 리턴 패스로 동료에게 기회를 내주기도 했지만 정작 슈팅은 단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다. 스트라이커로서 다른 움직임도 필요하지만 슈팅이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최근 경기력에 대한 비난을 이겨내는 건 그 어떤 말보다도 골이라는 걸 박주영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박주영이 살아나야 주변 공격수들도 공격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 알제리전에서는 박주영이 동료의 도움을 받아 득점포를 가동한 뒤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는 모습을 보고싶다.

아쉬움3. 오히려 밀린 체력

나는 한국이 전반을 잘 버티면 후반 들어 러시아를 체력으로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균 연령도 한국이 더 젊고 고온다습한 기후 역시 한국이 더 쉽게 적응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후반 중반 이후 체력적으로 러시아에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근육 경련으로 경기 도중 그라운드에 눕는 선수도 꽤 있었다. 최선을 다해 뛰었다는 증거이기도하지만 러시아를 상대로 그나마 우리가 우위에 있다는 체력에서 밀리니 경기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러시아는 오늘 경기에서 총 113.81km를 뛴 반면 한국은 108.13km를 뛰며 활동량에서 뒤졌다. 경기마다 상대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이는 H조 첫 경기에 나선 네 나라 중 가장 적게 뛴 수치였다. 활동량, 특히 후반 들어 체력을 앞세워 주도권을 빼앗아야 하는 한국으로서는 러시아전 후반 체력 저하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아쉬움4. 실점 장면

한국은 이근호의 득점 이후 좋은 흐름을 잡았다. 하지만 불과 6분 만에 러시아 알렉산더 케르자코프에 동점골을 허용하면서 이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어쩔 수 없는 실점이야 금방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지만 이번 실점 장면은 너무나 아쉬웠다. 정성룡이 쳐낸 공을 수비가 걷어냈으면 가볍게 해결될 상황에서 수비수들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다 실점을 허용했다. 파울이라면서 심판 판정이 내려지기도 전에 손을 들고 플레이를 멈추는 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니다. 오랜 습관이겠지만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차라리 꼼짝없이 손도 쓸 수 없는 프리킥으로 실점했다면 이 아쉬운 마음이 덜할 것이다.

아쉬움5. 소극적이었던 선수 교체

이근호 교체 카드는 성공했다. 하지만 나머지 두 장의 교체 카드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홍정호의 부상으로 황석호가 대신 투입되면서 한 장의 교체 카드를 썼고 손흥민을 김보경과 맞바꾸며 마지막 교체 카드를 활용했지만 이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무엇보다 수비수의 부상으로 교체 카드 한 장을 쓰면서 공격적인 선수 교체를 단행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후반 막판 김신욱이 투입됐으면 효과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김보경도 후반에 투입됐지만 체력이 바닥난 다른 선수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활동량에 머물고 말았다. 홍명보 감독은 분위기 반전을 위해 알제리전에서 어떤 교체 카드를 써야할지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쉬움6. 필요했지만 얻지 못한 승점 3점

우려했던 것에 비해서는 내용도 좋았고 패하지 않았다는 점도 다행이다. 하지만 조2위 싸움을 펼칠 것으로 예상됐던 러시아와 비겼다는 건 그저 16강 진출 가능성 여부를 2차전으로 미룬 것과 다름 없다. 러시아를 반드시 잡았어야 우리가 승점 3점을 얻고 러시아를 승점 0점으로 묶어둘 수 있었지만 결국 한국은 이제 알제리에 얼마나 많은 골을 넣고 벨기에를 상대로 얼마나 선전해야 하는지에 16강 진출 여부가 달리게 됐다. 러시아를 잡았더라면 우리 경기에만 신경 쓰면 되겠지만 앞으로 한국은 러시아의 남은 경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16강 진출을 위해서는 골득실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기대 이상으로 잘했기에 이 무승부가 더 아쉽다.

홍명보호는 러시아를 상대로 기대 이상의 플레이를 선보였다. 지금껏 홍명보 감독의 철학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적어도 오늘 만큼은 그가 말한 ‘하나의 팀’이었다. 가나전과 같은 무기력한 모습은 사라졌고 선수들은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해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다. 그동안 홍명보호의 여러 논란에 실망했던 이들도 이제는 조금씩 마음을 열 것이다. 비록 무승부였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최선을 다한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다가올 두 경기에서도 후회 없는 승부를 펼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