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 박지성으로 한국 축구계에서 산다는 것



박지성은 이제 대한민국 축구의 고유명사 같은 존재가 됐다. 대한민국 축구를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맹활약한 박지성을 모르는 이는 없다. ‘축구선수 박지성’이라고 하면 이름 자체만으로도 빛이 난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명의 박지성이 있다. 심지어 이 박지성도 축구인이다. 하지만 ‘캡틴’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고 전세계의 주목을 받을 때 이 박지성은 전세계를 돌며 좌절하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캡틴’ 박지성과 같은 이름이면서도 전혀 다른 축구 인생을 살아야 했던 ‘동명이인 축구선수’ 박지성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칼럼으로 소개하려 한다. 우리가 모르는 축구선수 박지성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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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은 그리 재능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전세계를 돌며 도전했다. (사진=부천FC)

새벽 5시 반 학교 가는 지하철을 타던 소년

1984년 경기도 화성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박지성은 어린 시절부터 축구가 마냥 좋았다. 하지만 시골에서 축구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도시로 전학을 가 축구부 생활을 하다 돌아온 동네 친구를 보고 결심했다. ‘나도 도시에 가 축구를 배우겠어.’ 박지성은 그때부터 부모님을 졸랐다. 부모님은 아들이 공부를 하며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길 바랐지만 결국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박지성은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중학교 1학년 때 축구부가 있는 서울 혜화동 경신중학교에 가 축구부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그렇게 뛰어난 실력은 아니었지만 시골 마을에서 축구 때문에 상경하고 싶다는 박지성을 보고 기특했는지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그래. 축구부에 들어와. 한 번 같이 해보자.”

박지성은 곧장 경신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선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학교 근처에 있는 아버지 지인의 집에서 6개월 동안 생활하며 축구부 생활을 한 박지성은 이후 가족이 안산시로 이사를 가게 되자 안산에서 경신중학교까지 머나먼 통학을 시작했다. 또래 선수들보다 한참 늦게 축구를 시작했고 재능 또한 특별하지 않았던 박지성은 부지런히 노력했다. 안산에서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 반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가 7시부터 새벽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박지성은 그렇게 중학교 시절 2년 넘는 시간 동안 꼬박 새벽 지하철을 타고 학교를 오갔다. 몸은 힘들었지만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행복했다. “그때는 그냥 공 차는 게 너무 좋았어요. 빨리 기술을 익혀 저보다 일찍 축구를 시작한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죠. 하지만 재능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텔레비전을 보고 동명이인 축구선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바로 훗날 한국 축구의 전설이 된 그 박지성 말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허정무 감독의 부름을 받아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된 박지성을 보고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때 생각했죠. ‘어? 나도 박지성인데? 나중에 같이 대표팀에서 뛰면 박지성에 한 팀에 두 명이겠네.’ 지금 돌이켜보면 참 허무맹랑하고 오글거리는 생각이었죠.” 그리고 그는 경신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장 브라질 축구 유학을 떠났다. 흔히 국내 유학 업체를 통해 브라질에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홀로 상파울루에 위치한 유소년 클럽 문을 두드렸다. 그곳에는 한국 선수도 없었지만 회비가 한 달에 약 5만 원 정도로 저렴했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이 일주일에 서너번씩 훈련하는 게 전부인 곳이었다. 그렇게 박지성은 브라질에서 유소년 클럽을 다니고 개인 레슨을 따로 받으며 2년을 보냈다. “한국 친구들이 없어서 외롭기도 했고 청소년기에 중심을 잡아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때 실력이 많이 늘긴 했어요. 개인적으로 참 많이 발전한 시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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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은 이탈리아에서 여러 번 좌절을 겪어야 했다. (사진=부천FC)

박지성이라는 이름이 안긴 상처

브라질에서 돌아온 그는 경신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브라질에서의 학력을 인정받지 못해 고등학교에 가려면 2년을 유급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년 정도 유급은 괜찮은데 2년 유급은 너무 부담스럽지 않겠니?” 주위에서도 2년 유급에 대해 많이 걱정했다. 결국 박지성은 고민 끝에 다시 해외 구단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페루자에서 뛰는 안정환의 일을 봐주는 한국인이 있었고 박지성 역시 그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박지성은 이탈리아 2부리그 안코나를 비롯해 여러 구단의 입단 테스트를 치렀다. 하지만 박지성은 그렇게 실력이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고 그를 원하는 팀은 없었다. 박지성은 고민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어디라도 나를 불러주는 팀을 찾아보자.’

“우리 구단과 계약합시다. 박지성 선수.” 그러던 중 입단 테스트를 받은 한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 이탈리아 3부리그 삼베네데떼세라는 구단이었다. 비록 3부리그지만 박지성은 자신의 진가를 알아준 구단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3부리그에서 차근차근 시작해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의욕도 넘쳐났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 비자와 관련된 서류를 준비해 주세요.” 그는 삼베네데떼세와 구두계약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국에서는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축구 열기가 뜨거웠다. 이 월드컵이 끝나고 비자 준비가 마무리되면 이탈리아에서 맘껏 뛸 수 있다는 사실에 박지성은 하루 하루가 행복했다. 그리고 누구나 그랬던 것처럼 박지성은 한국에서 2002년 월드컵을 즐겼다. 안정환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16강전에서 골든골을 넣는 순간 박지성도 다른 국민들처럼 친구들과 부둥켜 안으며 믿기지 않는 승리를 즐겼다.

하지만 안정환의 골든골이 박지성에게 시련이 될 것이라는 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박지성 선수, 우리와의 계약은 없던 일로 합시다.” 삼베네데떼세에서는 일방적으로 박지성과의 구두계약을 파기했다. 당시 이탈리아전 골든골로 안정환을 방출시킨 페루자 가우치 구단주가 삼베네데떼세 구단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우치 구단주는 한국 선수이면서 이름도 박지성인 그를 영입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안정환의 골든골로 인해 애꿎은 선수까지 피해를 입은 것이다. 박지성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안정환 선수의 골든골 때 저 역시 그 누구보다도 환호했어요. 그런데 그게 저한테 이런 혹독한 결과로 돌아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제 축구인생에서 가장 아쉬웠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어요. 돌이켜봐도 가장 아쉬운 순간이에요.” 박지성은 그렇게 삼베네데떼세 구단으로부터 계약 파기 통보를 받고 졸지에 공중에 붕 뜬 신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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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은 좌절을 겪은 뒤 3년 동안 축구를 포기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사진=부천FC)

박지성의 황당한 선수 등록 실패

박지성의 상처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 부모님 댁으로 걸려오는 수많은 지인들의 전화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지성이가 축구한다고 했지? 이번 월드컵 잘 봤어. 아들 하나 아주 잘 키웠네.” 부모님의 지인들은 국가대표 박지성의 플레이를 보고 그 박지성이 이 박지성인줄 알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럴 때마다 박지성은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이름이 박지성만 아니었어도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이탈리아로 날아가 여기저기 입단 테스트를 받기 시작했다. 비록 3부리그보다 더 낮은 지역 리그 팀이었지만 박지성을 필요로 하는 팀이 있었다. “우리는 한국과의 감정을 떠나 박지성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요.” 박지성은 곧바로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다. 이제 이 구단에서 이탈리아 축구협회에 신분증명서를 요청하고 FIFA를 통해 문서만 받으면 정식 선수로 이탈리아 무대에서 뛸 수 있었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이탈리아 구단으로 도착한 신분증명서가 박지성 본인의 것이 아니라 당시 아인트호벤에서 뛰고 있던 박지성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축구선수 박지성’이라고 하면 누구나 아인트호벤에서 뛰는 박지성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명이었던 박지성으로서는 어디에 하소연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박지성은 신분증명서를 발급받지 못해 선수등록에 실패했고 석 달 동안 함께 훈련만 하다 팀을 나와야 했다. 다시 여러 구단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파르마 구단 입단 테스트를 받으면서 실력 차이를 여실히 느꼈다. “18살 때 파르마의 20살 선수들하고 함께 훈련을 했는데 아무리 두 살 차이의 수준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라는 걸 그때 느꼈어요. 그때 좌절을 많이 했죠. 한계를 느끼고 귀국했어요.” 박지성은 한국 선수라는 이유로, 이름이 박지성이라는 이유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3년 동안 축구를 아예 접고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식당 서빙과 막노동을 했다. 다시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축구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면서부터 다시 축구에 대한 미련이 생기기 시작했다. 배운 게 축구밖에 없고 제대로 도전 한 번 못해본 박지성은 그렇게 다시 축구화를 신었다. 당시 내셔널리그 김포 할렐루야 이영무 감독이 그를 받아줬다. 그렇게 2006년 12월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한 그는 2007년 정식으로 선수 등록을 마쳤다. 하지만 김포 할렐루야에서도 이성길과 성호상 등 쟁쟁한 선배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한 채 또 다시 이곳에서도 6개월 만에 짐을 싸야 했다. 주변에서는 이름만 박지성이라면서 수군거리기도 했다. 비록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던 박지성은 좌절할 틈도 없이 곧장 아르헨티나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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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맨 오른쪽)은 이제 둔촌중학교 코치로 변신해 제2의 축구인생을 시작했다.

지도자로서 얻은 첫 직장, 하지만…

브라질에 있을 때부터 남미 소식을 접했던 그는 아르헨티나 4부리그에 한국인이 만든 데포르티보 꼬레아노라는 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박지성은 2007년 이 팀에서 간간히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맨유의 박지성과 무슨 관계냐”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박지성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동명이인’에 대해 설명했지만 장난기가 발동한 박지성은 “그 박지성이 우리 친형”이라면서 응수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동료들은 전화 연결 한 번만 해달라거나 사인을 받아달라고 하는 등 환호했다. 하지만 폐렴으로 고생을 했고 몸이 점점 좋지 않아져 더 이상 해외에 머물 수가 없었다. 한 시즌을 마친 뒤 2007년 가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현실을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더 이상 축구선수로서는 가능성이 없다는 걸요. 그전부터 재능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 자신을 억지로 끌고 여기까지 왔었거든요. 한국에 돌아와서 K3리그 부천을 택한 건 즐겁게 운동하면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지으려는 선택이었어요.” 박지성은 아르헨티나에서 돌아와 K3리그 부천FC 유니폼을 입게 됐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훈련 날을 빼고는 오로지 일에 매달렸다. 배운 기술이라고는 축구밖에 없던 박지성이 할 수 있는 건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족발집에서 일을 돕는 것뿐이었다. 훈련이 없는 날이면 하루에 많게는 16시간씩 족발을 손질하고 삶고 배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27세의 나이에 병역 문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됐다. 열정 하나로 14세 때 처음 축구를 시작한 박지성은 27세가 될 때까지 해외만 전전하다가 결국은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면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공익근무를 하면서 이후 잠시 K3리그 천안FC와 서울 마르티스에서 뛰었지만 이미 그는 선수로서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다.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이때 중대한 선택을 하게 됐다. ‘그래. 선수로서는 실패했지만 지도자에 도전해 보자.’ 중학교 시절 늦은 나이에 축구를 시작한 뒤 자신을 친절히 챙겨주던 감독을 늘 떠올렸던 박지성은 공익근무를 하면서 3급 지도자 자격증을 땄고 자신을 너무나도 아껴주는 여자친구와 결혼에도 골인했다.

하지만 공익근무를 마친 그는 지도자로서 갈 곳이 없었다.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누구의 소개를 받고 직장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엘리트 체육이 아닌 지방의 한 축구 아카데미에 취직했다. 박지성은 비록 선수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다양한 경험을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 거란 사실에 큰 기대를 품었다. 이때 그의 소중한 아기도 태어났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이 축구 아카데미에서 1년 반 동안 단 두 달치 월급만을 받았을 뿐 나머지 월급 지급을 미뤘기 때문이다. 차라리 월급을 주지 못하겠다고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미련 없이 몇 달치 월급을 포기하고 나왔을 텐데 아카데미 측에서 “한달만 기다려달라”면서 미루는 바람에 1년 반을 남아 있어야 했다. “아내는 육아휴직 상태였고 우리 세 식구가 먹고 살아야 하는데 수입이 거의 없었어요. 돈은 들어가는데 갚을 능력은 없고…. 신용불량자 바로 직전까지 신용 등급이 떨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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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중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하고 있는 박지성이 아이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박지성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축구계에서 산다는 것

결국 그는 지난해 9월 약 3천만 원에 가까운 돈을 받지 못하고 이곳에서 나왔다. 그리고 가을을 넘겨 겨울까지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그에게 올 봄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둔촌중학교 축구부에서 코치를 구한다는 소식이었다. 지난해 월급 체불로 힘들어 하면서도 B급 지도자 자격증을 딴 게 도움이 됐다. 박지성은 당장 달려가 면접을 본 뒤 합격 통보를 받았다. 지금 그는 둔촌중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워낙 1년 반 동안 수입 없이 진 빚이 많아서 지금도 여파가 남아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직장을 구해 돈을 갚을 수 있게 돼 만족합니다.” 박지성은 지금이 너무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이 된다. “어떻게 보면 이곳이 지도자로서의 첫 출발이잖아요. 아이들의 중요한 시기를 책임지고 있는데 ‘오늘은 아이들한테 내가 무엇을 줬나. 아이들한테 유익한 시간을 제공했나’ 늘 이런 고민에 빠져 있어요. 제가 비록 선수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제가 알고 있는 걸 어떻게 하면 아이들한테 잘 설명하고 전달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해요. 제가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요.”

박지성 코치는 아이들에게도 늘 호기심의 대상이다. ‘캡틴박’과 이름이 같기 때문이다. 요새도 함께 훈련을 하다 가끔 박지성 코치가 실수라도 하면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이렇게 놀린다. “박지성이 그런 실수도 해요?” 가끔 주변을 맴돌며 ‘캡틴박’을 상징하는 응원가 “위숭빠레”를 흥얼거리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늘 ‘캡틴박’과 비교되는 게 스트레스였던 박지성은 이제 이 그 사실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위대한 선수와 같은 이름이어서 늘 부담되고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박지성 선수 덕분에 저도 덕을 많이 보고 있어요. 이렇게 보잘 것 없이 선수 생활을 마친 저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시는 분도 계셔서 제가 추억도 만들 수 있잖아요.”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지도자로서의 미래를 그렸다. “좋은 지도자가 됐으면 좋겠는데 저에게 그런 재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려운 순간이 많았는데도 이렇게 축구의 끈을 놓지 않고 운동장에 있는 게 즐겁고 아직도 열정은 넘치거든요. 이 열정이 식지 않아서 아이들을 계속 지도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게 앞으로 제 축구 인생의 목표입니다. 박지성이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에 누를 끼치고 싶진 않아요.”

사람들에게 ‘축구인 박지성’은 단 한 명일 것이다. ‘캡틴박’에 비하면 한참 못미치는 또 다른 ‘축구인 박지성’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동명이인’ 박지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참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해외 각지를 돌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 박지성의 열정 만큼은 ‘캡틴박’ 못지 않다. 지금껏 힘든 시기만을 겪었던 둔촌중학교 박지성 코치의 앞날이 밝았으면 좋겠다. 한국 축구에서 박지성이라는 이름은 클래스가 남다른 이름이고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이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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