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소에 박지성에 대한 칼럼을 잘 쓰지 않으려고 했다. 박지성과 관련해 워낙 많은 칼럼이 쏟아지고 있고 내가 말 안 해도 박지성이 대단한 걸 모르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박지성이 은퇴할 때나 한 번 그의 맹활약을 뒤돌아 보는 칼럼을 쓰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가 현역에서 물러나는 순간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도 빨리 그의 은퇴를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고작 이 정도 짧은 칼럼 한 편으로 감히 박지성의 축구 인생을 정리하는 건 실례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한국 축구의 전설이 된 박지성에 대한 존경심과 경이로움을 담아 그가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순간을 꼽아보려 한다.

2009년 2월 11일 대한민국-이란

2009년 2월 한국은 2010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 부담스러운 이란 원정을 앞두고 있었다. 1974년 이후 이란 원정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10만 명에 달하는 이란 홈 관중의 응원 열기 또한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여기에 이란의 에이스 자바드 네쿠남은 경기 전부터 박지성을 겨냥하며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경험이 매우 많은 박지성이라도 아자디 스타디움의 분위기는 생소할 것”이라면서 “10만 명을 상대로 경기한 경험이 없는 한국 팀에 아자디 스타디움은 지옥이 될 것이다. 한국은 대기실에서 나오자마자 분위기에 압도당할 것이다. 진정한 외로움이 무엇인지 맛보게 될 것”이라고 거침없이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실제로 경기가 시작되자 네쿠남은 후반 13분 선제골을 뽑아내며 달아났다.

한국으로서는 답답한 경기였다. 주도권을 이란에 내준 채 끌려 다녔다. 아자디 스타디움에 쩌렁쩌렁 울리는 10만 이란 관중의 응원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하지만 후반 35분 박지성의 한 방이 마침내 터졌다. 기성용이 강하게 찬 프리킥이 골키퍼 손을 맞고 흐르자 박지성이 빠르게 쇄도하며 다이빙 헤딩 슛으로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낸 것이었다. 이 순간 기세를 올리는 10만 이란 관중은 쥐죽은 듯 조용해 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부담스러웠던 이란 원정에서 박지성의 천금 같은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거둔 허정무호는 이 경기를 계기로 분위기 반전에 성공해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박지성은 경기가 끝난 뒤 “이란 관중의 응원이 조금 시끄러웠지만 특별한 것은 느끼지 못했다”며 네쿠남의 도발에 멋지게 응수했다.

2012년 2월 24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아약스

2005년 10월 19일 박지성은 축구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릴과의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경기에서 후반 35분 라이언 긱스와 교체 투입된 박지성이 주장 완장을 찬 것이었다. 아시아 선수가 맨유의 주장 완장을 찬 건 대단한 이슈였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긱스가 다른 고참 선수에게 전해주라고 주장 완장을 박지성에게 건넸는데 이야기를 전달받지 못한 박지성이 자신에게 완장을 주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7년 뒤 이번에는 해프닝이 아니라 박지성이 진짜 맨유의 주장이 돼 당당하게 그라운드를 누비게 됐다. 2011/2012 유로파리그 32강 아약스와의 2차전 홈 경기를 앞두고 주장 네마냐 비디치가 부상을 당했고 파트리스 에브라와 라이언 긱스, 웨인 루니 등도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자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에게 주장을 맡을 것을 지시했다.

올드 트래포드에 들어서는 선수들 가장 맨 앞에는 노란 주장 완장을 찬 박지성이 있었다.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 선수가 맨유 주장 완장을 차고 선발 출전한 건 박지성이 처음이었다. 이는 단순히 누군가 대신 주장 완장을 찼다는 걸 떠나 엄청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박지성이 맨유의 주장 완장을 차고 그라운드를 누비자 아시아 전역에서 이를 조명하기도 했다. 태국과 홍콩,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 다양한 국가의 언론에서 속보 형식으로 이를 자국에 전달한 것이다. 아마도 당분간 맨유에서 아시아인이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장에 들어서는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이날 주장 완장을 찬 박지성의 모습은 중요한 경기에서 귀중한 골을 넣은 것 이상으로 큰 의미를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 6월 12일 대한민국-그리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은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목표를 세웠고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첫 경기 그리스전에서의 승리가 필요했다. 이날 경기에서 이정수의 첫 골로 앞서나간 한국은 후반 들어 박지성이 승부에 쐐기를 박는 추가골까지 뽑아냈다. 후반 8분 박지성은 그리스 수비수들이 후방에서 공을 돌리자 이를 가로채 단독 드리블에 이은 슈팅으로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수비수들이 박지성을 뒤쫓았지만 도저히 박지성의 드리블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한국으로서도 의미 있는 골이었지만 2002년과 2006년에 이어 2010년 월드컵에서도 득점포를 가동하며 아시아인 최초의 월드컵 3개 대회 연속골을 기록한 박지성에게도 엄청난 의미가 있는 골이었다.

한국은 이후 아르헨티나에 패하고 나이지리아와 비겼지만 골득실에 따라 그토록 원하던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겁 없던 신예는 2010년 팀의 주장이 돼 후배들을 이끌고 또 한 번의 신화를 써 내려 갔다. 이 경기를 녹화 중계한 북한 해설자 역시 “이렇게 빠른 속도로 공을 몰고 가서 문지기까지 빼돌리고 골을 넣는 건 불가능하다”고 극찬했고 일본 언론 또한 “박지성은 아시아의 자랑”이라면서 박지성을 칭찬했다. 박지성은 단순히 한국의 영웅이 아니라 아시아 모두가 주목하는 ‘아시아의 영웅’이었다. 또한 한 영국 언론에서는 남아공월드컵이 끝난 뒤 프리미어리그 선수 중 월드컵에서 활약한 선수 10명을 선정했는데 여기에도 당당히 박지성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다.

2008년 4월 30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바르셀로나

2007/2008 UEFA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원정경기에서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를 꽁꽁 묶어 팀의 0-0 무승부를 이끌어 낸 박지성은 2차전 홈 경기에서도 메시를 측면에서 완벽하게 봉쇄했다. 이날 90분 동안 측면을 지배한 박지성은 팀의 1-0 승리에 기여하며 결승 진출의 공신이 됐다. 특히 바르셀로나는 전반 내내 박지성 쪽 공략에 실패하자 아예 후반전에는 박지성이 있는 측면을 포기한 채 경기를 펼쳐야 할 정도였다. 이날 90분 풀타임을 소화한 박지성은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부터 네 경기 연속 풀타임 활약하며 퍼거슨 감독으로부터 확실한 신임을 받고 있다는 걸 몸소 입증했다. ‘수비형 윙어’라는 새로운 수식어도 박지성에게 따라 붙었다. 웨인 루니가 부상으로 빠진 경기에서 거둔 의미 있는 승리였다.

비록 박지성은 이날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결승골을 기록한 폴 스콜스와 더불어 양 팀 통틀어 가장 높은 평점을 받으며 역사에 남을 경기를 펼쳤다. <맨체스터 이브닝뉴스>는 “박지성이 상식을 넘어선 체력을 선보였다. 단지 열심히 뛰는 것 이상의 맹활약이었다”고 극찬하며 그를 ‘경기 최우수선수(Man of Match)’에 선정하기도 했다. 이날 박지성은 90분 동안 11.962km를 뛰며 양 팀 선수 중 단영 돋보이는 활동량을 선보였다. <가디언> 역시 “박지성이 바르셀로나 선수들을 조직력을 와해시켰다”며 박지성의 활약을 집중 조명했다. ‘천하의 메시’도 이날 박지성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팀의 패배를 씁쓸히 지켜봐야 했고 박지성은 수비뿐 아니라 공격에서도 위협적인 패스를 몇 차례 선보이며 수비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는 점 또한 입증했다.

2010년 11월 7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울버햄튼

늘 위기설과 방출설에 시달리던 박지성은 2010년 11월에도 마찬가지로 부진하다는 일부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 리그 1위 첼시를 바짝 추격하던 맨유로서는 웨인 루니와 디미타르 베르바토프가 부상으로 빠진 상황에서 울버햄튼을 상대해야 했다. 박지성에게나 맨유에나 쉽지 않은 승부였다. 또한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오언 하그리브스가 부상을 당해 그라운드를 빠져 나가는 악재까지 겹치고 말았다. 측면에 배치된 박지성은 하그리브스의 부상으로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바꿔 경기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치차리토를 비롯해 가브리엘 오베르탕, 베베 등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의 공격력은 여전히 아쉬웠다. 박지성이 공격을 풀어가는 역할은 물론 직접 해결사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반 종료 직전 박지성의 발끝에서 첫골이 터졌다. 대런 플레처의 스루패스를 이어받은 박지성이 침착한 오른발 슈팅으로 선취골을 뽑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맨유는 한 골을 내주면서 동점을 허용했고 시간은 후반 추가 시간까지 그대로 흐르고 말았다. 1-1 무승부가 유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때 또 다시 박지성이 놀라운 골을 뽑아냈다. 상대 페널티 박스 왼쪽에서 정면으로 드리블 돌파를 하며 수비수 세 명을 제친 박지성이 날린 왼발 땅볼 슈팅이 울버햄튼 골키퍼와 골대 사이의 빈곳으로 절묘하게 굴러 들어간 것이다. 이날 두 골을 혼자 뽑아낸 박지성의 활약 덕분에 맨유는 극적으로 2-1 승리를 따낼 수 있었고 늘 박지성을 따라 다니던 위기설과 방출설도 쏙 들어갔다. 두 번째 골이 들어가자 울버햄튼 울리에 맥카시 감독은 화를 참지 못하며 옆에 있던 물통을 걷어차기도 했다.

2010년 3월 11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AC밀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니폼을 입고 2009/2010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에 나선 박지성의 상대는 AC밀란이었다. 당시 원정 1차전을 앞두고 맨유는 라이언 긱스와 네마냐 비디치가 부상을 당해 전력 누수가 적지 않은 상황이었고 AC밀란은 중원에 안드레아 피를로와 데이비드 베컴, 암브로시니 등을 포진시키며 무게감에서 맨유를 압도했다. 하지만 이날 단연 돋보인 선수는 박지성이었다. 중원의 박지성은 상대 공격의 선봉장인 피를로를 완벽히 차단하며 공격 루트를 끊어 놓았다. 마치 화장실까지도 따라갈 기세였다. 시종일관 피를로를 압박한 박지성이 이날 뛴 거리는 무려 12.113km였다. 양 팀 통틀어 두 번째로 많이 뛴 플레처(11.473km)와 비교해도 엄청난 차이가 나는 활동량이었다. 이날 맨유는 적지에서 귀중한 3-2 역전승을 챙겼다.

안방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박지성은 빛났다. 이날 역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을 중앙에 배치해 피를로를 막는 변칙 작전을 지시했고 이는 그대로 적중했다. 피를로는 이날도 박지성에 의해 완벽히 지워지고 말았고 박지성은 한 골을 뽑아내며 팀의 4-0 승리에 힘을 보탰다. 경기가 끝난 뒤 퍼거슨 감독은 “우리는 밀란에서 뛰어난 선수인 피를로에게 대적할 수 있는 선수가 필요했는데 박지성이 희생적이었고 지능적으로 그를 막아줬다”고 극찬했다. 이후 피를로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박지성에 대한 불만 섞인 칭찬을 이렇게 늘어 놓기도 했다.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으로 하여금 나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게 했다. 박지성은 한국 축구 사상 최초의 핵과 같은 선수다. 그는 유명한 선수였지만 경비견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2010년 5월 24일 대한민국-일본

2010년 5월 24일 일본은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을 상대로 출정식을 겸한 평가전을 치렀다. 하지만 일본의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선수가 있었다. 바로 박지성이었다. 전반 6분 만에 하프라인 근처에서부터 일본 선수와의 몸싸움을 이겨내며 드리블 돌파에 성공한 박지성은 반박자 빠른 오른발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순간 5만여 명의 일본 관중은 박지성의 믿기지 않는 골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왜소한 박지성이 밀고 잡아 당기는 일본 수비수들의 방해에도 꿋꿋이 골문으로 돌진해 꽂아 넣은 슈팅은 완벽한 그림이었다. 일본 수비수들은 박지성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야심차게 월드컵을 준비한 일본으로서는 할 말이 없는 실점이었다.

골도 골이지만 더 통쾌한 건 골 세리머니였다. 침묵에 빠진 일본 관중을 쓱 쳐다보며 무표정하게 뛰어가는 박지성의 세리머니에 축구팬들은 전율을 느꼈다. ‘뭐 이쯤이야. 일본은 아직 우리한테 안돼’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침묵에 빠진 일본 관중과 이들을 배경으로 조깅하듯 뛰어가는 박지성의 모습을 묘하게 오버랩됐다. 그 어떤 준비된 화려한 세리머니보다도 더한 메시지와 통쾌함을 선사한 이 세리머니는 지금도 많은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성대한 출정식을 준비한 일본의 밥상을 뒤엎어 버린 멋진 골과 골보다도 더 멋진 세리머니였다.

2011년 4월 13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첼시

2010/2011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첼시와의 원정경기에서 부상 복귀 후 오랜 만에 풀타임을 소화하며 팀의 1-0 승리를 이끈 박지성은 2차전을 앞두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큰 경기에 나서면 더 강해진다”며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2차전에서 이 말에 꼭 들어 맞는 활약을 펼쳤다. 전반 43분 치차리토의 골로 앞서간 맨유는 후반 32분 디디에르 드록바에게 한 골을 허용하며 동점 상황을 맞게 됐다. 한 골만 더 내줄 경우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첼시에 4강 진출을 내주게 되는 위기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때 박지성의 벼락 같은 골이 터졌다. 페널티 박스 왼편에서 라이언 긱스의 패스를 받은 박지성은 침착하게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 한 뒤 왼발로 강한 슈팅을 날렸고 이 공은 첼시 골키퍼 체흐를 뚫고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첼시의 추격 의지를 완벽히 꺾는 귀중한 결승골이었다. 이날 맨유는 박지성의 결승골 덕분에 2-1 승리를 거두고 짜릿하게 4강행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날 전반 경기 도중 상대 수비수와 충돌해 눈 부위가 찢어지며 피를 흘리기도 했던 박지성은 부상 투혼을 선보이며 텔레비전을 통해 경기를 지켜보던 많은 고국 팬들에게 찡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퍼거슨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이번에도 박지성은 역시 빅매치 골잡이임을 스스로 재입증했다. 환상적인 결정력이었다.” ‘빅매치의 사나이’ 박지성의 왼발이 빛난 명승부였다. 이날 올드 트래포드의 영웅은 단연 박지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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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은 AC밀란과 디다의 무실점 기록을 깬 주인공이기도 하다. (사진=PSV에인트호벤 홈페이지)

2004년 5월 5일 PSV에인트호벤-AC밀란

2004/2005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 원정경기에서 PSV에인트호벤은 AC밀란에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안드리 세브첸코와 욘 달 토마손에게 골을 허용하며 0-2로 무너진 것이었다. 홈에서 열리는 2차전에서 부담스러운 승부를 펼쳐야 했다. 당시 AC밀란에는 세브첸코를 비롯해 디다, 말디니, 카푸, 카카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즐비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 7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며 무결점 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2004년 5월 5일 AC밀란과의 2차전 홈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박지성이 일을 냈다. 전반 9분 AC밀란 페널티박스에서 헤셀링크와 패스를 주고 받은 박지성이 왼발 슛으로 철옹성 같던 AC밀란 골문을 뚫은 것이다.

박지성의 골로 에인트호벤은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고 AC밀란의 무실점 행진도 여기에서 멈췄다. 디다의 챔피언스리그 640분 연속 무실점 행진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물론이다. 비록 이후 1-3으로 패해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에인트호벤은 결승 진출에 실패했지만 박지성은 한국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32강 이상 본선 무대에서 첫 골을 기록한 선수로 역사에 남게 됐다. 경기가 끝난 뒤 UEFA 공식 웹사이트는 “박지성이 에인트호벤을 간발의 차까지 끌어 올렸다”고 했고 <로이터 통신>도 “활기 넘치는 한국인 공격수 박지성이 에인트호벤에 힘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박지성의 활약은 그가 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가 됐다.

2006년 6월 19일 대한민국-프랑스

2006년 독일월드컵 G조 조별예선 2차전 프랑스와의 경기. 전반 초반부터 한국은 프랑스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전반 9분 만에 첫 골을 내주고 말았다. 실뱅 윌토르의 빗맞은 슛이 김남일을 맞고 굴절되자 티에리 앙리가 이를 침착하게 차 넣은 것이었다. 한국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프랑스의 공격에 당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한국은 더 이상 골을 내주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일방적인 열세에 몰렸고 후반을 맞았지만 이렇다 할 위협적인 장면도 만들지 못했다. 그나마 박지성이 상대 골문 앞에서 영리하게 파울을 유도해 몇 차례 기회를 잡은 게 전부였다. 한국으로서는 프랑스가 무척이나 버거운 상대였다. 그렇게 한국이 프랑스에 0-1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그런데 후반 35분 박지성이 또 한 번 해결사로 나섰다. 설기현이 오른쪽 측면을 돌파해 올린 공을 조재진이 헤딩으로 떨궈주자 문전 쇄도하던 박지성이 공을 툭 건드리며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낸 것이었다. ‘강호’ 프랑스를 상대로 거둔 귀중한 승점 1점이었다. 다 이긴 경기를 놓친 프랑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박지성은 이날 동점골은 물론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는 활발한 플레이를 펼치며 ‘경기 최우수선수(Man of Match)’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직접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득점포를 가동했던 박지성은 이 골로 프랑스를 상대로 두 경기 연속골을 기록하는 등 큰 경기에 강한 진가를 다시 한 번 입증했고 UEFA는 이날 경기에 대해 “박지성이 방탕한 프랑스를 응징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2002년 6월 14일 대한민국-포르투갈

온 국민이 16강 진출을 염원하던 2002년 6월 박지성이 마침내 그 꿈을 현실로 실현시켰다. 포르투갈과의 2002년 한일월드컵 D조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를 앞둔 한국은 1승 1무를 기록하고 있어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진출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상대는 루이스 피구와 루이 코스타 등이 포진한 ‘유럽의 강호’ 포르투갈이었다. 쉽지 않은 상대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0-0으로 팽팽히 맞선 후반 25분 한국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명장면이 바로 박지성의 발 끝에서 이뤄졌다. 이영표가 왼쪽에서 올린 크로스를 박지성이 페널티지역 오른쪽에서 가슴으로 받아 수비수를 제친 뒤 왼발 강슛으로 연결했고 이 공은 그대로 포르투갈 골문을 갈랐다. 유럽 정상의 포르투갈 선수들이 박지성의 페인트 모션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장면은 무척이나 통쾌했다.

‘천하의 포르투갈’이 월드컵 16강에 한 번도 오르지 못했던 한국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박지성이 골을 넣은 뒤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품에 안기는 골 세리머니 모습 또한 지금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한국은 박지성의 이 환상적인 결승골에 힘입어 1-0으로 포르투갈을 제압하고 2승 1무로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했고 이는 월드컵 4강 신화의 발판이 됐다. 이제 1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머리 속에 생생히 자리 잡은 이 골 장면은 한국 축구가 계속되는 한 앞으로 더 오랜 시간이 흘러도 또렷이 기억될 것이다. 박지성이 있기에 월드컵 사상 첫 16강 진출이 있었고 4강 신화도 있었다. 그는 2002년 6월 대한민국을 뜨겁게 만들었던 우리의 영웅이었다.

한국 축구의 영웅이 그라운드를 떠난다. 그 어떤 수려한 말로도 그에 대한 고마움을 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도 글로는 다 전할 수가 없다. 그가 있어 너무나도 행복했다. 비록 그는 이제 그라운드를 떠나지만 우리 마음 속에서 박지성은 언제나 최고의 축구 영웅, 우리의 ‘캡틴박’으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를 울리고 웃겼던 ‘영원한 주장’ 박지성이여, 당신과 함께 이 시대를 살았다는 걸 평생 감사하며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