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억 명이 살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축구 챔피언을 가리는 대회에서 한국 클럽이 16강 맞대결을 펼쳤다. 그것도 K리그에서 가장 강하다는 전북과 포항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 두 팀 중 한 팀은 반드시 떨어져야 한다. 동아시아에 걸린 8강 티켓 넉 장 중 이미 한 장은 K리그 팀에 확정됐지만 아직 주인은 모른다. 더군다나 이 맞대결에서 살아남은 팀은 현재 아시아 최강이라는 광저우 헝다와 8강에서 격돌할 것이 유력하다. 아시아 축구계 전체가 전북-포항전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하지만 바로 어제(6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전북과 포항의 경기는 국내에서 단 한 개의 채널도 생중계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이야기다. 중요한 순간마다 방송사들이 우리나라 축구를 외면하고 있다. 여러 차례 비슷한 이야기를 칼럼을 통해 해오고 있지만 그래도 바뀌는 게 별로 없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이제 이런 현상이 축구팬들에게도 점점 익숙해 지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졌을 때 축구계 전체가 분노하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한다. 그게 더 무서운 거다. 어느 순간 이런 푸대접이 당연한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텔레비전에서 K리그와 챔피언스리그가 사라져도 목소리를 내는 축구팬들이 없어지고 말 것이고 으레 축구는 중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참 화가 나는 현실이다. 어제 열린 경기장에 국내 방송사 카메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현장에는 국내 방송사 카메라가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이 화면은 그대로 외국 중계 방송사로 전달됐을 뿐 우리나라 채널을 통해서는 전파를 타지 못했다. 이 시간 스포츠 전문 채널을 자처하는 방송사에서는 다른 종목의 똑같은 경기를 중복해 보여주고 있었다. 전주에서 열리는 경기를 우리나라 방송사가 찍고 있는데 이걸 저 멀리 중국이나 홍콩 채널을 통해 화질도 좋지 않고 버퍼링도 심한 인터넷으로 봐야하는 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아랍어를 비롯해 중국어와 영어, 일본어까지도 능통해야 하는 게 바로 K리그 팬들의 자격이 되고야 말았고 여기에 해외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야 하는 검색 능력도 이제는 필수가 됐다.

이 경기는 개그콘서트 엔딩 음악이 울려 퍼지고 이제 곧 월요일이라는 짜증이 밀려오는 건 비교도 되지 않는 황금 연휴 끝자락인 자정이 넘어서야 국내 방송사들이 녹화 방송을 했다. 더군다나 한 방송사는 녹화 방송을 하면서 전북 이재성이 선취골을 넣는 순간 자막으로 친절하게 경기 결과를 ‘스포일러’하기도 했다. 다들 ‘기사를 통해서’ 접했다시피 이 경기는 전북 이재성이 먼저 골을 넣었지만 이후 포항이 손준호와 고무열의 두 골에 힘입어 짜릿하게 역전승을 거뒀다. 그런데 방송사에서는 녹화 방송 보는 것도 서러운데 방송 도중 뒤집힌 경기 결과까지 안내해 줬으니 이 얼마나 화나는 일인가. 스포츠만큼 결과를 알고 보면 재미없고 지루한 것도 없지 않은가. 기본적으로 축구팬에 대한 배려가 눈꼽 만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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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 지난 2012년 전북과 부리람의 경기가 국내에 중계되지 않아 전북 팬들은 태국 현지 팬들이 텔레비전 중계를 보는 모습을 인터넷을 통해 지켜봐야 했다. 이게 바로 ‘흔한 아챔 우승국’의 현실이다.>

중계 이야기가 나오면 늘 나오는 반론이 있다. 시청률 안 나오고 돈 안 되는 축구 경기를 방송사가 중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방송사가 자선 단체도 아니고 축구를 틀어줄 의무도 없단다. 하지만 축구팬도 한 명의 시청자로서 당연히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또한 과거 한 스포츠 전문 채널을 자처하는 방송사의 고위층은 “프로야구 발전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적자를 감수하고 퓨처스리그(프로야구 2군리그)를 중계한다”고 밝힌 바 있다. 방송사의 중계를 담당하는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돈이 안 되고 시청률이 적게 나온다고 해 텔레비전에서 중계가 사라져야 한다는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오늘도 이 칼럼에 지긋지긋하게 ‘게이리그, 시청률, 광고 수입’ 따위로 축구팬들의 요구를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면 방송사 고위층의 저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길 바란다.

이건 결국 의지의 문제다. 요즘 웬만한 가정에서는 채널이 100개도 넘게 나온다. 중계권을 보유한 방송사에서 운영하는 채널도 상당하다. 최근 몇 차례 이들은 이러한 자사 채널을 통해 실제로 챔피언스리그를 중계한 적도 있다. 하지만 어제는 이 엄청난 채널을 다 돌려도 국내 중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방식으로건 생중계를 할 수 있었지만 결국 방송사들은 이를 외면했다. 또한 전북-포항전 중계를 바라는 이들이 단순히 소수에 불과할까. 어제 해당 경기가 열리는 시간 한 포털 사이트 검색 순위 1위는 ‘전북 포항 중계’가 차지하고 있었다.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무려 2만여 명에 육박했다. 하다못해 2군리그까지 중계하면서 대승적 차원과 적자 감수를 운운하는 이들이 이 정도 관심을 끄는 경기를 전부 외면했다는 건 당연히 문제가 있는 일 아닐까. 축구팬들이 바라는 게 대단하고 거창한 일인가.

우리나라 땅에서 자국 팀끼리 붙는 아시아 축구대전을 중국에서 중계해 주고 축구팬들이 중국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는 게 상식적인 일일까. 호주는 크리켓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지만 프로축구 A리그도 꾸준히 중계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 역시 축구가 최고의 스포츠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다른 종목과 더불어 골고루 중계된다. 시청률 따지고 광고 수익 따지면 A리그나 MLS, J리그도 당연히 그들 방송국에서 외면해야 정상 아닐까. 왜 우리만 못하는 건가. 심지어 프로야구 시범경기 때문에 한국 프로농구 플레이오프가 밀리는 일이 벌어진 것도 불과 얼마 전이다. 우리나라 빼고 어느 나라가 과연 인기 1위랍시고 한 종목만 주구장창 중계하나. 나는 축구 칼럼니스트지만 비중이 적은 K리그 경기와 프로농구의 중요한 승부가 동시에 펼쳐진다면 당연히 프로농구 중계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단순히 축구 중계가 외면을 당해서가 아니라 상식적인 선에서 중요한 경기가 전파를 타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 어제 전북-포항전을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물론 방송사보다 더 한심한 건 프로축구연맹이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꾸준히 벌어지고 있는데 연맹은 도무지 뭘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단순히 AFC가 주관하는 이번 경기 문제를 떠나 매번 K리그 팀들이 나서는 경기가 이렇게 방송사에서 외면 받고 있는데 연맹은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나는 연봉 공개 찬성 입장을 과거에 피력한 적이 있지만 연봉까지도 공개하면서 선수들의 희생을 강조할 거면 그만큼 연맹도 선수들이 신명나게 뛸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줘야 한다. 하지만 연맹은 수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중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래 놓고 또 한 시즌이 끝나면 접근성이 부족한 몇몇 채널을 통해 K리그 중계율이 높아졌다고 자화자찬할 건가. 사정을 하건 K리그 중계 안 하면 A매치 중계도 없다고 강경책을 세우건 뭐라도 좀 해야 한다. 이제 중계 없는 게 당연한 리그가 돼 가고 있는 게 정말로 무섭다. 이렇게 가다가는 이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팬들마저 줄어들지 모른다.

아마 다음 달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눈물을 흘리며 축구에 열광하는 이들이 넘쳐날 것이다. 벌써부터 방송사들은 자사의 월드컵 중계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어제 나는 화가 나는 마음에 채널을 돌리다가 구역질나는 장면을 봤다. 전북과 포항이 맞붙는 이 중요한 승부를 외면한 방송사에서 하필이면 경기가 열리는 시간에 ‘월드컵은 XXX과 함께’라는 아주 거창한 광고를 내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들까지도 자사의 캐스터와 해설위원 띄우기를 벌써부터 시작했다. 우리나라 축구 클럽의 경기는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월드컵 본선 무대에 30년 넘게 서고 있는 게 기적이고 여기에서 16강 진출까지도 바라니 이게 얼마나 이기적인 기대인가. 오늘 역시도 FC서울과 가와사키 프론탈레의 16강전 경기가 단 한 개의 국내 채널에서도 중계되지 않는다. 어제는 중국 방송을 통해 중국어를 공부했으니 오늘은 일본 방송으로 일본어 공부에 매진해 볼 생각이다. 그게 바로 K리그 팬이 되기 위한 자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