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 전 명지대 감독은 박지성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다. 안정환과 우성용, 이민성, 하석주 등 무려 60여 명의 국가대표 역시 김희태 감독의 지도를 거쳤다. 하지만 한국 축구의 걸출한 스타를 이토록 많이 키워낸 김희태 감독은 지금 번듯한 프로팀이나 대표팀 지도자가 아니라 경기도 포천시 산골짜기에 있다. 선수 배출 경력만으로도 프로팀이나 대표팀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도 있는 이 ‘한국 축구의 대부’는 왜 메이저 무대에 나오지 않고 산골짜기에 있을까. 오늘은 김희태 감독과 그의 축구센터, 그리고 K3 챌린저스리그 FC의정부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그의 야심찬 ‘축구 왕국’ 건설에 대한 꿈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축구센터 건립의 꿈

김희태 감독의 지도자 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축구 명가’ 대우 로얄즈 트레이너를 시작으로 아주대학교 코치와 대우 로얄즈 코치를 역임한 그는 아주대 감독을 맡으며 감독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대우 로얄즈 감독을 지내는 동안 정해원과 이태호, 김주성 등을 지도하기도 했다. 무려 25년 가까이 성인 선수들을 지도했다. 하지만 그는 늘 기본기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명색이 프로선수인데 볼 컨트롤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어린 선수들을 기본기부터 가르치고 싶다.’ 대우 로얄즈와 아주대학교 등 최고 수준의 팀을 맡아 왔지만 힘과 근성으로만 하는 축구는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그의 철학이었다. 그는 늘 기본기를 강조했다.

명지대학교 감독직을 그만둔 2002년 그에게 마침 기회가 왔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 안정환, 박지성과 함께 당시 손학규 경기도지사는 스승인 김희태 감독을 초청했다. 단순히 월드컵 4강 주역을 초대해 마련한 식사 자리였지만 김희태 감독은 도지사에게 당당히 제안했다. “경기 남부에는 용인축구센터가 있지만 경기 북부에는 그런 시설이 없습니다. 하나 만들어 주신다면 제가 운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손학규 도지사는 월드컵 열풍이 불고 있던 당시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죠. 한 번 추진해보죠.” 경기도에서 축구센터 건립 및 운영 자금을 대고 김희태 감독의 고향인 경기도 포천이 축구센터 부지를 제공하기로 합의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유소년 선수들의 기본기를 가르칠 수 있는 축구센터 건립을 눈앞에 두게 됐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다. “축구센터 건립 부지 후보가 몇 군데 있는데 들러 보시죠.” 포천시에서는 여러 축구센터 후보 부지를 김희태 감독에게 보여줬지만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햇빛도 들지 않는 변두리 땅만 다섯 군데나 보러 다녔다. 햇빛 잘 드는 넓은 부지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걸 상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더군다나 포천시는 이런 말을 했다. “지자체가 한 종목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도 상당한 부담입니다. 이런 부지가 아니면 제공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당시 포천시가 축구센터 건립 타당성 검토를 해보니 필요한 자금만 무려 230억 원에 이르렀다. 김희태 감독은 고향인 포천시에 지인들이 많고 축구계에서도 발이 무척 넓었지만 여기 저기 발품을 팔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지원이 힘들다”는 것이었다. 일생일대의 꿈이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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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 김희태 감독이 사재를 털어 마련한 김희태 축구센터의 모습. (사진=김희태 축구센터)>

사비를 털고 빚을 내 완성한 축구센터

여기에 김희태 감독은 사기꾼으로 내몰릴 상황이었다. 축구센터 건립 약속을 받고 하루라도 빨리 선수들이 나쁜 습관이 들기 전에 지도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김희태 감독은 이미 축구센터와 연계할 일동중학교 축구부를 창단해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포천시가 입장을 바꿔 버리니 졸지에 학부형과 아이들을 속인 죄인이 되고 만 것이다. 이때도 여기 저기 포천시 내에서 축구센터 건립에 적합한 땅을 보러 다니던 김희태 감독은 한 부지를 보고는 무릎을 쳤다. ‘여기다. 바로 여기가 축구센터로 가장 적합한 곳이다.’ 그는 포천시에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곧바로 모아두었던 35억 원의 재산을 모두 털고 35억 원의 은행 빚까지 내 70억 원을 들여 땅을 샀다. 주변에서는 모두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포천시와는 관계가 없는 개인 소유의 축구센터를 연 것이다. 그렇게 2002년 말 포천시 이동면 노곡리 산골 마을에 김희태 축구센터가 생겼다.

해발 300m의 산 중턱에 마련된 김희태 축구센터 준공식 당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을 비롯한 축구계 인사 600여 명은 이곳을 방문하고는 깜짝 놀랐다. 7만6700평방미터 부지에 들어선 천연 잔디 한 개면과 인조 잔디 한 개면, 170명 수용의 기숙사 시설 규모도 대단했지만 이 대단한 시설을 특정 단체의 후원 없이 자비로 마련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다. 김희태 감독은 이 시설을 마련한 뒤 이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여기는 공기가 참 좋아서 소주를 한 병밖에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도 세 병은 거뜬해. 그리고 이 나이에 프로팀 감독하면 항상 잘릴 걱정해야 하는데 여기는 내가 사장이니까 그럴 일도 없어 마음도 편해. 허허.” 이후 김희태 감독은 일동초등학교와 일동중학교를 비롯해 중·고등학교 팀 다섯 개를 창단해 김희태 축구센터 이름을 달고 출전하는 경기도 북부 지역 대회에서 꾸준한 성적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는 웃으며 말한다. “우리 유소년 지도자들은 성적이 안 나와도 안 잘라. 그런데도 우승을 해. 개인 능력을 향상시키면 우승은 보너스거든.”

그가 한창 축구센터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 동네 후배인 2008년 당시 포천시장이 새로운 부탁을 해왔다. “포천시에 두 개의 축구단체가 있는데 매일 싸우기만 합니다. 선배님께서 통합해 포천시축구협회를 이끌어 주셨으면 합니다.” 김희태 감독은 막걸리와 갈비, 군부대가 전부였던 포천시에 축구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입히기 시작했다. 곧바로 파벌 싸움 중이던 포천시 축구계 인사들을 만나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포천시축구협회를 만들었고 이를 매개로 포천시민축구단을 창단했다. 오합지졸이던 포천 축구가 대통합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김희태 감독은 포천시민축구단 창단 이후 축구센터 운영에만 전념하려고 했지만 시장은 또 다른 부탁을 해왔다. “선배님께서 K3리그에 참가하는 포천시민축구단 운영을 맡아주세요. 연봉은 최고 대우인 8천만 원까지 챙겨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연봉이 많다고 해도 최고의 프로팀에서만 활약했던 김희태 감독이 K3리그 지도자가 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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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 김희태 축구센터는 최근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협약을 맺고 유소년 선수 육성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사진=김희태 축구센터)>

선수 육성 시스템 완성에 대한 그의 고민

주변에서는 그를 만류하기 시작했다. “큰 물에서 놀던 양반이 거기에 있으면 모양 빠진다”는 게 이유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더 큰 무대에서 감독 노릇을 할 수도 있는데 왜 거기에서 고생하느냐는 이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김희태 감독의 큰 아들은 치과 의사가 됐고 둘째 아들은 서울대를 나와 스포츠 전문 법률가를 꿈꿀 정도로 성공해 이었다. 아들들 덕만 봐도 노후가 편할 텐데 사서 고생하는 모습이 답답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김희태 감독은 잠시 고민한 뒤 곧바로 포천시민구단의 제의를 수락한 뒤 곧바로 추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2008년 팀은 창단했지만 뛸 선수가 부족하자 자신이 데리고 있던 코치들 10여 명을 선수로 등록해 팀을 안정화시켰다. 감독과 코치는 물론 선수들까지 김희태 축구센터에서 다 제공한 것이었다. 그는 약속된 연봉 8천만 원도 자신의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포천시축구협회 예산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연봉을 모두 협회로 보냈다.

김희태 감독은 축구센터와 포천시민구단 운영에만 집중했고 포천시민구단이 안정화 되자 스스로 포천 구단 운영에서 물러나 축구센터에만 다시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희태 축구센터는 점점 그 위용을 갖춰 나갔다. 기숙사 시설에서 150여 명의 아이들이 축구에만 전념하게 됐고 외국인 코치를 비롯해 연령별 지도자들도 14명이나 갖췄다. 박지성과 안정환 등 스타들을 배출했다는 과거 ‘경력’ 하나 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그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한 어린 선수를 데려와 또 다시 조련하기 시작했고 이 어린 선수는 김희태 축구센터에서 무려 5년 동안 기본기를 익힌 뒤 해외로 나갔다. 그가 바로 현재 바르셀로나 유소년 팀에서 촉망받고 있는 이승우다. 일부에서는 이승우가 오로지 바르셀로나의 힘으로 커나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승우 역시 김희태 감독이 최초로 발굴한 선수였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이라고 박지성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어.”

하지만 그는 늘 한켠에 아쉬움이 있었다.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유소년 팀을 다섯 개나 구축했지만 그의 꿈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이 선수들이 성장해 뛸 성인 팀이 자체적으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게 항상 마음에 걸렸다. 남들은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할지 몰라도 진정한 ‘축구 왕국’을 완성하려는 김희태 감독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김희태 축구교실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기본기를 전수받은 선수들이 정작 경기 감각을 키워야 할 20세 전후의 나이에 뛸 곳이 없다는 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20세부터 22세 때에 몸에 균형이 잡히기 시작해. 이전에는 키는 커도 흔히 말해 뼈에 힘이 없지. 20대 초반에 어떻게 경기에 나서느냐에 따라 선수로서의 성공 유무가 갈리는 거야. 그런데 이 나이에 뛸 무대가 없다는 건 참 아쉬워. 대학교에 가면 4학년들이 있는데 1학년이 경기에 나설 수가 있나. 바로 프로팀에 간다고 하더라도 20살 짜리 애들이 경기에 나설 수가 있나.”

그가 FC의정부 감독직을 수락한 이유

막 성인 무대를 노크하는 선수들을 위한 팀 창단을 고민하고 있던 중 포천시 인근 의정부시로부터 솔깃한 제안이 왔다. “K3 챌린저스리그 성인팀 창단을 고민 중인데 김희태 감독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의정부시로 달려간 그는 팀 창단을 위한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단순히 K3 챌린저스리그 참가에 그치지 않고 향후 K리그 입성까지도 품고 있는 비전도 마음에 들었다. 김희태 감독은 의정부시민축구단 창단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유소년 선수들을 육성하는 김희태 축구센터의 연계 선상인 성인팀이 완성된 것이었다. 의정부시와 협약했지만 김희태 감독이 구단주 겸 감독으로 팀을 운영하기로 했고 김희태 축구센터 출신 선수들이 뛸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시민구단이 아닌 협동조합 형태를 꿈꾸고 있는 FC의정부는 지난해 말 그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이들은 또 다시 “김희태 감독이 아직도 비전도 없는 아마추어 무대에서 사서 고생한다”고 혀를 찼다.

김희태 감독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K3 챌린저스리그 참가를 준비했다. 단순히 성적을 위한 팀이었다면 다른 K3 챌린저스리그 팀들처럼 K리그 무대에서 활약했던 공익 근무 요원을 영입하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김희태 축구센터 출신 중 한 명을 FC의정부로 스카우트했고 실력은 있지만 프로 무대에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이들을 데리고 왔다. 인천유나이티드와 FC서울에서 방출된 어린 선수들이 주인공이었다. 여기에 매탄고와 금호고, 현풍고 등에서 프로 선수의 꿈을 키웠지만 결국 K리그의 지명을 받지 못한 어린 선수들도 팀에 합류했다. 그는 선수 선발에 철칙이 있었다. “20세부터 23세의 어린 선수들만 뽑는다. 24세 이상의 공인근무 요원은 실력이 좋다고 해도 안 뽑는다. 이들을 뽑으면 당장 성적은 낼 수 있지만 좋은 선수를 육성하는 차원은 아니다.” 그는 앞으로 김희태 축구센터 출신 중 실력 있는 이들을 FC의정부로 많이 데려와 유소년 시스템 구축을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생각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축구 왕국의 완성이다.

여기에 FC의정부가 계획한 대로 프로화까지 성공할 경우 그는 한국 축구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역사의 산증인이 된다. 지금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김희태 감독이기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김희태 감독은 FC의정부 창단 추진 단계에서 조력자로서의 임무만 다해도 됐지만 언제든 의정부시가 운영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걱정으로 결국 감독까지 맡게 됐다. 끝까지 이 일을 포기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FC의정부를 ‘미래의 팀’으로 만들 계획이다. “골을 먹고 지고 말고는 두 번째 문제지. 우리는 이기고 우승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선수를 성장시키는 게 먼저거든. 이기려고 옛날 축구하면 세계적인 선수는 못 만들어. 가능성은 있는데 다른 곳에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선수들을 데리고 한 번 도전해 볼 거고 여기에서 돋보이면 언제든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줄 거야. 사람들이 편하게 살지 왜 거기에서 고생하느냐고 하는데 이건 누군가 꼭 해야 하는 일이야. 우리 20세 선수들은 뛸 곳이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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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 김희태 감독은 한국 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꿀 선수 육성 시스템을 자비를 털어 마련했다. (사진=김희태 축구센터)>

점점 완성돼 가는 김희태 감독의 ‘축구 왕국’

김희태 감독은 국가대표를 60명 넘게 배출했고 프로선수를 200명 넘게 육성했다. 또한 현재 김희태 감독의 지도를 받은 제자 중 10명이 넘는 제자가 프로팀 지도자가 돼 있다. 그만큼 그는 지금껏 이룬 게 많았고 앞으로 한국 축구의 전설들 덕만 보고 살아도 충분한 지도자다. 여기에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들들까지 두고 있으니 아들 덕만 보고 살아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산골짜기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로 아이들과 뒹굴고 있다. 여전히 김희태 축구교실 설립 당시 대출금을 갚느라 허덕이고 있지만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이제 FC의정부라는 성인팀까지 창단해 ‘축구 왕국’을 건설한 그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여기에 “우리는 아직 어린 팀이라 완벽하지 않고 K3 챌린저스리그의 수준 또한 높아 성적은 기대하지 않는다”던 FC의정부는 현재 2승 3무를 기록하며 무패로 K3 챌린저스리그 B조에서 3위에 올라 있다. 김희태 감독의 ‘축구 왕국’ 건설 꿈은 점점 현실이 돼 가고 있고 최근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협약까지 맺어 야심찬 계획을 이어나가고 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그에게 후대 축구인들에게 어떤 지도자로 기억되고 싶은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자 김희태 감독은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답했다. “그런 거 기억 안 해줘도 돼. 그런 거 바라보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나는 늘 좋은 팀에만 있었거든. 아주대 시절부터 대우까지 25년 동안 감독 생활하면서 우승을 수도 없이 했어. 28전 무패를 한 적도 있어. 그렇다고 지금 사람들이 ‘김희태가 우승 많이 시켰으니 대단한 감독’이라고 해? 그런 말 안 하거든. 우승은 잠시 기분은 좋을 수 있지만 1년 지나고 나면 그뿐이야. 나는 어린 선수들을 보면서 ‘이거 하나만 가르치면 더 좋은 선수가 되는데’라고 아쉬워할 때가 많아. 다른 감독들이 못하는 걸 내가 하고 싶은 것뿐이지 내가 하는 일을 국민들이 알아주고 그럴 필요는 없어. 지금 하는 것처럼 이곳에서 아이들과 뒹구는 게 좋아.” 김희태 축구센터 입구에 써 있는 ‘세계로 도전하는 한국 축구의 꿈터’라는 글귀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김희태 감독과 FC의정부의 꿈이 영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