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 축구 도전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자주 등장했다. 아시안컵 2연패를 차지한 한국은 1964년 제3회 아시안컵에서 이스라엘에 1-2로 패하면서 3회 연속 우승에 실패하기도 했고 1976년 올림픽 예선에서는 이스라엘에 1-3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 한국은 이스라엘과의 역대전적에서 5승 4무 2패를 기록 중이다. 비록 패배는 두 차례밖에 없지만 이스라엘은 중요한 길목에서 늘 한국을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한국과 이스라엘의 맞대결은 1970년대에 집중돼 있다. 이후 이스라엘이 아시아 무대를 떠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왜 더 이상 아시아 무대에서 볼 수 없게 된 걸까. 오늘은 아시아 축구 1세대의 선두주자였던 이스라엘이 아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 칼럼으로 준비했다.

‘편가르기’ 극심했던 테헤란 아시안게임

이스라엘은 아시아 축구의 강호였다. 1956년과 1960년 아시안컵 준우승을 거뒀던 이스라엘은 1964년 아시안컵을 개최해 우승까지 거머쥐면서 최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1970년에는 멕시코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기도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은 아시아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시절이었고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도 강호로 평가받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국으로서는 이스라엘을 넘어야 더 큰 무대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잘 나가던 이스라엘은 결국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주변 중동 국가들의 끊임 없는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이념과 정치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1970년대에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1974년 4월이었다. 당시 아시아 탁구는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아시아탁구연맹(ATTF)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중공이 나섰다. 중공은 일본, 북한 등과 함께 아예 다른 탁구 단체를 만들었다. 바로 아시아탁구연합(ATTU)이었다. ATTF를 와해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ATTU는 독단적으로 제3회 아시아탁구선수권을 북한 평양에서 열기로 합의해 버렸다. 남북 관계가 무척이나 예민하던 시기에 한국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중공과 일본, 북한은 한국의 ATTU 가입 자체를 불허하기도 했다. 이런 세력 싸움은 탁구뿐 아니었다. 여러 스포츠 분야에서 정치와 이념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념과 정치적 대립이 극심했던 1970년대에는 스포츠에서도 이러한 일이 자주 벌어졌다.

1974년 9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은 표면적으로 굉장히 의미가 큰 대회였다. 중공과 북한, 몽고 등 공산 진영에서도 대회에 참가하면서 진정한 아시아인의 축제로 포장됐다. 하지만 이 대회는 상상을 초월하는 편가르기가 난무했다. 힘을 앞세워 자유중국의 아시안게임 출전을 막은 중공은 이스라엘과의 펜싱 경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자유중국의 아시안게임 축출을 도와준 중동 국가에 대한 보답 차원이었다. 이후 중공과 한 배를 탄 북한, 쿠웨이트가 나란히 이스라엘과의 축구 경기까지 거부했고 파키스탄 역시 이스라엘과의 농구 경기 보이콧을 선언했다. 다음 대회 개최지인 파키스탄으로서는 막강한 중공과 중동 국가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나 이들의 가장 막강한 배후 세력은 중공과 쿠웨이트였다.

AFC의 이스라엘과 자유중국 축출 결정

힘을 모으면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를 스포츠 경기에서 축출할 수 있다는 걸 몸소 느낀 중공과 쿠웨이트는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을 아예 아시아 축구 무대에서 쫓아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4년 9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제6차 아시아축구연맹(AFC) 총회에서 지금까지 없던 규정을 신설했다. “AFC는 한 회원국의 회원 자격이 AFC내의 축구발전을 저해할 경우 그 회원국을 축출할 수 있다”는 규정이었다. 이스라엘에 극심한 거부감을 보이는 쿠웨이트를 비롯한 바레인, 카타르, 이라크 등 중동 국가들과 자유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중공이 함께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북한과 이란도 이들과 한 편이었다. 총회에서 이 규정을 신설한 뒤 곧바로 상정된 결의안이 바로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을 AFC에서 축출하자’는 것이었다.

결의안 내용은 이랬다. ‘AFC 회원국이 주최하는 축구대회에 이스라엘을 초청하지 않으며 AFC 주관 경기를 개최하는 어떠한 주최국도 이스라엘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을 것.’ 그리고 자유중국 또한 AFC에서 축출하고 중공을 새 회원국으로 받아들인다는 내용까지 결의안에 포함됐다. 이란이 중공의 AFC 가입을 제안했고 쿠웨이트가 이를 재청한 뒤 곧바로 이어진 투표에서는 찬성 25표, 반대5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중공의 AFC 가입이 받아들여졌다. 막강한 중동 국가들과 이들의 눈밖에 나고 싶지 않은 나라들이 대거 몰표를 던진 것이었다. 이후 속개된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의 AFC 축출에 대한 투표에서는 찬성 의견을 내는 국가들만 투표에 참여시켜 21개국 만장일치로 축출을 강행 처리해 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대한축구협회는 기다리던 대회 초청장이 오지 않아 의아해하고 있었다. 1975년 4월 쿠웨이트에서 열리는 아시아청소년대회 참가 준비를 해야 하는데 AFC측에서 연락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후 대한축구협회는 뜻밖의 통보를 받게 됐다. 개최국 쿠웨이트 측에서 1회 대회부터 17회 대회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 대회에 나선 한국 대신 중공과 북한을 대회에 초청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쿠웨이트가 중공과 손을 잡고 아시아 무대에서 한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이런 압박 카드를 쓴 건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한국이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의 AFC 축출에 대해 꾸준히 반대 의사를 표명해 왔기 때문이다. 쿠웨이트와 중공은 이런 한국의 행동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보복 당한 한국, 눈치 보던 일본

여기에 아루사돈 쿠웨이트축구협회장이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에 출마했을 때 대한축구협회가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한국은 곧장 쿠웨이트에 강력히 항의하면서 같은 시기에 별개의 청소년 대회를 여는 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쿠웨이트의 초청장을 받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도 설득해 우리 편으로 만든 뒤 AFC에 쿠웨이트에 대한 징계안을 제시했고 대회 인가 취소와 함께 새로운 대회 개최를 요구했다. 자칫하면 쿠웨이트와 중공을 앞세운 세력과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이 포진한 두 세력이 아예 다른 두 개의 단체로 갈릴 위기에까지 처했다. 하지만 AFC의 실세로 떠오른 쿠웨이트와 중공은 한국의 항의에 아랑곳 하지 않고 FIFA에 이런 통보를 해버렸다. “AFC에서 만장일치로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의 축출을 결정했으니 어서 빨리 FIFA에서 인가해 주길 바란다.”

이 와중에 일본도 쿠웨이트와 중공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1975년 9월 일본축구협회는 일본 도쿄에서 열리기로 했던 몬트리올 올림픽 축구 아시아 지역 예선 개최를 포기하겠다고 AFC와 FIFA에 통보하고 말았다. “이스라엘 선수들의 신변 문제가 보장되지 않았고 자유중국의 국기 게양 문제 등 제반 사정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이 참가하기로 한 대회였기 때문에 쿠웨이트와 중공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는 게 진짜 이유였다. 결국 FIFA는 오랜 고민 끝에 예선을 한국과 일본에서 나눠 치르도록 결정했다. 한국-일본전은 일본에서 열고 일본-이스라엘전, 한국-이스라엘전은 한국에서 여는 것으로 결정지었다. FIFA로서도 쿠웨이트와 중공이 주도하는 AFC의 논란이 골치 아픈 일이었다.

FIFA가 눈치만 보고 있자 AFC는 1년 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총회를 갖고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의 AFC 축출을 다시 한 번 확정지었다. 여기에 더해 알카이 마르키 이라크축구협회장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AFC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경기 연맹의 회의가 열릴 때 이스라엘의 회원 자격 발탁을 제의할 것이다.” 그러자 FIFA도 강경한 자세로 맞섰다. 사흘 만에 레느 코르트 FIFA 대변인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FIFA는 아직 AFC의 제안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을 하지 않았다. 두 달 뒤 열리는 FIFA 집행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면밀히 검토하겠다”면서 “AFC의 이스라엘과 자유중국 축출 선언은 번복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때부터 쿠웨이트와 중공의 합작 세력에 크게 밀린 이스라엘은 “유럽축구연맹(UEFA)으로 보내달라”고 FIFA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FIFA와 AFC의 극심한 대립

1976년 10월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FIFA 집행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면밀히 논의한 끝에 FIFA가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이는 두 달 전보다 훨씬 강경한 것이었다. 쿠르트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AFC는 두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하라. 이스라엘과 자유중국 축출 결정을 취소하거나 아니면 FIFA에서 탈퇴하라. 이념과 정치를 앞세워 특정 국가를 축출하는 건 명백한 불법이며 이를 취소하지 않을 경우 AFC는 FIFA로부터 제명되는 등 중대한 결과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AFC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무서울 게 없던 중동 국가들은 FIFA의 강경한 입장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1977년 5월 FIFA가 다시 한 번 AFC에 엄포를 놓았다.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을 AFC에 재가입 시키지 않을 경우 FIFA는 AFC와의 관계를 모두 끊겠다. 딱 90일의 시간을 주겠다.”

그런데 FIFA가 정한 90일이 다가올 때쯤 AFC는 총회를 열고 종전의 결정을 고수했다. AFC 33개 회원국 가운데 두 나라의 축출을 찬성하는 19개 회원국 대표가 모여 만장일치로 다시 한 번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의 축출을 재확인 한 것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AFC는 이 두 나라를 오세아니아축구연맹(OFC)로 보내버렸다. 그러자 무려 20년 동안 AFC 회장직을 맡아온 압둘 라만 말레이시아 전 수상은 이 자리에서 쿠웨이트와 중공 세력에 불만을 품고 회장직을 사임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AFC는 정치로 심하게 오염됐고 더 이상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들은 축구는 뒷전으로 밀어놓고 정치를 앞세우고 있다. AFC가 FIFA를 무시하고 계속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결국 완전히 분해되고 말 것이다. 내가 FIFA 관계자라면 AFC에 과감한 조치를 취하겠다.” 쿠웨이트와 중공은 겁 없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켜 나갔다.

그러자 FIFA가 사흘 만에 곧바로 응수했다. 구체적인 AFC에 대한 제재를 언급하며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FIFA 측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1978년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이란의 출전 자격을 박탈하겠다. 또한 이스라엘과 자유중국 축출을 주도한 쿠웨이트와 중공, 이란 등의 FIFA 회원 자격 정지와 FIFA 주관 모든 대회 참가 금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겠다”면서 이듬해 1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리는 FIFA 집행위원회 때까지 시정안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쿠웨이트와 중공을 비롯한 AFC에서는 여전히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고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의 AFC 축출에 대해 다시 논의할 생각도 없었다. 이미 AFC 내부에서는 자신들의 편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도 없었다.

결국은 떠돌이가 된 이스라엘과 자유중국

오히려 후앙 아벨랑제 FIFA 회장이 한 발 물러서고야 말았다. 아벨랑제 회장은 AFC에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이스라엘과 대만을 오세아니아로 보낼 테니 자유중국 명칭을 대만으로 바꿔 부를 수 있도록 해달라. 그리고 중공은 대만을 FIFA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 FIFA에 가입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 싸움의 승자는 AFC였다. FIFA는 “당분간 AFC와의 분쟁을 중지하겠다”면서 발을 뺐다. 공식적으로는 “AFC와 분쟁이 길어지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게 이유였지만 FIFA가 막대한 오일 머니에 굴복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FIFA 고위 관계자들이 쿠웨이트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로부터 거부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로비를 받았다는 소문도 퍼지기 시작했다. 결국 AFC가 원하는 대로 이스라엘과 대만은 AFC로부터 축출당하고 말았고 이란의 월드컵 출전 또한 가능해졌다. 쿠웨이트와 중공 등 이 일을 주도한 국가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FIFA의 권고와는 다르게 오세아니아축구연맹이 아닌 유럽축구연맹으로 가고 싶어했다. 특히 서독과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스위스 등이 이스라엘의 UEFA 가입에 지지 의사를 표명했고 1978년 2월 정식으로 이 안건이 UEFA에 올라갔다. 하지만 서독을 비롯한 다섯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UEFA 회원국들의 반대로 결국 이스라엘은 유럽 무대 입성에 실패하고 말았다. 단 1978년 11월 열리는 모스크바 올림픽 축구 유럽 지역 예선에만 한시적으로 이스라엘을 포함시키기로만 합의했다. 이스라엘이 유럽으로부터 거절을 당하자 FIFA는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1982년 스페인월드컵 지역 예선을 당장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FIFA는 북중미축구연맹(CONCACAF)의 문을 두드렸지만 결국 캐나다의 반대로 이스라엘과 대만을 북중미에 편입시키는 것도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부랴부랴 FIFA의 중재로 한시적으로 이스라엘은 월드컵 예선을 유럽에서 치르고 대만은 오세아니아에서 치르기로 했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스웨덴, 포르투갈과 예선 한 조에 속한 이스라엘은 1승 3무 4패 6득점 10실점하며 꼴찌로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1986년 멕시코월드컵을 앞둔 대륙별 예선에서 이 두 나라는 나란히 오세아니아로 편입됐다. ‘진짜’ 오세아니아인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다른 대륙에서 온 이스라엘과 대만 등 네 나라가 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을 치르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오세아니아에서 이스라엘과 대만이 맞붙는 건 황당함 그 자체였다. 예선에서 이스라엘은 3승 1무 2패 12득점 6실점하며 호주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대만은 6전 전패 1득점 31실점하며 4위에 머물고 말았다. 이스라엘과 대만은 아시아 대륙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힘의 논리에서 밀려 유럽과 오세아니아 등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처량한 처지였다.

결국 축구나 국제 정세나 힘의 논리다

1989년 11월 이스라엘은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에서 1위를 차지해 월드컵 본선 진출 가능성을 높였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콜롬비아를 만난 이스라엘은 1차전 원정경기에서 0-1로 패한 뒤 텔아비브에서 열린 2차전 홈 경기에서 결국 0-0으로 비기고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이스라엘은 아프리카와 북중미 등을 떠돌면서 올림픽 축구 예선을 치르는 등 굴욕을 당하가 1991년 정식으로 UEFA 회원 자격을 얻게 됐고 대만은 1989년 중화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AFC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 아시아 대표 자격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밝았던 이스라엘은 이후 단 한 차례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고 유럽축구선수권에서도 단 한 차례의 본선 진출도 이뤄내지 못하고 있다. 원래 약했던 대만 역시 오세아니아 등을 전전해 다니는 동안 경쟁력이 더더욱 떨어져 지금은 간신히 대표팀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정도다.

누군가는 “강팀하고 같이 UEFA에 속해 있으니 좋겠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시아 대륙에 속해 있으면서도 결국 힘의 논리에 밀려 남의 대륙에 가 있는 걸 부러워할 이유는 없다. 또한 축구 발전을 위해서는 월드컵 본선 무대에 꾸준히 진출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이스라엘은 유럽에 속하게 되면서 국제 경쟁력을 시험해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현재 UEFA에 속해 있지만 현재 대표팀 선수 중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요시 베나윤 말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라엘 선수가 또 있나. 오히려 이스라엘은 아시아에 남아 있었다면 국제 무대에 설 일도 더 많았을 것이고 그만큼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UEFA에 속해 있다고 해 부러워할 게 아니라 떠돌이 신세로 오랜 시간을 허비하면서 이스라엘이 축구계의 변방이 됐다는 점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스라엘도 정치와 역사를 봤을 때는 잘못한 일 투성이다. 그리 좋은 평가를 받는 나라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누가 더 정치적으로 옮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 힘의 논리에서 밀리면 벼랑 끝에 몰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쉬쉬하고 있지만 우리는 19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단교를 선언했다. 당시 대만에서는 배신감에 태극기를 불태우는 등 반한감정이 극에 달했지만 한국은 중국과 수교하면 얻을 게 더 많다는 경제적인 논리를 앞세워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축구계는 물론 국제 사회에서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루 아침에 AFC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하루 아침에 수교를 맺었던 나라가 단교를 선언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과 대만이 AFC에서 쫓겨났던 사건을 통해 힘의 논리에서 밀리면 우리도 언제든 떠돌이나 ‘왕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힘이 없으면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