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박종환 감독이 이끄는 성남일화에서 뛰었던 한 선수는 얼마 전 나와 사석에서 만나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휴, 말도 마. 그때는 전반전 끝나기 전에 벤치에 있는 선수들이 먼저 라커룸에 몰래 들어가 감독님이 집어던질 물건부터 치워 놓았다니까. 안 그러면 축구화건 물통이건 쓰레기통이건 다 우리한테 날아오거든. 심지어 외국인 선수도 감독님한테 맞은 적이 있었어. 아니 세상에 그 외국인 선수가 얼마나 당황했겠느냐고. 생전 처음 당한 일이잖아. 에이전트 불러달라고 해서 이 팀 나가겠다고 하는데도 감독님이 눈 하나 꿈쩍하지 않으신 거야. 결국 외국인 선수가 감독님한테 숙이고 들어갔지. 나는 지금도 감독님 얼굴만 봐도 덜컥 겁부터 나.” ‘빠따타카의 창시자’인 박종환 감독의 과거 이야기는 늘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지금 들으면 참 웃긴 이야기다. 당시만 하더라도 심각한 상황이었겠지만 이제는 ‘그땐 그랬지’식의 추억이 됐다. 폭력을 절대 정당화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어떤 스포츠건 주입식 교육이 판치던 과거에는 한 번씩 있을 법한 일이었다. 외국인 선수도 때리던 ‘빠따박’의 이야기는 과거형이었기에 웃으며 들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박종환 감독의 제자나 이 이야기를 듣던 나도 그저 ‘호랑이 감독’에 대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추억 쯤으로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 눈빛만 봐도 숨이 멎을 것 같던 학생주임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이제는 성인이 돼 친구들과 떠올릴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꼭 학생주임 선생님은 내가 교복 안쪽에 몰래 만화책을 숨겨놓고 있을 때만 나와 복도에서 마주쳤고 이럴 때면 항상 나는 구레나룻이 길어 꼭 교무실로 끌려가 구레나룻과 만화책 때문에 가중처벌을 받았었다.

경험 많은 감독 환영했지만…

나는 박종환 감독이 현장에 복귀해 성남시민구단 초대 사령탑에 부임할 때만 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K리그에 젊고 유능한 감독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고 그들이 좋은 지도력을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리그에는 다양한 감독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젊은 감독이 패기를 앞세워 이끄는 팀도 있어야 하고 경험 많고 노련한 감독이 지도하는 팀도 있어야 리그의 균형이 맞는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보다 세 살이나 많은 박종환 감독이 현장에 복귀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으로 K리그가 더욱 흥미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축구계에서 퍼거슨 감독이 “형”이라고 부르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물론 박종환 감독이 1990년대처럼 흔히 말하는 ‘빠따’를 들 것이라고는 걱정하지 않았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선수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감독이 용납될 수 있을까.

박종환 감독이 제파로프를 향해 “선수도 아니다”라며 쓴소리를 내뱉을 때에도 이해했다. 선수 본인에게는 잔인한 일이겠지만 이렇게 공식 석상에서 대놓고 누군가를 비판할 수 있다는 건 보통 배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발언 자체가 너무 공격적이기는 했지만 감독과 궁합이 맞는 선수가 있는 법이고 박종환 감독은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그에 대한 독설을 날렸다. 무리뉴 감독이 하면 독설이고 박종환 감독이 하면 망언일까. 나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박종환 감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리그의 다양성과 이슈를 위해, 경험 많은 지도자가 후배들에게 이 경험을 전수해 주기 위해 박종환 감독은 분명히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성남 홈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 “평일인데도 관중이 무척 많이 왔다”는 질문에 “원래 내 팬이 많아”라고 답할 때도 카리스마 있는 노장 감독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위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생각은 결과적으로 잘못됐던 것 같다. 박종환 감독은 과거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시 제자들을 폭행했다. 그것도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연습경기 도중 손자뻘의 어린 선수들을 향한 폭력이었다. 박종환 감독은 “꿀밤 정도였다”고 했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건 이게 꿀밤이었는지 따귀였는지가 아니다. 당시 목격자들은 단순한 꿀밤 수준이 아닌 폭행이었다고 진술했고 피해자 역시 팀을 떠나고 싶을 정도로 큰 모멸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박종환 감독은 “선수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지 폭행이 아니었다”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 정 억울하면 고소를 하면 될 것이 아닌가”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아무리 폭행을 당했다고 해도 좁디 좁은 축구계에서 지도자를 고소할 용기 있는 선수도 없고 박종환 감독이 말한 것처럼 꿀밤 수준이었다고 해도 이 행동이 용납될 수는 없다. 박종환 감독은 사건이 불거지자 이후 선수들을 불러놓고 입단속을 했다는 정황까지 포착되고 있다.

자진사퇴 기회가 가당키나 한가

성남 구단주인 이재명 시장과 신문선 대표이사 등은 이 문제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었다. 지난 19일 부산 아이파크 원정 경기에 박종환 감독을 배제하도록 한 뒤 최종 징계 수위를 논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재명 시장은 본인이 직접 선택한 박종환 감독을 내치자니 다가올 지방선거를 앞두고 스스로 실패한 선택을 했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는 꼴이고 그대로 박종환 감독을 품자니 인권 변호사로서 출신으로서의 신념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선수 폭행 사건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할 사람이 바로 이재명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감독직을 끝까지 고수하겠다고 밝혔던 박종환 감독은 결국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성남 지휘봉을 내려놓게 됐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성남FC 초대 감독으로서 4개월 만에 물러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박종환 감독은 당연히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 단순한 꿀밤이었다고, 선수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랬다고 버틸수록 그가 지금까지 이뤘던 업적에 흠집만 날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한 가지 그냥 스치고 지나갈지도 모를 문제를 지적하려 한다. 박종환 감독은 스스로 구단에 자진사퇴 의사를 밝혔고 구단 역시 이를 받아들였지만 사실 이건 자진사퇴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박종환 감독처럼 선수에게 폭력을 행사해 논란을 일으킨 경우에는 본인 스스로 물러날 기회를 주는 자진사퇴가 아니라 해임을 통해 구단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는 게 옳기 때문이다. 자진사퇴와 경질은 단순한 말 장난이 아니라 그 의미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물의를 일으키고 지휘봉을 놓아야 하는 이에게 스스로 물러날 기회를 주는 게 온당한 행동일까. 이런 사고의 장본인은 구단이 먼저 경질로 내치는 게 맞다.

보통 자진사퇴를 하는 감독은 성적 부진이 이유인 경우가 많다. 구단에서도 감독이 물러나기를 바라고 감독 본인 역시 성적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감독직을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하기 위해서다. 이러면 성적이야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았지만 서로 좋게 좋게 마무리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 아무리 성적이 부진했어도 자진사퇴의 형식을 빌려 감독에 대한 예우를 다하는 작별 방식이다. 하지만 박종환 감독은 전혀 다른 사례다. 성적을 떠나 제자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퇴진하는 판국에 구단에서 자진사퇴라는 기회를 주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럴 때는 경질이라는 구단의 일방적인 통보를 통해 그를 불명예 퇴진시켜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도 지도자들이 이런 사태에 대한 경각심을 느낄 수 있다.

유진회 코치도 자진사퇴, 축구계의 이상한 예우

그런데 성남 구단은 최대한 박종환 감독 퇴임을 좋게 포장했다. 구단 측에서는 경질을 주장했지만 결국 최종 결정권자인 이재명 시장이 이에 난색을 표한 것이었다. 이재명 시장은 박종환 감독에게 2개월 출전 정지의 징계를 내리고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다 결국 여론이 악화되자 징계가 아닌 자진사퇴 형식으로 박종환 감독 퇴진을 결정했다. 더군다나 박종환 감독은 감독직을 스스로(?) 내려 놓으면서까지도 “나는 한점 부끄러움도 없다”고 했다. 자발적으로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반성은 없고 변명만 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자진사퇴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성남 측에서 과감하게 먼저 경질이라는 결단을 내렸어야 했다. 가까스로 출범한 성남FC 명예에 먹칠한 감독에게 이런 예우는 안 해도 된다. 손자뻘 되는 제자를 폭행한 감독에게 자진사퇴 기회를 주는 건 사치다.

축구계에서 선수 폭행 사건을 너무 심각하지 못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K리그 챌린지 부천FC 역시 박종환 감독의 폭행 사건이 불거진 시점에서 유진회 골키퍼 코치가 선수를 폭행해 논란이 됐다. 유진회 코치는 지난 13일 강원FC와의 홈 경기에서 전반전이 끝난 뒤 한 선수를 폭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부천 역시 유진회 코치의 자진사퇴를 받아들였다. 스스로 물러날 기회를 준 것이다. 부천 구단 측에서는 유진회 코치가 상습적으로 선수를 폭행했다는 제보를 입수하고 진상 조사에 나설 계획이었지만 유진회 코치가 자진사퇴를 하면서 추가 조사를 모두 중단했다. 누가 봐도 일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한 유진회 코치가 꽁무니를 뺀 것이 분명한데 이런 지도자를 퇴출시키는데 자진사퇴라는 훈훈한 마무리가 꼭 필요했을까. 이런 사건은 경질과 함께 폭행 당한 선수는 물론 구단 입장에서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법적인 조치가 필요한 사안이다.

박종환 감독이나 유진회 코치에게는 자진사퇴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폭행 사건에 대한 책임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자발적으로 책임지는 모양새를 갖춰 물러나기 이전에 구단에서 먼저 자르는 게 맞다. 그리고 이런 지도자들은 구단의 경질과는 별도로 법적인 처벌을 받아야 한다. 자진사퇴라는 훈훈한 마무리로 구렁이 담 넘듯 이 문제에 대해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 아니 때가 어느 때인데 제자들을 두들겨 패 놓고 은근슬쩍 자리 하나 내주고 내빼려는 건가. 자진사퇴는 이럴 때 쓰는 게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로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나 재충전이 필요해 잠시 휴식을 취할 때나 쓰는 거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구단과 이미 대화를 통해 자진사퇴 형식을 빌린 경질이겠지만 구단 공식입장을 밝힐 때의 용어선택은 똑바로 해야 한다. ‘박종환 감독 경질’이지 ‘박종환 감독 자진사퇴’가 아니다.

박종환 감독은 경질됐어야 한다

참 씁쓸한 일이다. 아직도 제자들에게 폭행을 가해야 잘 뛴다고 믿는 지도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참 슬프다. 그것도 다 큰 성인들이 활약하는 프로 무대에서 폭행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니 내 방에 걸린 2014년 4월 달력이 참으로 무색하다. 개인적으로 1983년 청소년월드컵 4강 신화의 주인공으로서 박종환 감독이 한국 축구에 이바지 한 바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 있어서도 충분히 배울만한 부분은 많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그의 과거 업적까지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박종환 감독은 많이 반성해야 한다. 김호곤 감독은 “나이 많은 감독은 안 된다”는 편견을 깨는데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박종환 감독은 불과 4개월 만에 다시 김호곤 감독의 5년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개인적인 불명예를 떠나 이제 다시 현장에 복귀하려던 많은 노장 감독들을 향해 사람들은 색안경을 낄 수밖에 없다. 본인 한 명 물러나면 그만이 아니다. 요즘 일어나는 사고들을 보면 나이 많다고 다 어른은 아닌 모양이다. 참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