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게 은메달에 머물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올림픽 중계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우리에게 늘 2등은 1등에 비해 부족한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고 금메달이 아니면 그 가치를 한참 낮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세계에서 2등이란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우리는 늘 이런 우리 스스로에게 ‘1등이 되지 못한 패배자’라며 아쉬워했다. 우리나라 선수들 역시 이런 말을 자주했다. “금메달을 따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들은 시상식에 서 두 번째로 높은 자리에 오르고도 고개를 푹 숙인 채 1등이 되지 못한 자기 자신을 질책했다. 동메달을 딴 뒤 기뻐하는 외국 선수들을 볼 때면 우리 정서상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금메달보다 더 빛난 그들의 투혼

하지만 이번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을 통해 우리의 이런 ‘금메달 지상주의’가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참 기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번 소치 올림픽에서 나온 세 개의 금메달도 대단했지만 우리는 이번 소치 올림픽을 보면서 꼭 1등만이 이 축제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나 혼자만의 개인적인 감정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밤새 텔레비전 앞에 앉아 응원했던 모든 이들이 이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금메달보다 빛나는 은메달도 있었고 시상대에 서지 못했지만 플레이 자체로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해준 선수들도 있었다. 과거 올림픽처럼 “아쉽게 은메달에 머물렀다”가 아니라 “소중한 은메달을 땄다”고 받아들이는 국민들과 언론들이 많아졌다는 건 이번 소치 올림픽의 수확이 아닐까. 이건 그저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진심인 것 같다.

6번째 올림픽을 치른 이규혁은 이제 메달권을 노리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마지막 레이스에서 이를 악물고 뛰었다. 그가 나선 경기마다 전세계로 송출되는 카메라는 이규혁이 이를 악물고 뛰는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비단 우리만 그의 투혼을 유심히 지켜본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제는 메달 후보에서는 멀어진 선수가 마지막 올림픽에서 이런 투혼을 발휘하는 모습은 메달 이상의 감동이었다. 여자 쇼트트랙 500m 결승에서 불운하게도 넘어진 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 박승희는 한 번 더 넘어졌지만 그래도 결승선만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섰다. 나는 이 장면이 바로 우리의 투혼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박승희가 따낸 메달은 ‘금메달보다 빛난 동메달’이 아닐까.

압도적인 기량을 자랑하는 ‘신계’ 네덜란드 선수들과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결승에서 만난 ‘인간계’ 한국 선수들의 투혼도 아름다웠다. 네덜란드 남자 선수들은 전원이 이번 대회 다른 종목 메달리스트였고 예선에서도 다른 나라를 여유 있게 따돌려 누가 봐도 확실한 우승 후보였다. 반면 한국은 이승훈을 제외하고 주형준과 김철민 모두 다른 종목에서 20위권에 머문 선수들이었으니 한국이 네덜란드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국은 레이스 중반 오히려 네덜란드를 이기는 등 대등한 경기를 펼쳤고 경기 막판 전세가 기울어진 상황에서도 이를 악물고 달렸다. 비록 네덜란드를 잡지 못했지만 일찌감치 경기를 포기한 네덜란드의 다른 상대들과 우리는 달랐다. 개개인의 기량은 네덜란드에 압도적으로 뒤지지만 하나 된 팀으로서는 네덜란드를 위협하는 한국의 투혼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한국 축구도 일단 부딪혀 보자

나는 동계스포츠 전문가가 아니기에 전문적으로 그들의 플레이를 분석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소치 올림픽 때문에 매일 밤을 샌 팬으로서 금메달보다 더한 감동을 선사한 선수들의 플레이에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는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은메달과 동메달에도 박수를 보내고 비록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어도 최선을 다하면 찬사를 보낼 수 있는 인식이 깔리게 된 것 같아 참 뿌듯하다. 이건 국민들의 인식 변화와 더불어 최선을 다한 선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포츠 선진국은 얼마나 많은 메달을 따내느냐 보다는 얼마나 스포츠를 통해 즐거움과 감동을 얻느냐에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번 소치 올림픽을 통해 원했던 종합 10위의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마인드 만큼은 스포츠 선진국으로 갈 토대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곧 월드컵이 다가온다. 소치 올림픽을 통해 월드컵에 나서는 선수들도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나는 한국 축구가 월드컵 16강이나 8강 등 가시적인 목표가 아니라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경기를 펼치길 기원한다. 개인적으로 지난 2010년 남아공월드컵보다 1994년 미국월드컵과 1998년 프랑스월드컵이 훨씬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 물론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 나선 선수들도 최선을 다했고 첫 원정 16강이라는 가시적인 성과까지 냈으니 그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1994년 미국월드컵이나 오히려 네덜란드에 참패했던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원하는 성적에 도달하지 못했음에도 진한 감동과 여운이 있었다. 한 발 내딛기 어려울 만큼 들끓는 폭염에서도 독일을 압도했던 1994년 미국월드컵이나 이미 탈락이 확정된 뒤에도 끝까지 몸을 던져 상대 공격을 막아냈던 1998년 프랑스월드컵은 여전히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바로 이거다. 이번 소치 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경기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뽐낸 네덜란드를 맞아 결승전을 치른 폴란드는 사실상 경기를 포기한 듯했다. 한 번이라도 레이스에 참여해야 메달이 수여되기 때문에 폴란드는 기존 멤버 한 명을 제외하고 다른 선수를 투입했고 폴란드는 전혀 이길 생각 없이 레이스에 임해 당연한(?) 은메달을 따냈다. 반면 남자 팀추월 경기에서 한국은 끝까지 네덜란드를 물고 늘어졌다. 예선에서 경기에 나서지 않았던 모태범을 결승에 투입하면 은메달을 네 명이 함께 나눠 가질 수 있었지만 한국은 기존 선수를 그대로 투입해 한 번 이겨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똑같은 은메달이지만 나는 우리 남자 선수들의 은메달이 훨씬 더 자랑스럽다. 안 되도 일단은 부딪혀 보고 도전하는 자세에서 우리는 충분한 감동을 느낀다. 이게 바로 스포츠 정신이고 우리를 눈물 짓게 하는 요소다. 소치 올림픽의 한국 선수들은 이걸 제대로 보여줬다.

당신들은 진정한 우리의 영웅이다

월드컵에서 맞붙을 러시아와 벨기에는 분명히 우리보다 앞선 상대다. 하지만 나는 축구 대표팀이 이번 소치 올림픽에 나선 선수들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번 소치 올림픽에서 보듯 이제는 국민들의 인식도 많이 변했다. 과거처럼 은메달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금메달이 아니면 거들떠 보지도 않던 시대가 지났고 이제는 그 과정을 통해 즐거움과 감동을 찾고 있다. 또한 워낙 축구팬들의 눈이 높아진 상황에서 월드컵 16강은 실로 대단한 성과이지만 그 자체로 감동을 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러시아와 벨기에에는 우리나라 선수들보다 훨씬 더 좋은 무대에서 뛰는 이들이 많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숙이고 들어갈 이유는 없다. 결과를 떠나 과정이 아름다우면 충분히 박수를 보낼 이들이 많다는 걸 떠올리고 과정을 통해 감동을 선사했으면 좋겠다. 성적은 그러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소치 올림픽에 나선 선수들이 2014년 2월 감동을 선사했다면 6월에는 홍명보호가 그 감동을 이거가길 바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번 소치 올림픽이 이제 막을 내렸다. 그저 단순한 스포츠 축제가 아니라 이번 올림픽을 통해 한국 축구를 비롯한 우리 사회 모두 귀중한 메시지를 얻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마지막 레이스에서 이를 악물고 뛴 선수와 두 번 넘어지고도 동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 다시 일어선 선수, 개인 기량은 중위권이지만 하나의 팀으로 세계 2위에 오른 선수들, 억울한 판정으로 금메달을 놓쳤지만 그래도 웃으며 이를 받아들여 전세계의 찬사를 받는 선수, 그리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늘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많은 선수들이 있기에 이번 소치 올림픽은 감동적이었다. 태극마크를 달고 이 무대를 누비기 위해 4년 동안, 아니 때론 그 이상 오랜 시간 땀 흘린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당신들은 진정한 우리의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