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아프리카 남수단 수도 주바에 위치한 축구협회에서는 한국인을 위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이름도 생소한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 한국인이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가슴 짠한 이들의 이야기를 준비했다. 내전으로 고통 받는 빈국에서 한국 축구를 알리고 있는 두 명의 영웅을 위한 칼럼이다.

‘홍명보의 스승’ 아프리카로 떠나다

초등학교 시절 권투선수의 꿈을 키우던 임흥세는 맞은 얼굴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기 싫어 권투를 그만두고 성수중학교에 입학한 뒤 축구선수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작은 키였지만 빠른 발을 앞세워 지역에서는 꽤 알아주는 선수로 점차 성장하고 있었다. 한영고 시절에는 진주MBC 대회에 출전해 우승까지 거머쥐었고 인천체대 시절에는 전국체전 동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미래가 불투명한 실업팀에 입단하는 대신 인천체대에서 졸업한 뒤부터 지도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1977년 성수중학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선수 시절보다 지도자로서 더 재능을 보였다. 훗날 한국 축구를 이끌 선수들을 육성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성수중에서 김주성을 키워낸 임흥세 감독은 광희중으로 옮긴 뒤에는 홍명보를 지도했다. 하석주 역시 그의 지도를 받았고 개그맨 서동균 또한 임흥세 감독 밑에서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키웠었다. 임흥세 감독은 대한축구협회 중학교 상비군 감독과 청소년 대표팀까지 맡으며 지도자로서 승승장구했다. 1992년에는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학생축구대회에 대표팀 코치로 나가 우승을 일궈내는 등 한국 축구에 많은 공을 세웠다. 청소년 대표를 포함해 그가 길러낸 선수는 무려 20여 명에 이른다. 하지만 ‘홍명보의 스승’이라는 직함만으로도 평생 국내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그는 2006년 훌쩍 아프리카로 떠났다. 국내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모두 포기하고 말이다. 희망 하나 없이 보내는 이들을 위해 남은 인생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그가 날아간 곳은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처음 남아공에 도착하고 임흥세 감독 눈에 비친 세상은 절망적이었다. 어린 친구들이 술과 담배, 마약에 찌들어 절망적인 인생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막했지만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한 초등학교에 축구팀을 창단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자신을 배척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역시 축구는 만국 공통어였다. 무려 700여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맨발로 축구를 하겠다고 달려들었다. 임흥세 감독은 이후 본격적으로 남아공에서 체계적인 축구 수업을 시작했다. 소년원과 교도소, 고아원 등에 축구팀을 만들었고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가출한 한 이들을 위해 에이즈어린이축구팀도 이끌었다. 그에게 축구를 배운 어린이만 무려 2만여 명이었다.

아프리카 빈민촌에서 시작한 그의 헌신을 남아공 정부도 알아주기 시작했다.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감사편지를 보내오기도 했고 프리토리아시에서는 학교와 축구센터 건립을 위해 부지를 제공하기도 했다. 임흥세 감독은 남아공 12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 감독까지 맡으며 남아공 축구에 희망을 전파했다. 선수 시절 선배로 모시던 허정무 감독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마친 뒤 선수들이 사용하고 남은 물품을 직접 임흥세 감독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임흥세 감독은 남아공에서의 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다. 맨발로 축구를 하던 아이들이 임흥세 감독의 도움으로 나이키 축구화를 신고 공을 차는 등 점차 그곳 상황이 안정되자 아프리카에서도 더 참담한 지역에 가 축구를 통해 희망을 나눠주고 싶어졌다. 마침 남수단에 망고나무를 심어주는 한국 사단법인 ‘희망의 망고나무’(희망고)에서 그에게 축구를 통해 남수단에 희망을 불어 넣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기사 이미지

임흥세 감독이 아프리카에서 어린 선수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는 모습. (사진=임흥세 감독)

암과의 사투 벌이고 또 다시 남수단으로

그렇게 그는 6년 동안의 남아공 생활을 마치고 2012년 말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험난한 남수단으로 향했다.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故) 이태석 신부가 활동하던 남수단 시골마을 톤즈로 건너간 그는 눈으로 직접 남수단의 현실을 목격하고는 경악했다. 지금껏 다녀본 아프리카 20여개 국가 중에 가장 열악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내전으로 국가 전체가 피폐해진 상황이었고 부족간의 무력 충돌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에이즈도 남수단 전체에 퍼져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매일 두 시간씩 발전기를 돌려야 했고 물과 음식도 없었다. 이 열악한 남수단에서도 가장 가난한 마을인 톤즈에 갔으니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는 축구가 전하는 기적을 믿었다. 곧장 축구팀을 만들었고 선수는 금방 600여 명으로 불었다. 그의 축구에 대한 열정을 알아본 남수단 축구협회에서는 그를 기술고문으로 위촉됐다.

운동장 사정이 극히 열악한 남수단 톤즈에서 임흥세 감독은 직접 공터의 깨진 병과 쓰레기를 주우며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그의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지켜보고 감동한 마을 어른들 역시 임흥세 감독을 도왔다. 그렇게 임흥세 감독은 직접 연령별 축구리그까지 창설하게 됐다. 20여개 축구팀을 만들어 600여 명의 선수들이 축구선수로서의 희망을 품을 수 있었고 ‘희망고’와 함께 망고나무 3만 그루를 심어 마을에 기증하기도 했다. 축구뿐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씩 주민들을 상대로 망고나무 기르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또한 임흥세 감독은 남수단의 여러 체육단체 창립 역시 준비하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정식 가맹국이 되기 위해서는 5개 이상의 체육단체가 필요한데 직접 한국에 도움을 요청해 축구협회 외에도 태권도협회를 창설했고 향후 배구와 양궁, 농구협회도 창설할 예정이다.

임흥세 감독은 남수단에서 위험천만한 순간을 여러 번 넘겼다. 그가 탄 자동차가 길이 험한 비포장도로에서 전복돼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워낙 치안이 불안해 주에서 경호원을 대동해 주겠다고 했지만 주민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 같아 거절하기도 했던 그는 말라리아와 장티푸스에도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임흥세 감독은 결국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요로 결석 통증까지도 참아냈던 임흥세 감독이었지만 몸에 더 큰 이상이 있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돌아와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위암이었다. 결국 위암 수술을 받은 그는 이후 체중이 7kg이나 빠지는 등 후유증을 겪기도 했지만 남수단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치료를 받으며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축구공을 기증받았고 축구 교육 프로그램을 완성해 다시 남수단으로 날아갔다.

아프간에서 목숨 건 이성제 감독

임흥세 감독보다 먼저 오지로 날아간 이가 있다. 바로 이성제 감독이다. 영등포공고와 상지대를 졸업한 그는 실업팀 한국철도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1993년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큰 부상을 당하고 결국 선수 생활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직업을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뛰어봤지만 결국 축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방황하다가 1997년 아프리카 케냐로 떠났다. 축구를 통해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사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린 아이들을 지도했던 이성제 감독은 이후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소련의 침공과 탈레반 축출이라는 이유를 앞세운 미국의 공격까지 받은 아프가니스탄은 모든 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했다.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은 조국을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정도였다. 자원해 이 땅에 와 축구를 통해 봉사 활동을 하겠다는 외국인의 존재 자체가 놀라웠다. 그는 목숨을 걸었다.

그는 2002년 9월 아프가니스탄 한 고등학교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성제 감독은 어릴 때부터 이란과 파키스탄에서 난민 생활을 하다가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쫓겨나 희망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이 아이들을 위해 이곳에 뿌리내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이듬해 아프가니스탄 실업팀 감독을 맡았다. 선수 출신 외국인 지도자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프가니스탄 교육부장관이 이성제 감독을 찾아왔다. “당신을 그냥 이곳에 두기에는 아깝습니다. 청소년 대표팀을 맡아 이 아이들을 차근차근 지도해주세요.” 이성제 감독은 보다 체계적으로 어린 선수들을 지도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2005년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말이 청소년 대표팀일뿐 처음 훈련장에 도착한 이성제 감독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적지 않은 금액을 매년 아프가니스탄에 지원하고 있지만 협회 고위층이 이를 다 빼돌려 정작 선수들은 축구화 한 켤레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 대표팀 감독은 사실상 무보수 자원봉사였다. 그나마 식사를 제공받고 있는 정도에도 감사해야 했다. 하지만 이성제 감독은 자신의 돈을 털어 선수들 주머니에 찔러 넣어줬다. 그래야 이들이 쌀이라도 사 먹고 살 수 있고 축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제 감독은 늘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선생님이 도와줄 테니 절대 축구는 포기하지 마.” 2007년에는 올림픽팀 지휘봉을 잡고 베트남과의 경기를 치른 적이 있었다. 당시 1차전 원정경기 이후 2차전 홈 경기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아프가니스탄 현지에 마땅한 경기장이 없어 2차전 역시 원정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결국 아프가니스탄축구협회가 비행기 값이 없어 경기를 포기해야 했고 FIFA가 이 소식을 듣고 비행기 티켓을 대신 구해줘 간신히 원정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이만큼 이성제 감독은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10년 넘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어린 선수들을 지휘했다.

남수단에서 만난 한국 축구의 두 영웅

위암 수술 후 다시 남수단에 돌아온 임흥세 감독은 남수단 체육부장관을 만났다. “출국 전 부탁드렸던 일은 생각해 보셨나요?” 사실 임흥세 감독은 남수단 국가대표팀 감독 제의를 몇 번이나 받았지만 고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몇 차례 거절 의사를 밝힌 임흥세 감독에게 체육부장관은 거의 자포자기하는 생각으로 마지막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열악한 환경에서 이 시기에 또 다시 내전까지 벌어져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임흥세 감독이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믿을 수 없었다. “하겠습니다. 제가 남수단 대표팀을 한 번 맡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교육부장관을 감동시켰다. “비록 큰 힘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내전으로 힘들어 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표팀 감독을 고사하던 그가 이 자리를 수락한 건 내전 때문이었다. 남들은 내전으로 다 남수단을 떠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연신 “고맙다”고 하는 교육부장관에게 임흥세 감독이 말했다. “내전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를 믿고 감독으로 임명해준 남수단에 오히려 제가 고맙게 생각합니다. 큰 사랑을 받은 만큼 온 힘을 다해 남수단 축구 발전에 힘을 보태겠습니다.” 그는 단순히 남수단 남자 성인 대표팀만을 맡는 게 아니라 여자 대표팀과 청소년 대표팀 및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까지 총괄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는 코치진 인선을 계획하면서 누군가에게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축구를 전파하고 있는 이성제 감독이었다. “이 감독,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임흥세 감독의 부탁에 결국 이성제 감독도 남수단 대표팀에 합류했다. 그렇게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서로 다른 오지에서 희망을 잃은 아이들에게 축구를 통해 희망을 전달한 두 명의 영웅이 한 자리에 뭉칠 수 있게 됐다. 이 둘은 지난 14일 남수단 수도 주바에 위치한 축구협회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임흥세 감독은 늘 이렇게 말했다. “몇년 간 이곳에서 봉사한 뒤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면 또 다른 빈국으로 이동해 축구를 통해 희망을 전파하고 싶어요.” 남아공을 떠나 남수단으로 왔던 것처럼 그는 남수단 축구가 안정되면 또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날 예정이다. 이성제 감독도 10년 넘게 그 위험하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축구를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고 뛰는 이 선수들을 끝까지 돕고 싶어요.” 결국 이 둘은 이제 남수단에서 축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또 다시 실천하게 됐다. 축구공 하나로 희망 없이 하루 하루를 보내던 아이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됐고 그 중심에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은 참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단지 그라운드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선수들만이 국가대표가 아니다. 이렇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가난한 나라에서 한국 축구를 알리는 이들 또한 국가대표가 아닐까. 그들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