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김호곤 감독에 대한 인상은 무서웠다. 나는 2009년 김호곤 감독이 울산에 부임하고 치른 첫 번째 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2군 기용과 관련해 비판하는 칼럼을 썼었다. 당시 울산은 주축 선수를 제외하고 호주 원정을 떠나는 등 선수 기용에 아쉬운 대목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김호곤 감독이 직접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협박성 항의는 아니었고 “우리 사정이 이러니 2군 선수 기용도 좀 이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칼럼에 당사자의 해명을 실지 않은 내 잘못을 인정했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감독에 대한 놀라움도 있었다.

이듬해 나는 울산과 전북의 리그컵 8강전이 끝난 뒤 곧장 김호곤 감독과 만났다. 나는 그날 김호곤 감독에게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날 정예 멤버를 가동한 울산은 1.5군을 기용한 전북에 패하면서 아쉽게도 리그컵 8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무언가에 홀렸는지 정신줄을 놓고 만 나는 김호곤 감독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승리의 원동력이 뭔가요?" 당황한 김호곤 감독의 표정을 보고 나는 ‘내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하셨구나’라는 생각으로 더 또박또박 말했다. "오.늘.승.리.의.원.동.력.이.뭔.가.요?" 가뜩이나 아쉽게 패해 표정이 좋지 않았던 김호곤 감독이 내 배를 강타하며 말했다. "우리 졌거든."

순간 너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으로 연신 "죄송하다"고 하는 나에게 김호곤 감독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이기길 간절히 바랐나봐. 허허." 김호곤 감독은 내 실수를 이렇게 너그럽게 이해해줬다. 얼마 전 내가 진행한 임중용 인터뷰에서 일방적인 임중용 주장을 내보내며 김호곤 감독을 비하했다는 논란이 있은 뒤 만났던 자리에서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임)중용이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 나는 김 선생(김호곤 감독은 한참 나이가 어린 나를 이렇게 표현했다)의 그 인터뷰에 뭐 별로 불만은 없어. 중용이가 생각하는 관점이 나하고는 다른 거니까." 아, 대인배시다.

울산, 수비 축구에서 철퇴 축구로

나에게는 참 각별한, 아니 실수 투성이인 나를 매번 너그럽게 봐주던 김호곤 감독이 울산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김호곤 감독은 지난 4일 "오늘로서 울산 감독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히며 5년 간의 울산 지도자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준우승이라는 훌륭한 성과를 내고도 우승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며 떠나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성적지상주의가 참 밉기도 하고 그의 선택이 아쉽기도 하다. 오랜 시간 한 팀에서 감독 생활을 하며 'K리그의 퍼거슨'으로 남길 바라던 많은 축구팬들의 소망도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K리그에서 감독 사퇴가 이렇게 팬들의 아쉬움과 반발을 자아낸 건 실로 오랜 만인 것 같다. 그만큼 김호곤 감독은 비록 올 시즌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울산에서 5년 동안 많은 걸 남겼다.

나도 사실 김호곤 감독이 처음 울산 지휘봉을 잡았을 때는 부정적인 시선이었다. 이전까지의 이미지도 있었고 뭔가 젊고 가능성 있는 감독이 아니라면 바꿀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9년 울산은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K리그에서도 8위에 머물고 말았다. 울산이 기록한 8위는 2000년 10위 이후 가장 낮은 순위였다. 또한 김호곤 감독은 이후 현명민과 이진호 등 팀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를 이적시키거나 기용하지 않고 경기력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김호곤 감독은 굴욕적인 별명까지 얻었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팀을 새롭게 정비했다. 2011년 6강 플레이오프에서 6위로 챔피언결정전까지 진출해 준우승을 차지하는 저력을 보여줬고 지난해는 구단 최고의 성적인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두며 AFC 올해의 감독상 주인공이 됐다.

생각해 보면 울산은 김호곤 감독 부임 전까지 '몰락한 명가'에 가까운 성적에 머물고 있었다. 2005년 정규리그 우승 이후 2009년 김호곤 감독이 팀을 이끌기 전까지 2007년 리그컵 우승 한 차례가 전부였다. 역사와 전통은 있지만 모두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였다. 정규리그에서 4위 이상 오른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재미없는 '수비 축구'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김호곤 감독 부임 이후 5년의 시간이 지난 현재 울산을 수비 축구하는 팀으로 바라보는 이는 없다. 나는 이게 김호곤 감독의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지난 K리그 클래식 최종 라운드 포항전만을 바라보고 울산의 잠그기 축구에 비난을 보낼 수도 있지만 그건 김신욱과 하피냐가 빠진 상황에서 무승부만 거둬도 되는 울산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단 한 경기로 울산을 수비 위주의 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김신욱의 등장과 아시아 정복

김호곤 감독은 '철퇴 축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다. 밋밋한 K리그 스토리에서 언론 주도가 아닌 감독과 선수가 스스로 만들어낸 의미 있는 신조어다. '철퇴 축구'가 브랜드로 자리매김하자 '비빔밥 축구' '무공해 축구' '신공' '방울뱀 축구' 등 다른 팀들의 아류작(?)이 속출했다. 이 중 원조 브랜드인 '닥공'을 제외하고 팬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건 철퇴 축구'와 최근 포항의 '스틸타카' 말고는 없는 게 사실이다. 그만큼 울산의 '철퇴 축구'는 모든 이들의 인정을 받는 브랜드가 됐다. 울산은 시즌권 티켓에 철퇴와 쇠사슬을 그려 넣는 등 지금까지 재미없던 '수비 축구'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호곤 감독의 ‘철퇴 축구’는 아마 시간이 흐른 뒤 우리가 '고데로 트리오'나 '스틸러스웨이'를 기억하는 것처럼 오래 회자될 것이다.

또한 2007년 '종이컵' 한 번 들어 올리는 게 최근 성적의 전부였던 이 팀은 이제 아시아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팀으로 성장했다. 내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울산이 우승한 2012년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가장 편하게 봤던 경기였던 것 같다. 이전까지 K리그 팀들의 아시아 정복은 긴박감이 넘치는 살얼음판 승부였지만 2012년 울산은 결승에서 알 아흘리(사우디)를 맞아 여유 있는 3-0 승리를 거뒀다. 후반 중반 이후 나는 울산문수월드컵경기장에서 경기보다 예쁜 여자 관중 찾기에 몰입할 만큼 시시한 승부였다. 당시 울산은 2002년 AFC 챔피언스리그 개편 후 첫 무패 우승(10승 2무)이라는 범접할 수 없는 기록을 세웠다. 현 아시아 최강이라는 광저우 헝다도 이루지 못한 위업이고 앞으로도 누군가 이 기록에 도전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김호곤 감독의 업적을 평가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김신욱이다. 김신욱은 2009년 K리그 드래프트에서 울산 전임 사령탑이었던 김정남 감독이 뽑은 선수다. 하지만 이후 김정남 감독이 곧장 팀을 물러나면서 김호곤 감독은 본의 아니게(?) 김신욱을 조련해야 하는 지도자가 됐다. 당시 중앙대에서 수비수로 활약한 김신욱은 울산에서도 수비 강화를 위해 영입한 선수였다. 당시 울산은 박병규와 박동혁 등이 팀을 떠나고 이동원, 이원재, 임종은 등 젊고 유망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수비수 김신욱은 연습경기에서 후보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이때 과감하게 김신욱을 공격수로 보직 변경한 게 바로 김호곤 감독이었다. 김호곤 감독은 2009 시즌이 시작된 뒤 이진호와 조진수, 염기훈, 알미르 등이 나란히 부상을 당하자 김신욱을 공격수로 기용하는 파격적인 전술을 선택했다.

완벽히 재탄생한 '김호곤의 울산'

아마 김호곤 감독의 기다림이 없었더라면 김신욱은 지금쯤 수비수로서 힘겨운 경쟁을 펼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009년 헤딩만 잘하는 선수로 평가받은 김신욱은 이후 전폭적인 김호곤 감독의 신뢰를 바탕으로 매년 성장하기 시작했다. '멀대 공격수 거부 반응'이 심한 우리 축구계 정서상 김신욱을 믿고 기용한 김호곤 감독의 용단과 기다림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국가대표로서도 엄청난 메리트를 지닌 이 공격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김신욱의 공격수 보직 변경은 김호곤 감독의 업적 중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김호곤 감독은 2012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곽태휘를 비롯해 마라냥, 에스티벤, 이근호, 이호, 이재성, 고슬기 등 주축 선수들이 대거 팀을 떠난 상황에서 올 시즌 김성환, 한상운, 마스다 등만을 보강하면서도 결국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냈다.

최근 울산 경기에 나선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김호곤 감독의 업적이 또 한 번 느껴진다. 앞서 말한 것처럼 김신욱은 2009년 김정남 감독이 선택했지만 김호곤 감독이 업어키운 선수나 마찬가지다. 김신욱을 제외하고도 주축 선수 중 김호곤 감독 부임 이전부터 울산에 속한 선수는 김승규가 유일하다. 하지만 울산 유소년 팀에서 활약한 김승규는 2006년부터 울산에 속했지만 그 역시도 올 시즌 김호곤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국가대표로까지 성장했다. 이용을 비롯해 김성환과 한상운, 강민수, 김용태, 최보경, 김치곤, 최보경, 마스다, 김승용, 박용지, 하피냐 등 현재 울산의 주전급 선수들은 모두 김호곤 감독의 작품이었다. 재정이 열악한 시민구단과 다르게 울산은 어느 정도 주머니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이들 중 전 소속팀에서 괴물 같은 활약을 펼쳐 막대한 이적료로 울산 유니폼을 입은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의 울산은 전적으로 김호곤 감독의 작품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김호곤 감독은 올 시즌 우승을 확정지었어도 팀을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2005년 이후 8년 만에 울산에 정규리그 우승을 안기고 명예롭게 박수를 받으며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한 것 같다. 시즌 도중에도 특정 인사가 울산 후임 사령탑으로 유력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마지막 한 번의 상대 공격을 막지 못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결과에 책임을 지고 떠나는 모양새가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호곤 감독의 울산 생활 5년을 실패라고 손가락질 할 사람은 없다. 그는 5년 동안 추락하는 명가를 바로 세웠고 아시아 정상에 등극했으며 수비 축구로 비난받던 팀을 매력적인 '철퇴 축구'로 변화시킨 주인공이다. 또한 여기에 한국 축구의 선물이라는 김신욱까지 키워낸 인물이다. 그는 "우승 실패에 책임을 지고 떠난다"고 했지만 우리는 이 한 번의 우승 실패가 아닌 보다 큰 그림을 봤으면 좋겠다.

고정관념 깨운 '베테랑 지도자' 김호곤

김호곤 감독은 나의 고정관념을 깨준 사람이다. 젊고 신선한 지도자만이 대안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 K리그 최고령 감독은 관록이라는 걸 보여줬다. 개성 넘치는 언행과 말끔한 양복 차림의 젊은 지도자만을 바라보던 나에게 중년의 중후한 멋이 무엇인지 보여준 지도자다. 아들보다도 어린 풋내기 칼럼니스트의 무례함이나 실수에도 늘 여유로 대하던 김호곤 감독은 팀을 이끄는 지도력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좋은 감독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보내고 싶지 않지만 하루 하루 피가 마르는 감독 생활을 털어내고 잠시 휴식을 갖고 싶다는 김호곤 감독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아쉽지만 김호곤 감독을 놓아주며 5년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줘 너무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올 시즌 울산은 우승에 실패한 팀이 아니라 다득점 1위, 최소실점 1위를 거둔 자랑스러운 준우승 팀이었고 그 중심에는 김호곤 감독이 있었다. 그가 휘두르던 철퇴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