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K리그 클래식 우승은 포항이 차지했다. 득점왕과 도움왕은 나란히 FC서울의 데얀과 몰리나가 받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 시점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건 다름 아닌 부산 윤성효 감독이다. 부산은 올 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 나간 적도 없고 우승 트로피 하나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그런데 간신히 그룹A에 턱걸이 해 고생만 하던 이 팀의 감독이 올 시즌 K리그가 막을 내린 이 시점에서 이슈의 중심에 있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다. 윤성효 감독이 이끄는 부산이 37라운드 경기에서 울산을 잡으며 포항 우승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38라운드 울산-포항전에서 극적인 결승골을 기록한 포항 김원일도 그의 숭실대 시절 제자였다.

비록 윤성효 감독은 올 시즌 무관에 그쳤음에도 ‘K리그 설계자’라는 별명을 얻기에 충분했다. 포항 팬들은 그에게 넙죽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이 있다. 흔히 우리는 그가 선수 시절 대부분을 수원에서 보냈고 이후 수원 감독까지 맡은 ‘수원의 레전드’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사실 선수 시절 가장 오래 뛴 팀이 바로 포항이었다. 올 시즌 포항 우승을 결정적으로 이끈 윤성효 감독의 포항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다. 오늘은 이 아이러니한 역사의 퍼즐을 맞춰보려 한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던 포항 선수 윤성효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믿음직한 윤성효의 포항 선수 시절 이야기를 지금부터 출발한다.

윤성효의 어쩔 수 없는 선택, 실업팀 입단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윤성효는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김해에서 초등학교 생활을 하던 그는 정식 축구부원도 아니었고 체계적인 축구 교육을 받은 적도 없지만 지역 대회에 나가 준우승의 일등공신이 되면서 정식 축구부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이후 부산으로 전학을 가 동래중에 진학한 윤성효는 축구보다는 공부에 집중했다. 그러다 또 다시 재미로 한 번 출전한 축구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본격적으로 축구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후 김호 감독이 이끄는 동래고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부산 지역에서 꽤 이름을 날린 수비수로 성장했고 대학과 프로팀을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윤성효를 원하는 학교는 연세대였고 프로팀은 포항제철이었다.

'밀당'을 아는 남자 윤성효는 포철 대신 연세대를 선택했다. 하지만 2학년 때까지 주로 측면 수비수로 경기에 나서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3학년이 된 뒤 감독이 바뀌고 줄곧 벤치 신세를 져야 했다. 고학년이 된 후 활약을 하지 못하자 프로 무대에서도 그를 외면했고 결국 윤성효는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팀 한일은행에 입단해야 했다. 동래고 시절 그를 조련했던 김호 감독이 한일은행 지휘봉을 잡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한일은행은 아마추어 신분으로 프로축구 슈퍼리그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비록 한일은행은 아마추어 신분이었지만 윤성효를 비롯해 최덕주, 왕선재, 윤덕여, 이학종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경기에 나선 윤성효는 데뷔 시즌인 1986년 첫해 20경기에 나서 5골 1도움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남겼다.

특히 윤성효는 1986년 3월 프로축구 최대 이변을 연출했다. 당시 허정무와 최강희, 최인영 등 초호화 멤버로 무장한 현대를 상대로 치른 경기에서 갓 성인 무대를 처음 접한 윤성효가 극적인 결승골을 기록하며 현대를 1-0으로 제압하는 최대 이변을 연출한 것이었다. 이때나 지금이나 울산현대는 윤성효 감독이 참 얄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윤성효는 이해 기자단이 선정한 베스트11에 당당히 아마추어 선수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성실한 플레이를 선보인 윤성효는 조민국, 이흥실, 조영증, 최강희, 김평석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는 1987년 활약을 바탕으로 1988년 올림픽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상종가를 치고 있었다. 당시 윤성효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 올림픽팀인 한국B팀 선수로 국가대표팀인 한국A팀을 상대해 준결승전 선제골을 넣는 등 당돌한 모습을 선보여 축구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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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가는 믿음직한 윤성효의 모습. (사진=포항스틸러스)

윤성효, 포철에서 빛나기 시작하다

1987년 시즌 한일은행은 결국 프로 무대에서 물러났지만 이게 오히려 윤성효에게는 지금의 운명을 결정짓는 계기가 됐다. 당시 공격과 수비는 강력했지만 유독 중원이 약했던 포철이 윤성효를 영입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 한 번 윤성효에게 관심을 가졌던 포철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이때부터 윤성효와 포항의 오랜 인연은 시작됐다. 1987년 7월 포철 유니폼을 입은 윤성효는 어마어마한 선수들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최순호를 비롯해 박경훈, 박성화, 이흥실, 이기근, 김상호 등이 바로 그의 동료였다. 하지만 윤성효는 이해 20경기에 나서 공수의 연결고리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고 두 골과 한 개의 도움까지 기록했다. 늘 빛나지 않는 곳에서 궂은 일만 하는 그를 주목하는 팬들은 별로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지도자들이 먼저 알아보는 선수였다. 포철 이회택 감독 역시 윤성효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고 윤성효는 포철에서 뛴 첫해에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1988년 시즌 출발도 좋았다. 올림픽 대표팀에도 꾸준히 발탁됐고 5월 2일 열린 럭키금성과의 경기에서는 결승골을 뽑아내며 골까지 넣는 미드필더로 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시즌 초반 대다수의 경기에 출장해 풀타임 활약했다. 하지만 이때 그에게 커다란 시련이 찾아왔다. 바로 무릎 연골 파열이라는 큰 부상이었다. 초반 7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그는 결국 이 부상으로 선수 생활의 위기를 맞게 됐다. 담당 의사는 “무릎 연골을 다 들어냈으니 이제 축구를 하는 건 힘들 것”이라면서 그의 은퇴를 암시했다. 시즌을 통째로 날린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축구를 그만둬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윤성효는 확실한 재활 치료도 없이 무려 9개월이 넘는 시기 동안 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포철에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중원을 종횡부진 누비던 그는 서서히 잊혀진 존재가 됐고 올림픽 출전의 꿈도 날아갔다. 윤성효는 포철의 이해 우승을 함께 할 수 없었다.

사실상 선수 생활을 마감했던 그는 더뎠지만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1989년 시즌을 앞두고 동계훈련을 하지 못했지만 가볍게 뛰어 보니 몸 상태가 썩 괜찮았고 공을 차는 감각도 나쁘지 않았다. 결국 이회택 감독은 1989년 시즌 개막 전 윤성효를 다시 테스트 해본 뒤 합격 판정을 내렸다. 무릎 연골 대부분을 들어낸 윤성효는 그렇게 9개월여 만에 다시 그라운드에 설 수 있었고 큰 부상을 무색케 하는 대활약을 시작했다. 복귀 두 달 만에 시즌 첫 골을 신고한 윤성효는 이해 22경기에 나서며 완벽한 부활을 알렸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포철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본선 진출을 노리며 꾸려진 성인 대표팀에서 윤성효를 발탁한 것이었다. 포철에서 대표팀으로 자리를 옮긴 이회택 감독의 선택이었다.

'포철의 레전드'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선수

윤성효가 박경훈과 최강희, 최순호, 김주성, 변병주, 정용환, 김상호 등 당시 최고의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생애 첫 성인 대표팀에 발탁된 이때 한 앳된 대학생도 생애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 바로 건국대에 재학 중이던 황선홍이었다. 윤성효는 황선홍과의 첫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대학 최고 공격수 선홍이구나.” 올 시즌 포항의 우승을 극적으로 도왔던 윤성효 감독과 포항의 수장으로 도움을 받은 황선홍 감독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윤성효는 대표팀에서 윤덕여 등에 밀려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경기에 한 차례도 나서지 못했다. 또한 당시 대표팀이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 무패 행진을 이어가는 등 워낙 탄탄한 전력을 갖추고 있던 터라 주전 선수들에 대한 변화 여론도 그리 크지 않을 때였다. 어찌 됐건 윤성효는 포철에서 성장해 대표팀 문턱까지 넘은 선수가 됐다.

그는 이후 포철의 붙박이 주전 선수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991년 21경기에 나선 그는 1992년 무려 33경기에 출장하며 헌신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다. 170cm의 작은 키로 중원의 활발히 누비며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포철에는 이제 막 군대에서 제대한 새내기가 활약할 때였다. 바로 홍명보였다. 당시 경험이 부족했던 홍명보는 수비 라인을 진두지휘하는 윤성효와 함께 탄탄한 수비진을 구축했고 7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는 등 일화와 경쟁 끝에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하게 됐다. 당시에도 묵묵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실한 플레이를 선보였던 윤성효에 비해 주목받는 이는 사상 최초로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수상한 홍명보를 비롯해 박태하, 최문식, 박창현 등 화려한 선수들이었다. 대표팀에 발탁된 적은 있어도 제대로 된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고 항상 궂은 일만 하는 서른 살의 윤성효를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윤성효는 전담마크의 귀재였다. 본인 스스로 선수 생활 이야기를 할 때면 이런 말을 한다. “한 번 제가 맡은 선수는 끝까지 놓치지 않습니다. 제가 전담으로 마크한 선수가 골을 넣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죠.” 악착 같은 수비 능력을 선보인 윤성효는 1993년에는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34경기에 나서며 또 한 번 포철의 아디다스컵 우승에 기여했다. 그는 한국 축구 최고 명문 포철이라는 대단한 팀에서 주장 완장까지 차는 등 7년 동안 162경기에 나서 6골과 8개의 도움을 기록한 ‘포항의 레전드’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선수였다. 윤성효는 1993년에는 독일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황선홍과 포철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새로운 인연을 시작하기도 했다. 이후 1994년 대우로얄즈로 이적했던 윤성효는 1996년 수원으로 팀을 옮겨 1998년까지 뛴 뒤 은퇴했다가 2000년 잠깐 현역으로 복귀해 세 경기를 더 치렀다. 수원에서 뛴 해보다 포철에서 뛴 해가 훨씬 더 길었고 활약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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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효 감독의 부산은 올 시즌 K리그 클래식 판도를 뒤흔들었다. (사진=부산아이파크)

포항 우승 드라마는 윤성효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늘 성실했던 선수였다. 1999년 수원에서 은퇴한 뒤 2군 코치 생활을 할 때에는 스타 군단에서 2군을 전전하는 선수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선수들과 똑같이 훈련하고 직접 자신이 2군 경기에 나서는 등 솔선수범하기도 했다. 동래고와 한일은행을 거쳐 수원에서 다시 윤성효와 만났던 김호 감독은 그의 이런 행동을 높이 평가하며 2000년 수원이 위기에 맞은 순간 그를 은퇴 2년 만에 파격적으로 다시 복귀시킬 정도였다. 얼마 전 만난 김호 감독은 30년 가까운 지도자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로 단연 윤성효를 꼽기도 했다. 김호 감독은 윤성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참 순수한 선수였어. 오로지 축구만 생각했고 축구에 대한 열정이 넘쳤지.”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윤성효를 1994년 미국 월드컵에 데리고 갔을 것 같아. 그 친구가 참 패스도 잘하고 수비력도 있고 노련했거든. 걔를 뽑고 싶었는데 내 제자라서 말이 나올까봐 안 뽑았지. 그게 참 아쉬워.”

수원 시절 윤성효 감독의 능력에 대해서는 엇갈린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올 시즌 부산에서 보여준 윤성효 감독의 능력은 흥미로웠다. 비록 우승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지만 스플릿 시스템을 앞둔 시점에서 부산이 포항을 극적으로 제압하며 그룹A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 K리그 클래식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또한 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남은 시점에서 ‘대어’ 울산을 잡으며 포항 우승의 단초를 마련한 것도 바로 윤성효 감독의 부산이었다. 이렇게 K리그를 혼돈으로 몰아넣고 결국 포항 우승에 숨은 공신이 된 윤성효 감독이 과거 현역 시절 포철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다는 점은 그래서 더 새롭다. 현역 생활 내내 화려한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늘 어두운 곳에서 힘든 일을 도맡아 했지만 포철을 기억하는 올드팬이 아니라면 그의 공헌 역시 잊혀진 시대가 됐다. 하지만 오늘 한 번쯤은 ‘축구선수 윤성효’의 포철 시절을 한 번 되돌아 보는 건 어떨까. 올 시즌 완성된 K리그 드라마의 첫 퍼즐은 이미 1987년 25살의 청년 윤성효의 손에서부터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