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강하다. 2011년 그가 인천유나이티드에 입단한다고 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저 은퇴를 앞둔 나이 많은 백업 골키퍼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는 K리그에서 뛴 지난 8년 동안 서른 경기에 나선 게 전부인 선수였다. 하지만 36세인 그는 이제야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인천유나이티드에 없어선 안 될 선수로 자리매김한 골키퍼 권정혁에 관한 이야기다. 뒤늦게 팬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이 사연 많은 골키퍼를 직접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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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준 권정혁.

반갑다. 최근 컨디션은 어떤가.

늘 좋다. 시즌 초와 비교해 다를 게 없다. 체력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상태다.

늦었지만 일단 인천의 그룹A 진출을 축하한다.

고맙다. 하지만 팀이 그룹A에 진출한 뒤 다소 긴장이 풀린 것 같다. 그 전에는 살얼음판을 걷다 보니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한순간 선수단 분위기가 풀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아직 남은 열 경기가 무척이나 중요해 다시 한 번 해보자는 분위기다.

얼마 전 전북과의 경기에서 케빈과 충돌해 부상을 당했는데 부상 부위는 어떤가.

큰 부상이 아니라 단순한 충돌이었다. 케빈이 굉장히 적극적이고 투지 넘치면서도 투박한 스타일인데 세트피스 상황에서 케빈과 충돌하고 말았다. 전북과 경기를 할 때면 나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많이 고생한다. 전북은 키가 큰 선수도 많고 K리그에서 가장 피지컬이 뛰어난 팀이다.

과거 케빈이 대전에 있을 때 나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케빈은 “인천이 축구를 거칠게 한다”면서 “다음에 만나면 꼭 복수를 하겠다”고 했다.

케빈이 우리하고 경기할 때 두 번이나 다친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케빈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당시 케빈을 거칠게 다뤘던 선수가 지금 자기와 같이 전북에서 뛰고 있는 (정)인환이다. 이제 우리하고의 악연은 잊고 인환이하고 알아서 잘 해결했으면 좋겠다. 우리 인천을 떠난 일이다.

알겠다. 케빈과 정인환을 이간질하는 당신의 발언, 잘 전달하겠다. 당신은 늘 그라운드보다 벤치가 익숙한 선수였다.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시절 이야기부터 한 번 해보자.

2001년 울산에 입단해 4년 동안 정규리그 15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다. 그나마 상무에 있던 2006년 막판에만 잠시 주전으로 뛰었을 뿐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한 적은 없었다. 프로라는 무대가 참 쉽지 않은 곳이고 늘 좋은 팀에 있어 쟁쟁한 상대들과 경쟁해야 했지만 아쉬움보다는 늘 그들과 함께 해서 좋았던 점을 떠올렸다. 경기에 나서지 못한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진작 축구를 그만뒀을 것 같다. 경기에 나서지 못하더라도 내가 할 일은 많다. 계속 기량을 연마하는 게 프로 선수로서 할 일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해서 하는 일 아닌가. ‘다음 번에는 나한테 기회가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준비하고 기다렸다.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며 K리그에서 기다린 시간이 무척이나 길었다. 상무에서 제대한 뒤 2007년 포항으로 이적했지만 1년 동안 딱 정규리그에서 한 경기를 뛴 게 전부였다.

제대를 한 뒤 새 팀을 찾고 있는데 여러 곳에서 제의가 왔다. 그런데 에이전트가 “포항이 널 원한다. 파리아스 감독님이 널 찾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지도자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팀을 우선적으로 고려했고 포항과 계약했는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어떤 문제였나. 당시 포항에는 정성룡과 신화용 등 쟁쟁한 선수들이 경쟁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 문제 때문이었나.

아니다. 막상 포항에 가보니 에이전트 말과 다르더라. 알고 봤더니 파리아스 감독님은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고 계셨다. 내가 뛴 경기를 본 적도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바로 ‘아, 이번 선택은 잘못 됐구나’라고 느꼈지만 후회해도 변하는 건 없지 않나. 그래서 1년을 꾹 참고 열심히 했다.

그래도 한 경기라도 뛴 게 어딘가. 이듬해 이적한 서울에서는 1년 동안 단 한 경기에도 나서지 못했다. 점점 더 최악이다.

포항에서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지만 그래도 운동은 열심히 했다. 그런데 너무 무리했는지 몸이 많이 상했더라. 서울로 이적했는데 발목과 무릎 등 안 아픈 데가 없었다. 경기에 나서지 못했을 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부상을 당해 제대로 훈련을 하지 못하던 이 시기는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당시 서울 코치진이 잘 챙겨줬다. 특히 당시 최용수 트레이너…. 특별히 잘못 해주지는 않았으니 잘해준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8년 동안 정규리그 서른 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던 당신은 2009년 서른 두 살의 적지 않은 나이로 핀란드에 진출했다. 특히나 핀란드 진출 직전 2년 동안은 단 한 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을 정도로 자신감이 떨어져 있었을 텐데 어떤 생각으로 유럽에 도전하게 됐나.

에이전트를 통해 핀란드에 가자는 이야기를 먼저 들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북유럽 축구와 생활을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더군다나 핀란드는 외국인 쿼터가 아예 없어서 골키퍼도 진출하기가 수월했다. 아마 리그 수준이 높았다면 더 비싼 외국인 선수를 데려다 썼겠지만 수준도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해 도전해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골키퍼는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는 자신 있었나.

북유럽 사람들은 영어를 굉장히 잘한다. 어느 정도 영어만 할 줄 알면 굶어죽지는 않는다. 나도 학창시절부터 언어 영역에는 자신이 있었고 대학교에서도 언어 과목 만큼은 꾸준히 공부를 해왔다.

보통 체육특기자들과 다르게 당신은 고려대에 진학해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이거 사실 무늬만 고려대 신방과 아닌가.

공부를 해 고려대 신방과에 온 친구들은 다들 엄청난 수재다. 그 친구들에 비해 아예 기초가 부족한 수학은 상대가 안 됐지만 영어나 국어 등은 나름대로 나도 괜찮았다. 아주 공부를 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학점이 잘 나왔을 때는 3.3점까지도 나왔다.

대학 시절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받은 나에게는 당신도 수재다.

친척 분들이 미국에 사시는데 어릴 때부터 공부를 다 하고 남은 시간에 운동을 하는 외국 체육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나는 운이 좋아서 지금까지 축구를 하고 있지만 운동을 직업 삼아 오랜 시간 활동할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다.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가는 건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고 프로 무대에 입성한 선수들도 2년 안에 85%가 그만둔다. 나머지 15%만 조금 오래 운동을 하는 거다. 그래서 축구를 하면서도 공부에도 늘 신경을 썼다.

사실 학교에서의 영어 공부는 핑계라고 알고 있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영어 공부랍시고 외국인 여성에게 접근했다는 첩보를 전해 들었다.

아니. 그런 걸 당신에게 이야기 해준 사람이 누구인가.

당신 주변에 다 내 정보원이 있다.

외국인 이성까지는 아니고 정말 말 그대로 순수한 외국인들이었다. 그저 성별이 여자였을 뿐이다. 아니, 그리고 솔직히 남자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나. 이성을 만나야 서로 호기심도 생기고 영어가 늘지 않겠나. 그래서 그런 거였다.

그 비법을 자세히 좀 알려 달라. 나도 좀 써먹어 보고 싶다.

외국어는 서로 관심이 있어야 나도 말을 하려고 하고 상대방도 들어준다. 그게 중요한 거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지만 나도 이제 결혼을 했다. 여기까지만 하자.

알겠다. 얼마 전 이싸빅이 나에게 외국인 여성을 소개해준다고 했다.

건투를 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외국인을 만나서 영어를 배운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는 거다. 나는 결국 ‘내가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자극을 받는 걸로 마무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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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로 유럽리그에 골키퍼로 진출한 권정혁(왼쪽)이 발레리 본다렌코 감독과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RoPS 구단)>

다시 핀란드 진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벌써 핀란드는 나라 이름 자체에서도 내가 강원도 화천군에서 2004년 1월에 받았던 혹한기 훈련이 떠오를 정도로 한기가 느껴진다. 정말 추웠나.

겨울이 좀 길긴 하다. 내가 2009년 2월에 핀란드에 처음 갔는데 그때 날씨가 영하 23도였다. 많은 분들이 이런 추운 나라에서 축구를 어떻게 하느냐고 궁금해 하신다. 하지만 핀란드는 체육 시설이 잘 돼 있다. 리그컵처럼 비중이 적은 대회는 2~3월에 모아서 하는데 이런 경기들은 실내 축구장에서 치르고 그나마 조금 덜 추워지는 4월이 되어야 정규리그를 야외 축구장에서 시작해 10월에 마무리한다. 다른 유럽 리그 일정과는 조금 다르다. 나도 적응되니까 별로 춥지는 않더라. 그런데 핀란드 사람들은 영상 20도만 돼도 덥다고 에어컨을 틀고 난리를 친다.

국내 골키퍼 유럽 진출 1호로서 그 역사적인 데뷔전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할 것 같다.

잊을 수 없는 경기였다. RoPS라는 팀 유니폼을 입고 데뷔전에서 경기 시작 3분 만에 큰 충돌을 겪었다. 덩치가 굉장히 큰 상대 공격수가 돌진하는 상황에서 내가 몸을 날렸는데 상대방이 내 얼굴을 발로 가격한 것이었다. 인중 부분을 정확히 강타 당했다. 아마 조금만 위에 맞았어도 코뼈가 으스러졌을 것이고 조금만 밑을 가격 당했어도 이가 다 부러졌을 것이다. 굉장히 고통스러웠는데 내 인중이 그렇게 강한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데뷔전부터 대단한 수난이었다.

난 내가 당하는 순간 상대가 일부러 그랬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건 심판이 퇴장은커녕 경고도 주지 않는 거다. 그 팀은 전년도 우승팀이었고 우리는 약체였다. 거기다가 나는 동양에서 온 아무도 모르는 선수였다. 그때부터 오기가 생기고 정신이 번쩍 들더라. 비록 경기에서는 졌지만 나름대로는 괜찮은 플레이를 했다고 생각한다.

직접 부딪혀 본 핀란드 리그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나. 알기 쉽게 K리그에 빗대 설명해 주면 좋을 것 같다.

HJK 헬싱키라는 팀이 독주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리트마넨을 배출한 이 팀은 우승 23회, 핀란드 컵 우승 10회, 핀란드 리그 컵 우승 4회 등을 거두며 늘 압도적인 1위를 거두고 있다. 내가 직접 부딪혀 본 경험으로는 2011년 전북 정도의 전력인 것 같다. 그리고 나머지 팀은 K리그에서 중하위권 수준이다. 우리로 치면 상위권 팀들이 다 빠지고 전북만 남아서 중하위권 팀과 리그를 치른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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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VPS 구단으로 이적해 동료들과 기념 촬영을 한 권정혁의 모습. (사진=VPS 구단)

당신이 핀란드에서 치른 경기 중 최고의 경기는 무엇이었나.

RoPS에서 VPS로 이적해 치른 2010년 핀란드 FA컵이었다. 2-1로 이긴 경기였는데 내가 굉장히 잘했다. 상대가 강팀이었지만 내가 선방을 많이 했고 그날 따라 내 롱패스가 정확히 다 우리 공격수들한테 연결되는 거였다. 그런데 아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 경기를 모를 거다. 혼자 만족하는 경기다.

비록 어떤 경기에서 얼마 만큼 활약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당신이 핀란드에서 꽤 인정받는 선수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핀란드 최대 스포츠 매거진에서 매 경기마다 선수들한테 평점을 매기고 시즌이 끝나면 그걸 합산해 각 포지션별로 베스트11을 뽑는다. 2010년 시즌 막판까지 나와 경쟁하던 골키퍼가 있었는데 마지막 경기에서 내가 잘해 그 선수를 이기고 베스트11에 올랐고 전체 선수 평점 순위에서 7위에 올랐다. 핀란드 전국 일간지에서 선정하는 시즌 베스트11에도 선정됐다. 내가 뛰던 팀이 5~6만이 사는 작은 도시를 연고로 하고 있었는데 동양인이 거의 없다보니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많이 알아봐 주시더라. 그런데 동양인이 생소해 나이를 잘 모르고 내 나이보다 6~7살 어리게 봐주셔서 무척 좋았다. 핀란드 여고생들한테 인기가 좋았다.

당신 그러다가 발목에 보호대 대신 발찌를 차는 수가 있다. 말조심 하자. 유럽 진출 골키퍼 1호로서 더 큰 무대를 꿈꾸고 있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마디 해달라.

일단 언어 문제가 크다. 영어만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면 축구가 만국공통어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다. 이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만 먹으면 갈 곳은 많다. (김)승규나 (이)범영이처럼 어리고 재능 넘치는 친구들이 돈을 떠나 더 좋은 리그에 가서 배워보면 더 큰 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해외 생활은 참 외롭다. 첫 해에는 부모님과 함께 있어서 큰 걱정이 없었는데 두 시즌 째 접어들고 혼자 생활하던 마지막 석 달은 향수병이 생기더라. 아침에 운동하고 점심 먹고 낮잠 자고 운동하고 저녁 먹고 자전거 타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가족과 함께 간다면 적응이 더 쉬울 것이다.

그래도 당신 덕분에 가족들은 1년 동안 평생 가보기도 어려운 핀란드에서 좋은 관광 많이 했을 것 같다.

그렇다. 그리고 핀란드에 있다 왔다고 하면 다들 ‘자일리톨’ 이야기 떠내는데 거기도 한국하고 다른 건 별로 없다. 영어식 ‘자일리톨’이 아니라 핀란드식으로 ‘쉴리톨’이라고 부르는데 그냥 광고 때문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 같다. 자기 전에 씹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으니 이제 이런 질문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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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혁은 2011년 인천에 입단해 마침내 K리그에서의 오랜 벤치 생활을 청산했다. (사진=인천유나이티드)

알겠다. 나도 그 질문은 있었는데 지우겠다. 당신은 8년간 K리그에서 뛴 서른 경기보다 2년간 핀란드에서 뛴 경기(42경기)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당신은 이후 조용히 은퇴한 걸로 알려져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는데 나는 은퇴를 한 적이 없다. 핀란드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스웨덴 구단에서 제의가 와 현지로 날아갔었는데 문제가 꼬여 결국 계약을 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 공백이 한 6개월 정도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소속팀이 없었으니 기자분들이 은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은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나. 그만두면 그냥 그만두는 거지.

에이, 당신은 성대한 은퇴식을 치러도 충분한 선수로 자리매김 했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뒤 성남일화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성남에서는 뽑기도 한 다른 골키퍼가 있었고 나는 그냥 운동만 하다 나왔다. 아마 내가 그때 몸 상태가 좋았으면 성남에서도 뽑았겠지만 잠시 공백이 있어 그리 좋은 몸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도 덕분에 성남에서 운동에 집중하고 몸을 만들 수가 있었다.

지금 성남 전상욱도 잘해주고 있지만 당신을 놓쳤다는 사실에 무척 아쉬워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인천에는 어떻게 입단하게 된 건가.

핀란드에서 돌아올 때 인천과도 이야기가 있었다. 허정무 감독님과 의견을 주고 받았는데 연봉 차이가 있어 계약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골키퍼가 부족한 인천에서 계속 구애를 했고 내 고향이 인천이어서 마음이 갔다. 머나먼 핀란드까지 갔었는데 이제는 집에서 출퇴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좋았다.

2011년 인천에 처음 온 뒤 어떤 생각이 들었나.

허정무 감독님이 너무 변해있어서 놀랐다. 1999년 당시 올림픽 대표팀에서 만났던 허정무 감독님은 해병대 호랑이 조교처럼 무서웠다. 사실 인천과 계약하면서 가장 겁이 났던 게 허정무 감독님과 다시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1년 다시 만난 허정무 감독님은 너무 인자하고 부드러워지셨다. 또한 초등학교부터 부평고등학교까지 늘 함께 했던 1년 선배 (김)남일이형과 다시 만났다는 것도 반가웠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같은 학교에서 축구를 했으면 누구보다 김남일에 대해 잘 알 것 같다. 김남일은 어떤 꼬마였나.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남일이형을 봐 왔는데 개구쟁이였고 어디든 잘 돌아다니는 스타일이었다. 재미있는 형이었다. 그런데 덩치 크고 후배를 괴롭히는 형들을 굉장히 싫어하고 늘 후배를 잘 챙겨줬다. 후배들이 다 좋아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남일이형이 1년 동안 축구를 그만둔다고 하고 축구부를 나갔었는데 그때 172cm였던 형이 1년 쉬고 181cm가 되어서 돌아온 기억도 난다.

나는 1년이 아니라 평생 운동을 쉬었는데 키가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렇게 작아보이진 않는다.

내가 앉은 키는 당신과 비슷하다.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컸나.

원래 쭉 컸다. 지금 키는 192.7cm다.

저런, 나한테 10cm를 줘도 나보다 당신이 더 크다.

줄 생각은 없다.

나도 받을 생각은 없다. 그런데 당신은 올해 인천에서 세 시즌째 뛰고 있다. 인천만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큰 돈은 안 주지만 선수들을 무척 편하게 대해준다. 감독님부터 그런 마인드가 몸에 배어 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정.말.큰.돈.은.안.주.지.만.

네이트 역시 마찬가지다. 나같은 칼럼니스트를 무척 편하게 대해준다. 정.말.큰.돈.은.안.주.지.만. 그렇다면 인천의 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건 내가 만약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 말해주겠다.

뭔가. 또 이적할 생각인가.

안 옮기면 비밀로 묻어두려고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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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혁은 이제 인천에서 없어선 안 될 선수로 완벽히 자리매김했다. (사진=인천유나이티드)

알겠다. 평생 당신으로부터 인천의 단점을 들을 기회가 없었으면 좋겠다. 지난 7월 당신은 제주와의 원정경기에서 무려 85m짜리 초장거리 골을 성공시켰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나.

상대방 공격 상황에서 내가 그걸 잡은 다음에 굴려 놓고 킥을 준비하고 있었다. 멀리 (설)기현이가 손을 들고 있는 게 보여 기현이를 향해 찼다. 그런데 너무 잘못 맞았는지 잘 맞았는지 공이 기현이를 넘어가더라. 그래서 ‘잘못 찼네’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공이 쭉 뻗어나가더니 제주 골키퍼 키를 넘겨 골이 되고 말았다. 기분이 무척 좋았는데 골 세리머니를 하면 경기력이 흔들릴 거 같아서 자중했다. 사실 내가 골 세리머니를 생각해 본 적이 있겠나. 늘 상대방한테 골 먹고 세리머니 당한 적만 있지.

그건 그렇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경기 도중 팀 동료인 이윤표와 다투는 일도 있었다. 같은 팀끼리 밀치고 다투는 모습은 참 생소했고 보기에도 별로 좋지 않았다.

나도 그렇고 수비진도 그렇고 그전부터 불필요한 세트피스를 내주고 위기를 허용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우리가 심판 판정에 억울하게 당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전에 일단 그런 빌미조차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윤표한테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고 그 친구도 내 의견에 대해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다가 충돌하고 말았다. 경기를 잘하려고, 이기려고 하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그 이후 어떻게 됐나.

바로 윤표한테 미안하다고 했고 윤표도 쿨하게 사과를 받아주더라. 선배니까 내가 좀 더 참았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했다. 나한테 일어난 일은 다 내 탓 아닌가.

나는 당신의 최근 활약상을 보면 늦은 나이지만 지금이 전성기인 것 같다. 당신이 생각하는 전성기는 언제인가. 지금인가.

핀란드에서 뛰던 2010년이 전성기라고 생각하는데 지금도 몸 상태가 좋아 더 욕심이 난다. 작년보다 올해 운동을 더 많이 하고 있다. (김)병지형이나 (최)은성이형처럼 오래 활약할 수도 있지만 또 당장 언제 그만둘지도 모르는 게 나같은 노장 골키퍼의 운명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보다 먹는 거나 자는 거를 더 신경 쓰고 모든 일상도 어렸을 때보다 더 운동에 맞춰져 있다. 외국에도 많은 나이를 무릅쓰고 활약하는 선수들이 많다. 병지형이나 은성이형도 있는데 내가 나이 이야기하면 어린 놈이 까분다고 할 거다.

국가대표에 대한 욕심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최근 활약이 뛰어나다. 이거 우리 엄마한테 늦둥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좀 그렇기는 하지만 솔직히 국가대표에 대한 욕심은 없나.

1996년 청소년 대표팀에 뽑혔었고 올림픽 대표팀에도 발탁됐었지만 정작 성인 대표팀에는 히딩크 감독님이 지휘하시던 2002년 골드컵 엔트리에 포함된 후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다. 대표팀에 뽑히는 건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울산의 (김)승규가 참 잘 됐으면 좋겠고 그렇게 되고 있어 기분이 좋다. 내가 울산에 있을 때 울산이 처음으로 유소년 팀에 받은 친구가 바로 승규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내 방에 와서 놀던 녀석인데 훌쩍 커서 대표팀에서 뛰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 물론 대표팀에서 나를 불러주면 가긴 갈 거다.

돌이켜보면 가장 행복했을 때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

2008년 다친 몸으로 서울에 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경기에는 나서지 못해도 운동이라도 하면 괜찮은데 절뚝거리면서 운동도 못 할 때는 정말 괴로웠다. 반대로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뛰어보고 싶었는데 비록 빅리그는 아니지만 핀란드에서 뛰는 동안에는 꿈을 이룬 것 같아 참 행복했다.

그렇다면 올 시즌 목표는 무엇인가.

부상 없이 이번 시즌이 끝날 때까지 팀과 함께 가는 게 가장 큰 목표다. 지금 3/4을 마무리했고 1/4이 남았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부상 없이 마무리를 잘 했으면 좋겠다. 또한 인천이 내년에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고 말고를 떠나 올해보다 내년에 더 성장할 수 있는 팀이 됐으면 좋겠다.

마지막 질문이다. 그렇다면 선수로서의 마지막 목표는 무엇인가.

남은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루 하루,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면 내년에도 선수로 뛸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거창한 꿈을 꾸기 보다는 다음 경기에서도 잘할 수 있도록 이 부분에만 신경을 쓰려고 한다.

8년 동안 정규리그 서른 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던 이 무명의 노장 골키퍼는 2011년 중순 인천에 합류해 지금까지 50경기에 나서 눈부신 선방을 보여주며 진정한 전성시대를 열었다. 누구보다 오랜 시간 음지에서 늘 묵묵히 땀을 흘리던 권정혁이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 빛나는 건 아닐까. 비록 늦은 나이에 관심을 받기 시작했지만 그래서 더 권정혁의 전성시대가 특별하다. 그가 오래 오래 K리그에 남아 김병지와 최은성에 버금가는 ‘전설’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