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물리 선생님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저 선생님의 행동 하나 하나에 불만을 가졌다. 한 번은 수업 시간에 자율학습을 시켜놓고 자리를 비운 물리 선생님을 향해 반 친구들이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물론 수업보다 자율학습을 좋아하는 나는 이때 별로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물리 선생님의 아내분이 급하게 사고를 당하셔서 부랴부랴 병원으로 가신 거였다. 우리는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 무척이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물리와 담을 쌓은 나는 물리 선생님으로부터 ‘F=ma’ 같은 공식은 배우지 못했지만 세상 무슨 일이건 전후사정과 이유를 알고 나면 그 결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법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오는 6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아이티와 평가전을 치를 예정이다. 이 평가전을 두고 일부에서는 불만을 나타내기도 한다. 가장 큰 오해가 아이티를 스페인에 0-10으로 대패한 타히티와 헷갈린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도 아이티는 그저 대지진으로 힘겨워하는 약소국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지금껏 한 번도 이긴 적 없는 대표팀이 억지로라도 첫 승을 거두기 위해 약한 상대를, 그것도 원정이 아닌 안방에서 상대한다는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를 거론하기에 앞서 현재 대표팀이 처한 상황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 평가전에 대해 비판하려면 우리가 아이티를 안방으로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먼저 떠올려 봐야 한다. 이 평가전을 까려거든 제대로 알고 까야한다.

이란의 배신, ‘A매치 미아’가 된 한국

마음 같아선 지금 스페인이나 아르헨티나 원정을 떠나 그들과 정면대결하면 참 좋겠다. 일방적인 한국팀 응원을 받는 곳이 아니라 한국 선수들이 공만 잡아도 귀청이 떨어질 듯한 야유를 받는 곳에서 적응력을 키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이다. 나 역시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스파링 파트너를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대륙별 예선 중 가장 먼저 끝난 곳이 아시아다. 한국이 아이티와 평가전을 잡은 9월 6일은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 북중미 등 다른 대륙의 월드컵 예선이 열리는 날이다. 이미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우리와 다르게 아시아를 뺀 전세계는 우리만 ‘왕따’ 시켜놓고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당연히 평가전 상대 범위가 급격히 좁혀질 수밖에 없다. 월드컵 개최로 자동출전권을 따내 이날 경기가 없는 팀 중 최상의 파트너인 브라질은 이미 호주와의 평가전을 일찌감치 확정지었다. 더군다나 호주는 브라질까지 날아가야 한다. 한국으로서는 해외파는 물론 한창 스플릿 경쟁을 치러 체력적으로 버거운 K리그 선수들에게도 브라질 원정이 불가능한 일정이다.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국가는 이미 지역별 예선에서 탈락했거나 예선을 마친 아시아 몇몇 국가들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수준을 놓고 본다면 아시아에서는 이란, 쿠웨이트, 사우디, 일본, 북한 정도가 우리의 적합한 스파링 파트너일 것이다. 실제로 대한축구협회는 아이티와의 평가전을 잡기 전 이란과의 평가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이 꼬였다. 지난 7월 일찌감치 이란과 평가전을 치르자는 합의문까지 작성했지만 이란은 평가전이 한 달 남은 시점에서 돌연 이 평가전을 취소해 버렸다. 이란 대표팀 일정 때문에 평가전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평가전이 한 달 남은 시점에서 이런 일을 당한 협회로서는 부랴부랴 다른 상대를 찾아야 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A매치 데이를 맞아 월드컵 예선을 치러야 하는 나라가 대다수인 시점에 그렇지 않은 나라들 역시 대부분이 평가전 일정을 확정지은 상황이었다. 그 사이 협회는 이라크, 쿠웨이트,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접촉했지만 이라크는 요르단과, 쿠웨이트는 북한과 평가전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우리로서는 갑자기 ‘평가전 미아’가 된 셈이다.

아이티, 현 상황에서는 적합한 상대

스파링 파트너 범위는 더욱 줄었다. 그렇다고 올 해 몇 번 남지 않은 A매치 데이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현실적으로 한국이 택할 수 있는 A매치 상대는 이미 월드컵 북중미 예선에서 탈락한 몇몇 나라들 뿐이었다.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탈락한 팀 중 그나마 강팀을 찾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자, 골라보자. 아이티, 과테말라, 앤티가 바부다, 엘살바도르, 가이아나, 캐나다, 쿠바 등에서 선택해야 한다. 부루마블을 열심히 하는 이들에게도 생소한 나라들 뿐이다. 그나마 한국은 이중 과테말라보다 최근 나은 경기력을 보이고 FIFA 랭킹에서도 더 높은 아이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협회의 평가전 상대 선택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는데도 그저 상대가 아이티라는 이유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이란이나 쿠웨이트, 북한 등과 비교해 봤을 때 생소한 아이티가 우리 상대로는 더 적합하지 않을까.

일부에서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안방에서만 편하게 경기를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국은 아이티와 평가전을 치르고 나흘 뒤 안방에서 FIFA 랭킹 8위인 크로아티아와 또 한 번 평가전을 펼친다. 10월에는 홈에서 브라질, 말리 등과 격돌한다. 국내파와 해외파의 일정상 도저히 원정 평가전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안방에서 모의고사를 치른다. 그래도 브라질과 맞붙는 게 어디인가. 이후 한국은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11월 벨기에와 러시아, 포르투갈 등과 원정 평가전을 치르기 위해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 지금은 처한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대를 안방으로 불러들이지만 11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월드컵 체제로 전환해 해외로 나간다. 지금 당장 강팀과 원정 평가전을 치르지 않는다고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때가 되면 다 나가게 돼 있다.

또한 내년 1월이 되면 대표팀은 브라질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아마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면 말짱 도루묵이었겠지만 아시아 최종예선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2월에 협회는 직원을 브라질 현지로 파견해 이미 훈련장까지 점검을 마쳤다. 명절을 앞두고 기차표가 동이 나는 것처럼 시간이 촉박한 상황에서 브라질 전지훈련을 준비할 경우 좋은 훈련장을 다른 나라에서 선점할까봐 미리 미리 준비했다. 한국은 브라질과 미국 등에서 3주 간의 전지훈련을 가지며 현지에서 평가전을 치를 예정이다. 또한 올 12월 월드컵 본선 조 추첨이 마무리 되면 그때는 스파링 파트너를 구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진다. 일본, 이란, 호주 등과 한 조가 된 팀은 같은 대륙의 한국을 좋은 평가전 상대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지난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과 한 조가 된 그리스는 북한과 평가전을 치렀다. 이때부터는 아이티 같은 약체가 아닌 강호들과 겨룰 수 있다.

‘약체(?)’ 아이티전, 까려면 알고 까자

아이티와의 평가전을 그저 약한 상대를 만나 대량 득점하며 첫 승이나 거두는 경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경기는 우리에게도 큰 의미다. 홍명보호가 출범하고 지금껏 K리그와 J리그 선수들을 주축으로 평가전을 치러왔지만 이번 경기부터는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까지 대거 가세해 발을 맞출 예정이다. 우리로서는 아이티라는 상대보다 우리 스스로 얼마나 좋은 호흡을 보여줄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면 좋을 것 같다. 또한 손발을 처음 맞추는 아이티전이 끝나면 지난 경기에서 우리에 0-4 대패를 안긴 크로아티아가 기다리고 있다. 국내파와 해외파가 처음 호흡을 맞추고 크로아티아전을 준비한다는 사정을 따져본다면 아이티도 충분히 우리의 좋은 스파링 파트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아이티는 우리가 혼동하는 타히티처럼 스페인에 0-10으로 패한 팀이 아니라 최근 스페인에 1-2로 패했고 이탈리아와는 2-2로 비긴 만만치 않은 팀이다.

일부에서는 아이티전을 크게 이기지 못하면 마치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벌써부터 걱정을 한다. 물론 대승을 거둔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이는 그저 월드컵 본선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국내파와 해외파가 처음 발을 맞추는데 승패보다는 그 과정을 더 중시했으면 좋겠다. 이미 동아시안컵을 통해 홍명보호가 출범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출발은 모든 선수들을 소집할 수 있는 이제부터다. 10월에 브라질을 만나고 11월부터 강팀과의 해외 평가전을 추진하고 있는 단계에서 아이티전은 승패를 떠나 그 시작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한국 축구에 대한 의미 있고 건전한 비판은 언제든 좋다. 하지만 전후사정을 따지지 않고 그저 강팀과 원정에서 맞붙지 않는다고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는 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질 않는다. 참고로 같은 날 일본은 우리와 비슷한 이유로 아이티(74위)보다 FIFA 랭킹이 낮은 과테말라(93위)와 평가전을 치른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