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악마의 초창기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도 체계적으로 대표팀을 응원하자는 마음으로 뭉친 이들이 1995년 12월 결성한 단체가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였고 이후 이 모임은 붉은악마로 이름을 바꿨다. 역사적인 붉은악마의 탄생이었다. 당시 붉은악마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이들은 K리그 서포터스가 대다수였다. 이들은 평소에는 자기가 지지하는 K리그 팀을 열심히 응원하고 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에는 대표팀 유니폼으로 바꿔 입고 모였다. 2002년 전국 거리를 가득 채운 길거리 응원도 붉은악마가 아니었다면 아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이 변했다. 전체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붉은악마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K리그 팬들 상당수는 이제 대표팀 경기가 열리는 날 골대 뒤로 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K리그 서포터스와 붉은악마를 따로 떼어 놓고 이야기 할 수 없었지만 이제 이 둘을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는 없다. 붉은악마 지역 지부와 해당 연고 K리그 서포터스가 잘 연계된 곳도 있지만 이 두 단체의 관계가 적대적인 곳도 상당수다. 꼭 적대적이지는 않더라도 서로 교류를 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과거처럼 K리그 서포터스가 대표팀 경기가 열리는 날 같은 유니폼을 입고 골대 뒤에 모여 인사를 나누는 광경은 참 오래 전 일이다. K리그 서포터스 따로 붉은악마 따로다.

나는 이제 K리그 서포터스가 대표팀 골대 뒤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국가대표 경기에만 목을 매던 이들에게 “K리그 경기장에도 좀 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반대로도 생각해 봐야 한다. K리그 서포터스가 대표팀 경기 응원에는 깊숙이 관여하지 않으면서 반대의 목소리만 내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초창기 붉은악마를 잘 떠올려 보자. 대표팀 경기에서 북을 치는 건 안양 팬이었고 깃발을 돌리는 건 성남 팬이었고 리딩을 하는 건 수원 팬이었다. 자발적 해체를 선언한 붉은악마에서 K리그 서포터스가 감투를 하나씩 쓰자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대표팀 경기에도 K리그 서포터스가 녹아 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K리그 경기에 집중하다보면 대표팀 경기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건 사실이다. 대표팀 경기만 즐기는 이들보다 K리그 경기를 챙겨보는 내가 더 우월하다는 느낌을 갖는 이들도 있고 1년 내내 즐기는 축구를 어느 한 순간 대표팀 경기에만 혈안이 돼 응원하는 이들에 대한 거부감도 없진 않을 것이다. 내 주변에도 대표팀 경기보다는 자신이 응원하는 K리그 팀 선수 영입에 더 관심이 있는 이들도 많다. 나 역시 대표팀 경기보다는 K리그 경기가 더 흥미로운 게 사실이다. K리그를 즐기며 자연스레 대표팀에 대한 관심이 주는 건 비판할 일이 아니지만 붉은악마의 탄생 배경을 살펴본다면 조금 더 의식적으로 K리그 서포터스가 대표팀 경기에도 관심을 갖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제는 모든 국민이 따라하는 “대~한민국”은 원래 “수~원삼성”이었다. “오 필승 코리아”는 “오 나의 부~천”이었다. 이렇게 K리그 팀 응원가와 구호를 하나씩 따와 결국 대표팀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런 응원 구호는 이제 붉은악마만의 전유물이 됐다. K리그에서 골대 뒤를 지키는 서포터스 상당수는 이제 대표팀 경기장에 아예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열혈 붉은악마가 되는 걸 시시해 한다. 하지만 대표팀 따로, 자국 리그 따로 노는 나라에서는 성숙된 응원 의식이 나올 수 없다. 대표팀만 응원하는 사람들을 K리그 팬으로 끌어 들여 이런 문화를 구축하는 게 한계가 있다면 반대로 K리그 팬들이 다시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건 어떨까.

K리그 팬들은 응원하는 팀의 선수가 대표팀에 차출되면 ‘보낸다’는 생각이 강하다. 이 선수가 대표팀 한 경기에서 부진해 온갖 비난에 시달리면 그걸 지켜보며 마음 아파한다. “저 선수 원래 우리 팀에서는 되게 잘하는데…”라며 아쉬워한다. 하지만 K리그 서포터스가 붉은악마가 된다면 어떨까. 경기장에서 그 선수의 이름을 크게 외쳐주는 게 오히려 더 확실한 응원 아닐까. 응원하는 팀 선수가 대표팀에 차출되면 ‘보내는’ 게 아니라 ‘따라가야’ 한다. 나도 1999년부터 붉은악마 활동을 실제로 해온 사람이다. 대표팀 경기가 열리는 날 골대 뒤에 가면 “왔어? 지난 번 리그 경기에서는 너무 했어”라며 악수하고 깃발을 돌리는 형들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세상은 변했고 자연스레 K리그 서포터스는 붉은악마에서 퇴장했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초창기 붉은악마를 주도했던 K리그 서포터스는 응원 문화에 대한 의식도 대단했다. 당시 광화문 광장에서는 아무리 규모가 작은 대표팀 경기라도 꼭 몇 명의 붉은악마가 북을 들고 전광판을 보며 응원을 했다. 지다가는 사람들이 “쟤네 뭐야?”라는 시선을 보내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 결국 2002년 시청 앞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 차게 된 것이다. 그저 2002년에 정부나 대한축구협회, 서울시가 주도해 “시청 앞으로 모이세요”라고 공지를 한 게 아니다. K리그 서포터스가 한국 축구 응원 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이 그저 K리그라는 울타리 안에만 있을 게 아니라 다시 대표팀 경기장으로 와 초창기 붉은악마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매 경기 허를 찌르는 카드섹션을 선보였던 붉은악마의 메시지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은 지대했다. 붉은악마에서는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며 경기 당일까지 일체 카드섹션에 대한 정보를 노출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마지막 경기였던 터키전에서 붉은악마의 카드섹션에 새겨진 마지막 메시지는 ‘CU@K리그’였다. 붉은악마와 K리그를 따로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다. 이제 그들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 대표팀 경기만 보는 사람들에게 “K리그도 보러 오라”고 할 게 아니라 그들 속에서 함께 어우러져 붉은악마의 탄생 의미를 되새기는 건 어떨까. 이제는 K리그 팬들을 향해 ‘CU@A매치’를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