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노우진 “친구 차두리, 고3시절부터 이미 로봇”


노우진

송종국과 차두리, 그리고 조원희. 한국 축구의 한 획을 그은 선수들과 학창시절 같은 꿈을 꿨던 팀 동료는 지금 개그맨이 돼 우리를 즐겁게 하고 있다. 그는 텔레비전 어디에서도 축구선수 시절 이야기를 자세히 한 적이 없다. 웃겨야 사는 직업 때문에 그저 선수 시절 이야기도 개그 소재로만 가끔 썼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진짜 축구인생이 너무 궁금했다. 그는 왜 축구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개그맨이 됐을까. ‘달인의 수제자’에서 이제는 정글로 나아가 우리를 즐겁게 하는 바로 그 개그맨 노우진이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를 직접 만나 ‘개그맨 노우진’이 아닌 ‘축구선수 노우진’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 인터뷰 전에 노우진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절대 독자들을 놀라게 하지 않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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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법칙> 촬영 준비로 바쁜 개그맨 노우진씨는 귀중한 시간을 내 자신의 축구 이야기를 들려줬다.

반갑다. 이렇게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

나도 반갑다. 인터뷰를 할 때 대부분 비슷한 질문만 하셔서 사실 인터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은 개그맨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축구선수 출신으로서 축구 이야기를 하는 인터뷰라 즐거운 마음으로 나왔다.

<정글의 법칙> 촬영 때문에 바쁠 텐데 요즘 스케줄은 어떤가.

한 번 <정글의 법칙> 촬영을 가면 3주에서 한 달 정도는 그곳에 머문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있을 때 다른 스케줄을 최대한 몰아서 소화해야 한다. 다시 이번 주 금요일(칼럼이 나오는 바로 오늘) <정글의 법칙> 촬영을 위해 떠난다.

매일 집구석에만 있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부러운 스케줄이다. 그런데 당신이 축구선수 출신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축구 인생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어본 적이 없다. 오늘 그 이야기를 심도 있게 해보고 싶다.

나도 좋다. 지금은 축구를 그만뒀지만 축구 이야기 하는 건 아직도 무척 좋아한다.

처음 축구를 시작했을 때로 돌아가 보자.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하고 매일 축구만 했다. 반 친구들한테 인정받는 실력이었고 선생님도 “중학교에 가면 축구를 하라”고 하셨을 정도다. 슈팅하는 척 하면서 접고 드리블하고 그런 발재간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어 그저 취미로만 즐기다가 배재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배재중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축구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축구부에 들어갈 수는 없다. 더군다나 초등학교 시절 전문적으로 축구를 한 적도 없었는데 그 정도면 천재 아닌가.

중학교 1학년 때 바로 축구부에 가입하려고 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반대하셨다. 그때는 내가 공부를 좀 잘했기 때문에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반대하셨다. 그래서 그냥 특별활동이라고 토요일에 하는 축구반에 들어서 취미로 축구를 했다. 이 시간이면 축구부 선배들이 와서 우리를 가르쳤는데 그때 내가 공 차는 걸 보고 축구부 선배들이 그러는 거다. “어? 너 좀 하는데? 축구부 들어올 생각 없니?” 때마침 기가 막히게 성적까지 떨어졌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정식으로 축구부에 들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축구 천재 탄생 스토리다.

끝까지 들어보라. 왜 이렇게 성격이 급한가. 나는 그냥 축구선수가 되면 경기에만 나서는 게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해보니 다른 선수와 비교했을 때 체력과 힘, 스피드 등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냥 발재간 부리면서 깔짝대는 정도였다.

그래도 늦은 시기에 시작해 축구부에 들만큼 인정받았다는 게 어디인가.

나도 늦게 시작해서 실력이 떨어지는 거라고 핑계를 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학교 1년 선배인 (송)종국이 형도 중학교 3학년 때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도 잘하더라. 그런데 내가 어떻게 늦게 시작해 실력이 떨어진다고 핑계를 댈 수 있겠나.

그건 그렇다. 곽태휘는 고등학교 때 축구를 시작했단다.

진짜인가. 내가 정말 재능이 없긴 없었나보다. 일반 친구들 사이에서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축구부에서는 그저 묻어가는 존재였다. 키도 커야하고 빨라야하고 힘도 좋아야하는데 나는 발재간 말고는 없었다.

오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이대로 인터뷰를 끝내야 할 것 같다. 별로 나올 이야기가 없을 것 같다.

기다려보라. 그래도 중학교 3학년부터는 경기에 좀 나섰다. 원래 그 나이 때는 한 살 차이가 상당히 크지 않나. 주로 윙으로 경기에 나섰다.

오, 축구 명문 배재중학교의 주전 윙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영광이다.

감독님이 나를 그렇게 중용하시지는 않았고 승패에 그렇게 영향이 없는 경기에만 나를 투입시켰다. 진짜 큰 경기나 중요한 경기에는 다른 선수가 나가더라. 인근 초등학교에서 잘하는 친구들이 다 배재중으로 스카우트 돼 왔는데 나는 그런 케이스가 아니었다. 그냥 중학교에 진학했다가 특별활동 시간에 눈에 띄어 제의를 받은 거라 그렇게 실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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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중 시절 차두리(11번과)와 바로 그 옆(12번) 노우진의 모습.

그때 당신네 팀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들은 누구였나.

배재중, 배재고에서 같이 오랜 시간 운동한 동료들 중에 3년 선배인 (박)진섭이 형과 1년 선배인 (송)종국이 형, 동기인 (차)두리, 후배 (조)원희 등 쟁쟁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됐다. 지금 K리그에서 뛰고 있는 수원의 (홍)순학이도 동기였고 울산의 (최)성환이는 1년 후배다. 이 선수들은 그때부터도 축구로 성공할 만한 이들이었다. 아, (최)성환이만 빼고 말이다.

최성환은 왜 빼나.

그 친구는 지금 K리그에서 잘하고 있는 게 참 의아하다. 프로선수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 친구 역시 중학교 때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키도 작았고 느렸다. 내가 항상 못 생겼다고 놀리던 후배였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확 크더라. 실력이 특출나진 않았지만 악과 깡이 있는 후배였다. 지금도 “성환아 너는 내가 역대 본 선수 중에 제일 못생겼어. 지구를 통틀어서 제일 못생겼어”라고 놀린다. 그러면 (최)성환이도 내 휜다리를 가리키면서 그런다. “형, 그 다리 사이로 알 많이 먹었잖아.”

그렇게 최성환 같은 후배들이 한 순간에 확 클 때 당신은 뭐했나. 남 얼굴 지적하지 말고 키 크는데 집중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정말 꾸준히 조금씩 컸다. 나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오랜 만에 친구를 만나도 “야, 너 왜 이렇게 컸어?”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30만 원짜리 청바지 사서 길이 수선하면 10만 원어치는 잘려 나간다. 그때 동료들에 대해 더 이야기 좀 해 달라. 텔레비전에서 차두리와 친하다는 이야기를 몇 번 한 적이 있다.

나와 (차)두리는 둘도 없는 친구다. 동기로 5~6년을 같이 지냈는데 안 친할 수가 없는 사이 아닌가. 몇 년을 같이 먹고 자고 했다.

당시 차두리는 어떤 선수였나.

울산에서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 지금이야 로봇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단단한 체격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얼굴도 곱상하고 키도 나와 비슷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부터 키가 쑥쑥 크더니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힘과 스피드가 어마어마해졌다. 전형적인 유럽형 몸매가 된 것이다. 아직도 (차)두리의 플레이가 기억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교 4학년 형들과 연습경기를 했는데 (차)두리한테 수비수 두 명이 붙은 거다. (차)두리가 드리블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공을 툭 차놓고 뛰는데 스피드와 어깨싸움으로 그 하늘 같은 형들을 다 물리치는 거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원래는 (차)두리가 청소년 대표에 뽑힐 실력이었는데 차범근 감독님께서 “얘는 더 준비해야 한다”면서 막으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괜히 차범근 아들이라서 뽑혔다는 이야기도 듣기 싫으셨단다.

차범근 감독의 아들이라는 이유로도 유명세를 많이 탔을 것 같다.

우리 사이에서는 (차)두리가 연예인이었다. 전지훈련을 가서 우리 유니폼을 보면 다른 학교 축구부 애들이 “차범근 아들 있는 학교잖아”라면서 수군거릴 정도였다. 당시에는 차범근 감독님이 프랑스월드컵 대표팀 감독까지 하실 때여서 인기가 대단했다. 축구부 버스에서 내릴 때 다른 학교 애들이 “어? 배재 축구부야”라고 하면 괜히 우리 어깨가 으쓱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냥 옆에서 뿌듯해했다.

그렇게 친했으면 집에도 초대받고 그랬나.

한 번 집에 놀아오라고 했었는데 못 가겠더라. 나도 노는 건 좋아하지만 차범근 감독님 댁이라 부담이 좀 됐다. 나 말고 다른 친구들은 몇 명 놀러갔을 거다.

에이, 그게 뭔가. 원래 친구네 집에 놀러 안가면 안 친한 거다. 난 또 엄청 친한 줄 알았다.

정말 친하다. 믿어달라. 항상 내가 웃기면 옆에서 (차)두리가 빵빵 터졌다. 자기 심심할 때면 내 옆으로 왔다. 나도 (차)두리가 리액션이 좋아 재미있는 이야기 들으면 먼저 찾아가고 그랬다. 친한 사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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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노우진, 그리고 그 왼쪽이 노우진이 못 생겼다고 주장하는 최성환의 모습.

송종국은 어떤 선배였나.

정말 사람이 너무 좋았다. 조용조용하고 얼굴도 곱상하게 생겨서 개인적으로 후배들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요새 <아빠 어디가>를 보며 깜짝 놀란다. 방송을 저렇게 잘하는 형이 아닌데 너무 잘한다. 그때는 이런 모습을 보일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아마 (송)종국이 형은 기억 못할 거다. 그 형한테 머리를 한 번 맞은 적이 있다. 우리 때는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고 가끔 잘못하면 선배들한테 맞기도 했는데 (송)종국이 형은 한 번도 후배를 때려본 적이 없는 선배였다. 그런데 중학교 때 새벽운동을 하는데 내가 패스를 계속 잘못 줬던 걸로 기억한다. 운동이 끝난 뒤 동그랗게 다 모여 있을 때 그 형이 나한테 꿀밤을 한 대 딱 때리더라. 항상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잘 웃고 조용조용하던 선배인데 그때는 진짜 서러웠다. 아마 그 형은 기억 못 할 거다.

원래 항상 무섭다가 한 번 잘해주는 선배한테는 감동하는데 잘해주다가 한 번 기분 상하게 하는 선배가 더 얄밉다. 한편으로는 착한 송종국이 그렇게 화를 낼 정도면 당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 짐작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오늘 인터뷰 기사 제목을 <노우진, 학창시절 송종국한테 맞았다> 이런 걸로 뽑으면 안 된다.

그럴 생각 없었는데 좋은 아이디어 줘서 고맙다. 홍순학과도 동기라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다.

요새도 종종 연락한다. 개그맨인 나와 운동선수인 (홍)순학이는 스케줄이 전혀 달라 시즌 중에는 잘 못 만나지만 (홍)순학이 휴가 때 내 스케줄이 없으면 만나서 옛날 이야기도 많이 한다. (홍)순학이는 어릴 적에 얼굴도 곱상했고 공도 예쁘게 잘 찼다. 약간 여우 같은 스타일이었는데 이렇게 잘 될 줄 알았다. 그때부터도 참 재능이 많은 친구였다.

그때 당신은 어떤 선수였나.

실력 같은 건 묻지 마라. 나는 그냥 학창시절을 참 재미있게 보냈다. 운동할 때만 딱 운동하고 나머지 시간을 축구에 투자하지는 않았다. 남들 웃기는 게 좋았다. 축구로는 대성하기 힘들다는 걸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뭘하면서 그렇게 남들을 웃겼나.

동기 중에 안용진이라는 친구가 있다. 항상 우리는 숙소에서 같이 생활했는데 나와 (안)용진가 누워서 늘 그 사이에 후배 한 명을 끼워 눕혔다. 그리고는 말도 안 되는 토크쇼를 진행하는 거다. “오늘 운동해보니까 어때요? 달리기가 굉장히 느리시던데.” 뭐 이런 식이었다. 우리끼리 별명도 있고 특징도 있고 아버지가 뭐하시는지도 다 아니까 또래들 웃기는 건 쉽지 않나. 아버지가 당구장하는 친구 데려다 놓고 수다 떨다가 “다음 곡입니다. XXX 아버지가 부릅니다. ‘녹색 다이 위에 네 꿈을 펼쳐라.’” 그런 거였다. 운동 끝나고 자기 전에 다 같이 누워서 항상 그렇게 재미있게 하루를 마쳤다. 역시 그때도 리액션은 (차)두리가 가장 좋았다. 내 개그 최고의 방청객은 (차)두리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나.

우리가 고등학교 2학년 때 KBS 춘계연맹전 결승에 나갔다. 상대가 포철공고였는데 우리 감독님이 경기 전에 그러는 거다. “포철공고 11번만 막아. 쟤는 무조건 잡아.” 당시 우리 팀에는 차두리라는 스타가 있었고 포철공고에는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크고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바로 그 선수가 있었다. 그때 (차)두리가 한 골을 넣었는데 포철공고 11번이 두 골을 넣고 결국 우리가 졌다. 그 친구 마크맨한테 경기 끝나고 “11번 잘해?”라고 물어봤더니 혀를 내두르더라. 등을 지면 절대 공을 빼앗을 수 없다면서 장난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1년 뒤 그 선수가 엄청 떴다. 바로 이동국이었다. 그 경기가 참 기억에 남는다.

그때 당신의 활약은 어땠나.

나는 그때 철통 같이 벤치를 지키고 있었다. 힘든 경기였다.

저런….

또 기억나는 경기가 있다. 아주대와 홍익대의 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이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에 갔다 공항에서 바로 경기장으로 온 한 선수가 후반전에 투입돼 1-2로 밀리던 경기를 뒤집었다. 후반에만 두 골 1어시스트를 해 결국 5-2 역전승을 거뒀다. 그걸 직접 눈으로 보면서 “저 사람은 정말 축구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안)정환이 형이었다.

그 경기에서 당신은 무얼했나.

그때도 철통 같이 관중석을 지키고 있었다. 그 전설적인 경기를 직접 봤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참 영광이다.

뭐 다 다른 선수들 이야기만 하나.

우리와 건국대가 연습경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건국대에서 한 명이 수비를 보다가 오버래핑을 나가더니 골키퍼와 1대1 찬스에서 헛다리짚기를 해 공을 골문으로 툭 밀어 넣더라. 진짜 빨랐다. 그 선수는 이영표였다.

그때도 당신은 철통 같이 벤치를 지켰나.

물론이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 중요한 경기는 다 벤치에 있었다고. 나는 큰 경기에 강하고 그런 거 없었다. 승패와 관련 없는 경기에서만 활약을 했다.

당신이 직접 뛴 경기 중에 인상 깊었던 경기 이야기를 좀 해 달라.

이번에는 진짜 내가 뛴 이야기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풀백이나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 있어서 공식 대회에서 한 번도 골을 넣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왼발슛으로 내 축구인생에서 첫 공식대회 골을 넣었다. 기가 막힌 슛이었다. 골을 넣자마자 너무 기뻐서 우리 벤치 쪽으로 달려가 감독님 앞에서 세리머니를 했다. 그런데 감독님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세상에 0-4로 지고 있는데 골 넣었다고 세리머니하는 놈이 어디 있느냐”고 하시더라. 그날 헤딩으로 한 골 더 넣었다. 그게 내 축구 인생의 유이한 공식대회 득점이다.

그때부터 개그 본능이 있었던 것 같다. 본인 스스로 축구 명문 배재고에서 어느 정도의 선수였다고 생각하나.

축구는 혼자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워낙 우리팀 멤버가 좋다보니 나는 발만 조금 맞춰줘도 팀에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고 그저 머리수만 채우는 정도였다. 내가 축구를 정말 잘했다면 다른 쪽으로 빠질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축구로 대학까지 갔다. 전주대는 나름대로 축구계에서 알아주는 학교 아닌가.

전주대에 입학하니 선배들이 나에게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배재고가 축구 명문 아닌가. 내가 배재고 출신이라는 걸 알고 선배들이 “야, 너 잘하겠는데”라면서 들떠 있었다. 입학 동기들도 처음에는 배재고를 졸업한 나를 견제하더라. 입학 초기에는 선배들의 기대에 살짝 부응하는 듯했다. 기본기 위주로 깔짝대니 선배들이 “역시 배재는 다르다”면서 칭찬했다. 그런데 날이 가면 갈수록 내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빠르지가 않고 그렇게 몸싸움이 뛰어나지도 않고 그렇게 공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지가 않은 게 보이기 시작했나보다. 그렇게 밑천이 드러나니 마음은 편하더라.

밑천이 얼마 만에 드러났나.

내가 그렇게 축구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지 않다는 걸 한 달 만에 다 보여줬다. 동기들과 친해지고 나서는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계속 축구할 마음이 없어. 개그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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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우진(가운데)은 차두리(바로 왼쪽)와 여전히 둘도 없는 친구라고 주장하고 있다.

학창시절 내내 해오던 축구를 포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만 가면 축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건 포기하고 싶었다. 학창시절 내내 축구만 해 와서 당장 그만두면 대학가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부모님도 내가 축구선수로 대성할 거라고 기대는 하지 않으셨고 대학을 졸업한 뒤 체육선생님 되는 걸 원하셨다. 전주대에 입학한 뒤 부모님께 운동을 그만두고 개그맨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깜짝 놀라시더라. 학창시절 내내 해온 게 운동이고 방송 쪽에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다가 나는 집안에서 늘 조용한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장손이고 장남이어서 어릴 때부터 집안 어르신들이 한두 살 어린 친척 동생과는 다르게 항상 어른 대접을 해주셨다. 밖에서는 까불고 말 많은 학생이었는데 집안에서는 늘 조용했다. 그런 애가 축구를 그만두고 개그맨이 되겠다고 하니 놀라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데 다른 축구부원 부모님들이 우리 부모님께 “우진이가 참 재미있는 친구”라면서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그래서 부모님도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라”고 나를 믿어주셨다.

축구가 싫었던 건가.

그건 아니다. 축구가 싫었다기보다는 남들을 웃기는 일이 더 좋았던 거다. 또한 축구에 대한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축구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체육특기생으로 당신을 뽑은 전주대에 곧바로 뒤통수를 날린 건가.

특기생은 무조건 1학년 1학기는 축구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 입학하자마자 그만두면 제적이 된다고 해서 한 학기 동안은 버텼다. 이미 마음은 떠나 있었는데 그 시기가 너무 힘들었다. 전주대가 체력훈련을 정말 혹독하게 하기로 유명했다. 다쳤다고 거짓말하고 쉬기도 했지만 오래 쉬자니 눈치가 보여서 억지로 운동을 했다. 그 당시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한 학기가 너무 길었다.

하늘 같은 감독님께 축구를 그만둔다고 말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직접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선배들도 무서운데 어디 1학년 신입생이 감독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아버지가 직접 전주까지 내려오셔서 나와 함께 감독님을 만나 어렵게 말을 꺼내셨다. “우리 아들이 축구에 대한 재능이 부족하고 다른 일을 하고 싶어해서 축구는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정말 오랜 생각 끝에 용기 있게 말씀하셨는데 감독님이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으시는 거다.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라고 하시더라. 욕심나는 선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감독님도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재능이 없는 건 빨리 포기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나도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는데 음치다. 빨리 포기하기를 잘했다.

그리고 나서는 일반 학생으로 전주대 체육학과를 다니면서 일주일에 월,수,금 세 번씩 여의도에 있는 MBC 아카데미 개그연기반을 오갔다. 학교 수업을 세 시 정도에 마치고 세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오가는 걸 6개월 동안 했다. 왕복으로는 7시간이나 걸렸다. 그런데 그게 너무 즐거웠다. 그러다가 전주에 계속 있으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아예 서울로 올라와 기획사를 찾아다녔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와 같이 동료들을 웃기던 (안)용진이와 함께였다. 그 친구는 어릴 때부터 축구를 잘해 유소년 대표로 일본까지 가 경기를 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고 축구특기생으로 광운대에 입학한 유망주였다. K리그 구단에서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정도다. 그런데 개그하겠다고 나와 함께 축구를 그만뒀다. 아마 (안)용진이 부모님이 나를 무척 싫어하실 수도 있다.

원래 친구를 잘못 만나면 그렇게 된다. 그때부터 개그맨이 되기 위해 맨땅에 헤딩을 한 건가.

그렇다. 겁도 없이 주병진 선배님이 하시는 인터넷 방송국에 찾아가기도 했다. 거기에서 선배 개그맨들 회의하고 촬영하는 걸 지켜보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깡’을 키우기 위해 한강시민공원에 있는 무대에 올라 조깅하는 분들 앞에서 웃기려고 노력도 했다. 지하철을 타 첫 번째 칸부터 마지막 칸까지 돌아다니며 얼굴에 철판도 깔아봤다. 그러다가 명동과 동대문 쇼핑몰 장기자랑 무대 사회자 오디션에 붙었고 조금씩 활동을 하다가 군대에 가게 됐다. 스물 네 살 때의 일이다.

군대에서 축구 잘하고 웃기면 최고 아닌가. 고참들한테 사랑 많이 받았을 것 같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군대에서 축구 잘하면 휴가증 많이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대를 많이 했다. 주말이면 고참들하고 공도 차고 피엑스도 가는 걸 상상했다. 그런데 강원도 철원 6사단에 배치를 받아 이등병 때 바로 GOP로 들어갔다. 산악 지형이라 연병장도 없고 밤새 근무만 서고 외출, 외박, 면회도 안 됐다. 내가 생각했던 군대가 아니었다. GOP에서 1년 있다가 상병 때 후방 부대로 내려와서는 축구해서 포상휴가도 많이 나오고 장기자랑해서도 휴가증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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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우진은 최근 <정글의 법칙>에서 축구계 대선배인 안정환과 함께 환상적인 호흡으로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등병 때가 아니면 그렇게 예쁨 받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제대 후에는 바로 꿈을 이뤘나.

제대하고 한달 반 만에 KBS 공채 개그맨 시험에 합격했다. 내가 먼저 데뷔한 뒤 (안)용진이도 1년 후 MBC 공채 개그맨이 됐다. 그 친구는 자기가 더 웃겼다고 하는데 사실 내가 더 웃겼다.

참 멋진 인생인 것 같다. 자기가 원하는 꿈을 위해 다른 꿈을 포기할 수 있다는 건 웬만한 용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에 <정글의 법칙>을 통해 안정환과 함께 동고동락했다. 오랜 만에 만난 축구계 대선배인데 느낌이 어땠나.

정말 나와는 다른 사람인줄 알았다. 모든 국민의 눈이 집중된 상황에서 어떻게 페널티킥을 차나. 보통 사람이면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 이야기를 나눠보니 자기도 월드컵에서 페널티킥 찰 때 엄청 떨렸다고 하더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부담감을 안고 경기하는 모습을 보니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말도 잘 못하고 재미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 재미있는 사람이다. 귀찮으면 귀찮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하기 싫으면 싫은 거다. 굉장히 인간적인 형이다.

축구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눴나. 할 거 없는 정글에서 축구 이야기로 시간 보내기는 좋았을 것 같다.

내가 계속 물어봤다. 이런 축구계 대선배를 만나니 너무 신기했다. “형, 같이 축구해본 사람 중에 누가 힘이 제일 좋아요? 누가 제일 빨라요? 홍명보는 선수 시절에 어떤 게 장점이었어요? 황선홍은요?” (안)정환이 형이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는 데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서 안정환과는 좀 친해졌나.

물론이다. 지금은 둘도 없는 사이다.

그 말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면 개그맨이 된 뒤로는 축구를 완전히 잊고 살았나.

아니다. 내가 원래 컴퓨터를 잘 못하는데 가입한 카페가 딱 세 개 있다. 내 팬 카페와 신동엽 선배님 팬 카페, 그리고 ‘아이러브사커’다. 못 봤던 경기 하이라이트를 거기에서 꼭 챙겨본다. 지금도 축구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금방 친해진다. (김)종국이 형이나 (탁)재훈이 형, (이)수근이 형하고 축구 이야기하면서 문자 메시지도 하고 축구를 즐긴다. 그리고 연예인 축구단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내가 거기가면 가장 잘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선수 출신도 많고 잘하는 분들이 많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잘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눈에 띌 정도는 아니다. 구자명 같은 청소년 대표 출신은 나와 차원이 다르다.

만약 지금까지 축구를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 혹시 아나. 유럽에서 뛰고 있을지.

절대 K리그에는 못 갔을 것이다. 실업팀 입단도 힘들었을 것 같다. 내가 축구를 해봤기 때문에 K리그 문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보통 그중 4~5명만이 대학에 갈 수 있고 그 중에서 진짜 말도 안 되게 잘해야 K리그에 간다. 실업팀도 어느 정도 수준 높은 대학팀에서 두세 손가락 안에 들어야 갈 수 있다. 이렇게 K리그나 실업팀에 가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여기에서 주전으로 뛰는 거면 그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주전경쟁이 또 그 또래들만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하는 사람 중에서 11명을 뽑아 국가대표팀을 구성한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김현석처럼 젊었을 때 공격수를 하다 나중에 수비로 전향해서 활약하는 것만 봐도 대단한 일이다. 만약 내가 계속 축구를 했다면 K리그에 가지 못하고 교육과정 이수해서 체육선생님을 꿈꿨을 것 같다. (조)원희가 나한테 그런다. “형은 축구를 그만둔 게 정말 형 인생에서 신의 한수였어.”

그렇다면 축구선수로 학창시절을 보낸 걸 후회하나.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축구선수였다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 축구를 하면서 근성과 승부욕을 배웠고 인내심이 뭔지 알게 됐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아야 할 것들을 축구를 통해 일찍 깨우쳤다. 윗사람한테 예의를 갖추고 후배들을 이끌 수 있는 책임감도 축구가 아니었다면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아들을 낳게 되면 한 번쯤은 꼭 축구를 시켜볼 생각이다. 꼭 선수로 대성하지 않더라도 엄격한 작은 사회를 겪어보는 게 남자로서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축구선수였다는 게 자랑스럽고 좋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앞으로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40~50대가 돼 사람 냄새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MC가 되고 싶다. 어릴 때부터 방송 일을 꿈꿔오면서 늘 그 생각을 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축구 관련 일도 해보고 싶다. 딱딱한 축구 중계 말고 좀 유머러스하게 축구 중계를 하면서 즐거움을 드리고 싶다. 내가 직접 축구를 겪어봤고 여기에서 느낀 감정들을 중계를 통해 유쾌하게 전달한다면 좋을 것 같다. 비록 선수로서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앞으로도 축구를 평생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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