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초반 이 선수를 빼놓고는 K리그 클래식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이 앳된 얼굴의 어린 선수는 혜성처럼 등장해 첫 경기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기더니 두 경기 연속골까지 기록하며 말 그대로 펄펄 날고 있다. 단 세 경기를 소화하고 이렇게나 빨리 스타로 급성장한 선수가 또 있을까. 3라운드를 치른 현재 인천의 무패 행진(2승 1무)을 이끌고 있는 신인 이석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오늘은 벌써부터 언론과 팬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이석현을 인천에서 직접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숨김 없이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은 이석현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나와 이석현 사이에 베니싱 스프레이 따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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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이석현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반갑다. 당신 개그맨 한민관 닮았다.

그러는 당신은 룰라 이상민 닮았다. 나도 반갑다.

이 이야기는 그만 하자. 서로에게 도움 될 게 없다. 요새 뜨고 있는데 그 인기를 실감하나.

주위에서 연락이 끊긴 친구들한테도 연락이 많이 온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친구들도 있는데 일단 다 반가운 척, 아는 척 하고 본다. 요새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내 이름을 자주 쳐 보기도 하는데 좋은 평가를 해주시는 분들이 많아 기분이 좋다. “이석현 대박이다”라는 말은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며칠 전에는 치료실에서 포털사이트에 내 이름을 쳐보다 형들한테 걸렸다. “1년차 때는 다 그런다”고 하더라. 가끔 ‘인천의 이니에스타’라는 이야기에는 ‘악플’도 종종 있다.

‘악플’이 고민이라면 언제든 나에게 말하라. 그건 나의 전문 분야다.

알겠다. 요새는 언론 인터뷰도 많이 한다. 갑작스레 관심을 가져 주는 분들이 많아 얼떨떨하다. 그런데 인터뷰는 해도 해도 늘지 않는 것 같다. 어렵다.

나는 무엇이든 집요하게 물어볼 거다. 각오는 돼 있나.

긴장되긴 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다.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할 준비가 돼 있다.

일단 위로의 말부터 전하고 싶다. 그렇게 신인상 받고 싶다고 여러 언론을 통해 말했는데 애석하게도 올 시즌부터 신인상이 없어졌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당신을 만나기 한 시간 전에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신인상을 폐지하고 영플레이어상이 생겼는데 만 23세 이하에 K리그 클래식 출전 햇수가 3년 이내로, 해당 시즌 리그 전체 경기 가운데 절반 이상 출전한 모든 선수가 해당된단다. 안 그래도 올 시즌 신인상 경쟁자가 많았는데 이제는 더 많아졌다. 우리 팀의 (한)교원이도 있고 포항의 (이)명주도 있고 (고)무열이도 있다. 신인상 타고 싶다고 인터뷰도 많이 했는데 정말 이럴 수 있나. 당신이 칼럼으로 한 번 써 달라. 이렇게 신인상이 없어지는 건 안 된다.

미안하다. 내가 무슨 힘이 있나. 그저 당신이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정말 신인상에 욕심이 많았는데 그 선수들은 경기 출장 시간도 많고 이미 프로 무대에서 자리를 잡았으니 내가 많이 불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경쟁해 볼 생각이다. 초반에는 내가 두 골을 넣었으니 경쟁에서 비슷하게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명한 연맹 관계자 분들께서 시즌 막판까지 비슷한 조건이면 신인인 나를 조금 더 귀엽게 봐주지 않겠나.

신인상 폐지에 대한 분노를 조금 가라 앉히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눠보자. 일단 처음 축구를 했던 때로 돌아가 보자.

울산 무거초등학교 4학년 때 방과 후 활동으로 취미 삼아 축구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옆 학교 옥동초등학교 축구부 감독님과 친했던 우리 방과 후 선생님이 나도 모르게 나를 옆 학교 축구부 제주도 전지훈련에 보냈다. 사실 축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학교에 축구부도 없고 여건도 좋지 않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옆 학교 축구부 제주도 전지훈련에 따라가 있는 거 아닌가. 학교에서 친구들하고 축구하면 꽤 잘하는 편이었는데 축구부 애들하고는 상대가 안 되더라. 그리고 난 축구부면 경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훈련도 힘들었고 꾸중도 많이 듣더라. 막상 제주도에 가니 무서웠다.

저런, 당신은 도망도 못 가게 섬에 갇히고 말았다.

그 친구들은 선수였고 나는 그저 취미로만 하는 애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축구를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축구를 전문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 전지훈련에서 돌아온 뒤 그 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 그 친구들이 누군 줄 아는가. 지금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진출해 있는 (윤)주태와 수원의 (조)지훈이, 울산에 간 골키퍼 (이)희성이 등이었다.

한 학교에서 프로에 한 명 가기도 쉽지 않은데 정말 대단한 친구들과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대단했다. 나가면 다 우승이었다. 특히 내가 앞서 말한 친구들은 그때부터도 축구를 너무 잘해서 유명한 애들이었다. 나는 왼쪽 사이드 미드필더였는데 그냥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 뒤처지지도 않고 묻어가는 스타일이었다.

원래 학교 다닐 때 그런 애들이 있다. 우리 반에도 그런 애가 있었는데 사흘을 결석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그런 존재였던 거 같다.

중학교 때는 어땠나.

울산 현대중에 다니다가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남창중으로 전학을 가서 다시 (조)지훈이를 만났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선배들이 괴롭히고 때리는 일이 잦았다. 몇 번 이 일에 불만을 품고 도망간 적이 있었는데 한 번은 울산에서 기차 타고 부산으로 도망을 쳤었다. 그때 (조)지훈이도 있었다. 그런데 이틀 만에 잡혔다. 부산에 가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았는데 그걸 추적한 거다. 찜질방 탕 안에서 팔자 좋게 누워 있는데 많이 본 아저씨가 들어오더라. 축구부 학부형 회장님이셨다. 알몸으로 있다가 도주도 못하고 그대로 잡혔다.

역시 축구선수는 민첩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 학년이 10명 가까이 됐는데 그런 일에서 빠지면 의리가 없는 걸로 생각했다. 그럴 땐 또 잘 뭉친다. 항상 도망치기 싫어하는 친구가 꼭 있는데 절대 빠질 수 없었다. 물론 나는 주도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빠지고 싶어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묻어가는 스타일이었다.

원래 묻어가는 인생이 가장 편한 법이다. 그렇게 팀을 이탈하면서 축구를 그만둘 생각은 안 했나.

숙소에서 도망칠 때도 그런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냥 한 번씩 하는 일탈이었다. 반항심이라고 할까. 아마 축구선수라면 그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일탈을 꿈꾸는 어린 선수들이 있다면 내 말을 꼭 들었으면 좋겠다. 항상 나갈 때는 재밌지만 들어올 땐 후회한다. 결국 돈 떨어지면 돌아오게 돼 있다. 그리고 정 도망치려면 현금인출기를 조심하라. 다 걸린다.

도망치다가 끝난 중학생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는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좀 해보자.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이 무척 중요하다. 그때 잘해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중요한 시기에 왼쪽 발목을 다쳐 수술을 했다. 회복도 느려서 고등학교 3학년 후반기에 경기에도 나가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은 후반기가 되면 하나둘 다 대학 진학이 결정되는데 나는 부상으로 아무 것도 보여준 게 없었다. 그 전까지는 서울에 있는 축구 명문대를 꿈꿨지만 아무 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선문대가 입학 제의를 해왔다. 현실이 되니 ‘선문대도 괜찮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졸업 전 11월에 다 대학 진학이 결정되고 대학팀에 가 훈련을 시작하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발목이 좋지 않아 다음해 1월에 선문대에 합류했다. 발목 부상으로 8개월 정도는 쉰 것 같다.

나도 처음에는 서울대나 연·고대 아니면 학교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학 원서 쓸 때가 되면 그동안 다른 대학을 무시했던 내 자신을 반성하게 되더라.

선문대는 내가 힘든 시기에 나에게 기회를 준 학교다. 1학년 때는 몸 상태도 좋지 않았고 팀 성적도 좋지 않았는데 2학년이 되면서 잘 풀리기 시작했다. 특히 2학년 때 치른 춘계연맹전이 기억에 남는다. 영남대하고 결승전에서 내가 전반 시작하자마자 골을 넣고도 결국 1-3으로 패했지만 참 경기력이 만족스러웠던 대회였다. 그 대회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 수 있었다.

2학년이 되고 기량이 부쩍 성장한 계기라도 있었나.

일단 막내 생활을 벗어나 심적으로 안정이 됐다. 그리고 춘계연맹전은 창원에서 열렸는데 모텔이 즐비한 유흥가에 우리 숙소가 있었다. 심심하면 밤에 나가서 유흥가를 한 바퀴 돌았다. 성인이긴 하지만 대회 중이라 가진 못하고 그냥 눈으로 구경만 했다. 그러면서 컨디션이 굉장히 좋아졌다. 뭔가 피가 끓는 느낌이었다. 골도 많이 넣고 빨리 대회 마치고 놀고 싶었다.

유흥가로 힐링하는 선수는 또 처음 본다. 그 대회 활약을 바탕으로 청소년 대표팀에 뽑힌 건가.

그렇다. 내 생각에도 만족스러운 대회였다. 선문대 조긍연 감독님하고 대표팀 홍명보 감독님이 나를 굉장히 좋게 봤다. 그 전까지는 태극 마크와 인연이 없었는데 이때 처음 20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에 뽑혔다. 연령별 대표팀이었고 내가 꽉 찬 나이라 선배가 없었다. 지금 서울에 간 (박)희성이, 포르투갈에 진출한 (석)현준이, 전남의 (이)종호, (황)도연이 등이 그때 같이 소집됐던 애들이다. 그런데 경쟁해 보니 대학생 신분인 나와 프로팀 소속인 다른 친구들의 기량 차이를 느꼈다. 6~7번 정도 차출됐는데 뭔가 해보지도 못했다. 친선대회에서는 종종 뛰었지만 중국과의 평가전에서는 몸만 풀다가 끝나기도 했다.

프로팀에 소속된 선수들과 아마추어 소속 선수들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보통 몸 풀 때 ‘볼 돌리기’라고 패스 게임을 하는데 대학생 애들은 옆에서 우리들끼리 따로 한다. 프로 애들이 안 껴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쪽으로 못 간다. 항상 ‘볼 돌리기’를 할 때면 재미삼아 내기를 하는데 프로 애들 쪽은 판이 크기 때문이다. 해외파 애들은 흔히 말하는 ‘면세점 털기’라고 진 사람이 면세점에서 한 턱 내고 국내 프로 애들은 그거보다는 조금 약하지만 ‘마트 털기’를 한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대학생 애들은 같은 ‘마트 털기’지만 상한가가 있다. 우리는 그냥 애들 장난치는 정도다. 수입의 차이가 있어 프로 애들하고 ‘볼 돌리기’도 잘 못한다. 지금 인천에서도 고참 선수들은 세차 내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냥 소소하게 사우나 내기 정도다.

그래도 대표팀에 다녀와 얻은 것도 있을 것 같다.

물론이다. 대표팀에 다녀온 뒤로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 번 대표팀에 다녀오고 대학교 대회에 나가면 주위의 시선을 느낀다. 옆에서 “쟤 이번에 대표팀 뽑혔다며?”하는 소리가 들린다. 몇 번 더 대표팀에 차출되니 상대팀에서도 나한테 신경을 많이 쓴다. 평소에는 수월하게 플레이했는데 상대팀 감독님이 “쟤 바짝 잡으라”고 하신다. 똑같은 플레이를 해도 “우와, 쟤는 역시 대표팀 출신이라 플레이가 달라”라면서 잘하는 것처럼 보더라. 그래서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 대학교 시절에는 내 포지션에서 어느 정도 인정 받았다.

대학 시절 수준급 미드필더로 평가받던 당신은 이후 일본 무대 진출을 잠시 생각했다고 들었다.

진지하게 생각한 건 아니고 주위 친구들이 하도 일본으로 많이 진출해 나도 살짝 관심을 가진 정도였다. 직접적인 J리그의 이적 제안은 없었지만 에이전트를 통해 마음만 먹으면 갈 수는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 가 실패하는 선수를 많이 봤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외롭기도 하고 제 기량도 다 보여주지 못했다고 한다. K리그 팀과 J리그 팀이 붙으면 결론은 K리그 팀이 이긴다. 실력적으로 K리그가 더 높다고 생각했고 여기에서 인정을 받고 싶었다. 거친 K리그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그 어떤 리그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한테는 K리그에서 성공하는 게 우선이다.

올 시즌부터 드래프트에 앞서 자유선발이 실시됐다. 당신은 이 제도의 첫 번째 수혜자였다.

드래프트를 하기 전에 구단과 선수가 자율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계약을 할 수 있게 됐다. 조긍연 감독님 후임으로 선문대를 맡은 대구FC 스카우터 출신 김재소 감독님이 지난 8월 나를 따로 불렀다. “인천에서 영입 제의가 왔는데 갈래?” 아마 다른 팀에서도 더 제의가 있었다면 살짝 고민했겠지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제일 먼저 나를 인정해주는 인천과 함께하고 싶어 곧바로 계약했다. 그래서 사실 마지막 대회를 조금 마음 편하게 임해 선문대 감독님한테 한 소리 듣기도 했다.

제일 얄미운 캐릭터다. 수시 모집에서 합격하고 남들 수능시험 준비할 때 노는 애들하고 똑같다. 솔직하게 당신이 인천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기 전 제3자의 신분으로 바라본 인천은 어떤 팀이었나.

솔직하게 말하겠다. 인천은 내가 인연을 맺기 전부터 강팀은 아니었지만 조직력으로 싸우는 무척 단단한 팀이라고 생각했고 열정적인 팬들의 응원도 멋진 팀이었다. 나에게는 인천 유니폼을 입을 수 있다는 게 무한한 영광이었다. 이건 립서비스가 아니다.

입단을 앞두고 포지션 경쟁에 대한 고민은 안 했나. 인천은 김남일을 비롯해 정혁과 구본상 등 중원 자원이 무척이나 풍부한 팀 아닌가.

당신이 말한 선수는 물론이고 여기에 지난 해에는 외국인 선수 이보까지 있었다. 당연히 내가 경쟁해야 하는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거 다 따지면 아예 프로 무대에 올 수도 없다. 어딜 가나 경쟁은 있다. 비슷한 연령대 선수가 많아 처음에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를 불러주는 팀에 오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경쟁은 각오하고 왔다.

자유 선발은 따로 계약금을 받나.

받는다.

얼마나 받나. 그게 가장 궁금했다.

상한가가 1억 5천만 원인데 나는 인천에서 그만큼까지는 안 주시더라. 그거보다는 조금 덜 받았다. 선문대에서 대구FC로 자유 선발된 내 친구는 계약금 상한가 다 받았다는데…. 뭐 섭섭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나는 그 정도 못 번다. 한 8백 정도 번다.

한 달에 8백 정도씩이면 괜찮은 거 아닌가.

아니다. 연봉이 8백이다.

힘내라.

그렇다면 그 계약금은 다 어디 갔나.

인천 입단 전에 잠시 쉬는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는 친구들을 만나면 내가 다 사야겠더라. 그때 조금 쓰고 나머지는 다 부모님 드렸다.

효자다. 그러면 용돈 타 쓰나.

그렇다. 아예 통장과 카드를 다 부모님한테 드리고 나는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다. 경기에 이기거나 골을 넣으면 부모님께서 용돈에 조금의 수당을 얹어 주신다. 이번에 두 경기 연속골 넣고 2연승한 것도 수당의 영향이 컸다. 며칠 전이 월급날이어서 부모님께 용돈을 부탁했더니 두 경기 이기고 두 골 넣었는데 20만 원 보내주시더라. 이거 너무 짠 거 아닌가. 한 골에 10만 원이다.

인생 선배로서 이야기하는데 부모님과도 돈 거래는 철저하게 해야 한다. 계약서라도 써라.

친구들이 항상 그런다. “너는 프론데 왜 돈이 없어?” 여자친구도 만나야 하는데 명색이 프로 선수가 돈이 없다. 사실 나도 돈 들어갈 데 많다. 홈 경기 전날에는 호텔에 들어가 경기를 준비하는데 훈련 때 ‘볼 돌리기’하다가 걸리면 이날은 20만 원씩 깨진다. 호텔 로비에 있는 아이스크림이나 빵 내기를 하는데 원래 호텔이 비싸지 않나. 나는 돈이 없어 이거 걸리면 두 경기 연속골로 부모님께 받은 수당이 날아간다. 눈에 불을 켜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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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현은 세 경기만에 인천의 새로운 스타로 성장했다. (사진=인천유나이티드)

원래 헝그리 복서가 가장 무서운 법이다. 그런데 인천에는 당신과 같은 포지션에 어마어마한 선배 김남일이 있다. 첫 만남이 떨리지는 않았나.

나는 일찌감치 계약을 맺고 지난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인천에 합류했다. 그때는 형들이 시즌 중이라 내가 2군에서만 훈련을 해 (김)남일이 형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식당에서 처음 마주쳤는데 너무 신기했다. 2002년 월드컵 때 나는 이제 막 축구를 시작한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때 텔레비전으로 보던 영웅과 같이 생활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냥 인사밖에 못했다. 시즌이 끝나고 지난해 12월 후원의 밤 행사 때 처음 제대로 소개를 하고 악수를 했는데 “열심히 하라”고 하시더라.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떨렸다.

중원을 함께 책임져야 하는데 요새는 좀 친해졌나.

동계 전지훈련에 가서 조금 친해졌다. 사실 지금도 내가 먼저 말은 못 건다. 훈련할 때면 나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해준다. 오늘 당신을 만나기 전에 인터뷰를 한 번 더 했는데 인터뷰 시간이 길어져 점심시간을 놓쳤다. 후배와 이 앞에 있는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는데 거기 (김)남일이 형이 있었다. 그냥 인사만 했는데 아무 말도 없이 나갈 때 계산을 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카리스마를 느꼈다.

김남일이 가장 멋질 때는 언제였나.

방금이었다.

방금 말고는 또 없었나.

사실 올 시즌을 앞두고 팬즈데이 행사 때 새 유니폼 발표가 있었다. 마술사가 마술을 하다 유니폼을 공개하는데 커튼 사이에서 (김)남일이 형이 새 유니폼을 입고 등장하는 것 아닌가. 남자가 봐도 멋있었다. 같이 훈련 할 때 형과 패스를 주고 받는다는 게 지금도 너무 신기하다. 훈련할 때 패스를 하면서 상대방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아직도 “남일이 형”이라면서 패스하는 게 너무 어색하다. 돌아가면서 패스 훈련하다가 내 차례 때 (김)남일이 형이 나오면 입이 안 떨어진다. 그 형은 숨 쉬는 모습까지도 멋있다. 주위에서 (김)남일이 형 사인 받아달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형한테 그런 부탁하기도 어렵다. 나도 사인 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이 인터뷰를 보고 (김)남일이 형이 사인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 사인 나도 한 장 부탁한다. 당신은 현재 인천에서 프리킥을 담당하고 있는데 또 한 명의 대단한 스승이 있다. 바로 이천수다.

(이)천수 형은 정말 대단한 선수다. 훈련이 끝나면 나와 함께 따로 프리킥 연습을 하면서 많은 노하우를 전수해 주신다. 그런데 가르쳐준 대로 똑같이 해도 나는 절대 그런 프리킥을 찰 수가 없다. (이)천수 형만큼 찰 수는 없지만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려고 노력 중이다. (이) 천수 형 복귀 전에 프리킥으로 두 골 정도는 더 넣고 싶다.

평소에는 이천수가 어떤 조언을 해주나.

워낙 성격이 좋은 선배라 살갑게 대해준다. 그런데 대화의 대부분이 칼럼으로는 나갈 수 없는 내용이다.

알겠다.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자.

(김)남일이 형, (이)천수 형, (설)기현이 형 등 내가 초등학교 시절 2002 월드컵을 통해 봤던 그 대단한 형들과 한 팀에서 뛰고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성인 무대에 처음 왔는데 이런 좋은 선배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나로서는 무한한 영광이다. 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지금 2002년 월드컵 영웅 이야기만 했지만 인천에는 이들 말고도 훌륭한 선수가 많다. 하지만 김남일과 이천수, 설기현에 비해 많은 이들이 주목하지 않는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정말 인천에 헌신하는 선수 한 명을 소개해 달라.

다 나에게는 너무 대단한 선수들이지만 특히 그 중에서 (구)본상이 형을 꼽고 싶다. 비록 많이 주목 받지는 못하지만 (김)남일이 형과 함께 둘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힘든 일을 도맡아 한다. (구)본상이 형이 없었더라면 팀이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 형이 나와 같은 방을 써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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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서울 원정에서 극적인 3-2 승리를 거두고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켰다. (사진=인천유나이티드)

알겠다. 절대 룸메이트여서 그런 건 아니라고 믿고 앞으로 구본상의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보겠다. 요새 당신은 확 떴지만 아직 별명이 없다. 원하는 별명이 있나.

일단 몇몇 언론에서 나온 ‘인천의 이니에스타’는 너무 부담스럽다. 그냥 가만히만 있어도 별명이 ‘인천의 이니에스타’라는 이유로 욕을 먹는다. 당신이 별명 하나 지어 달라.

‘석현이’ 중에 가장 ‘짱’이라는 의미로 ‘왕석현’ 어떤가.

그냥 팬들에게 부탁하겠다.

나도 그게 나을 것 같다. 인천 경기를 보면 당신이 속으로 이런 말을 하면서 플레이하는 거 같다. ‘뭐야? K리그 클래식 졸라 쉽잖아.’ 표정에서부터 플레이까지 너무나도 당당하다.

절대 쉽지 않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많았는데 적응하고 나니 이제 해볼만 하다는 정도다. 대학교에서는 한 번 생각하고 공을 줘도 늦지 않았는데 K리그 클래식에서는 공을 잡고 한 번 생각하면 이미 압박을 당하고 있다. 외국인 선수가 있다는 점도 상당히 어렵다. 초반에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절대 K리그 클래식이 쉽다거나 만만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거짓말하지 말라. 내가 그 증거를 대겠다. 당신이 성남전에서 상대 선수 가랑이 사이로 공을 넣어 제치는 걸 봤다. 그것도 두 명이나 당신에게 당했다. 이게 만만하게 보는 게 아니고 뭔가.

어릴 때부터 상대 가랑이 사이로 공을 넣고 제치는 걸 너무 좋아했다. 축구선수들은 이렇게 당하면 기분이 굉장히 나쁜데 반대로 그 기술을 써서 통하면 기분이 너무 좋다. 그래서 따로 중학교 때 연습도 많이 하고 코치님께 배우기도 했다. 경기 도중 내가 공을 잡고 코치님이 “가랑이”를 외치면 상대 가랑이 사이로 공을 넣고 제쳤다. 딱 수비수가 다리를 벌릴 타이밍이 있다. 그런데 사실 넣을 상황이 아닌데도 넣다가 끊긴 적도 많다.

앞으로 당신의 ‘가랑이 개인기’를 유심히 지켜보겠다. 서울과의 2라운드 경기에서 당신은 리그 데뷔골을 뽑아냈다. 어떻게 보면 운도 조금 따른 것 같다.

중앙에서 드리블을 하다 탁 쳤는데 슈팅 기회가 생겼다. 바로 때려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공이 발에 굉장히 잘 맞았는데 공이 골키퍼 정면으로 가더라. 그런데 그게 골키퍼를 맞고 들어갔다. 나중에 다시 영상을 보니 무회전 슈팅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때린 건 아닌데 너무 잘 맞아서 칭찬하는 기사가 많았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무회전 노리고 찼다”고 말하고 다닌다.

꿈보다 해몽이다. 나는 그 골보다 경남과의 개막전에서 골대를 맞춘 슈팅이 들어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 슈팅이 무척이나 아쉽다. 의도하고 감아 차긴 했는데 그렇게 잘 맞을 줄은 나도 몰랐다. 나도 내가 놀랐었다. 그때는 슈팅을 하고도 들어갈 거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 슈팅이 골로 연결됐다면 세 경기 연속골이었을 텐데 무척 아쉽다.

서울전에 이어 성남전에서도 프리킥으로 골을 기록하면서 두 경기 연속 득점포를 가동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나.

그 때는 차기 전부터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 (문)상윤이가 차기로 했었는데 내가 (문)상윤이한테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한 번 차볼게. 다음에 기회 오면 네가 차.” 아마 (문)상윤이 기분이 조금 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연습할 때도 그 자리에서 10번 차면 5번은 넣을 만큼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슈팅하기 전에 미리 골 넣고 뛰어갈 골대 뒤 중계 카메라 위치부터 찾았다. 사실 서울전 골은 조금 얼떨떨했는데 성남전 골은 생각한대로 맞아 떨어졌다.

그날 골을 넣은 뒤 카메라 앞으로 달려가 하트 세리머니를 했다. 다음에는 골을 넣고 어떤 세리머니를 하고 싶나.

지난해 대학생 신분으로 인천 경기를 보면서 빠울로가 서울전에 결승골을 넣고 서포터스석으로 달려가 포옹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이건 우리 홈 경기장에서만 할 수 있는 세리머니 아닌가. 원정경기에서만 두 골을 넣고 아직 홈 경기 골은 없는데 안방에서 골을 넣는다면 서포터스석으로 뛰어가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그때 빠울로처럼 반갑게 맞아줬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민망할 것 같다.

이왕이면 여성팬 쪽으로 뛰어가는 건 어떤가.

자세히 봤는데 앞쪽에는 여성 관중이 별로 없는 거 같더라.

아쉽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인천 상승세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팀 분위기가 너무 좋다. 서로 헌신할 준비가 돼 있다. 또한 김봉길 감독님이 선수들을 믿어주시는 것도 우리가 좋은 경기력을 발휘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어느 한 명이 잘해서가 아니라 뒤에서 묵묵히 받쳐주는 선수들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는 코치진들, 열정적으로 응원을 보내주시는 팬들이 모두 어우러져 초반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것 같다.

세 경기 만에 K리그 클래식 무대를 뒤흔든 이석현은 올 시즌 과연 얼마나 팬들을 더 놀라게 할까. (사진=인천유나이티드)

인천이 잘 나가고 있지만 요새 인천 팬들은 걱정이 많다. 어떤 걱정인 줄 아나.

내가 다른 팀으로 갈까봐 걱정하시는 걸로 알고 있다. 많은 분들이 그 이야기를 하신다.

인천은 늘 능력 있는 선수들을 다른 팀으로 보냈다. 당신도 곧 더 재정이 좋은 팀으로 팔려갈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아직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일단은 나에게 이런 좋은 기회를 준 인천에서 오랜 시간 뛰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내 의도와 다르게 내가 팀을 떠나야 한다면 그때는 팬들이 나와의 작별을 아쉬워할 만큼 많은 업적을 쌓고 싶다. 떠나든 팀에 남아 있든 그저 그런 선수가 되고 싶지는 않다. 일단 나는 인천과 5년 계약을 맺었고 최대한 인천을 위해 헌신할 생각이다. 그리고 이제 세 경기했는데 가긴 어딜 가나.

알겠다. 여자친구와 잘 만나고 있는데 벌써 헤어질 걱정을 하는 것보다는 그 상황에 충실해 더 열심히 사랑을 나누는 게 후회가 없는 길인 것 같다. 그렇다면 국가대표에 대한 욕심은 없나.

왜 없겠나. 축구선수라면 당연히 태극마크를 달고 뛰는 걸 누구나 상상한다. 특히 내년에 인천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고 싶다. 나는 만 23세를 넘겼지만 와일드카드로 내가 뛰는 이 도시에서 내가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뛴다는 건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상상만 해도 멋진 장면이다. 그렇다면 올 시즌 각오에 대해 한 마디 해 달라.

신인왕이 없어지고 영플레이어상이 신설돼 경쟁자가 많아졌지만 공격 포인트도 많이 올리고 팀에 헌신해 좋은 성적을 거두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천 유니폼을 입고 내년 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 나가고 싶은 마음도 크다. 초반에 잘하고 있어 지금이 무척 좋은 기회인 것 같다. 팀이 보다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응원하는 팬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SNS를 통해 보내주시는 응원에 큰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응원을 보내주시는 팬들이 온라인뿐 아니라 이제는 경기장에도 직접 찾아와 응원해 주신다면 더 신나게 축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분들에게 실망을 드리지 않도록 늘 고민하고 노력하겠다. 그리고 프로축구연맹은 신인상 폐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 올 시즌을 앞두고 신인상을 타면 팬들에게 노트북을 선물하겠다는 약속도 했는데 그 약속도 못 지키게 생겼다. 이건 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