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일을 하면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면서 느낀 건 모두의 존경을 받는 이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 남부러울 것 없고 자신감 넘쳐도 할 말이 없지만 그들은 늘 하나 같이 겸손했다. 축구장에 가면 몇 명이 알아본다며 우쭐대던 내 자신은 아직 이런 훌륭한 분들을 따라가기에는 한참 멀었다. 성공한 이들의 인터뷰는 늘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들은 모두의 존경을 받아서 겸손하고 예의 바른 것이 아니라 겸손하고 예의 바르기 때문에 모두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성공하는 것보다 존경을 받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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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과 광저우의 공식 기자회견은 광저우의 불참으로 전북 파비오 감독대행과 최은성만이 참석한 채 진행됐다. (사진=프로축구연맹)

나이 많아 기자회견 못 한다는 광저우 감독

광저우 헝다가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전북현대와의 원정경기를 치르기 위해 전주를 방문했다. 그런데 전주에 도착한 광저우의 건방과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경기 시작 48시간 이전에 원정 팀이 도착해야 한다는 규정을 어기고 경기 하루 전 입국한 그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오전 11시에 열릴 공식 기자회견을 오후 3시로 연기하더니 결국 공식 기자회견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광저우 측은 기자회견 불참 이유에 대해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고령이어서 불참하겠다”고 전했다. 또한 기자회견장에서 감독 역할을 대신할 수석코치와 대표 선수도 참석하지 않았다. 전북 파비오 감독대행과 최은성만이 참석한 채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이건 명백한 잘못이다. 전북은 물론 AFC 챔피언스리그를 무시하는 처사다. 흔히 감독이 경기 전 기선 제압을 위해 심리전을 펴는 경우는 있지만 이건 심리전이 아니라 상대팀과 대회 자체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공식 기자회견은 상대팀과 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공식 기자회견이 딱딱한 분위기에서 아무리 입에 바른 소리를 하는 자리라지만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전북은 지난 일요일 K리그 클래식 울산전을 치른 뒤 피곤할 법도 하지만 이 공식 기자회견에 ‘당연히’ 참석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것도 아니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동한 광저우가 이런 식으로 예의를 갖추지 않는 건 ‘축구 후진국’이라고 인증하는 꼴이다. 돈 많은 구단이라 벌금 110만 원 내는 게 별로 아깝지 않을 테지만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다.

리피 감독은 1948년생이다. 아직도 팔팔하게 선수들을 지도하며 열정을 보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알렉스 퍼거슨 감독보다 무려 7살이나 어리다. 리피 감독이 나이 많다고 이렇게 행동하면 퍼거슨 감독은 뭐가 되나.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의 고령이라면 축구 감독 안 하면 된다. 나이도 많은데 어떻게 선수들을 지도하고 경기가 펼쳐지는 두 시간 동안 벤치에 앉아 있나. 전북이 위협적인 슈팅이라도 날리면 고령의 나이에 심장마비의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 기자회견도 참석 못할 정도의 건강 상태라면 편히 집에서 쉬는 게 나을 것이다. 규정을 어겨 경기 전날 도착하고 공식 기자회견 시간 변경까지 요청하더니 결국 이마저도 불참한 광저우는 건방과 오만의 끝판왕이다.

상대팀에 예의를 다하는 K리그 클래식

K리그 클래식 구단들은 AFC 챔피언스리그 원정을 떠나 늘 홈 텃세에 푸대접을 받아왔다. 지난 해 4월 호주 센트럴코시트 원정을 떠난 성남은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 후 시드니에 도착해 또 다시 2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경기장 근처 호텔에 도착했다. 규정상 홈팀이 숙소와 통역, 교통편 등을 제공해야 하지만 센트럴코스트가 준비해줬다는 호텔에서는 “아직 준비가 덜 됐다”면서 12시간 넘게 이동한 성남 선수들을 호텔 로비에서 꼬박 세 시간 이상 기다리게 했다. 부산과의 K리그 경기를 끝내고 부랴부랴 이동한 선수들은 호텔 로비에서 새우잠은 청해야 했다. 분요드코르와 4강 1차전 원정경기를 치른 울산 역시 훈련장에 제대로 된 조명시설이 없어 제대로 된 훈련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호곤 감독은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원정에 오면 이 정도 고생하는 건 당연하다.”

특히나 중국은 원정팀에 대한 텃세가 상상을 초월한다. 홈팀에서 원정팀 선수단 버스 한 대와 VIP용 세단 한 대를 지원하도록 규정을 정해놨지만 중국 클럽들은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울산과 맞붙은 베이징 궈안은 사전에 통보한 공식 일정 이외에는 일절 차량지원을 해주지 않았고 전북은 광저우 원정을 떠나 노후된 1990년식 차량을 VIP용으로 제공받았다. 홈팀이 제공하게 돼 있는 원정팀 식사 또한 매번 똑같은 메뉴다. 훈련장도 수시로 변경해 불편함이 많고 원정 응원단에 대한 배려도 전혀 없다. “우린 홈과 원정 응원석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중국 클럽들은 “정 불안하면 원정 응원 온 팬들이 경기장에서 공안에게 말하라. 경기 두 시간 전 게이트 문을 닫을 예정이니 세 시간 전에 입장해야한다. 또한 경기가 끝나고 홈팀 관중이 모두 퇴장하면 마지막에 빠져나가라”는 상식 밖의 이야기들을 전했다.

반면 K리그 클래식 구단들은 최대한 상대를 배려하고 예의를 다한다. 야간에 선수들이 병원에 가거나 급한 볼 일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호텔에 24시간 기사와 차량, 통역을 배치하고 선수단 식사 메뉴까지 세세히 정해 사전 조율한다. 종교적인 이유로 금기시하는 음식이 많은 중동 클럽이나 심판이 체류할 때는 시내를 샅샅이 뒤져 음식을 조달하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음식이지만 전주나 울산, 포항 등 지방 경기장 숙소 근처에서 이런 음식을 조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AFC 규정에는 홈 팀에서 현지 숙식을 3박 4일 동안만 제공하도록 돼 있지만 울산은 지난해 호주 브리즈번 로어가 방문했을 때 4박5일 체류 협조를 원하자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기도 했다. 생각 같아서는 알 사드가 전주를 방문했을 때 민박집에서 재워도 성에 차지 않았지만 전북은 그들을 최고급 호텔로 안내했다.

그들을 고개 숙이게 하는 건 승리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원정 텃세를 경험한 K리그 클래식 구단들도 똑같이 응징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90분 동안 갚아야 할 일이다. 경기 전후에는 상대팀에 대해 최대한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는 게 축구 선진국으로서의 도리다. K리그 클래식 구단들은 최근 4년 동안 세 차례나 아시아 정상 무대에 섰지만 이것만큼 우리가 자부심을 느껴야 할 건 이 값진 성과가 상대를 최대한 배려하고도 얻어낸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행동은 상대에게 피곤함과 불쾌감을 느끼게 해 경기력에 영향을 주지 않고도 정정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반면 안방에서는 온갖 텃세를 저지르고 원정길에 올라서는 무례하고도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팀은 그만큼 우리를 견제하고 두려워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홈 텃세를 당하고도 그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똑같이 갚아주지 않아 K리그 클래식 구단들을 순진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는 그들과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 K리그 클래식의 성숙한 문화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나는 이게 바로 리그의 수준 차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으면서 아시아 정상에 도전할 자격을 얻을 수는 없다. 돈 많은 구단주가 팀을 인수해 한 순간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최고의 외국인 선수를 영입한다고 명문 구단이 되는 건 아니다. 상대에 대한 예의와 매너를 지키는 건 가장 상식적인 일이지만 명문 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이는 온몸에 명품을 휘감고 자신이 원래부터 대단했던 것처럼 건방지게 행동하지만 진짜 ‘퀄리티 있는’ 부자는 오히려 더 검소하고 예의바르다.

이런 팀들을 응징하는 법은 그들의 숙소나 식사, 훈련 등에서 불편함을 주는 게 아니라 경기력으로 박살을 내는 것뿐이다. 물론 광저우와의 경기는 쉽지 않은 승부가 될 것이다. 지난해 광저우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던 전북은 충격의 1-5 대패를 당하기도 했다.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외국인 선수를 영입했고 비록 공식 기자회견에 나오지도 못할 만큼 자신들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늙어 빠졌지만 명장이라던 감독까지 데려왔다. 광저우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전북은 지난해 1-5 대패 이후 치른 부담스러운 광저우 원정 경기에서 석연찮은 판정으로 조성환이 퇴장당하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짜릿한 3-1 승리를 챙긴 기억도 있다. 이 경기에서 5만 명의 광저우 팬들은 전북의 ‘닥공’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오후 7시에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전북과 광저우의 경기는 예의를 지키는 자와 예의 없는 자의 맞대결이다. SBS ESPN과 KBS N 스포츠를 통해서도 생중계되는 이 경기는 당연히 정의가 승리해야 한다. 아무리 돈으로 쳐 발랐어도 결국 클래스는 당해낼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한판이었으면 좋겠다. 건방과 오만의 광저우를 고개 숙일 수 있게 하는 건 오직 승리뿐이다. 광저우가 언제부터 강팀이었나. 이탈리아 감독 하나 와서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잘난 척하다 큰 코 다칠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