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5월 한국 축구는 K리그 승부조작이라는 최악의 사건을 겪었다. 60명이 넘는 선수들이 승부조작에 연루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까지 생겨났다. K리그에서 정정당당히 뛰던 선수들은 물론 팬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자 상처였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승부조작 여파가 어느 정도 가라 앉아 다시 K리그는 평온해졌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홀로 괴로워하는 이가 있었다. 승부조작 누명을 벗기 위해 15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외로이 법적 다툼을 벌였던 대구FC 온병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오늘은 승부조작 선수라는 누명을 벗고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온병훈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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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병훈을 만나 승부조작 누명을 벗기까지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들어봤다.

일본에 진출한 유망주 온병훈

연희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은 온병훈은 또래들 사이에서는 당해낼 선수가 없었다. ‘축구 명문’ 중동중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한국 축구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동중학교를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으로 이끈 온병훈은 미드필더임에도 탁월한 득점력을 뽐내며 대회 MVP와 득점왕을 휩쓸었다. 여러 고등학교에서 중학생 온병훈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주목하고 있었다. 차원이 다른 기량을 선보인 온병훈은 “국가대표는 물론 은퇴 후 행정가가 돼 대한축구협회장이 되고 싶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그는 중학생이었지만 미래에 대한 꿈이 무척 구체적이었고 당당했다.

당시 황보관 J리그 오이타 트리니타 육성부장은 재능 있고 어린 한국 선수를 찾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 오이타의 핵심으로 기용할 생각이었다. 황보관 부장이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재능 있는 선수를 수소문하고 있을 때 정해성 코치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들 녀석이 중동중학교에서 공을 차고 있는데 거기에 아주 기가 막힌 애가 있어. 온병훈이라고. 한 번 데려가서 키워봐.” 황보관 부장은 곧바로 온병훈을 보기 위해 중동중학교 경기를 찾았다. 그리고는 어린 선수가 혹 부담이라도 느낄까봐 숨 죽여 몰래 온병훈의 플레이를 지켜봤다. 이날 경기에 나선 온병훈은 무려 2골 2도움이라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치며 팀의 4-1 완승을 이끌었다. 황보관 부장은 단 두 경기만 지켜보고 온병훈 영입을 결정했다.

“일본에서 한 번 뛰어보지 않을래?” 온병훈은 어릴 적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캐논슛을 꽂아 넣으며 자신의 우상이 된 황보관 부장의 제안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집안에서는 외아들을 어린 나이에 외국에 혼자 보내는 것이 불안해 반대했지만 온병훈의 생각은 확고했다. “갈래요. 다른 무대도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어요. 외국에서 공부도 병행하면서 대학에도 가고 싶어요.” 17세의 나이에 홀로 일본에 간 온병훈은 거기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뽐냈다. 유소년 경기는 물론 성인들이 주로 나서는 J리그 2군경기에도 꾸준히 모습을 보였다. 2군끼리 치르는 일왕배의 우승까지도 이끌어 냈다. 20세가 되면 곧바로 오이타 성인팀과 계약하고 J리그 공식 데뷔전을 치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국내 복귀와 청소년 대표 발탁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어.”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03년 겨울 전격적으로 한국행을 결심했다. 일본에서 대학 무대를 거치고 싶었지만 일본은 축구선수가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축구 못지 않게 학업도 병행해야 했다. 축구만 잘하면 체육특기생으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우리와는 달랐다. 온병훈도 틈틈이 일본어와 영어를 비롯한 공부에 매진했지만 목표였던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많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또래 친구들이 다 한국에서 이미 대학 입학을 확정지을 무렵 중동고등학교로 돌아왔다. 온병훈은 이미 대학교 축구부에서는 뽑을 인원을 다 뽑은 상황이라 위험 부담이 있었지만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그가 3년 동안 일본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보여줄 기회는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대회 딱 한 번뿐이었지만 자신 있었다.

대학 입학 선수 선발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얻은 온병훈은 펄펄 날았다. 경기가 끝나자 그의 진가를 알아본 몇몇 대학에서 그에게 입학 제의를 했다. 특히 신연호 감독이 지휘하고 있는 숭실대가 가장 매력적이었다. 양상민과 김영후, 박주호, 박종진, 김원일 등을 배출한 숭실대의 당시 전력은 대학에서도 늘 상위권이었다. 온병훈은 잠시 고민한 뒤 결국 숭실대를 택했다. 숭실대에 입학한 온병훈은 곧바로 박성화 감독이 이끄는 U-20 청소년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다. 그동안 한국 무대를 떠나 있어 많이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온병훈의 실력이 입소문을 타고 박성화 감독의 귀에까지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근호를 비롯해 박주영, 백지훈, 김진규, 신영록, 차기석 등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 온병훈의 이름도 있었다.

국내 무대에 있던 선수들은 이미 검증이 끝났지만 온병훈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박성화 감독은 수원컵과 부산컵 두 차례의 평가전을 지켜본 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대표팀 21명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당시 언론은 “흙 속의 진주를 발견했다”면서 온병훈의 등장에 주목했다. 온병훈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태극마크를 단 아들을 보고 부모님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셨는지 몰라요. 그 당시 신문 1면에도 나오고 김호 숭실대 총감독님도 애제자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다 플랜카드가 걸려 있기도 했죠.”

K리그 입성, 두 번의 좌절과 대구에서의 행복

대학교 2학년을 마칠 무렵 자유계약이던 K리그가 드래프트 제도로 돌아간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언젠간 K리그에서 마음껏 뛰어보고 싶었던 온병훈은 자기가 원하는 팀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계약 제도일 때 K리그에 입단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포항과 전북에서 영입 제의를 받은 온병훈은 2006년 시즌을 앞두고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 포항을 택했다. 포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온병훈은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잘 할 수 있다. 내 실력만 다 보여준다면 충분히 K리그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자신감은 곧바로 사라졌다. 포항에는 같은 포지션에 따바레즈라는 어마어마한 산이 있었다. 지금은 포항의 핵으로 성장한 황진성도 벤치에 앉는 신세였다. 이들 외에도 포항에는 이동국과 김기동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2년 동안 포항에서 딱 두 경기에 나섰다. 주로 2군경기에만 나서는 신세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프로의 벽은 너무 높았고 같은 포지션에 뛰는 선수들의 재능이 너무 대단했다. 포항과 3년 계약을 했던 온병훈은 2년이 지난 뒤 또 다른 기회를 잡기 위해 팀을 옮겼다. 맨 처음 포항과 함께 자신의 영입을 노렸던 전북으로의 이적이었다. 전북에서 첫 시즌 9경기에 나서 두 골을 기록하는 등 조금씩 자리를 잡은 온병훈은 2009년에는 또 다시 주전경쟁에서 밀리고 말았다. 루이스와 에닝요 등 이번에도 외국인 선수와의 경쟁은 버거웠다. “제 포지션 특성상 외국인 선수와의 경쟁이 불가피해요. 하지만 그때는 내 실력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누군가를 원망하기만 했어요. ‘내가 쟤보다 뭐가 모자라다고 나를 벤치에 앉혀두는 거야’라고 생각했죠. 불만이 많았어요.”

“유망주는 원래 그냥 유망주로 끝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만큼 어릴 적에 잘했기 때문에 절박함도 모르고 컸거든요. 저도 꽤 유망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왜 그런 선수들이 더 성장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아요.” 한 때 공 좀 찬다던 온병훈은 결국 전북에서도 주전경쟁에서 밀려 대구로 이적하게 됐다. 온병훈에 현금을 얹어 펑샤오팅과 맞바꾸는 굴욕적인 트레이드였다. 하지만 온병훈은 이를 굴욕이라고 느낄 겨를도 없었다. “축구를 잘한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제가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고 절박함도 생겼어요. 포항과 전북에서는 벤치에도 앉지 못하고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게 너무 싫었는데 상대적으로 선수층이 두텁지 못한 대구에서는 완전한 주전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가장 파이팅이 넘쳤던 때였죠. 저에게는 마지막 기회였고 의욕도 있었어요.”

절박했던 온병훈은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매일 경기 날이면 엔트리에 들지 못하는 게 당연했던 그는 간절한 바람대로 대구의 주전 선수가 됐다. “주말에 경기가 있으면 경기에 나서는 게 당연한 선수가 됐고 한 번 결장하면 사람들이 ‘왜 온병훈은 오늘 안 나왔느냐’고 궁금해하는 상황이 됐어요. 너무 행복했죠. 하지만 꾸준히 경기에 나가면서도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았어요. 포항과 전북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고 지금 경기장에 서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잘 알았거든요. 한 번 흐트러지면 또 바닥으로 떨어질까봐 이를 악물고 했어요.” 온병훈은 대구 이적 첫 해인 2010년 28경기에 나서 4골 2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주축 미드필더로 자리매김했다. 이영진 감독은 투쟁심 넘치면서도 성실한 온병훈의 플레이에 반해 그를 꾸준히 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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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시절 골을 넣고 환호하는 온병훈의 모습. (사진=전북현대)

2010년 8월 7일, 잊을 수 없는 그의 생일

2010년 7월부터 K리그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K리그에 승부조작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온병훈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스타급 선수 몇몇이 승부조작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온병훈의 대답은 이랬다. “그런 게 정말 있어? 있으면 싹 다 잡아가서 나도 이 참에 국가대표나 한 번 해봤으면 좋겠네.” 그저 동료들과 이렇게 말하고 껄껄 웃었다.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온병훈에게 승부조작은 남의 이야기였다. 온병훈은 대구 동료들도 승부조작에 가담했다는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승부조작은 K리그에 암 덩어리처럼 조금씩 퍼지고 있었고 대구의 동료들 또한 하나 둘 전염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0년 8월 7일 온병훈 인생에 있어 잊을 수 없는 경기가 펼쳐졌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생일이었다. 부모님을 비롯한 친척들이 직접 대구까지 와 생일을 맞은 온병훈을 응원했다. 상대는 대전이었다. 경기 전부터 ‘오늘은 부모님도 오셨는데 뭔가 보여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전반전에 대전은 한 명이 퇴장을 당했고 대구는 더욱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칠 기회를 잡았다. 전반 프리킥 기회를 잡은 온병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나 넣자.’ 온병훈이 강하게 때린 공은 대전 수비벽을 넘더니 골문을 그대로 강타하고 말았다. 아쉬웠지만 일단 감은 좋았다. 그런데 하프타임이 지나고 후반전을 앞둔 상황에서 공격수 장 모 선수가 온병훈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후반전에 골 넣지마. 지면 내가 5백만 원 줄게.” 평소 대구의 간판 공격수라던 장 모 선수의 말을 온병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승부조작은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하던 온병훈으로서는 이게 승부조작 제의라는 것도 당시에는 몰랐다. “정신 없이 후반전을 준비하고 있어서 그냥 넘겼어요. 승부조작이라는 건 생각도 못했죠.” 후반전 들어서도 온병훈이 골 욕심을 내자 장 모 선수는 한 번 더 이렇게 말했다. “넣지 말라고.” 하지만 온병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오로지 대구에서 이렇게 주전으로 뛸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생일을 맞아 부모님까지 오신 터라 반드시 골을 넣고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골문을 향해 돌진했다. 당시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후반전 내내 온병훈은 한 골이라도 넣기 위해 가장 많이 뛰고 가장 위협적인 움직임을 선보였다. 온병훈은 후반 막판 코너킥으로 팀의 첫 번째 골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팀은 대전에 1-3으로 패하고 말았다. 대전의 퇴장으로 대구는 한 명이 더 많았지만 수비수들이 그냥 길을 터주면서 연이어 골을 허용했다. 온병훈은 경기가 끝난 뒤 5백 만원을 받지도 않았고 이 일은 그렇게 잊혀지는 듯했다.

승부조작 누명을 쓴 온병훈

시간이 흘러 1년이 지났다. 장 모 선수는 상무에 입단하고 팀에 없었다. 그런데 2011년 7월 검찰에서 대구 구단으로 전화가 왔다. “네. 여기 창원지방검찰청입니다. 승부조작 혐의를 받고 있는 선수들이 있어서 소환조사를 해야겠습니다. 조XX, 안XX, 이XX, 오XX, 양XX, 그리고 온병훈, 이상 6명입니다.” 구단에서는 충격에 빠졌다. 승부조작이 K리그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게 사실이었고 대구 일부 선수도 그랬다니 엄청난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누구보다 절실한 마음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온병훈도 승부조작 가담자 명단에 포함돼 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구단에서는 온병훈을 따로 불렀다. “너 정말이야? 승부조작 했어?” 온병훈은 기가 찼다. 그리고 억울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승부조작을 한 적이 없습니다.”

구단에서도 평소 성실한 온병훈을 믿고 있었지만 소환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조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가서 너는 가담하지 않았다는 걸 솔직히 말하고 돌아와.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동료들도 온병훈이 승부조작 가담자로 의심 받으며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병훈이가 왜? 그렇게 포항하고 전북에서 고생했던 애가 이제 막 자리 잡았는데 돈 몇 푼이 아쉬워서 승부조작을 했겠어? 병훈이는 절대 아닐 거야.” 온병훈 역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기 때문에 당당한 마음으로 창원에 갔다. 하지만 온병훈을 다른 승부조작 가담자들과 똑같은 눈으로 쳐다보는 일부의 시선도 있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인하다가도 검찰 조사에서 곧바로 승부조작 가담을 실토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온병훈은 그저 ‘빨리 조사 마치고 돌아와서 운동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검찰에 가 조사를 받았다. 대구에서 상무에 입대한 장 모씨가 승부조작 사실을 시인하며 “함께 조작에 참여한 온병훈을 비롯한 다섯 명에게 5백만 원씩을 줬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같이 간 동료 5명은 조사가 시작한지 단 몇 분 만에 승부조작 가담 사실을 시인했다. 하지만 아무 죄가 없는 온병훈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자 황당한 상황이 연출됐다. 승부조작을 시인한 사람들은 수사관이 무척이나 따뜻하게 대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그래. 괜찮아.” 그런데 완강히 혐의를 부인하는 온병훈에게는 너무도 매정하게 대했다. “어디서 어린 놈이 거짓말을 해? 너 돈 받았지? 장XX가 다 불었어.” 범죄자는 오히려 편했고 누명을 쓴 온병훈만 범죄자 취급을 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온병훈을 앞에 두고 여러 명의 수사관들은 그의 행동 하나 하나, 눈빛, 말투까지도 분석하고 있었다. “너 돈 받았지?” “승부조작 했지?” 이런 똑같은 질문만 수십 번씩 했다. 하지만 당당했던 온병훈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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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병훈은 대구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지만 승부조작 가담자로 억울한 누명을 써 가장 괴로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사진=대구fc)

“저 형은 제 집이 어디인지도 몰라요”

수사가 길어졌다. 대구에서 창원까지 매일 오가며 나흘 동안 조사를 받았다. 한 번에 짧게는 8시간씩, 길게는 10시간씩 조사가 이어졌다. 온병훈은 수십 번이나 이렇게 생각했다. ‘여긴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지금 운동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왜 내가 여기 있어야 하나.’ 온병훈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승부조작 가담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쓰러져 머리를 다쳤다. 오랜 좌절을 딛고 이제 막 대구에서 행복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온병훈으로서는 너무도 괴로운 시간이었다. 조사를 마치고 대구에 와 숙소에서 밥을 먹을 때는 일부러 다른 동료들을 피했다. 장 모씨는 “온병훈이 대전전 당일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 골을 넣을까봐 하프타임 때 포섭했다. 경기 끝나고 5백만 원을 줬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온병훈은 너무도 억울했지만 이미 세상에 승부조작 가담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졌다. 졸지에 범죄자가 된 것이다.

온병훈과 장 모씨의 주장이 너무도 달라 대질심문이 이어졌다. 온병훈이 장 모씨와 창원지검 조사실에서 마주했다. 장 모씨는 “온병훈의 집 앞에 내 차를 타고 가 5백 만원을 현금으로 줬다”고 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평소 팀에서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온병훈과 장 모씨는 몇 번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고 더군다나 장 모씨가 온병훈의 집이 어딘지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온병훈이 억울해서 조사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형은 제 집이 어디인지도 몰라요. 한 번 물어보세요.” 그러자 조사관이 온병훈에게 “조용히 하라”면서 “장XX 말이나 더 들어보라”고 했다. 장 모씨에게만 질문이 계속 이어졌고 온병훈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억울했지만 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온병훈으로서는 장 모씨가 자신의 집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무죄를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였다. 그 사실만 밝혀내면 장 모씨가 자신의 집 앞에 찾아와 돈을 줬다는 게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수사관이 한 장의 지도를 가지고 왔다. 그러더니 장 모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온병훈 집이야. 그렇다면 너는 아마 이쯤에서 차를 대고 온병훈을 만나 돈을 줬겠지. 맞지?” 장 모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병훈은 기가 찼다. 온병훈의 집이 어디인지 수사관이 장 모씨에게 친절히 알려준 꼴이 됐기 때문이다. 온병훈으로서는 무죄를 입증할 단서 하나를 날렸다. 같은 팀에서 그래도 승리를 위해 같이 땀 흘리던 선배가 자신에게 있지도 않은 범죄를 뒤집어 씌우는 모습을 보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아마 제가 욕설을 하고 그 형 멱살을 잡았으면 아마 재판까지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분위기를 자꾸 그렇게 몰아가고 제가 원래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어서 행여 말 실수를 하면 또 꼬투리를 잡을까봐 조용히 무죄를 주장했어요. 그랬더니 어느 순간 제가 혐의를 인정한 것처럼 보여지더라고요.” 검사가 대구의 승부조작 가담자 5명과 함께 온병훈까지도 똑같은 범죄자로 몰아 같이 이름을 올렸다. 결국 그는 승부조작에 가담한 적도 없고 돈 한 푼 받지도 않았지만 스포츠 정신과 팬들을 져버린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재판을 받아야 했다. 자신의 생일에 부모님 앞에서 멋진 골을 터뜨리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결국 골대를 맞추며 아쉬워하던 온병훈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1심 재판, 믿을 수 없는 유죄

1심 재판이 시작됐다. 변호사를 선임한 온병훈은 누명을 벗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온병훈 측 변호사가 장 모씨에게 다시 지도 한 장을 펼쳐 보였다. 대질심문 때의 지도와 똑같은 것이었다. “자, 여기에서 온병훈의 집이 어딘지 지목할 수 있나요?” 잠시 당황한 장 모씨는 전혀 엉뚱한 곳을 지목했다. 와 본 적이 없는 곳이라 같은 지도인데도 모르는 것이었다. 무죄를 입증할 결정적인 단서를 다시 찾은 셈이었다. 장 모씨의 앞뒤가 안 맞는 말은 또 있었다. 승부조작 경기가 끝난 뒤 3,700만 원을 계좌에서 인출해 온병훈에게 가장 먼저 돈을 건넸다고 했지만 모순이 있었다. 팀 동료 중 장 모씨로부터 경기 다음 날 곧바로 돈을 받은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돈을 줬다는 날짜가 다 엉터리였다.

온병훈 측 변호사는 장 모씨가 온병훈을 만나러 왔다면 통화 기록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증거 자료로 전화 통화 내역서를 뽑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재판정 측에서는 “1년이 지나면 통화 내역을 뽑을 수가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알아보니 재판에 사용할 근거로 1년이 넘은 통화 내역도 뽑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우리 의견이 묵살된 거예요.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그날 경기 영상을 수도 없이 돌려봤는데 다들 그러더라고요. ‘온병훈은 저 날 절대 승부조작을 할 만한 움직임이 아니다. 가장 열심히 뛰었다.’ 축구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도 그날 경기를 보시고는 다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내심 무죄 선고를 기대하고 있었다. 여러 정황상 장 모씨의 진술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걸 충분히 입증했고 경기 영상을 통해서도 온병훈이 얼마나 승부에 강하게 집착했는지 보여줬기 때문이다.

재판이 끝날 때쯤 온병훈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판사님,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해도 될까요?” 판사가 최후변론을 허락했다. 그는 장 모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 정말 나쁘다. 솔직히 말해줘. 형이 거짓말하면 그 한 마디에 내 인생은 다 끝나. 날 보고 대답해봐. 정말 형이 나한테 그날 집 앞에 찾아와 돈을 줬어? 부탁이야. 나 너무 억울하거든. 솔직히 날 보고 말해봐.” 장 모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1심 재판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다른 승부조작 가담자들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며 유죄가 확정됐고 온병훈 또한 “받은 돈 5백만 원을 벌금으로 내라”는 유죄 판결이 났기 때문이다. 무거운 형량은 아니었지만 온병훈도 유죄는 유죄였다. 결국 법원의 판결로 온병훈은 다른 승부조작 가담자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됐다. 승부조작으로 유죄를 선고받으면 제명 등 강력한 조치를 내리던 대한축구협회로서도 유죄를 선고받은 온병훈만 선처해 줄 수가 없었다.

“온병훈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탕탕탕.”

온병훈에게는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2년 넘게 사랑을 키워오던 이 커플은 상견례까지 마치고 곧 평생을 약속할 사이였다. 하지만 1심 재판에서 온병훈이 유죄를 선고받은 뒤 사랑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말 마음이 따뜻한 친구였어요. 1심 재판 때 당연히 잘 될 줄 알았는데 유죄를 선고받고 서로 흔들렸죠. 내 미래가 너무 불투명하고 축구를 다시 할 수 있을지, 과연 그게 가능할지 너무나 괴로운 시간이었죠. 군대도 가야하는데 현실적인 장벽이 너무 높은 거예요. 결국 재판을 준비하면서 자주 보지도 못하고 서로 힘들어서 말다툼도 잦아졌죠.” 온병훈은 결국 1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2년 넘게 키워오던 사랑도 끝이 나고 말았다. “마음이 아파요. 정말 착한 친구였는데….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나죠.” 온병훈은 누명을 벗기 위해 곧바로 항소했다.

온병훈은 자신의 무죄를 더 강력하게 입증해줄 변호사를 찾았다. 1심 재판 때처럼 자비를 털어 변호사를 구하려고 했다. 이미 대구 구단에서의 월급도 끊긴 터라 모아 놓은 돈 조금과 부모님에게 손을 벌려 구한 돈으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변호사들은 대부분 온병훈 변호를 꺼려했다. 승부조작이 워낙 큰 이슈였고 거기에서 60명 넘는 사람 중 유일하게 무죄를 받아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런데 그때 한 변호사가 선뜻 온병훈의 변호에 응하기로 했다. 탤런트 박상원의 형으로 잘 알려진 박상기 변호사였다. 1심 판결문을 쭉 훑어본 박상기 변호사는 “이런 판결은 말이 안 된다. 같이 누명을 풀기 위해 노력해 보자”고 했다. 걱정이 되는 건 창원지법에서 재판을 또 하면 같은 계통에 있는 판사들이 판결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런데 2심 재판은 다른 지역에 있는 판사가 왔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검토할 수 있는 판사였다.

1심 재판 때보다 더 철저하게 준비했다. 직접 대구에 내려가 집 앞 구석 구석을 다 사진으로 찍었다. 장 모씨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걸 입증하기 위한 자료였다. 하나 하나 처음부터 다시 풀어가기 시작했다. 해당 경기 영상을 수십 번씩 돌려보며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동료들과 황보관 선생님이 탄원서도 써주셨어요. 얼마나 그게 무죄 입증에 자료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죠.” 1심 재판 때 아버지와 함께 가 아들이 유죄 선고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너무 가슴 아팠던 온병훈은 결심 공판 때 혼자 창원으로 향했다. 그의 머리는 복잡했다. ‘또 결과가 잘못 되면 어쩌지. 이번에는 반드시 누명을 벗어야 해.’ 그는 다시 그라운드에 서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에게는 단 돈 몇 백만 원의 벌금형도 유죄는 유죄였다. 반드시 무죄를 선고받아야 그라운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떨리는 순간이었다. 결심 공판 때 판사가 입을 열었다. “장XX의 말에 신빙성이 없고 경기 영상을 봐도 승부조작의 정황을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승부조작에 가담도 하지 않았고 돈을 받았다는 증거 자료도 없습니다. 온병훈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탕탕탕.” 온병훈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주저 앉을 뻔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길고 긴 15개월 간의 법적 공방에서 드디어 누명을 벗은 것이다. “힘들 때보다 오히려 무죄를 선고받았을 때가 눈물이 더 났어요. 부모님이 제일 먼저 생각났고 에이전트 계약이 끝났지만 같이 협회도 찾아가고 변호사도 찾아가고 내 일처럼 도와준 TI스포츠 김승태 사장님도 생각이 났죠. 부모님께 곧바로 전화를 드렸더니 저보다 더 좋아하시더라고요.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뻤어요.”

누명 벗은 온병훈, 다시 뛸 준비를 하다

온병훈은 법적 투쟁을 벌이면서도 개인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서울 시내에서 풋살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그러면서 축구선수보다도 더 축구를 좋아하는 탤런트 이완(본명 김형수)을 만나 급격히 친해졌다. 매일 같이 축구를 하면서 그로부터 큰 힘을 얻었다. “유일하게 운동할 때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어요. 형수 형하고 매일 축구를 하며 고통을 달랬죠. 친형이 생긴 것 같아요. 형수 형 덕분에 김태희 누나도 한 번 만났죠.” 그는 꽤 오랜 시간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지만 몸 상태는 충분하다. 무죄 판결만 받으면 언제든 그라운드에 달려 나갈 수 있도록 개인 훈련에 묵묵히 임했기 때문이다. 혼자 수영도 하고 등산도 하고 요가를 하며 복귀만을 기다려왔다.

무죄 판결이 난 뒤 대구 구단에 바로 이 사실을 알리고 협회를 찾았다. 이전까지 승부조작 징계 보류 선수였던 온병훈은 에이전트와 함께 판결문을 가지고 기분 좋게 협회로 향했다. 협회에서도 온병훈을 따뜻하게 반겼다. “축하해요. 그리고 너무 고마워요. 우리도 당신 같은 선수가 한 명은 나와야 이런 상황에서 굴하지 않고 정정당당했던 선수가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어요. 이제부터는 더 이상 승부조작 징계 보류 선수가 아닙니다. 어느 팀이건 원하는 팀이 있다면 계약하시면 됩니다.” 온병훈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됐다. 대구와의 계약이 만료돼 어느 곳으로도 이적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함께 했던 대구와 먼저 계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물론 군대 문제가 걸려 있어 계약 과정이 쉽지만은 않지만 의견을 조율 중에 있다.

온병훈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해야 할 시기에 외롭고 힘겨운 법적 투쟁을 하느라 무려 15개월이나 그라운드를 떠나 있었다. 너무나 아까운 시간이었고 고통의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제 누명을 벗었으니 다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그라운드에 서려 한다. “가장 큰 목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대한축구협회장이 되고 싶어요. 사람들은 비웃을 수 있지만 나중에 50대가 돼 ‘나는 이런 것도 이겨낸 축구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지금의 좌절이 분명 큰 힘이 될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단기적인 목표는 일단 다시 K리그 무대에 서는 거예요. 단 1분이어도 상관없어요. 경기장에 서면 진짜 미친 듯이 뛸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린 아이 손을 잡고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걸 상상하면 벌써부터 너무 벅차요. 눈물이 날 것만 같네요. 저에게는 이 무대가 너무 절박했거든요.” 억울한 누명을 벗고 다시 우리 곁에 돌아온 온병훈을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