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약속 지킨 조기축구회 청년들


드디어 우리가 꿈에 그리던 프로축구 2부리그 출범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14개 팀으로 구성된 1부리그 K리그 클래식은 물론 2부리그 몇몇 팀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하지만 이 관심은 대부분 특정 구단에 쏠려있다. 연고 이전 후 팬들이 직접 나서 팀을 창단한 안양과 부천이 2부리그의 중심에 서 있다. 언론과 팬들도 안양, 부천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인다. 물론 가슴 벅찬 스토리를 갖춘 구단이기 때문에 이런 관심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6개의 2부리그 팀들 또한 각기 다른 역사와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2부리그 팀 중 비교적 덜 알려진 한 팀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비록 덜 알려져 있지만 이 팀의 감동 스토리는 그 어떤 구단에도 뒤지지 않는다. 바로 충주 험멜이다.

1974년 5월, 노원구 월계동에서의 약속

“나쁜 길로 빠지지 말고 국가대표가 될 때까지 뛰자. 한국 축구에 한 획을 그어보자.” 1974년 5월 당시만 해도 시골이었던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청년 20여 명이 모여 다짐했다. 그리고는 흔히 말하는 조기 축구회를 결성했다. ‘월계축구회’였다. 포부는 당당했지만 이 팀을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스타 플레이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막대한 자금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축구가 좋아 동네 친구들이 함께 뭉친 조기축구팀이었다. 하지만 매주 3~4회씩 모여 운동을 하며 조직력을 갖추게 된 월계축구회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동네 친구들이 함께 모여 공을 찰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이들은 월계동의 맨땅에서 축구를 하며 우정을 다졌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변석화도 축구를 좋아하는 동네 형과 친구들을 따라 월계축구회에 가입했다. 그는 비록 취미였지만 축구가 너무 좋아 축구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성인이 되던 1978년 월계축구회는 출범 4년 만에 각종 조기축구대회를 휩쓸 정도의 강호가 됐다.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하석주 전남 감독을 비롯해 박지성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이학종 수원공고 감독, 안종관 전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 고병운 현 부산아이파크 U-15팀 감독, 이재철 전 수원 선수 등 훗날 한국 축구계에서 이름을 날린 이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촌동네 소년들이 만든 조기축구회가 전국의 동호인 축구대회를 휩쓸자 사람들의 시선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동호인 축구대회에서 월계축구회를 넘을 수 있는 팀은 없었다.

월계축구회는 나름대로의 회원 가입 규정이 있었다. 축구 실력은 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사람만을 받아들였다. 월계축구회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이들은 가입을 하고 싶어도 자격(?)을 갖추지 못해 팀에 합류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자는 많아도 1년에 1~2명 정도밖에 회원이 늘지 않았다. 월계축구회는 축구 특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형편이 넉넉지 않은 이들을 선발해 축구화와 트레이닝복 등 운동 용품은 물론 많지는 않지만 용돈까지 챙겨줬다. 이들은 학교 합숙훈련이 없을 때면 월계축구회 선배들과 함께 운동을 했다. 월계축구회는 단순히 축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선후배들의 우정을 다졌고 어린 선수들에게 희망을 줬다.

구멍가게(?) 사장 변석화, 험멜과 만나다

같은 시기 성인이 된 변석화는 학업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다. 작은 회사에 취직해 일을 하며 월계축구회에서 축구를 했다.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도 지겨웠던 변석화는 좋아하는 축구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큰 결심을 했다.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 13년 동안 잘 다니던 회사를 1994년 하루 아침에 그만둔 것이었다. 주위에서 말렸지만 변석화의 의지는 확고했다. “내가 직접 스포츠 용품점을 운영해야겠어. 그래야 더 많은 이들을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지 않겠어?” 변석화는 이런 다짐을 하고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좁디 좁은 가게 하나를 구했다. 이름을 ‘월계스포츠’라고 짓고 축구화와 유니폼 등 스포츠 용품을 팔기 시작했다.

변석화가 운영하는 월계스포츠는 작은 스포츠 용품점이었지만 직접 발로 뛰며 성장했다. 소비자가 가게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소비자에게 찾아가 주문을 받고 배송하는 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사업이 안정화되자 ‘스포스타’라는 독자적인 브랜드도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이 만만치 않았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외국 브랜드가 급속도로 유입되면서 국내 브랜드로는 경쟁하기가 불가능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업에 실패하고 말거야. 더 큰 시장을 찾아봐야겠어.’ 위기감을 느낀 변석화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자신감 하나만 믿고 덴마크로 향했다. 그리고는 덴마크 험멜 본사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험멜을 알릴 자신이 있습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험멜 관계자들은 코웃음을 쳤다. 자본금이 150억 원은 있어야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에서 빈손의 한 동양인이 찾아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렇지만 변석화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흘 간 덴마크에서 지내며 매일 본사를 찾아 자신감을 내비쳤고 결국 험멜 본사에서는 그의 열정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렇게 시골 마을에서 공을 차며 놀던 꼬마 아이는 동대문운동장에서 작은 스포츠 용품점을 운영하다가 1998년 험멜코리아 사장이 됐다. 한국으로 돌아온 변석화 사장은 직원을 채용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축구선수 출신이 있다면 우대해.” IMF 사태 이후 실업팀의 연이은 해체로 한 순간에 백수가 된 축구선수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스포츠 용품 업체 특성상 운동선수 출신이 여러 모로 유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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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멜은 월계축구회 멤버들을 주축으로 실업팀을 창단했다. 의정부를 연고로 했을 당시 험멜의 경기 모습. (사진=내셔널리그)

월계축구회 계승한 험멜축구단의 탄생

변석화 사장은 이때 월계축구회 감독과 단장을 동시에 맡고 있었다. 험멜코리아를 운영하면서 몇몇 후배 축구인들을 직원으로 받아들여 도움을 주고는 있지만 더 많은 이들이 축구선수로 힘겹게 살아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축구를 그만둔 이들과 부상으로 선수 생활이 사실상 끝난 이들, 그 어떤 팀의 선택도 받지 못해 축구화를 벗어야 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축구만 할 수 있으면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다.” 후배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슬픔에 찬 변석화 사장은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더 큰 무대를 만들어 줄 생각이야. 실업축구팀을 창단해야겠어.” 그와 마주 앉은 직원도 놀라지 않았다. 모두들 월계축구회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1999년 3월 험멜코리아 사무실에서 이들은 또 한 번 결심을 했다. 1974년 봄 월계축구회를 처음 만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변석화 사장은 월계축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핵심 선수 9명을 주축으로 험멜 축구단 구성을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수들이 대거 입단을 위해 몰려들었다. 변석화 사장은 축구 실력뿐 아니라 선수들의 절박함을 봤다. 한 선수는 대학교 졸업 후 한일생명 실업팀에서 뛰다가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은 상황에서 험멜을 찾았다. “곧 한일생명 지방대리점 보험 영업사원으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나왔습니다. 축구를 할 수만 있다면 뭐든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 골수암으로 쓰러진 홀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대학 축구부를 자퇴한 선수, 아버지를 뇌출혈로 잃은 뒤 어머니마저 장애를 얻게 돼 생계가 막막한 선수, 집이 가난해 운동을 그만두고 고등학교에서 코치를 하던 전직 선수 등이 다시 한 번 축구선수로서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여기에서 물러서면 더 이상 축구로는 갈 곳이 없었다. 여기에 월계축구회의 베테랑들이 함께 어우러져 합숙을 하며 새벽 단체 운동까지 시작했다. 변석화 사장은 이들을 물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 “낮에는 직장인으로, 밤에는 운동선수로 살아야 한다. 오로지 실력으로 보여줘라. 축구와 일을 동시에 잘해 다른 실업팀 창단에도 자극이 되어라.” 그는 생계가 막막한 선수들을 험멜 직원으로 채용해 업무를 병행하도록 했다. 아무리 퇴근이 늦더라도 야간훈련까지 이어졌다. 이후 프로축구 드래프트에서 지명 받지 못한 선수들 중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를 몇 명 더 뽑았다. 그렇게 월계축구회와 변석화 사장을 중심으로 한 험멜 축구단은 점점 조기축구회에서 벗어나 실업 축구팀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조롱을 이겨낸 그들의 열정

“뭐? 조기축구회가 실업팀으로 바뀐다고?” “실업팀은 아무나 해?” “어차피 다 한물 간 애들이잖아.” 험멜의 창단 소식이 알려지자 비아냥이 쏟아졌다. 아직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부족한 중소기업 험멜코리아에서, 그것도 조기축구회 월계축구회를 중심으로, 그것도 나머지 선수는 이미 성인 무대에서 버림받은 선수들로 실업팀을 만든다니 어쩌면 이런 비아냥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들은 귀를 막고 훈련에만 집중했다. “그라운드에서 쓰러지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이를 지켜본 변석화 사장은 선수들이 기가 죽을지 몰라 대대적인 창단식을 준비했다. 하지만 선수들은 변석화 사장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간소하게 치러주세요. 저희는 그런 성대한 창단식보다는 그저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거든요.” 그렇게 1999년 12월 9일 월계축구회는 실업팀 험멜 축구단으로 다시 태어났다. 험멜 덴마크 본사 사장도 직접 창단식에 참석해 이들을 축하했다.

험멜은 창단 첫해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서울시장기배에서 우승해 전국체전 서울대표가 되더니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는 8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처음 이들을 우습게 보던 주위에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열린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도 또 다시 8강에 오르며 실력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험멜은 어느덧 실업축구에서 다크호스 이상의 존재가 됐다. 뿐만 아니다. 변석화 사장은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업팀과는 별개로 초급, 중급, 상급자로 분류해 사내 축구 동호회를 구성하자.” 주축 선수들이 실업팀 험멜로 옮겼지만 그 근간이 된 월계축구회도 여전히 40여 명이 활약하며 국내 최고수준의 조기축구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월계축구회와 험멜은 거대한 ‘축구공화국’인 셈이었다. 변석화 사장은 2002년부터 대학축구연맹 회장을 맡아 현재 4선에 성공하기도 했다.

사내 상급자 축구팀은 전국 동호인 축구대회에서 매년 서울시 대표로 나설 정도의 강팀이고 월계축구회는 2006년 마카오에서 열린 8개국 초청 국제OB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할 만큼 대단한 성과를 내고 있다. 험멜 직원들은 일주일에 세 번씩 축구를 할 정도로 다들 축구에 열정적이다. 심지어 월계동에 위치한 험멜 본사 옥상에는 풋살장이 갖춰져 있을 정도다. 남들은 회사가 너무 축구에 목을 매는 것이 아니냐, 중소기업이 어떻게 매년 20억 원씩 적자를 보며 축구단을 운영하느냐고 하지만 변석회 사장의 철학은 뚜렷하다. “국내 스포츠 용품 업계에서 험멜이 이렇게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축구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험멜은 골키퍼용 유니폼을 만들 때면 전직 골키퍼 출신 사원이 직접 입어보고 실용성을 점검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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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멜 축구단은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충주에 정착했다. (사진=충주시)

‘유랑 구단’ 험멜의 암흑기 10년

하지만 험멜은 2003년부터 암흑기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한국 축구의 상황이 그랬다. 실업축구를 K2리그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연고지 제도가 도입됐고 험멜은 모기업과 가까운 경기도 의정부시를 연고로 정했다. 그래야 K2리그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정부축구협회가 험멜 축구단을 반대했고 결국 의정부시도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 결국 3년 만에 의정부와 결별한 험멜은 K2리그에 계속 참가하기 위해서는 다른 연고지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경기도 이천시에서 ‘이천 험멜’로 다시 태어났지만 역시 이천축구협회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그렇게 험멜은 2008년 서울시 노원구로 다시 연고지를 옮겨야 했다. 월계축구회 시절부터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던 험멜로서는 툭하면 연고지나 옮기는 ‘떠돌이 구단’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노원구도 험멜의 연고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K2리그에서 명칭이 바뀐 내셔널리그 측에서 갈 곳 없는 험멜의 딱한 사정 때문에 잠시 노원구에 머무는 걸 허락했지만 규정상 노원구는 내셔널리그 경기를 치를 수 없는 곳이었다. 내셔널리그는 천연 잔디 구장에서 열려야 하지만 험멜의 홈 경기장인 노원 마들 스타디움은 인조 잔디는 물론 좌석수도 턱없이 부족했다. 냉정히 말해 생활 체육팀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경기장에서 내셔널리그가 치러지는 셈이었다. 결국 ‘노원 험멜’은 2년 뒤 다시 새로운 연고지를 찾아 떠나야 했다. 10년 동안 무려 네 번째 연고지를 찾아 떠나는 방황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험멜은 또 다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다가 충주에 자리를 잡게 됐다.

14,900명의 관중과 파격적인 프로화 선언

충주에 처음 입성했을 때만 하더라도 또 다시 얼마 가지 않아 연고지를 옮기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과거 연고지에서 경기장 사용 문제와 지역축구협회와의 갈등 등으로 고생하던 험멜은 충주에 정착한 뒤 본격적으로 지역 정착에 나섰다. 지역 유소년 축구팀과 엘리트 축구선수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충주시 또한 험멜 축구단을 위해 경기장과 훈련장 무상 사용을 약속하고 경기장 내 광고 사용 권한까지 줬다. 그동안 조명 시설이 부족해 야간 경기를 치를 수 없었던 충주 험멜은 무려 13억 원을 투자해 완벽한 야간 경기 시설을 갖췄다. 1968년 개장한 충주종합운동장은 무려 44년 만에 야간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통해 지난해 5월 울산현대미포조선과의 홈 경기에서는 무려 14,900명이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3년 K리그 2부리그 출범을 앞두고 여기저기에서 내셔널리그 팀 중 프로화를 선언할 팀이 어디인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대부분이 막대한 자금력을 갖춘 고양국민은행과 울산현대미포조선을 지목했다. 아무도 충주 험멜이 프로화를 선언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양국민은행이 해체하면서 일부가 안양시민구단에 흡수되고 울산현대미포조선이 내셔널리그 잔류를 선언하는 동안 충주 험멜은 또 다시 깜짝 놀랄 발표를 했다. “우리는 프로 2부리그에 참가하겠습니다. 프로축구단이 유일하게 없는 충북에서 프로팀으로 거듭나겠습니다.” 모두가 프로화에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충주 험멜은 과감하게 이렇게 말했다. 충주 험멜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국민은행과 미포조선도 하지 못하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시선도 있었다.

충주 험멜로서는 여전히 난관이 남아있다. 창단 팀에 한해 프로축구연맹에서 10명의 우선지명권을 줬지만 충주 험멜은 창단팀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혜택을 받지 못했다. 안양과 부천에서 좋은 선수들을 대거 데려가는 동안 충주 험멜은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충주 험멜은 전력상 열세가 예상되는 가운데에도 올 시즌 역사적인 K리그 참가를 위해 칼을 갈고 있다. 자체적으로 공개 테스트를 실시해 선수들을 더 수급할 예정이고 사무국 구성과 지역 밀착 마케팅 등을 위해서 머리를 싸매고 있다. 어제(23일)는 충주에 정착하겠다는 의미를 더해 충주의 상징을 가미한 새로운 엠블럼을 선보이기도 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충주 험멜은 조금씩 K리그 클럽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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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조기축구회는 40년이 지난 지금 무려 14,900명의 관중이 찾는 팀으로 발전했다.

40년 전 약속 지킨 월계축구회 청년들

40년 전 한 중학생은 동네 형들과 함께 조기축구팀을 만들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이 팀은 국가대표까지 배출했고 25년 뒤에는 실업팀으로 변모하더니 2013년 K리그에 참가하는 역사를 이루게 됐다. 40년 전 까까머리 중학생은 이제 이 팀의 구단주가 됐고 13년 전 아무도 받아주는 팀이 없어 선수 생활을 접을 위기에 놓였던 어린 선수는 이 팀에 입단한 뒤 이제는 이 팀의 감독이 됐다. 비록 단 한 번도 한국 축구 중심에 서보지는 못했지만 편견과 싸우면서 성장한 충주 험멜의 위대한 발자취는 올 시즌에도 이어진다. 조기축구팀 월계축구회에서 K리그 충주 험멜이 되기까지 험난하고도 아름다웠던 그들의 역사를 이제는 더 많은 이들이 알고 응원했으면 좋겠다.

“축구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는 이들이 모여 하나 하나 역사를 이룬 팀이 이제는 더 큰 무대를 향해 뛴다. 모두들 코웃음을 보낼 때도 그들은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고 이제는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을 이뤄내고 있다. 1974년 5월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모인 20여 명의 소년은 결국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약속을 지켰다. “한국 축구에 한 획을 그어보자.” 볼 품 없던 소년들의 조기축구회는 이렇게 40년 만에 한국 축구에 한 획을 긋는 K리그 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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