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다. 젠장. 커플이 염장질을 해대는 통에 도무지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나는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 크리스마스도 케빈과 함께 보낼 생각이다. 그런데 그 케빈은 그 케빈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케빈은 마약에 찌들었어도 언제나 우리에게는 열두 살에 머물러 있는 그 케빈이 아니라 대전을 잔류로 이끈 케빈 오리스다. 오늘은 대전 케빈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나홀로 집에’ 케빈과는 이제 이별하고 싶지만 대전 케빈이 퍼플아레나와 작별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대전은 최근 정대세 영입에 뛰어 들었다. 정대세의 수원행이 사실상 굳어진 상태에서 뒤늦게 정대세 영입 작전에 돌입했다. 대전은 전종구 사장이 직접 독일로 건너가 정대세를 만날 정도로 의욕이 넘친다. 이거 고등학교 시절 대천해수욕장에서 내 작업에 거의 다 넘어온 여성을 내 친구 김동혁이 넘볼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상도덕도 모르는 김동혁은 결국 그녀가 자기에게 넘어가지 않자 그녀의 멱살을 잡았었다. 대전이 정대세에게 보이는 관심은 이해하지만 나는 지금 대전에 필요한 건 정대세가 아니라 케빈의 잔류라고 생각한다. 정대세보다 케빈이 먼저인 몇 가지 이유를 지금부터 꼽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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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케빈이 수원을 상대로 뽑아낸 두 골은 훗날 대전-수원 앙숙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대전시티즌)

1. 케빈의 가치는 8억 원 이상이다

대전과 케빈의 계약은 처음부터 다소 이상했다. 보통 년 단위로 계약을 하지만 대전과 케빈은 1년 6개월 계약을 맺었다. 케빈은 시즌 도중인 내년 7월이면 대전과의 계약이 만료된다. 대전은 계약 기간을 연장하지 않을 경우 내년 여름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케빈을 내보내야 한다. 이거 참 애초에 10년 정도 계약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케빈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번 겨울에 재계약을 맺어야 하지만 난항을 겪고 있다. 케빈 측이 내년 시즌 연봉으로 약 8억 원을 원하기 때문이다. 열악한 대전 입장에서는 케빈을 잡기가 쉽지 않다. 올 시즌 연봉이 2억 원 조금 넘었는데 8억 원을 원한다니 케빈은 참 된장남인 것 같다.

하지만 돌려 생각해보자. 올 시즌 대전에서 뛰었던 나머지 외국인 선수 테하와 레오, 바바, 알렉산드로의 활약을 다 합쳐도 케빈 만큼은 안 된다. 레오는 시즌 도중 방출됐고 알렉산드로는 나름대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지만 부상으로 6개월 이상 결장이 예상된다. 바바가 그나마 괜찮은 활약을 펼쳤을 뿐 테하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대전은 또 다시 이 선수들을 대거 내보내고 새로운 외국인 선수를 찾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에 쓰이는 연봉만 하더라도 4억 원에서 6억 원은 든다. 그럴 바에는 올 시즌 16골을 넣으면서 맹활약한 케빈 한 명 잡는 게 이득이다.

K리그 전체를 살펴보면 케빈보다 활약이 미비하면서도 8억 원 이상 받는 선수들이 많다. 시민구단 대전에 8억 원은 적지 않은 돈이지만 케빈이 팀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한다면 8억 원도 아깝지는 않다. 또 다시 검증되지 않은 외국인 선수 여러 명 영입해 실패를 경험하고 돈 날리는 것보다는 케빈을 잡는 게 낫지 않을까. 10억 원 이상 줘야 특급 외국인 선수를 영입할 수 있는 마당에 케빈이 8억 원이면 거의 ‘점포정리, 케빈이 미쳤어요’ 수준이다. 또한 보통 에이전트가 제시한 금액보다는 적은 금액으로 실제 계약서에 서명하는 게 관례다. 케빈에게 “우리가 남이가”라며 절충안을 제시하면 8억 원보다는 적은 돈으로 케빈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2. 대전 구단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다

대전은 최은성 방출 이후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팀의 레전드를 매몰차게 팽개치는 모습을 보고 팬들은 분노했다. 결국 이를 주도한 전임 사장은 사표를 내고 팀을 떠나야 할 정도로 이 문제는 커졌다. 지금껏 대전은 비록 가난하지만 끈끈한 조직력과 스토리를 갖춘 구단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 한 번의 실수로 지금까지 팬들은 분노하고 있다. 더군다나 최은성은 전북으로 이적해 여전히 펄펄 날고 있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봐도 이 정도 분노는 아닐 것이다. 이 헤어진 여자친구는 오늘도 그 남자와 행복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낼 테니 억장이 무너진다. 대전으로서는 성난 민심을 달랠 필요가 있다.

지금껏 “돈이 없다”는 이유로 많은 선수를 내보내야 했던 대전은 이번 기회에 ‘우리도 팀을 더욱 강하게 만들 의지가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반드시 케빈을 잡아야 하는 이유다. 아마 올 시즌 케빈이 없었다면 대전은 강등권에서 더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결국 잔인한 결과를 받아 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대전의 영웅’으로 떠오른 선수를 또 다시 다른 팀으로 보내는 모습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대전 팬들은 올 시즌 케빈이 맹활약할 때마다 무척 기뻐하면서도 “저렇게 잘하면 또 팔려가겠지…”라는 걱정이 앞섰다. 케빈의 잔류는 대전 팬들이 선수의 활약에 마음껏 기뻐할 수 있는 구단이 되는 첫 걸음이다.

3. 케빈만큼 대전을 사랑하는 선수가 있나

케빈은 지난 11월 코뼈에 금이 가 수술을 받았지만 2주 만에 경기에 나섰다. “강등권의 팀을 이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것도 유상철 감독이 말리고 말려 한 경기를 쉬고 나온 것이었다. 나는 그 정도 다쳤으면 아마 엄살을 떨면서 시즌 아웃된 것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케빈은 홈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직접 구단 홍보 전단지를 돌린다. 자비를 털어 이웃 주민들을 경기장에 초대하기도 하고 결장하는 날에는 팬들과 함께 관중석에 앉아 라면을 먹으며 응원을 한다. 케빈은 “조용한 대전의 분위기가 꼭 내 고향 브뤼셀 같다”면서 대전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실력이 뛰어난 외국인 선수를 또 다시 물색할 수도 있다. 실패를 거듭하겠지만 언젠가는 케빈만큼 훌륭한 선수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전을 이토록 사랑하는 선수를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물론 전재산이 8만 원 뿐인 내가 몇 억 원을 논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1년 예산이 수십억 원인 구단에서 몇 억 원 때문에 이런 매력적인 선수를 놓친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케빈이 대전을 떠난다면 그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많은 대전 팬들도 잃을 것이다. 머리 좋은 케빈이 이미 ‘다단계 마케팅’을 해놓은 셈이다. 나는 대전 관중석에서 라면을 먹으며 “여기 찬밥 좀 말아주세요”라고 외칠 케빈을 더 보고 싶다. 구단 프런트 몫까지 하는 케빈을 데리고 있으면 직원 한 명 월급도 굳는 셈이다.

4. ‘정대세 모셔오기’ 같은 정성이면 된다

대전은 정대세를 영입하기 위해 사장이 직접 독일로 날아가는 정성을 들였다. 이미 수원 이적으로 마음이 굳혀졌던 정대세도 “며칠만 시간을 달라”고 할 정도로 이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정대세의 마음까지 흔든 정성이라면 케빈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정대세 영입에 이 정도 정성을 쏟는다는 건 케빈을 다른 팀으로 보낼 의지가 있다는 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정대세는 현 상황에서 수원 이적 가능성이 매우 높게 점쳐지고 있다. 대전이 뜨거운 구애를 보냈지만 결국 정대세는 수원 유니폼을 입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전은 어떻게 될까. 케빈을 내보내고 정대세를 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결국 정대세를 놓친다면? 이 상황에서 재정이 풍족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케빈을 내보내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대세를 영입하기 위해 수원 측은 이적료 30만 달러, 연봉 50만 달러(한화로는 8억 원 이상)를 내걸었고 대전은 이보다 더 많은 이적료를 쾰른에 제시한 걸로 알려졌다. 정대세 영입에 8억 원 이상을 베팅했던 대전이 케빈을 잡는데 쓸 돈이 없다고 한다면 이건 마치 “오늘 너하고 술 마실 돈은 있는데 영화 볼 돈은 없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다. 정대세를 모셔오기 위해 보였던 정성과 돈이라면 케빈도 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

5. 정대세 영입, 효과는 크지 않다

대전은 “정대세 영입으로 대전 지역 실향민들을 경기장에 불러 모으겠다”고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참 좋을 것이다. 정대세를 영입해 실향민들이 경기장을 꽉 채우고 이를 지켜본 관계 당국에서 감동 받아 남북 관계가 개선되고 결국 남북 통일이 이뤄지고 가난한 북한 주민들이 소고기를 사묵는 일까지 일어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정대세 영입 효과는 이 정도로 크지 않을 것이다. 몇 경기 반짝할 수는 있어도 정대세가 대전에 입단했다고 관중 대박을 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전은 경기력으로 감동을 주는 구단이지 스타 선수에 흥행을 목매는 구단은 아니다.

경기력을 따져 보더라도 정대세보다는 케빈이 대전에 더 적합하다. 정대세도 뛰어난 선수지만 그는 개인적인 성향이 무척 강하다. 과거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2010 남아공월드컵 본선 당시에도 그는 북한 팀 동료들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강한 개성이 또 정대세의 매력이기는 하지만 대전은 ‘선수’보다는 ‘팀’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구단이다. 늘 스타 선수를 앞세우기 보다는 끈끈한 조직력을 앞세운 대전으로서는 톡톡 튀는 정대세의 영입이 오히려 조직력에는 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철저하게 팀 플레이를 구사하는 케빈이 정대세보다는 대전에 더 어울릴 것 같다.

6. 크리스마스엔 케빈이 대세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다. 케빈이 대세인 날이다. 모두들 케빈을 떠올리며 하루를 보냈으면 한다. 독자 여러분들이 더 케빈을 아껴줘야 하는 이유는 내가 오늘 무척 바쁘기 때문이다. 혹시 여의도공원에서 흰색 옷을 입은 채 서 있는 나를 보더라도 모른 척 해줬으면 좋겠다. 신호가 떨어지면 송종국이 피구를 마크하듯 빨간 옷을 입은 여성에게 달려가야 하니 나를 보더라도 모른 척 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