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도 아니다. 그렇다고 코치진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K리그와 포항을 떠난다고 하니 당장 달려가 만났다. 늘 화려한 이들의 뒤에서 묵묵히 일했던 그의 한국 생활 10년을 독자들에게 반드시 소개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포항에서 통역으로 활약한 나영준 씨가 정든 한국을 떠나 브라질로 돌아가기 직전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비록 그는 선수도 아니고 지도자도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포항을 사랑했던 남자다. 그 누구보다 포항을 위해 헌신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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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통역사 나영준 씨는 정든 포항을 떠나 브라질로 돌아가기 직전 인터뷰에 응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반갑다. 갑자기 포항 구단에 사직서를 내고 브라질로 돌아가기 직전 시간을 내줘 너무 고맙다.

오히려 내가 감사하다. 항상 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존재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직접 인터뷰까지 해준다니 고맙다. 내일 브라질에 가는 걸로 알고 있었다가 방금 부랴부랴 항공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오늘 출국이란다. 포항에서 일을 하며 영어를 전공했는데 어제 마지막 시험을 마쳤다. 뭐 출국 준비를 할 시간도 없다. 이 인터뷰 끝나고 짐 챙겨 곧바로 공항으로 가야한다. 당신과 약속을 하루만 늦게 잡았어도 못 만날 뻔했다.

다행이다. 당신은 항상 누군가를 빛나게 해주는 존재였지만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당신이다.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인이지만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소개를 부탁한다.

포항스틸러스에서 통역 일을 했던 나영준이다. 뭐 다른 소개를 더 해야 할까.

싱겁다. 파리아스 감독 시절 그와 똑같은 표정, 말투로 통역을 하면서 참 독특한 캐릭터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나는 당신이 코치진인줄 알았다.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그러면 지금부터 진솔한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보자. 유창한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면서 오랜 시간 통역을 해왔는데 K리그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시기는 언제인가.

다섯 살 때 부모님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거기에서 20년을 살았다. 브라질에서 언론정보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아르바이트로 통역 일이 들어왔다. 포스코에서 후원하는 축구 유망주들이 브라질 지쿠 축구학교로 유학을 왔는데 이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 때 (황)진성이, (오)범석이, (박)주영이 등을 만났다. 1년 동안 같이 자고 같이 생활하면서 그 친구들 통역을 담당했다. 학비를 스스로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낮에는 축구단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때부터 한국 축구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지금 보면 다 어른스러운 친구들이지만 그때만 해도 진성이가 16살이었다. 다들 꼬마였다.

아르바이트 삼아 시작한 일이 직업이 됐다. 한국에 들어온 건 언제인가.

전남과 포항이 포스코에서 운영하는 구단 아닌가. 지쿠 축구학교에 있을 때부터 그쪽 관계자들하고 알고 지냈다. 지도자들도 여러 명이 브라질에 왔다 갔다하면서 안면을 익혔다. 유학 프로젝트를 3년 동안 함께 했는데 3년째 되는 해에 전남에서 연락이 왔다.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한데 한국에 와서 같이 일할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학교를 휴학하고 한국에 들어왔다.

20년 동안 브라질에서만 살았던 당신으로서는 오히려 한국이 더 외국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그렇다. 처음에는 1년만 한국에 유학을 간다는 생각이었다. 브라질에서 어릴 적부터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아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또한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1년 동안 공부한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3년 동안 브라질에서 축구와 인연을 맺으며 한국 축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어떤 호기심을 말하는 건가.

통역 일을 하기 전부터 워낙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 바스코 다 가마를 응원했는데 이 팀이 이기면 일주일이 행복하고 지면 일주일이 슬펐다. 직접 경기장에 가 응원도 하고 호마리우와 펠레를 만나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간직하는 축구팬이었다. 그런데 브라질은 철저히 클럽 시스템으로 돌아가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들었다. 한국은 미국과 비슷하게 학원 스포츠 위주라고 했는데 이게 너무 궁금했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도대체 학교에서 축구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브라질에서 오랜 시간 생활한 나로서는 학교에서 축구를 가르치는 모습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상상이 안 됐다.

한국에 와 바라본 학원 스포츠는 어떤 모습이었나.

일단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운동부에 속하면 이게 취미가 아니라 그때부터 직업이 되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브라질 같은 경우는 축구를 취미로 즐기면서 성인이 되는 나이에 직업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지지만 한국은 어릴 적부터 너무 전문적인 선수 육성에만 집중하는 것 같다. 한 번 학교에서 운동을 시작하면 중간에 포기를 하고 싶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남 유스팀에서 초등학교 선수들을 함께 지도하면서 이 선수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뿌듯했다. 아이들 때문에 자기 삶까지 포기하고 같은 꿈을 꾸는 부모님들의 열정도 대단했다. 처음에는 1년만 한국에 있으려고 했지만 전남 유스팀에서 에지송이라는 훌륭한 브라질 지도자를 만나 결국 이렇게 눌러 앉게 됐다.

2002년 전남에서 일을 시작한 당신은 2005년 드디어 포항으로 연고이전, 아니 직장이전을 했다.

브라질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낸 포항 김경호 수석코치가 적극적으로 나를 스카우트했다. 그때부터 포항과의 인연이 시작됐고 파리아스 감독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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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준 씨는 파리아스 감독의 5년을 바로 옆에서 함께 한 이다. (사진=포항스틸러스)

당신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5년 간 함께 일한 파리아스 감독이다. ‘파리아스 매직’의 중심에는 언제나 당신이 있었다. 첫 인상은 어땠나.

굉장히 냉정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첫 인상만 보고도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한국에서 감독하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나’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당시 파리아스 감독은 한국 나이로 만 서른 일곱 살이었다. 외국에서는 서른 살 중반의 감독도 종종 있지만 한국에서 감독을 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감독과 통역사라면 하루 종일 붙어 다녀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친해지는 게 가장 중요한 일 아닐까.

나는 사람을 참 좋아한다. 당연히 냉정한 사람보다는 따뜻한 사람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나와 파리아스 감독이 만난 이유는 친목 도모의 목적이 아니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도움을 줘야하는 관계로 만났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 그 사람한테 맞춰야 한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나도 내 생각이 있지만 적어도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내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다. 친해지지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내가 파리아스 감독에 맞게 맞춰줘야 하는 게 더 중요했다.

파리아스 감독을 보좌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나도 파리아스 감독의 성공에 반신반의했던 사람이다. 나뿐 아니라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파리아스 감독의 성공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때 내가 그 사람들을 이해시켜야 했다. 아니, 나도 파리아스 감독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해 못하는 부분이 많은데 반대로 내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한국 사람들을 이해시켜야 되는 상황이었다. 이 얼마나 난감한 상황인가.

그럴 것 같다. 당신도 잘 모르는 사람을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키나. 그런데 통역을 위해서는 하루의 대부분을 파리아스 감독과 보내야 할 텐데 그게 당신의 직업이지만 참 힘들었을 것 같다.

파리아스 감독은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거의 나를 찾는 일이 없었다. 나뿐 아니라 자기와 함께 일하는 스텝, 선수들의 개인 생활을 철저히 존중해 주는 감독이다. 함께 일할 때만 똑바로 하면 나머지 생활은 존중해줬다. 내 개인 시간에는 나를 절대 귀찮게 하는 일이 없었다. 웬만해서는 본인이 스스로 해결하더라.

나도 파리아스 감독 시절 몇 번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파리아스 감독보다 당신이 더 인상적이었다. 성대모사급 통역으로 ‘나리아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파리아스 감독이 진지하면 당신도 진지하고 파리아스 감독이 장난을 치면 당신도 장난스럽게 통역하는 모습이 특이했다.

별명이 많더라. ‘나리아스’도 있고 ‘나감독’도 있다. 무리뉴가 원래 통역으로 처음 일을 시작하다 지도자가 된 케이스라 ‘나리뉴’라는 별명도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나리아스’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파리아스 감독과 나영준을 하나로 본 것 아닌가. 통역으로서 이보다 더 훌륭한 칭찬이 있을까.

당신은 한참 나이 많은 선수들에게도 작전지시를 할 때 반말을 찍찍하더라. 하늘 같은 김기동에게 “기동아, 더 뛰어”라고 하는 걸 보고 경악했다. 이 얼마나 버르장머리 없는 일인가.

(김)기동이 형, (김)병지 형, (김)성근이 형, (이)창원이 형 등 나보다 한참 나이 많은 형님들이 많았다. 물론 평소에는 깎듯이 형님들께 존대를 하지만 나는 운동장에서는 나영준이 아니라 감독이 원하는 걸 전달해야 하는 사람이다. 빠르게 감독의 의중을 전달하는 게 나의 임무다. 파리아스 감독은 평소에는 말이 별로 없지만 운동장에서는 말이 많아도 너무 많다. 동시통역으로 빨리 빨리 말을 전달해야 한다. “기동이 형님, 감독님께서 이렇게 하시라는데요. 이렇게 하시겠어요?”라는 건 프로답지 못한 모습이다.

확고한 철학이다. 하지만 때론 파리아스 감독보다 더 진지한 당신의 모습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미팅 중에 파리아스 감독이 선수를 혼낸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는 파리아스 감독이 어떤 말을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말을 통해서 자기가 지금 화난 상황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다. 그런데 “여러분, 저 지금 화가 나 있으니 잘 좀 해주세요”라고 표현을 완화해 웃으며 말해야 할까. 파리아스 감독의 화난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내가 할 일이다. 선수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당연히 불만이 생길 것이고 기분이 나쁠 것이고 화나 갈 것이고 삐칠 것이고 울 것이다. 그런데 파리아스 감독도 그걸 알면서 하는 말이다. 내가 파리아스 감독 이야기를 전달할 때 그 선수가 기분이 좋고 그냥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감정을 느끼면 안 되는 거다. 나는 선수들 기분 따져가면서 계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파리아스 감독이 뱉어 버리는 대로 저질러 버리는 대로 해야 한다.

말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중간에서 그렇게 호통을 치면 기분 나빠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영준이 형이 좀 좋게 이야기해주면 되는데 뭘 그렇게 화를 내며 이야기할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나중에 따로 파리아스 감독을 찾아가 “저 선수는 여려서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 같다”고 조언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따로 선수를 찾아가 “아까는 감독님이 너한테 심하게 혼을 냈는데 요즘 감독님이 예민한 상황이니 네가 이해를 좀 하라”고 다독이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나도 사람이라 그럴 때면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일을 할 때는 내 감정을 철저히 숨기고 감독의 입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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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전지훈련에서 파리아스 감독과 함께 그라운드를 응시하고 있는 나영준 씨. (사진=포항스틸러스)

당신도 사람인데 당신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실수했던 적은 없나.

왜 없겠나. 감정이 폭발했던 적도 있었다.

자세하게 이야기 해 달라.

2009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8강전 때였다. 우즈베키스탄 분요드코르를 만났는데 1차전 원정 경기에서 1-3으로 패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우즈벡 기자들이 너무 건방지게 행동하는 게 기분이 나빴다. 질문 내용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그렇고 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2차전을 안방에서 치렀는데 우리가 대역전에 성공해 4-1 승리를 거두고 4강에 올랐다. 경기가 끝난 뒤 기자회견장에서 또 우즈벡 사람들이 건방지게 행동하는 거다. 정확히 질문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예의 없는 행동 때문에 너무 화가 났다. 경기와는 상관없는 비아냥 섞인 질문이었다. 원래 영어로 질문을 받으면 그걸 내가 포르투갈어로 파리아스 감독에게 전달해야 하지만 영어로 질문을 듣는 순간 파리아스 감독에게 전달하지 않고 내가 그 사람하고 싸웠다. 내가 알기로는 그 사람이 우즈벡 기자도 아니고 구단 관계자도 아니고 팬 비슷한 신분이었다. “당신, 팬이야? 기자야? 신분이 뭐야?” 그랬더니 얼버무리더라. 그래서 “당신 기자 아니니까 그런 건방진 질문에 우리 감독님이 대답할 이유가 없겠네”라면서 싸웠다. 결국 고성이 오가고 그 사람은 기자회견장에서 쫓겨났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은 영웅이었다.

한국 기자 분들은 좋아하더라. 원래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런 다툼을 벌이면 안 됐지만 1차전 때부터 건방지게 행동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당신은 앞서 말한 것처럼 파리아스 감독의 ‘입’이 되어야 한다.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당신의 사소한 실수가 결국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어떤 실수였나.

2009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경기 시작 한 시간 반 전에 선발 명단을 제출하는데 다른 감독들은 대부분 선발 명단을 정하고 선수들한테 통보한 뒤 경기장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파리아스 감독은 선발 명단을 경기장에 도착해 알려준다. 홈 경기였는데 평소처럼 경기장에 도착해 파리아스 감독을 따라 감독실에 들어갔다. 파리아스 감독이 작전판에 명단을 쭉 쓰고 내가 선수 출전 명단 리스트에 체크를 한 뒤 파리아스 감독 서명을 받았다. 이 명단은 매니저를 통해 경기 감독관에게 전달돼 서명을 받고 공식 출전 명단으로 발표된다. 늘 하던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

공식 출전 명단이 나오면 매니저가 그걸 다시 들고 라커룸으로 온다.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 미팅을 하는데 파리아스 감독이 칠판에 포메이션을 적어 놓고 선발 선수 이름을 쭉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선발 명단에 체크한 이름과 파리아스 감독이 적어 놓은 이름이 달랐다. 나는 분명히 유창현의 이름에 체크를 했는데 파리아스 감독은 칠판에 노병준이라고 쓰는 거다. 공식 선발 명단을 확인하니 거기에도 유창현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실수를 한 거였다. 순간 아찔했다. 내가 선발 명단을 바꾼 거다. 칠판에는 노병준 이름이 써 있고 선수들은 다 모여 미팅 준비를 마친 상태였는데 내가 조용히 파리아스 감독을 불렀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오늘 (유)창현이가 선발로 나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바꾸면 교체 카드가 하나 날아가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듣는 내가 다 쥐구멍에 숨고 싶다.

파리아스 감독이 화가 있는 대로 났다. 워밍업을 마치고 라커룸에서 선수들이 입장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내가 조용히 창현이를 불렀다. “창현아, 너 오늘 내가 실수해서 선발로 나가게 됐어. 제발 잘해줘. 형이 부탁할게.” 그리고 창현이가 그날 전반전에 골을 넣었다.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창현이가 골을 넣고 벤치 쪽을 쳐다보는데 이렇게 말하는 거 같았다. ‘내가 오늘 형 살렸어.’

당신이 파리아스 감독보다 더 명장이다.

지금에야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살 떨리는 일이었다.

당신 동생도 K리그에 통역사로 일했다. 그러면서 2007년에는 참 기구한 운명에 놓이기도 했다. (이날 인터뷰에는 동생 나영훈 씨도 함께했다.)

동생 (나)영훈이는 김학범 감독 시절 성남에서 통역으로 일했는데 2007년 챔피언결정전 당시 포항과 성남이 만났다.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일부러 연락을 피한 건 아니지만 서로 너무 바빠 따로 연락도 하지 못했다. 성남은 합숙 훈련을 하고 있었고 우리도 챔피언결정전 준비하느라 너무 바빴다. 경기장에서 마주쳤는데도 서로 눈인사밖에 나누지 못했다. 1차전 홈 경기에서 우리가 이기고 내가 전화를 했는데 동생이 전화기를 꺼 놨더라.

참 난감한 상황이었을 것 같다. 당신과 무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했던 파리아스 감독은 2009년 클럽월드컵을 끝으로 팀을 떠났다. 그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는데 지켜보는 심정이 어땠나.

그 이야기를 파리아스 감독으로부터 처음 들은 게 나였다. 클럽월드컵 3·4위전이 열리던 날 아침에 식사를 하고 나와 수석코치를 불러 이야기를 꺼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이 포항을 버리고 간다는 배신감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팀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사장님을 비롯해 모든 이들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잠시였다. 파리아스 감독은 포항을 위해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5년 동안 좋은 팀을 만들었고 우승컵을 수도 없이 들었고 결국에는 아시아까지 정복했다. 그러면서 본인도 발전하고 구단도 발전했다. 또 다른 도전을 위해 팀을 떠나겠다는데 이해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참 포항이 고맙게 생각해야 할 감독이다.

지금도 가끔 연락은 하고 지내나.

그렇다. 자주 연락이 온다. 지금 중국에서 감독 생활을 하고 있는데 2부리그 팀을 승격시켜 올 시즌에는 1부리그에서 5위를 차지했다. “포항 요새 성적이 왜 그러나. 힘 좀 내라”고 가끔 포항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전화로 사람 사는 이야기만 한다. 예전부터 내가 본인 말을 들어주는 역할이어서 그런지 속상한 일이 있으면 전화로 나한테 다 털어 놓는다.

나도 술 먹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한테 전화한 적이 많다. 그런 심정 아닐까.

파리아스 감독은 일절 술을 안 먹는다. 뭐 그래도 대충 그런 감정과 비슷하긴 한 것 같다. 자기가 요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심정인지 일방적으로 이야기한다. 물론 내 이야기는 잘 듣지 않는다. 예전하고 똑같다.

파리아스 감독에게 안부 전해 달라. 예전에 나와 인터뷰 했을 때 고양시민구단에 스카우트를 보내 내 영입을 추진하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고 전해 달라.

당신이 고양시민구단에서 임의탈퇴 됐다는 사실도 함께 전하겠다.

나도 훈련 불참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임의탈퇴가 풀리길 기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파리아스 감독 후임으로 포항 사령탑에 오른 레모스 감독은 어땠나. 참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인간적인 면은 참 좋았다. 어느 정도 연세가 있으셔서 젊은 사람 대하는 방법이 참 따뜻했다. 그런데 너무 자기 주관이 뚜렷했다. 포항이 5년 동안 해왔던 방식이 있는데 그걸 하루 아침에 자신의 훈련 방식, 생활 방식으로 바꾸면서 혼란스러웠다. 선수들과 스텝들이 적응하기에는 참 힘들었다.

포항에서 감독뿐 아니라 브라질 선수들 통역까지 담당했다. 참 기억에 남는 선수들이 많을 것 같다. 누가 가장 사고뭉치였나.

이따마르다. 한 번은 토요일에 경기를 하고 일요일에 휴식을 취하고 월요일에 훈련을 해야 하는데 이따마르한테 전화가 왔다. “나 지금 인천공항인데 브라질 갈 거야. 지금 비행기 타니까 브라질 도착해서 전화할게” 이러는 거다. 무단이탈이었다. 가벼운 부상을 당해 2주 정도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뭐 시간 남으면 브라질이나 한 번 다녀오지’ 그런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너 지금 브라질 돌아가면 큰일 나. 정신 차려. 빨리 포항으로 와”라면서 말렸지만 이따마르는 그냥 자기 할 말만 하고 끊더라. 결국 열흘 있다가 돌아왔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벌금에 자체적인 경기 출장 정지 징계까지 받았다. 이따마르가 참 말썽도 많이 피우고 사고도 많이 쳤다.

다른 브라질 선수들은 어땠나.

데닐손은 무척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브라질 선수들에 비해 책임감도 강했고 성실하다. 반면 모따는 ‘상남자’다. 자기가 저지른 일은 남자답게 책임진다. 가끔 브라질에 가면 모따나 따바레즈, 슈벵크 등을 만나서 밥도 먹는다. 다들 그립다.

K리그 구단에서 통역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처음에는 선수들한테 방출 통보를 하는 일이 참 힘들었다. 성공해서 돌아가면 박수쳐 주고 웃을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K리그 무대에서 흔치 않다. 방출 이야기를 꺼낼 때면 그 선수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굴에는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으로 열정과 꿈을 위해 머나먼 한국까지 온 거 아닌가. 성공하겠다는 기대와 꿈을 안고 왔는데 실패하고 돌아갈 때 내가 그 통보를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또한 ‘정말 이건 아닌데’라고 느끼는 순간에도 내 감정을 죽인 채 일할 때면 회의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통역사라는 직업은 자기 의견을 내는 직업이 아니지 않는가. 내 감정과 생각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2007년 당시 12경기 연속 무승에 빠져 있을 때도 포항에서 지낸 8년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반대로 가장 기뻤을 때는 언제인가.

2007년 무승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지만 결국 그해 포항이 막판 대역전극을 펼치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때는 너무 감격스러웠다. 특히 플레이오프 수원 원정에서 박원재의 백헤딩 골로 승리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성남과 챔피언결정전을 앞둔 상황에서 우리가 이길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마 당시 포항 선수들 중 우리가 성남에 질 거라는 생각을 단 1%라도 했던 이는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가장 행복했다.

나는 가장 기뻣던 순간으로 포항의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꼽을 줄 알았다.

그때도 좋았지만 더 극적이었던 건 2007년 리그 우승이었다. 또한 포항에서의 8년, 한국에서의 10년을 정리하면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포항에서 함께 했던 이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데 내가 이 팀을 사랑했던 만큼 그 사람들이 나를 아끼고 사랑했다는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맙다.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포항에서의 8년이라는 생활을 정리하는 나에게 진심으로 행운을 빌어주는 친구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정든 포항을 떠나는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청춘을 다 바친 포항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새는 새로운 직장 구하기도 쉽지 않다.

내가 가장 존중받고 멋진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포항이다. 포항은 나에게 너무 많은 걸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곳이다. 그런데 이제는 내 인생을 돌아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까지 너무 정신 없이 바쁘게 살아왔는데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리아스 감독을 위해서? 선수들을 위해서? 포항을 위해서? 지난 8년은 절대 낭비한 시간이 아니었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나를 위한 인생을 살고 싶다. 나는 이 팀에서 언제나 그들을 빛나게 해주는 보조 역할이었다. 주인공은 아니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만의 꿈을 꾼 적이 없었다. 포항의 꿈과 목표가 곧 나의 꿈과 목표였다. 이제는 내 스스로 꿈을 꾸고 싶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달라.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지금껏 열심히, 정직하게 일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일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매일 함께 지내던 사람들과 이별하는 게 너무 슬프고 그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포항을 떠난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이겨내고 싶다. 당분간은 아무런 계획이 없다. 브라질에 있는 부모님 집에 가 좀 쉬면서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일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싶다.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지 못했던 이들도 만나고 싶다. 한국에 있는 동안 공부를 다 마쳤는데 또 다른 배움의 기회가 있다면 잡고 싶은 마음도 있다.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더 밝고 에너지 넘치는 인생을 준비하려 한다. 한 달을 쉴지 두 달을 쉴지 1년을 쉴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잠시 칼럼 연재를 중단했었는데 석 달이 되니 몸이 근질근질하더라. 혹시 포항에 돌아올 생각은 없나. ‘나리아스’를 다시 보고 싶다.

나는 포항에서 통역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더 이상 새롭게 할 게 없다. 발전이 없다. 그게 내가 포항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런 사람이 다시 포항 통역으로 복귀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럴 거면 애초부터 그만둘 생각도 안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다른 구단에서 통역으로 일을 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나.

아쉽지만 당신의 결정을 존중한다. 나도 석 달 정도 쉬면서 뒤를 돌아보니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았다. 물론 석 달을 쉬면서 거지가 됐다. 돈이 없다.

나도 그게 걱정이다. 당분간 전문적으로 일을 하지 않더라도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브라질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한국어를 가르치던 먹고 살려면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

마지막 질문이다. 당신의 최종적인 꿈은 무엇인가.

지금껏 포항의 꿈이 곧 내 꿈이었다. 이제는 쉬면서 최종적인 내 꿈을 찾고 싶다. 과연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나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려 한다. 다른 이의 꿈, 우리 팀의 꿈이 아니라 나만의 꿈을 찾는 일이 힘들지만 즐거울 것 같다.

나영준 씨는 이 인터뷰를 마친 뒤 곧바로 브라질로 떠났다. 이제 더 이상 포항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몇 명의 감독이 바뀌는 동안에도 든든히 포항 벤치를 지키던 그의 빈 자리를 보면 나영준 씨가 무척 그리울 것 같다. 지금껏 다른 이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한 나영준 씨는 이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려 한다. 이제 새롭게 품을 그의 꿈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