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취재를 위해 제주에 내려갔다가 박경훈 감독과 사담을 나눴다. “이제 곧 시즌이 끝나는데 뭐하시면서 보낼 생각인가요?” 내가 묻자 박경훈 감독이 후련하다는 듯 받아쳤다. “아휴, 말도 마. 아주 한 경기 한 경기가 내 목숨을 건 싸움이야. 시즌 끝나고 서울 올라가면 일단 건강 검진부터 받을 생각이야.” 나는 군대에 있을 때 휴가를 나오면 일단 무조건 고깃집에 가 삼겹살 먹는 걸로 휴가를 시작했는데 박경훈 감독은 한 시즌을 온전히 마치면 병원으로 달려가 건강을 체크하는 게 늘 제일 먼저란다. K리그 감독은 대한민국에서 딱 16명에게만 허락된 자리인 만큼 명예롭기도하지만 외롭고 고된 직업이기도 하다. FM을 하다가 연패를 당해도 속이 바짝바짝 타는데 ‘게임 새로 시작하기’도 없는 진짜 K리그 감독들은 오죽할까.

생존 확률 37.5%의 잔인한 서바이벌

올 시즌은 K리그 감독들에게 고난의 연속이다. 시즌 도중에 전남과 강원, 인천 등 세 개 구단 감독이 바뀌었고 시즌이 끝난 지금도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벌써 수원 윤성효 감독과 성남 신태용 감독, 대전 유상철 감독, 광주 최만희 감독, 대구 모아시르 감독, 부산 안익수 감독, 전북 이흥실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성적부진이 대부분의 원인이지만 구단 재정 문제와 수뇌부 간의 갈등도 감독 교체의 원인이 된다. 올 시즌 K리그에 참가했던 16개 구단 중 벌써 10개 구단 감독이 교체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이쯤 되면 정말 K리그 감독은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다. 알렉스 퍼거슨이 대전에 부임해 잔류에 성공해도 한 시즌 만에 잘릴 판이다.

강등제 시행으로 리그가 치열해졌다고 하더라도 강등팀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이 이렇게 성적부진 등을 이유로 줄줄이 감독을 내치는 건 참 이례적인 일이다. 시즌 도충 리그 불참을 선언한 상주 박항서 감독을 제외한다면 시즌 내내 자리를 온전히 지킨 감독은 서울과 포항, 울산, 제주, 경남 등 딱 다섯 명에 불과하다. 이 시대의 진정한 승리자들이다. 조금 더 확대해 K리그에서 3년 이상 감독직을 유지하고 있는 이를 살펴보면 더 놀랍다. 성남 신태용 감독이 사퇴하면서 울산 김호곤, 제주 박경훈 감독이 유이하다. 1년 버티기도 어려운 K리그 무대에서 3년 넘게 버티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대단한 위인들이다. 제주 박경훈 감독이 시즌 종료 후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병원이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내년 K리그는 혼돈의 시대가 될 것 같다. 감독 교체로 성공을 거두는 구단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구단도 속출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몇몇 구단은 나쁘지 않은 성과를 냈음에도 성적부진을 이유로 감독을 내쳤는데 아마 이를 뼈저리게 후회할 수도 있다. 적어도 새로운 감독이 부임하고 3년은 기다려야 원하는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내년 시즌 K리그는 럭비공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리그가 된다는 건 토토에 돈을 건 이들을 제외하고는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재야에서 칼을 갈고 있는 무직 감독들도 ‘알바 천국’ 사이트를 뒤지면서 이력서를 쓰느라 바쁜 나날을 보낼 것이다.

감독이 성적부진의 최후 책임자인가

프로 무대에서 감독이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 성적 부진이라는 잣대는 다 다르다.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우승을 노리던 팀이 준우승에 그친다던가, 없는 살림에 근근이 선수단을 운영하며 14위를 노리던 팀이 15위로 시즌을 마감한다던가 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이는 상황은 다르지만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감독 경질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자신들의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낼 경우 감독 이하 코치진이 책임지고 떠나는 모습이 잔인하기는 하지만 프로 세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몇몇 구단의 감독 내치기를 살펴보면 과연 이게 합당한 일인지 의문이 가기도 한다.

감독선에서 책임 전가를 마치고 나몰라라 하는 구단들이 꽤 있다. 하지만 나는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떠안는 마지막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적 부진으로 언론과 팬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이제 감독을 바꿀 테니 조용히하고 지켜봐 달라”는 회피성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런데 이게 어디 감독만의 탓인가. 경기력 향상에 보탬을 주고 감독 선임 결정권을 행사하는 이들은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고 하질 않는다. 감독 선임권을 가지고 있는 구단 수뇌부와 이사진들은 감독이 수도 없이 내쳐지는 이 상황에서 여전히 그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 당신들이 선택한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다면 그 감독을 선택한 이들에게도 상당 부분의 책임이 있지는 않나. 올 시즌 감독이 경질된 10개 구단 중 감독 이상의 인물이 책임을 진 구단은 아직 없다.

꼭 감독 선임 권한을 가진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폭적으로 경기력 향상에 도움을 줘야 할 고위 수뇌부들이 직무유기를 하면서도 감독 경질 하나로 책임을 피해가려는 모습은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K리그 대다수 구단은 전력강화 부서를 따로 두고 있는데 전력강화에 실패했다면 감독뿐 아니라 이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감독 이하 코치진 전원 물갈이 하나로 개선의 의지가 모두 표명된 것 같은 이 유행 아닌 유행은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겠다. ‘노스페이스’ 패딩이 전국 청소년들에게 순식간에 쫙 퍼진 것 만큼이나 걷잡을 수 없는 유행이다. 영화 ‘타짜’에서 고니와 아귀는 자신의 말이 맞다며 손목을 걸었는데 K리그 몇몇 구단 수뇌부는 손목은커녕 손톱의 때도 안 건다.

광주 단장은 강등 책임에서 왜 자유롭나

감독을 경질한 대다수의 구단이 이 문제를 떠안고 있지만 그 중 가장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광주를 예로 들고자 한다. 강등이 확정된 후 최만희 감독은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광주는 K리그 역사상 첫 번째 강등 구단이 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개인적으로 최만희 감독을 조금 더 믿고 싶었다. 굴욕적인 첫 강등의 장본인이 된 이 나이 많은 감독이 다시 일어서 ‘첫 강등이자 첫 승격’의 주인공이 될 기회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책임 전가성 사퇴보다는 끝까지 책임을 져 다시 팀을 1부리그로 올려 놓기 위해 노력하는 게 와해된 팀을 하나로 만드는 역할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최만희 감독 스스로 사퇴를 통해 책임을 지겠다고 하니 더 이상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렇다면 그 윗선은 강등을 막기 위해 뭘했는지 묻고 싶다. 아마추어 축구팀 수준의 비좁은 원룸 숙소에서 두 명이 생활을 하고 그마저도 제대로 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선수들은 한 여름에는 영상 38도, 한 겨울에는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져도 참고 지냈다. 프로 구단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은 끝없이 벌어졌다. 일반인과 함께 헬스장을 이용했고 인근 식당에서 끼니를 때워야 했다. 구단 운영에 관해 단장을 향한 팬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이 팬들을 직접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전용 훈련장이 없어 인근을 떠돌던 선수단이 연습경기를 위해 영광으로 떠나던 날에는 30만 원의 비용을 아끼기 위해 단장이 돌연 연습경기를 취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최만희 감독과 광주시가 환경이 개선된 숙소 변경을 요청했지만 이마저도 단장이 거부했다.

단장은 선수 기용에 관해서도 감독 이상의 권력을 휘둘렀다. 최만희 감독이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한 슈바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하자 단장은 이렇게 말했다. “쓰지도 못하는 선수를 뭐하러 데리고 있느냐. 당장 내보내라.” 결국 최만희 감독은 슈바를 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방출시켰고 슈바는 이에 항의해 광주 구단을 국제축구연맹(FIFA)에 제소한 상황이다. 박병주와 허재원은 희생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연봉을 적게 받고 팀에 남으려 했지만 이마저도 단장이 반대해 결국 제주로 떠났고 김병석은 한 달 동안 광주에서 테스트를 받고 계약서에 사인하기 직전 역시 단장의 반대로 대전에 입단했다. 김병석은 대전 입단 후 18경기에서 네 골을 뽑아내며 팀의 1부리그 잔류에 힘을 보탰다. 복이가 추천한 한 외국인 선수는 자비로 광주까지 내려와 입단 테스트를 받고 계약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영입할 수가 없었다.

‘수석코치로 돌려막기’ 올바른 현상인가

이 과정을 온전히 감독 사퇴 하나로 막을 수는 없다. 구단이 강등되는 걸 지켜만 본, 아니 어떻게 보면 부추긴(?) 수뇌부도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 팀 재정 사정이 좋지 않아 전력 강화에 보탬을 주지 못했다고 백 번 이해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해도 재정 악화에 따른 책임은 필수다. 감독이 물러났다고 해 여기에서 모든 게 덮어져서는 안 된다. 단장 이하 수뇌부와 이사진, 전력 강화를 위해 일하는 프런트 역시 성적 부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광주 계약 담당 직원은 박병주와 허재원을 잡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냈다. 구단 수뇌부가 스스로를 감독 경질권만 가진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적 부진의 1차적인 책임은 감독이지만 결정권을 가진 그 윗선 스스로도 성적 부진에 책임이 따르는 존재라는 걸 명심할 필요가 있다. 비단 광주뿐 아니다. 현재 감독이 사임한 10개 구단 중 감독 윗선에서도 연대적인 책임을 진 구단은 없다.

감독 사퇴 현상은 충분히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성적 부진의 책임을 떠나 보다 강한 팀을 구성하기 위한 방편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현재 돌아가고 있는 상황은 꼭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김봉길 감독을 비롯해 서정원, 당성증, 김인완, 여범규, 하석주 등 새로운 감독은 분명히 훌륭한 지도자다. 오랜 시간 끊임없이 전술을 연구하고 현장에서 일한 이 훌륭한 지도자들을 나 같은 하찮은 사람이 평가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에 대한 개인적인 자질 평가가 아니라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용기 내 한 마디 하고 싶다. 앞서 소개한 감독들은 모두 수석코치를 지내다 공석이 된 감독 자리를 맡게 된 이들이다. 수석코치 경험을 쌓고 감독으로 올라서는 건 정상적인 일이지만 전임 감독의 실력을 놓고 봤을 때 몇몇 구단은 이런 극단적인 처방이 지금 당장 필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성적 부진을 이유로 감독은 경질하고 싶은데 명망 있는 후임 감독을 물색하자니 영입도 쉽지 않고 몸값 맞추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 수석코치를 감독으로 올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허정무 감독과 황보관 감독 경질 이후 인천과 서울은 김봉길, 최용수 수석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앉혔다. 그리고는 한 동안 지켜본 뒤 좋은 결과가 나오자 이들과 정식 감독 계약을 체결했다. 수석코치가 정식 감독이 된 훌륭한 사례지만 만약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면 또 다시 이런 수석코치로 감독 메우기라는 악순환이 계속 됐을 것이다. “팀을 가장 잘 아는 수석코치가 당분간 팀을 지휘할 것”이라는 명분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형태의 감독 선임 과정은 아닌 것 같다.

K리그 감독 교체 ‘대유행’에 대한 우려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하는 건 전임 감독이 명예롭게 퇴진한 후 그 자리를 수석코치에게 물려주는 형태가 더 이상적이다. “넌 더 이상 내 밑에서 배울 것이 없으니 이제 하산하라”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차경복 감독이 김학범 수석코치에게 바턴을 물려준 것처럼 말이다. 지금처럼 대다수 K리그 구단이 감독 경질 이후 수석코치에게 구단의 모든 짐을 맡기는 모습으로 가는 건 그리 이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임시방편으로 여겨지던 현상이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고 있다. 그들은 훌륭한 수석코치였고 언젠가는 K리그에서 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하는 지도자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건 이 지도자들 스스로의 역량을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현상을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이름값으로 축구를 하는 건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K리그에서 ‘거물급 감독’ 모셔오기는 싹 사라졌다.

수석코치도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인지도를 떠나 언제든 더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합리적인 세상이다. 하지만 지금 현상은 꼭 그렇지 만은 않아 보인다. 전임 감독의 빈 자리를 황급히 수석코치로 메우는 구단이 유독 시·도민구단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지금껏 거물급 감독을 영입할 경우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기 주장이 강해 수뇌부가 다루기 어려운 경우가 무척 많았다. 이런 측면에서 시·도민구단이 상대적으로 수뇌부가 다루기 쉬운 무명의 수석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하는 건 아닌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인지도를 떠나 팀에 맞는 감독을 선임한 것이라면 충분히 박수 쳐 줄 만하다. 하지만 무명의 수석코치를 앉히면서 복잡한 감독 선임 과정을 건너 뛰고 편하게 그들을 다루기 위한 방편으로 써 놓고 “팀을 잘 아는 수석코치를 감독으로 승격하는 게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이라고 핑계를 대는 건 아닌가.

이번 시즌 경기력을 보면 응당 물러나야 하는 감독도 있었지만 한 시즌 정도는 더 기회를 줘도 괜찮을 감독도 꽤 있었다. 유행처럼 번지는 감독 사퇴가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다. 지금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성적 부진에 따른 책임은 누군가 져야 하는데 감독만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그리고는 다시 수석코치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선에 혼자 총대를 매고 선다. 이 잔인한 서바이벌이 진행되는 동안 정작 윗선은 책임에서 자유롭다. 이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잔인한 승부의 세계에서 감독 교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과정은 더 투명해야 하고 더 합리적이어야 한다. 올 시즌이 끝난 뒤 한 시즌 동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K리그 감독들의 건강 검진으로 병원은 북새통을 이룰 것 같다. 과연 이들 중 내년에는 얼마나 많은 감독이 또 다시 건강 검진을 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