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K리그를 즐겨보던 이들이라면 어제(12일) 열린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 경기가 무척 새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K리그 팬들에게 이 경기는 흔한 한국의 A매치가 아니었다. 세르베르 제파로프(전 FC서울)와 티무르 카파제(전 인천유나이티드), 알렉산드르 게인리히(전 수원블루윙즈) 등 우즈벡에 무려 세 명의 K리그 출신 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까지만 하더라도 매주 우리의 눈 앞에서 경기를 펼치던 선수들을 오랜 만에 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건 새로운 재미였다. 마치 고등학교 동창회에 간 느낌이었다.

나는 당연히 한국을 응원했지만 이 세 선수에게도 관심이 간 게 사실이다. 이들이 K리그에서 보여준 경기력이라면 충분히 한국에 위협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이들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후반 교체 투입된 게인리히의 움직임을 평가하기에는 시간이 짧았다고 하더라도 제파로프와 카파제의 활약은 훌륭했다. 두 차례의 코너킥 상황에서 날카로운 킥으로 골을 엮어낸 제파로프는 물론 경기 내내 중원에서 터프한 플레이로 한국 공격을 차단한 카파제 역시 얄미울 정도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 지난 시즌까지 응원했던 선수들을 적으로 만난다는 건 괴롭기도하지만 클럽 축구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기도 하다.

우즈벡에서 이 세 선수의 무게감은 대단하다. 이 세 선수는 우즈벡 축구 역사상 A매치 최다 출장 1위부터 3위까지 나란히 기록 중일 정도로 영향력이 상당하다. 우즈벡의 주장인 카파제는 99경기에 나섰고 제파로프는 85경기, 게인리히는 74경기에 출장하고 있다. 또한 게인리히는 74경기에서 28골을 넣어 우즈벡에서 A매치 통산 최다 득점 3위에 올라있다. 과거 우즈벡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우즈벡은 현지에서도 역대 최강이라 불릴 만큼 강하고 그 중심에는 K리그 출신 이 세 선수가 포진해 있다. 이 세 선수가 같은 시기에 K리그에서 뛰었다는 점은 새삼 놀랍고 우리에게는 축복이었다.

경기를 보면서 지난 시즌 이 선수들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제파로프와 게인리히가 K리그 빅클럽에서 뛰어 더 잘 알려져 있지만 개인적으로 팀 내 공헌도를 따지자면 카파제도 뒤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2001년 우즈베키스탄 프로 무대에 데뷔해 10년 동안 225경기에 나섰던 카파제는 인천으로 이적한 뒤 어려운 팀 사정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팀 내 공격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나서기도 하는 등 30경기에 나서 5골 3도움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 인천은 엘리오와 바이야, 루이지뉴, 엘리오 등 영입하는 외국인 선수마다 족족 실패했지만 그나마 카파제만이 성공작으로 평가받았다.

카파제는 K리그에서 뛰면서 자녀를 얻었다. 그래서 K리그에 대한 애정이 더 특별하다. 지난해 5월 수원과의 경기에서 페널티킥 골을 터뜨린 카파제는 공을 유니폼 속에 넣고 태어날 2세를 위해 ‘만삭 세레모니’를 펼쳤고 9월 소중한 생명을 얻었다. 카파제는 “한국은 나에게 특별한 나라다. 한국에 있을 때 태어난 아기를 보고 있으면 한국이 떠오른다”고 한국 생활을 추억했다. 지난 2월 한국과 평가전을 위해 내한한 그는 “지난 1년 동안 한국에서 따뜻했던 경험들을 가졌는데 이렇게 다시 불러주고 환대해 줘서 감사하다”면서 “K리그 시절 전북 축구를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최강희 감독이 대표팀에서도 좋은 축구를 하기 바란다”고 전하기도 했다.

‘문어왕’ 게인리히의 짧았던 수원 시절도 참 다사다난했다. 2005년 3월 한국과 치른 2006 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골을 기록하기도 했던 그는 지난해 1월 한국과의 2011 아시안컵 3-4위 결정전 두 골을 넣으면서 이미 K리그 팬들에게는 잘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가 수원에 합류해 이틀 만에 치른 서울전에서 데뷔골을 뽑아낼 때만 하더라도 기대감은 대단했다. 하지만 게인리히는 자신을 선발로 기용하지 않는 윤성효 감독과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트위터에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기고 수원을 떠났다. 트위터 글은 이랬다. “그 감독이 있는 한 수원은 절대 챔피언이 될 수 없다.” K리그에서 선수가 감독에게 이렇게 불만을 터뜨린 사건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게인리히가 수원에서 겉도는 선수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난해 10월 수원과 알 사드의 AFC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터진 사상초유의 난투극에서 가장 활발하게(?) 주먹을 휘두른 선수가 바로 게인리히였다. 임대 신분이었지만 수원 유니폼을 입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그에게 수원 팬들은 열띤 박수를 보냈다. 게인리히는 아내와 생후 5개월 된 딸, 장모를 한국으로 모셔와 오랜 한국 생활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비록 1년 만에 팀을 떠났지만 최근 한국전을 앞두고는 “한국 축구팬들은 잘 지내느냐”면서 먼저 안부를 물을 정도로 K리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여전하다.

제파로프의 K리그 시절도 화려했다. 아마 K리그 성적에 대한 임팩트만 따지고 본다면 세 선수 중 제파로프가 가장 뛰어날 것이다. 2010년 6개월 만 뛰면서도 18경기에 출전, 1골 7도움을 기록하면서 서울의 K리그 우승에 큰 역할을 했던 제파로프는 지난 시즌 사우디 알 샤밥으로 이적하기 전까지도 15경기를 뛰며 서울 공격을 이끌었고 아시아축구연맹(AFC) 올해의 선수상까지 수상하기도 했다. 비록 짧은 시간 활약한 뒤 서울을 떠났지만 서울 역사에 있어서 가장 찬란한 순간을 함께 한 주인공이다. 최근에는 한국 기자를 만나 “안녕하세요”라고 한국어로 먼저 인사를 건넬 정도로 한국과 무척 친근한 선수다. 이 세 선수가 어제 경기에서 맹활약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내가 잘 키운 딸이 시집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적으로 본다면 한 없이 미운 선수들이다. 어제 경기에서 이들은 우즈벡의 에이스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였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보면 무척 흥미로운 경기였다. 지난 시즌까지만 하더라도 한솥밥을 먹었던 하대성과 제파로프가 중원에서 맞대결을 펼쳤고 게인리히는 팀 동료였던 정성룡이 지키는 골문을 향해 돌진했다. 지난 시즌 부진했던 인천에서 고군분투했던 카파제는 주장 완장을 차고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한국이 원하는 승리를 얻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지만 조금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또 이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경기가 있었을까.

어제 경기는 마치 K리그 같았다. 한국 선수 중 김보경(카디프시티)과 박주호(바젤)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은 K리그에서 뛰었거나 지금도 뛰고 있는 선수들이고 상대팀 주축 선수 세 명 역시 K리그 출신이었다. 한국이 승리하지 못해 아쉽지만 월드컵 본선 진출을 놓고 다투는 중요한 경기에서 K리그가 이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는 무척 즐거운 경기였다. 앞으로 유능한 외국인 선수들이 K리그를 많이 거쳐 가 이런 색다른 재미가 특별하지 않은 날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