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날이라는 게 있다고 들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야구가 금메달을 딴 걸 기념해 8월 23일로 제정된 야구의 날에는 한국야구위원회(KBO)가 8개 프로구단과 함께 공동 프로모션을 진행한다고 한다. 아이디어가 꽤 괜찮은 것 같다. 이 소식을 들으니 축구의 날도 하루쯤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가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순간이 얼마나 많은데 1년에 하루 정도는 축구의 날이 있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축구의 날로 제정할 가장 적합한 날은 언제일까.

6월 4일

한국 축구 역사를 나눈다면 그 기점을 어느 순간으로 해야 할까.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나는 월드컵 첫 승 이전과 이후로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려 48년 만에 거둔 이 월드컵 첫 승은 한국 축구사에서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월드컵 4강 신화도 다 이 첫 승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월드컵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던 팀이 감격의 첫 승을 거두는 순간 전국은 눈물바다가 됐다. 이후 한국은 연이어 펼쳐진 월드컵에서 이제 1승 정도(?)는 충분히 거둘 수 있는 팀이 됐다. 폴란드를 제압하고 감격스러워하던 바로 그날, 6월 4일이 축구의 날로 지정된다면 의미가 깊을 것 같다.

이날이 축구의 날로 지정될 경우 ‘처음’과 관련된 마케팅 활동을 펼치기 좋다. 월드컵 첫 승을 기념해 첫사랑에 성공한 부부에게 경기장 입장권을 할인해 준다던지 프러포즈 이벤트를 통해 커플의 첫 날을 경기장에서 보낼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마케팅 활동을 할 수가 있다. ‘월드컵 첫 승의 감동, K리그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거는 것도 좋다. 또한 4년에 한 번 6월이 되면 월드컵이 열리기 때문에 6월 4일이 축구의 날로 제정된다면 효과가 더욱 빛날 것이다. 우리가 월드컵에서 역사적인 첫 승을 거둔 날이 그냥 1년 중 똑같은 하루라면 슬플 것 같다. 6월 4일이면 대개 대학교 시험기간인데 대학생들 빼고 우리 직장인들도 축구를 통해 축제를 즐겨보자. 대학교 축제 가고 싶은데 나이 먹어서 못가니 이런 날이라도 생기면 좋겠다.

7월 1일

지금 생각하면 2002년은 다시는 안 올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안방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하는 일이 우리 생애 또 있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런 날이 온다고 하더라도 내가 80대 노인이 돼 젊은 친구들이 시청 앞 광장에서 신나게 월드컵을 즐기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무척 서글플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건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끝난 다음날인 2002년 7월 1일을 정부에서 임시공휴일로 선포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축구 때문에 임시공휴일이 선포된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태극전사들이 공을 잘 찬 덕분에 우리는 학교와 회사도 가지 않고 하루 동안 생각지도 않은 휴식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당시 임시 공휴일을 맞아 전국의 고궁과 능원 등 유적지가 무료로 개방되기도 했다.

임시공휴일로 지정될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닌 이날을 축구의 날로 선포해도 좋을 것 같다. 최근 들어 K리그 올스타전이 들쑥날쑥하게 열리고 있는데 아예 혹서기로 잠깐의 리그 휴식기를 갖기에 앞서 매년 7월 1일을 올스타전이 열리는 날로 지정하면 더할 나위 없다. 월드컵과 K리그는 동떨어진 대회가 아니다. 전국민이 하나가 돼 축구에 열광하던 그 분위기를 축구의 날이라는 기념일과 엮어 K리그 올스타전을 통해 이어갔으면 한다. 이날 올스타전이 열려 평소 으르렁대던 K리그 여러 구단 팬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은 진정 축구의 날을 상징하는 이벤트가 될 것이다.

5월 8일

표면적으로 월드컵과 관련된 날을 축구의 날로 지정하는 게 빛나겠지만 더 깊은 의미를 찾고 싶다면 5월 8일을 축구의 날로 선포하는 게 더 좋을 것이다. 1983년 5월 8일 이 땅에 아시아 최초의 프로리그가 출범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월드컵에 빠지지 않고 초대받을 수 있었던 것도 프로축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을 5월 8일 축구의 날을 통해 상기할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한국은 프로축구가 출범한 뒤부터 단 한 차례도 빼놓지 않고 월드컵 7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한국 축구에 있어 5월 8일은 월드컵과 관련된 날 이상으로 조명 받아야 할 날이다.

이 날이 축구의 날로 지정된다면 K리그를 재조명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프로축구 출범의 해인 1983년생에게 입장권 할인 이벤트를 펼칠 수도 있고 K리그와 생일이 같은 5월 8일 출생자들에게도 축구장에서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어버이날과 겹친다는 점이 다소 껄끄럽기는 하지만 이 역시도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부모님께 감사하고 지금의 한국 축구를 있게 해준 K리그에도 감사하는 날’이라는 접근 방식이라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아낌없이 한국 축구를 위해 베푸는 K리그에 카네이션을 달아주는 날이 된다면 더 좋겠다.

9월 26일

한국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날이 올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들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미 우리가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다. 성인 남자 월드컵은 아니지만 2년 전 U-17 여자월드컵이 바로 그 무대였다. 당시 한국은 멕시코와 남아공, 나이지리아, 스페인, 일본 등 각 대륙의 강호들을 모두 제압하고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FIFA 주관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나이지리아와의 8강전에서는 전반 시작과 동시에 두 골을 허용한 뒤 끝까지 따라붙어 6-5 대역전승을 일궈냈고 결승전에서는 일본을 만나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하고 역사적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만이 아니었다. 여민지가 골든슈즈와 골든볼까지 받아 FIFA 주관 대회에서 한국이 상을 싹쓸이하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성인 남자 월드컵에 비해서는 주목을 덜 받았지만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운 9월 26일은 축구의 날로 지정되기에 충분하다. 여자축구와 관련된 날을 축구의 날로 선포할 경우 보다 다양한 이벤트가 가능해진다. 축구를 관람하기에도 선선한 9월은 딱 적당하다. 대대적으로 팬들에게 축구 보러 가는 날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좋을 것 같다. 우승 당시 선수 사인 유니폼과 사진 등을 직접 볼 수 있는 행사를 마련한다면 이 대단한 업적이 더 빛나지 않을까.

10월 20일

매년 10월 20일은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다. 이 날이 축구의 날로 지정됐으면 좋겠다. 물론 10월 20일이 내 생일이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축구의 날이 제정될 만큼 위대한 한국 축구 역사가 많다. 이제 문제는 선수들이 열심히 뛰어 얻은 성과를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우리가 포장하는 것이다. 또한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축구장이 전국적인 축제의 무대가 될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축구의 날을 제정해 산골에 사는 어린이들을 축구장으로 초대하거나 축구 박물관 개관, K리그 선수단 체험, 올드 유니폼 데이 등 다양한 행사를 연다면 보다 한국 축구가 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물며 연인들끼리 만난 지 100일도 기념하는데 한국 축구의 위대한 역사를 기념하고 성대한 잔치를 벌이는 일을 지금까지 너무 소홀히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