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제대하는 날 개구리 마크 치고 놀이공원 가자.” “과연 그 날이 올까?” “언젠간 오겠지.” 군대에서 야상에 주름도 없던 이등병 시절 동기들과 이런 약속을 했다. 그리고 2년 뒤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제대를 한 뒤 동기들과 2년 전 약속을 지키고 제대를 기념하기 위해 예비군 마크를 단 채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부대에서 나오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늘 제대한 녀석들한테 무서울 게 뭐 있을까. 세상이 다 우리 거였다. 지나가는 아저씨들도 우리들의 예비군 마크를 보고 축하를 해줬다. “오늘 제대했나보네. 고생 많았어. 축하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건 오늘 제대한 군인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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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미리 열린 상무 선수단 전역 기념식에서 권순태가 캐리커처를 전달받는 모습. 이날 행사에서는 전역 선수들을 위한 상주시 명예시민증과 전역기념패 등이 전달됐다. (사진=상주상무 축구단)

오늘(10일)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사회로 돌아오는 이들이 있다. 강민우, 이윤의(이상 강원FC), 고차원(전남드래곤즈), 김범준, 유창현, 이성재(이상 포항스틸러스), 김철호(성남일화), 오봉진(제주유나이티드), 이종찬(대전시티즌), 황병인(경남FC), 김민수(인천유나이티드) 등은 지난 3일 제대했고 2010년 K리그 플레이오프에 나서느라 이들보다 일주일 늦게 입대했던 이종민과 최효진, 김치우(이상 FC서울)를 비롯해 권순태(전북현대), 김용태, 김치곤(이상 울산현대) 등은 오늘 성스러운 병역 의무를 마치고 전역을 할 예정이다. 이제 이들은 다시 원소속팀으로 돌아가 재개될 K리그를 준비할 것이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들이다.

정말 고생 많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어찌 보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군대를 가지 않으려고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는 이들이 많은 요즘 세상에 당당히 군대를 다녀온 이들에게 고생했다고 박수 한 번 쳐주는 것도 무척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이들은 어제 밤 후임들과 냉동 파티를 벌인 뒤 설레는 마음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군 생활을 제대로 못한 이들은 모포말이를 당했을 수도 있다. 지긋지긋한 군 생활을 다 마쳤다는 후련한 마음과 다시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불안한 마음이 교차할 것이다. 아마 그동안 썼던 수양록을 살펴보며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일부에서는 상무에서 축구를 하며 군 복무 기간을 채운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할 수도 있다. 남들은 전방에서 힘들게 군 생활하는데 상무에서 편하게 운동에만 집중했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빡센(?) 부대는 자기가 나온 부대라는 우스갯소리처럼 정말 많이 고생하고 제대한 이들도 수두룩한데 상무에서 공 차면서 K리그에까지 나섰으니 이들이 무척 편해 보일 수도 있다. 보통 일반 사병이 군 생활하면서 몇 안 되는 스트레스 해소 수단인 축구로 2년 동안 시간을 보낸다는 게 부러움의 대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특기를 다한 것이다. 상무에는 축구뿐 아니라 여러 종목의 선수들이 있다. 다들 체육특기병으로 군 복무 중이다. 취사병이 열심히 밥을 하고 군악병이 열심히 악기 연습을 하는 것처럼 이들도 자신이 부여 받은 주특기를 열심히 갈고 닦는 것이다. 이들은 국방부의 정당한 편제 하에 체육특기병으로 복무하면서 자신이 속한 종목에서 기량을 갈고 닦는 게 본연의 임무다. 전쟁이 터지면 당장 전선으로 나가 싸울 전투병으로서의 임무도 기본적으로 다 숙지하고 준비하는 건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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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 훈련 중인 백지훈의 모습. 꽃미남 백지훈도 머리 깎고 군복 입으니 그냥 군인아저씨다. (사진=상무상무 축구단)

지난 6월 K리그는 잠시 휴식기를 맞았다.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상무 선수들은 군장을 쌌다. 대한민국 군인이라면 누구나 받아야 할 유격훈련을 위해서였다. K리그에 참가하고 있는 축구단이 유격훈련을 받을 수 있는 시기는 이 K리그 휴식기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2박 3일 일정으로 30사단 유격장에서 다른 사병들과 똑같이 훈련을 받았다. 꼬인 군번이라 유격훈련을 세 번이나 받아야 했던 나에 비하면 나은 편이지만 PT체조 8번 전설의 온몸 비틀기라고 이들에게 예외는 아니었다.

스포츠 스타의 병역 비리는 예나 지금이나 사라지지 않는다. 활발히 사회 생활을 하다가 모든 걸 포기하고 군대에 가고 싶은 남자는 없지만 스포츠 스타는 더더욱 그렇다. 짧은 선수 생활 기간 동안 많은 걸 보여줘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2년을 군대에서 보낸다는 건 치명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현역 선수들에게는 병역을 회피할 수 있는 수 많은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오늘 제대하는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응당 져야 할 의무를 다했다. 당연한 걸 칭찬해야 하는 이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군 생활 잘 마치고 사회로 돌아오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운동선수들은 현역 입대 시기가 일반인에 비해서는 다소 늦는 편이다. 대부분이 20대 중·후반에 입대한다. 또한 안정적인 선수 생활을 위해 일찍 결혼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일반 사병과는 다르게 기혼자가 상당수다. 당연히 가정을 책임지던 이들의 수입이 사라지니 가정 경제가 흔들리는 일도 자주 봤다. 실제로 지금은 이미 제대한 한 선수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군 생활 동안 많은 빚을 지기도 했다. 한 해에 수억 원을 벌었던 특급스타는 그나마 낫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부분에서 만큼은 일반 사병과는 다른 상황이라는 점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2년은 아까운 시간이지만 이들의 2년은 더더욱 그렇다.

상무의 연고지인 상주에는 호텔이 딱 하나 있다. 경기 전날 경기도 성남의 국군체육부대에서 상주로 이동해 경기 준비를 하며 하루를 묵는 상무 선수들이 이 호텔을 써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이 하나 뿐인 호텔을 원정팀에 내주고 자신들은 폐교를 개조해 숙소로 쓰고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게 상무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요새 웬만한 내무실도 개선돼 시설이 좋은 걸로 아는데 이들은 폐교에서 여섯 명이 한 방을 쓴다. 이거 참 클럽하우스라고 할 수도 없고 내무실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이들은 이 시설에 불만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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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 선수들이 홈 경기 때마다 쓰고 있는 생활관의 모습. (사진=상주상무 축구단)

이제 이들은 다시 사회로 나와 험난한 경쟁을 펼쳐야 한다.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전북 주전 골키퍼였던 권순태가 군대에 갈 때만 하더라도 최은성이 전북 골문을 대신 지키는 일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 권순태는 하늘 같은 선배 최은성과 주전 경쟁을 펼쳐야 한다. 최효진은 서울의 붙박이 오른쪽 풀백으로 성장한 고요한과 선발을 놓고 다툰다. 성남에서 주전으로 뛰던 김철호와 울산의 김치곤, 김용태도 주전을 장담할 수는 없다. 이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세상은 변했고 이제는 도전자의 입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군대에 다녀온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제대 후 겪는 불안감이 이들에게도 있다.

얼마 전 취재를 위해 국군체육부대를 찾았을 때 평소 안면이 있던 한 선수를 만났다. 내무실 구경 좀 해보고 싶다고 하니 친절히 안내를 해주면서 나에게 관물대에 몰래 짱 박아뒀던(?) 맛스타와 초코파이를 건넸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귀한 손님 오면 대접하려고 숨겨뒀어요.” 사회에 있을 때는 멋도 부리고 폼 나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던 그도 군대에 가니 다 똑같은 군인이었다. 맛스타와 초코파이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완벽한 군인이었다. 물론 K리그 원정 경기를 다니면서 사회와 완벽히 단절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무 소속이라고 ‘땡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으면 한다. 최전방에서 오늘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생하는 많은 이들이 있지만 후방에서 다른 주특기를 수행하고 있는 이들도 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군인이다.

그동안 국방의 의무를 다하느라 무척 고생했다. 이제 다시 세상을 향해 나오는 이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건 어떨까. 이제 이들이 2년 동안 벌지 못했던 돈도 많이 벌고 더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으니 군 생활이 체질에 잘 맞는 이들은 말뚝을 박는 건 어떨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물론 나는 다시 가라면 절대 안 가지만 밥도 주고 잠도 재워주고 군대만한 곳이 또 있나. 제대하고 2년 안에 부사관 지원하면 사병 시절 호봉수도 인정해 주는 아주 훌륭한 제도도 있다는 사실을 참고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