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총재가 지난 3일 별세했다. 업적과 비판 속에 세상을 떠난 문선명 총재에 대해서는 여전히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종교에 관해서 박식하지 않은 내가 문선명 총재에 대해 논할 이유도 없고 논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축구와 관련된 문선명 총재라면 그가 세상을 떠난 이 시점에서 할 이야기가 있다. 오늘 칼럼에서는 종교적 색채를 모두 배제하고 ‘축구인’ 문선명을 되짚어 보려고 한다. 참고로 나는 무교이자 군대 시절 초코파이 하나에 손바닥 뒤집듯 모든 종교 행사를 경험한 사람이다. 특정 종교를 띄워주거나 폄훼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저 단순히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 발전에 힘썼던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한다.

K리그 최초의 3연패, 일화의 위대한 역사

1988년까지 프로축구에는 5개 팀밖에 없었다. 팀이 홀수이다 보니 한 라운드를 치를 때마다 한 팀은 쉬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매 라운드 딱 두 경기뿐이어서 리그가 흥미를 끄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1989년 일화가 프로축구 무대에 전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평소 축구를 좋아하던 문선명 총재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일화그룹에 딱 한 마디를 내던졌기 때문이다. “프로축구단 하나 만들어.” 일화의 합류로 프로축구는 6개 팀 체제가 돼 더욱 알차게 치러질 수 있었다. 일화는 1983년 멕시코 4강 신화를 이뤘던 박종환 감독을 사령탑에 앉혔다.

창단 초기 일화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첫 시즌에서 6개 팀 중 5위에 머문 일화는 이듬해에는 리그 꼴찌에 머물렀다. 리그 최다 득점(56골)을 기록했지만 동시에 최다 실점(63골)하며 무너졌다. 하지만 1992년 시즌을 앞둔 일화는 달라졌다. 창단 후 일화의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던 문선명 총재가 직접 나섰기 때문이다. 일화는 1992년 시즌을 앞두고 박종환 감독과 당시 사상 최고액에 재계약을 체결했다. 5,160만 원이었다. 또한 문선명 총재는 역시 그가 보유하고 있던 워싱턴타임스 박보희 회장을 세계일보 사장 겸 일화 축구단 구단주로 기용하며 본격적인 ‘축구단 키우기’에 나섰다.

신인드래프트에서 대우에 지명된 ‘대어’ 신태용과 이태홍을 곧바로 영입했고 고정운과 이상윤 등도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팀에 잔류했다. 이상윤은 첫 시즌에 비해 무려 60% 인상된 금액에 재계약했고 고정운도 50% 인상안에 사인했다. 나머지 선수들 역시 평균적으로 15% 이상의 인상안을 제시하며 연봉 협상을 마무리했다. 또한 훗날 K리그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 놓은 골키퍼 발레리 사리체프도 영입했다. 당시 사리체프는 소련 전 국가대표 출신으로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리그에서 3년 연속 최우수 골키퍼에 선정된 세계적인 골키퍼였다. 170경기 중 101경기를 무실점으로 틀어 막은 골키퍼가 K리그에 온 것이었다.

전폭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은 일화는 1992시즌 개막 후 무패가도를 달리면서 창단 후 처음으로 리그 선두에 올랐다. 언론에서는 최하위권을 전전하던 신생 구단의 변화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막판 뒷심 부족으로 포철에 승점이 1점 뒤져 1992 시즌 우승 트로피를 내주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일화 시대’는 그 웅장한 막을 열었다. 곧바로 이듬해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첫 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일화는 K리그 최초로 3회 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현대와 대우, 럭키금성 등 굴지의 대기업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이다. 문선명 총재는 늘 일화 축구단 운영 보고를 직접 받을 정도로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샤샤? 몸값 따지지 말고 데려와.”

“영상 자료 안 보내고 뭐하십니까. 기록 정정을 해야 하니 빨리 보내주세요.” 1999년 5월이었다. 당시 일화는 울산과의 경기 기록이 잘못돼 프로축구연맹에 기록 정정 신청을 냈다. 세르게이의 두 번째 골 도움이 홍도표였지만 엉뚱하게도 공식 기록에는 박남열의 도움으로 이름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화는 연맹이 요구한 경기 자료를 곧바로 보낼 수 없었다. 당시 중계가 없어 자체적으로 구단에서 찍은 영상이 있긴 했지만 엉뚱하게도 이 영상이 브라질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질에 머물고 있는 문선명 총재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문선명 총재는 중계가 없는 날이면 구단에서 자체적으로 찍은 영상이라도 반드시 챙겨볼 정도였다.

문선명 총재가 불편 없이 경기를 보기 위해 담당자가 직접 육성으로 멘트를 집어넣기도 했다. 한 사람만을 위한 특별한 해설위원인 셈이다. 또한 그가 서울 모처에 머물 때는 담당자가 전화기를 이용해 경기 진행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고하기도 했다. 이마저도 쉽지 않을 경우에는 팩스를 동원했다. 실제로 2001년 9월 문선명 총재는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 오랜 시간 체류하다 제주도 개인 별장에서 쉬는 동안 K리그 성남일화 경기가 열리자 팩스로 실시간 보고를 받으며 경기 결과를 챙기기도 했다. K리그에서 성남이 자체중계 시스템을 가장 먼저 구축할 수 있었던 것도 문선명 총재에게 보고하던 노하우 때문이었다. 2007년 성남은 당시 14개 K리그 구단 중 유일하게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자체 중계를 선보였다.

하지만 그가 구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권리만 행사한 건 아니다. 2000년 12월 문선명 총재는 성남일화 박규남 사장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리그 우승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라.” 그러자 박규남 사장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샤샤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몸값이 어마어마합니다.” 문선명 총재는 박규남 사장의 말을 듣고 딱 한 마디로 답했다. “데려와. 몸값은 상관하지 말고 샤샤 데려와서 우승해.” 이 일이 있고 불과 열흘이 흐른 뒤 샤샤는 정말 성남 유니폼을 입게 됐다. 계약기간 3년, 계약금 130만 달러, 연봉 30만 달러에 이르는 당시로서는 역대 외국인 선수 중 최고의 대우였다. 문선명 총재의 말 한마디로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샤샤는 엄청난 몸값과 그에 걸맞지 않은 슬럼프 때문에 어떤 팀에서도 쉽게 영입할 수 없는 선수였다.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했다가 극심한 슬럼프를 겪으며 부진에 빠진 그를 통 크게 영입할 수 있는 팀은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어마어마한 돈만 날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전남과 안양은 샤샤에게 접근했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몸값을 듣고 곧바로 계획을 철회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성남은 문선명 총재의 지시 하나로 샤샤 영입을 일사천리로 마무리했고 샤샤는 마지막 순간 보은의 골을 터뜨리며 2001년 K리그에서 성남이 우승을 차지하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K리그에서 상상할 수 없는 우승 보너스

2006년 K리그 우승도 성남의 몫이었다. 김학범 감독을 필두로 모따와 김두현, 우성용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된 성남은 강력한 기량을 선보이며 리그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리그를 마무리한 뒤 서울 메리어트호텔에서 우승 축하연을 가졌다. 이날 축하연에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과 곽정환 프로축구연맹 회장 겸 성남 일화 구단주, 박규남 프로축구연맹 부회장 겸 성남 사장 등 축구계 인사와 이대엽 성남시장, 이수영 성남시의회 의장 등 내빈, 성남 일화 선수단 및 서포터스 등 500여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주장 김해운이 곽정환 구단주에게 우승 트로피를 건네고 만세 삼창을 외치자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그런데 행사 도중 누군가가 사회를 맡고 있던 신문선 해설위원에게 다가가더니 귓속말을 했다. 순간 축하연을 즐기던 호텔에는 정적이 흘렀다. 귓속말을 전해 들은 신문선 해설위원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방금 문선명 총재께서 직접 전화를 걸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수단에 지금 즉시 포상금으로 16억 원을 지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파티장은 열광에 빠졌다. 문선명 총재의 지시에 따라 김학범 감독과 모따, 김두현, 우성용 등 우승 주역은 각각 1억 원을 받았고 다른 선수들과 코치진, 구단 프런트에게도 기여도에 따라 8등급으로 나눠 12억 원이 배분됐다. K리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돈 잔치였다.

이뿐 아니었다. 이들을 흥분시키는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문선명 총재께서 챔피언결정전에 나선 선수 전원에게 부부동반 여행도 선물하셨습니다. 라스베가스와 나이아가라, 뉴욕으로 9박 10일의 여행을 갈 예정이니 개인 휴가 일정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아직 미혼인 선수들은 여자친구와 함께 오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절대 열외는 없습니다.” 이 여행 경비만 하더라도 무려 4억 원이 넘었다. 성남이 K리그에서 7번이나 우승을 차지하며 가장 위대한 역사를 쓸 수 있었던 데는 코치진과 선수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문선명 총재의 역할이 무척이나 큰 비중을 차지했다.

펠레와의 약속, 그리고 사회 공헌 활동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축구 황제’ 펠레는 내한해 문선명 총재의 서울 한남동 집을 직접 방문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펠레가 말했다. “전쟁 중인 가봉에서 축구 경기를 하기 위해 잠시 전쟁을 멈췄습니다. 축구는 세계 평화를 이끄는 인류 공통의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세계평화와 통일이라는 자신이 내건 기치가 축구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던 문선명 총재는 이 자리에서 펠레에게 약속했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오늘 당신과 약속 하나 하겠습니다. 내가 세계평화를 위한 축구 대회를 하나 만들죠.” 이 약속을 한 뒤 8일 만에 피스컵 창설이 발표됐다. 피스컵은 훗날 레알마드리드와 유벤투스, 토트넘 등이 나설 정도로 성장했다.

2000년에는 브라질 프로축구 무대에서 재정난으로 휘청이던 소로카바를 11억 원에 인수하기도 했다. 인수 당시 상파울루 지역 3부리그격에 속해있던 소로카바는 인수 이후 매년 승격해 지역 1부리그까지 올라 코린티안스와 팽팽한 승부를 펼치는 등 지역 강호로 성장하기도 했다. 상파울루주 1부리그 소속으로 현재 전국 리그에서는 3부리그에 속해있는 소로카바는 2009년 11월 북한을 방문해 2010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고 있던 북한과 평가전을 치러 0-0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소로카바 뿐 아니라 브라질의 또 다른 팀 쎄네 역시 문선명 총재가 소유하고 있다.

지금도 문선명 총재가 설립한 선문평화축구재단은 축구와 관련된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피스컵은 물론 여자축구 대회인 피스퀸컵을 열고 연예인 자선축구대회인 피스스타컵을 개최해 수익금 전액을 유니세프와 유엔난민기구 활동에 후원금으로 전달하고 있다. 2003년부터 유소년 축구지원을 중심으로 한 사회공헌 프로그램 ‘피스드림’ 운영으로 전 세계 40여개국에서 유소년 축구대회와 후원도 지속 중이다. 특히 아프리카의 빈민국 라이베리아에서 ‘피스드림컵 축구대회’를 열어 주목을 받기도 했다. 피스드림재단은 국내 유소년 선수들의 유럽 축구 유학도 지원하고 있고 아시아축구연맹(AFC)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인 ‘드림아시아’ 공식 파트너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 축구사에 기억될 문선명 총재

지난 번 안산 H FC 구단과 관련된 칼럼을 쓴 뒤 “그렇다면 통일교에서 운영하는 성남일화도 종교적 색채가 있다고 비판해 보라”는 이메일을 몇 통 받았다. 하지만 안산 H FC 구단은 애초에 선교를 목적으로 탄생한 구단이지만 성남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얼마 전 만난 신태용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불교 신자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 중 절반 가량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믿고 있다. 만약 구단 자체가 통일교 선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면 나를 감독으로 앉히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른 종교를 믿는 선수들도 영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이 구단과 20년 넘게 연을 맺고 있는데 단 한 번도 누구로부터 통일교를 믿어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건 내가 어디가도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선명 총재를 안지도 20년이 됐는데 “신 감독, 통일교 한 번 믿어봐” 이런 이야기 한 번 들은 적 없다.”

물론 문선명 총재의 축구 사랑이 완벽한 건 아니다. 그는 K리그에서 성남의 경기력 향상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이 구단이 보다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는 것에는 관심이 부족했다. 좋은 선수를 사오고 훌륭한 감독을 영입하는 것 만큼 성남이 K리그의 인기 구단이 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면 아마 지금쯤 K리그의 판이 더 커졌을 것이다. 성남이 서울이나 수원만큼 많은 사랑을 받는 구단이었다면 보다 흥미로운 구도가 됐을 것이다. 현재 성남은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 밤낮 없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이미 한 번 굳어진 이미지를 회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남은 늘 축구를 잘하는 구단이었지 인기가 많은 구단은 아니었다.

하나 걱정되는 것도 있다. 문선명 총재 별세 이후 성남 구단 사정은 사실 좀 걱정이 된다. 당장 물질적인 타격이 있지는 않겠지만 구단 운영에 전적인 힘을 가진 이가 사라졌다는 건 장기적으로 적지 않은 손실일 것이다. 문선명 총재의 유산이나 다름없는 축구단을 해체하는 정도는 아니어도 그 명맥을 유지하는 선으로 지원이 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말 한 마디로 최고의 선수를 영입할 수 있는 힘이 사라졌으니 재단의 간섭이 심해지고 지원이 줄어들 수도 있다. 또한 문선명 총재의 관심에서 다소 멀어진 피스컵이 예전만큼 성대한 대회로 치러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살펴본다면 피스컵도 점차 그 규모가 줄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내 걱정이 기우이길 바란다.

또한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건 오늘 프로축구 발전에 이바지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종교적인 논란으로 변질되는 건 원치 않는다. 문선명 총재의 종교적 관점을 떠나 그는 축구계에서 큰 업적을 이룬 인물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성남이 엠블럼에 별을 7개나 달 수 있었던 것도, 아시아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유럽의 수준급 클럽이 피스컵에 나서 흥미로운 경기를 선보이는 것도, 지금 많은 유소년 선수들이 유럽에서 축구 유학을 하고 있는 것도, 아프리카의 가난한 선수들이 대회에 나설 수 있는 것도 문선명 총재의 공이라는 건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종교적인 색채가 조금이라도 들어 있지도 않다. 종교를 떠나 이렇게 축구 발전을 위해 힘 쓴 인물의 명복을 빈다. 한국 축구사에 있어 문선명 총재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