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라운드에 들어가면 기대감이 생긴다. 언제나 찡그리지 않는 인상으로 웃으며 축구를 하는 그는 고생 없이 그 자리에 섰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힘든 시기를 이겨냈기에 그는 그 자리에서 웃을 수 있다. 바로 포항스틸러스의 공격수 노병준이다. 요즘 들어 축구선수로서는 환갑을 지난 34살의 나이도 잊은 채 펄펄 날고 있는 노병준을 포항에서 직접 만났다. 이번에는 내가 요새 키우는 인턴기자도 한 명 대동했다. 지금부터 노병준과의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포항에서 직접 노병준을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반갑다. 이렇게 만나게 돼 영광이다.

나도 반갑다. 요새 보니까 안티 팬도 많던데 힘내라.

고맙다. 나는 안티 팬한테 시달리는데 당신은 요새 너무 잘나간다. 축하한다.

아버지가 얼마 전에 돌아가신 뒤 참 많이 힘들었다. 아버지를 하늘로 떠나보내기 전 경기에서 플레이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문제로 괜히 좋은 팀 분위기를 망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어차피 내가 할 일이 있다면 그때 만큼은 잊고 하는 게 옳다고 생각을 바꿨다. 운동할 때만큼은 집중하려고 했더니 다행히 골도 계속 터지고 좋은 플레이가 나오는 것 같다.

팀 분위기는 좀 어떤가.

항상 좋은데 지금은 더 좋다. 시즌 초반에는 무너지는 경기가 많다보니 선수들이 심리적으로 쫓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그런데 지금은 우승 경쟁보다는 상위 스플릿에 남아야 하는 경쟁 중이기 때문에 모두들 더 침착해졌다. 급하게 따라가기보다는 상위 팀들과 격차를 줄여가는 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선수들이 이제는 한 골을 먼저 내주더라도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많이 생겼다.

오늘 내가 키우는 인턴기자 한 명을 더 데리고 왔다. 인사하라.

얘가 당신네 인턴기자인가. (김)원일이 거기서 뭐하고 있나.

오늘 이 친구는 당신 후배 김원일이 아니라 내가 뽑은 김원일 인턴기자다. 예리한 질문을 많이 할 예정이다. 각오 단단히 하라. 우리 김원일 인턴기자가 맛보기로 예리한 질문 하나하겠다.

알았다. 살살 하라.

김원일 인턴기자 : 당신이 K리그 3대 엄살이라고 들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엄살이 심했나.

대학교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어왔다. 당시 우리 한양대학교 감독이 얼마 전까지 포항 감독대행이었던 박창현 선생님이셨다. 나는 정말 아파서 누워있는데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한테 ‘쟤 저러다 좀 있으면 일어나니 걱정말라’고 하시더라. 이관우하고 나하고 한 명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데 아무튼 3대 엄살로 뽑혔다. 사실 지금도 엄살이 심한 편이긴 하다. 우리 큰 아들도 나를 닮았는데 조금만 까져서 피가 나면 아주 아프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운다. 그런데 (김)원일이 너 오늘 아주 단단히 벼르고 나온 거 같다.

우리 인턴기자 1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온 건 아니고 오늘 요 앞에서 같이 밥 한끼 먹고 놀다가 같이 왔다. 훈련하러 가라고 해도 시간 많다면서 따라왔다. 이제부터 당신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좋다. 한 번 해보자.

K리그에서 잘 뛰다가 2006년 오스트리아에 진출했다. 어떤 생각으로 유럽의 변방까지 날아간 건가. 나는 당신의 플레이를 K리그에서 더 보고 싶었다.

전남에서 뛸 때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냈다고 생각했다. 당시 스물 여덟 살이었는데 다른 무대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있을지 몰랐고 FA가 돼 걸림돌도 적은 상황이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오스트리아에 가게 됐다. 내 꿈이 유럽으로 날아가 축구를 한 번 해보는 거였다.

김원일 인턴기자 : 당시 형수님과는 어떤 사이였나. 내가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디에서 들은 게 많은 것 같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으니 솔직히 말하겠다. 사실 우리 인연도 첫 아이 때문에 이어졌다. 전남에서 FA로 풀려 나온 상황에서 서로 마음을 정리하고 헤어졌었다. 그런데 3개월 뒤에 지금의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아이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인연이 돼 만났다. 결혼식도 못 올리고 혼인신고도 못하고 같이 오스트리아 생활을 시작했다. 우리 큰 아들 수인이가 복덩이였는지 수인이를 낳고 나서부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부상으로 많이 뛰지는 못했지만 8경기에 나가서 3골 2도움을 기록했다. 팀에서도 계약을 연장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가 알려진 당신의 오스트리아 생활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고 알고 있다. 듣던 것과는 다르다.

힘든 이야기는 지금부터 하겠다. 당신은 혹시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해 본 적이 있나.

난 언제나 밑바닥이다. 이제 땅을 뚫고 지하로 들어갈 것만 같다.

에이, 너무 엄살 피우지 말라. 당시 유럽에서는 아직 확신이 들지 않는 선수와는 6개월 단발 계약을 한 뒤 이후 좋은 평가를 받으면 2년 연장 계약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나도 처음 6개월 계약을 했는데 계약 기간이 끝날 때 한꺼번에 연봉을 받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6개월 뒤 팀이 파산하고 말았다. 결국 돈을 받을 방법이 없었다. 6개월 동안 승리수당과 연봉의 일부만 가지고 생활했는데 공중에 붕 뜬 상태가 된 거다. 백원 짜리 하나가 만원 짜리로 보일 정도로 힘들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우리 큰 아들이 태어났는데 기저귀 값도 없어 장인어른께 손을 벌려야 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인생의 밑바닥이었다.

저런,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팀은 2부리그나 3부리그로 내려간다는데 연봉은 못 주더라도 자기들과 함께 하자고 했다. 고민이 됐지만 먹여 살려야하는 가족이 있어 거절하고 나왔다. 돈도 벌어야하고 군대 문제도 아직 해결이 안 된 상황이었다.

잠깐, 주문한 주스하고 빙수가 나왔다. 인턴기자 뭐하고 있나.

김원일 인턴기자 : 알았다. 내가 가지고 오겠다.

다시 이어가자. 일부에서는 당신 에이전트의 일 추진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오스트리아나 핀란드 등 유럽의 변방으로 K리그의 좋은 선수를 터무니 없이 보낸다고 평가한다.

우리 에이전트가 어떤 이유로 욕을 먹는지는 나도 잘 안다. 주위에서는 “다른 에이전트도 많은데 왜 그 사람하고 계속 같이 일하느냐”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항상 선수 편에 서 있지 구단 편에 서 있지 않는다. 옆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에이전트를 교체했을 텐데 벌써 10년째 인연을 맺고 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선수의 해외진출은 그 선수가 거기에 가 얼마나 적응을 잘하고 기량을 선보이느냐의 문제지 에이전트가 어느 리그로 보냈는지는 나중 문제다. 선수들을 유럽으로 보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선수들을 위해 많이 힘써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당신은 200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선수 등록기간이 끝난 시점에서 당신을 받아주는 팀은 없었다. 힘들었을 것 같다.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분데스리가 레버쿠젠과 좋은 이야기가 오갔다. 직접 레버쿠젠에서 스카우트를 오스트리아로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대 문제가 걸려 계약이 성사되지 못했고 프랑스 마르세유와의 협상도 결렬됐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직도 날짜를 기억한다. 2007년 5월 13일에 한국에 돌아왔다. 다시 유럽 무대에 도전해보려고 벨기에에 가 입단 테스트를 받기도 했는데 이것도 잘 안 됐다. 10월이 되고 나서는 ‘이번 년도에는 안 되겠다. 내년을 기약하자’고 하면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김원일 인턴기자 : 여기 주문한 주스하고 빙수 나왔다.

고맙다. 그런데 당신 서빙하는 거 잘 어울린다. 축구 말고 이거해라.

당신의 이력을 보면 2007년 5월에 돌아와 2008년 초 포항에 입단하기 전까지의 행적이 오리무중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뭘하고 살았나.

돈도 없고 갈 곳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장인어른 댁에 얹혀 살면서 장인어른께 하루에 용돈을 만 원씩 받고 살았다. 혼자 운동을 하기 위해 헬스장과 찜질방을 같이 운영하는 곳에 매일 갔다. 더 시설이 좋은 곳도 있었지만 7천 원으로 웨이트트레이닝과 사우나를 같이 할 수 있어서 이곳을 찾았다. 만 원 들고 가 7천 원원 내고 운동하고 사우나 하면 3천 원이 남는다. 이 돈으로 나오면서 마시고 싶은 음료수 하나 사서 마시는 게 내 유일한 낙이었다. 이 생활을 포항에 오기 전까지 5개월이나 했다.

만원의 행복인가. 그런데 남자가 돈이 없고 갈 곳이 없으면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한다. 언제나 밑바닥인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매일 오후에 일어나 집에서 애들 보고 설거지하고 눈치 보이니까 걸레로 방 한 번 닦고 밤에 운동하러 가는 게 일과였다. 아마 다른 집 같았으면 눈치도 주고 잔소리도 했을 텐데 우리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나를 끝까지 믿어줬다. 특히 장모님은 아내에게 “남자는 자신감을 세워줘야 한다”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아내도 나에게 짜증 한 번 안 냈다. 가족들에게 너무 고마웠다.

든든한 가족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고민이 될 것 같다.

혼자 운동을 하다보면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극한 상황에 갈 때까지 운동을 해야 하는데 옆에 누가 없으니 ‘이 정도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런데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아내가 둘째까지 임신한 상황이었는데 그만둘 수가 없었다. 웨이트트레이닝하고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혼자 산에 오르면서 이 한 가지만 생각했다. ‘이대로 무너지지 말자.’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렇게 5개월을 보낸 뒤 드디어 포항과 계약하게 됐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 좀 해달라.

이적 시장 마감이 사흘을 앞두고 있었다. 수도권 몇 팀과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다 틀어졌다. 급한 마음에 협회 이회택 부회장님께 전화를 드려 도와주실 수 있는지 묻고 포항의 박창현 코치님께 전화를 했다. “불러만 주신다면 일단 포항에 가서 같이 운동을 좀 해보고 싶다”고 했다. 박창현 코치님도 “일단 알았으니 연락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셨다. 사실 포항 코치진이야 다 아는 분들이었지만 마지막 결정은 파리아스 감독님이 하시는 거였다. 그래서 에이전트가 내 플레이를 담은 DVD를 포항으로 보냈다. 파리아스 감독님이 내 모습을 보고 “나쁘지 않다. 괜찮다”고 하셨단다.

내가 대학생 때 화상 채팅하다가 ‘캠빨’에 속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DVD빨’도 믿었다가는 큰일 난다.

나는 FA였기 때문에 이적시장이 마감돼도 며칠 더 등록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3월 1일에 포항에서 연락이 왔는데 계약이고 뭐고 말도 안 꺼내고 일단 내려오라고 했다. 경기도 안산에 있다가 부랴부랴 짐을 싸서 혼자 포항으로 갔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파리아스 감독님이 “축구화 신고 나오라”고 하셨다. 나는 유럽에서 허비한 시간과 한국에서 무적 신분으로 있던 5달 동안 축구화를 신어본 적이 없었다. 항상 혼자 웨이트트레이닝하고 운동화 신고 러닝머신 위만 달렸는데 축구화 신고 나오라는 말에 막막했다. 그래도 보여줄 건 보여주고 싶었다. 감독님은 내가 공을 얼마나 잘 차는지 보다는 움직임을 보고 싶어했고 그 역할에 충실했다. 연습경기에서 교체로 들어가 40분을 뛰었는데 감독님 표정을 보니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계약하게 된 건가.

그리고 다음날인 3월 3일 고려대학교와의 연습경기에서 2골 2도움을 기록했다. 사실 오랜 시간 공을 차지 못했는데 간절한 마음으로 악착 같이 한 게 파리아스 감독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다. 파리아스 감독님은 물론 처음 나에게 기회를 준 박창현 코치님께도 너무 고맙다. 3월 5일에 계약서를 쓰고 7일에 공식 보도자료가 나갔다.

드디어 빈곤한 주머니 사정에서 벗어나게 된 건가. 첫 입금은 언제였나. 나는 네이트에서 원고료를 입금해주는 매달 말일이 가장 행복하다.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3월 20일에 처음으로 통장에 월급이 들어왔다. 이걸 확인하자마자 바로 아내한테 전화해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여보, 돈 들어왔어. 이거 우리 돈이야.” 스스로 돈을 번 건 정말 오랜 만의 일이었다. 그 동안 돈이 없어서 느꼈던 설움이 교차했다. 포항에서 쓸 용돈을 빼고는 모두 아내에게 보냈다. 이때부터 차곡차곡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듣는 내가 다 행복하다. 그리고 1년 뒤인 2009년 포항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주로 교체로 27경기에 나와 7골 5도움을 기록했다.

기량이 일취월장하고 그런 건 없었다. 내가 그동안 못했던 축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으로 뛰었다. 내가 먹여 살려야 하는 처자식이 있었기 때문에 간절했다. 아마 그동안 벌어 놓은 게 좀 있었다면 무척 나태해졌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내 나이가 서른이었는데 이때까지 모아놓은 돈도 없었고 아무 것도 이뤄놓은 게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축구뿐이고 이걸 할 수 있는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몇 년이 지나면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절실한 마음이 있어서 가능한 플레이였다.

생활도 점차 나아졌나.

처음 포항과 계약하고 돈을 모아 이곳에 원룸을 얻었다. 처갓집에서 살다가 포항으로 내려와 우리 네 식구가 처음 함께 지낼 수 있는 곳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런데 원룸에 살면서 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네 식구가 원룸에 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더라. 그래서 돈을 열심히 모으고 시작했다. 운동 끝나면 곧바로 집에 왔고 가까운 마트 아니면 밖에 나가질 않았다. 그래서 딱 1년 만에 큰 평수의 아파트 전세를 얻었고 2009년도에는 꿈에 그리던 우리 집을 샀다. 참 일이 술술 풀렸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때쯤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온 걸로 알고 있다.

그렇다. 아버지께서 폐암 선고를 받으셨다. 아버지가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는데 가족들이 다 모였다. 포항에서 운동을 마치고 뒤늦게 병원에 갔더니 분위기가 심각하더라. 어머니와 형이 나를 따로 부르더니 아버지께서 폐암 말기라고 하셨다. 길어라 6개월에서 1년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심정은 어땠나.

그냥 담담했다. 처음 겪는 일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어서 실감이 나질 않았다. 폐암 말기 선고를 받았지만 아버지께서 항암 치료도 꾸준히 받으시고 좋은 음식도 많이 드시고 1년이 지나 1년 반 동안 큰 이상 없이 살아계셨다. 그래서 ‘몇 년은 더 사시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하시더니 못 일어나셨다. 그전에는 항암 치료 받고 직접 운전하셔서 집까지 오시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 거동도 못하시게 된 거다. 그때부터 실감이 났다. ‘아, 이게 아닌데. 왜 저렇게 누워계시지.’ 그게 올해 2월말이었다. 시즌 개막을 준비하고 있을 때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드려야 하는 마음의 준비까지 해야 했다.

아버지가 암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당신은 2009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골을 뽑아내며 팀을 아시아 정상으로 이끌었다. 아버지 앞에서 골을 터뜨렸을 때의 심정은 어땠나.

우리 아내도 참 대단한 여자다. 아프신 시아버지 모시고 비행기 타고 일본까지 왔다. 방도 하나 잡아서 옆에서 시아버지를 간호했다. 아직도 그 경기가 기억난다. 언제 그런 큰 경기에서 아들이 골을 넣고 MVP를 타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아버지께 보여드릴 수 있을까. 경기가 끝나고 관중석으로 가 아버지를 껴안고 아무 말 없이 펑펑 울었다. 아픈 아버지께 선물을 드릴 수 있어 너무나 행복했다. 아들이 아시아 최고가 됐다는 사실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는지 모른다.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그런 낙에 의사의 선고보다 더 오래 사신 것 같다.

아버지가 사경을 헤매는 동안 당신은 올 시즌 개막과 동시에 경기에 나서야 했다. 마음이 복잡했을 것 같다.

올 2월부터는 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을 찾아 아버지와 함께 했다. 다음날 경기만 없으면 무조건 부산까지 가 아버지를 뵙고 병원에서 쪽잠을 잤다. 그런데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뭔가 복잡한 마음에 골까지 안 터지니 머릿 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저러고 계셔서 내가 골을 못 넣는 건지, 내가 골을 못 넣어서 아버지가 저러고 계신 건지 너무 복잡했다. 그러다 아버지께서 완전히 의식을 잃으셨는데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느꼈을 때의 심정이야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멋진 골을 넣고 아버지를 위해 골 세리머니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울산과의 경기에서 티셔츠에 아버지를 위한 메시지를 적고 골을 넣었지만 워낙 애매한 상황이라 골 세리머니를 하지 못했다. 5-0으로 수원을 이길 때도 유니폼 속 티셔츠는 준비돼 있었는데 그때는 내가 골을 넣지 못했다. 의식이 없으셔서 내가 이 세리머니를 해도 아버지께서는 보시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시겠지만 내가 아버지께 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었다. 그런데 결국 아버지를 위한 골 세리머니를 보지 못한 채 아버지께서 하늘로 가셨다.

당시 어떤 글귀를 준비했는지 말해줄 수 있나.

‘위대한 당신. 당신은 저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거였다. 아버지 영전에 그 티셔츠를 걸어 놓았다가 납골당에 모신 뒤 아버지 유품과 함께 태워 보내드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가 하늘로 가신 뒤 당신의 골 퍼레이드는 다시 시작됐다.

그때부터 연이어 골이 막 터지는 거다. 그게 너무 안타까웠다. 조금만 일찍 골을 넣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아마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많이 도와주시는 것 같다. 그 뒤로 거짓말처럼 다섯 경기에서 네 골을 넣었다.

무언가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인가.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에 하늘을 보며 아버지께 말씀드린다. ‘좋은 모습 보일 테니까 위에서 지켜봐주세요.’ 경기에 나서면서 이 상황에서 기회가 올 것 같다고 생각하면 실제로 그 상황이 연출되더라.

당신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인가.

위대한 존재다. 아버지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나에게 힘을 주는 존재였다. 또한 아내가 옆에서 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많이 깨우치게 도와줬다. 아버지께 살갑게 대해본 적이 없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아내 덕분에 많이 바뀌었다. 아내가 “왜 어머니께만 먼저 전화 드리고 아버지께는 전화도 안 하느냐”고 나를 혼내기도 많이 했다. 아내를 만난 뒤로는 아버지를 대하는 내 자신이 달라졌다. 아버지께도 감사드리고 그런 아버지를 일깨워준 아내에게도 너무 고맙다.

아내도 정말 훌륭한 사람인 것 같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참 현명한 여자다. 아마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도 더 밝지 못했을 것이다. 전남 소속이던 2004년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 에어로빅 교실에 갔다가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는데 그때는 주위에서 도둑놈이라고 많이 손가락질 했었다. 내가 매일 학교에 모셔다 드리고 ‘햄버거 셔틀’도 하고 그랬다.

이렇게 예쁘고 마음씨도 곱고 심지어 나이까지 어린 아내를 만나다니 정말 도둑놈 맞는 거 같다. 이제 조금 분위기를 바꿔보자. 도대체 그 바가지머리는 왜 하는 건가. 몇 년 동안 당신을 지켜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게 이거였다.

아내의 작품이다. 뭔가 특색 있는 헤어스타일로 나를 어필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어 했던 아내가 고민 끝에 미용실에 나를 데리고 가 이 머리를 만들었다. 내가 잘 생기지도 않았고 별로 개성이 없어 머리라도 개성 있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머리는 마음에 드나.

어휴, 처음에는 얼마나 인상을 썼는지 모른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자연스러워졌다. 아들하고 똑같은 머리를 하고 다니다보니 좋다. 이제는 이 헤어스타일이 나만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어딜 가도 바가지머리만 보면 사람들이 한 번 더 쳐다보고 나를 알아본다, 포항에서는 이 헤어스타일이 좀 먹히는 편이다. 뭐 나쁘지 않다.

오빤 포항 스타일인가보다. 그렇다면 머리에 변화를 주고 싶은 생각은 없나.

은퇴하고 나서는 바꾸겠지만 현역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에는 이 스타일을 유지하고 싶다.

잠깐만 기다려 달라. 전화가 왔다. 차 빼달라는 전화다.

당신네 인턴기자 놀면 뭐하나. 차라도 빼라.

김원일 인턴기자 : 차 키 달라. 내가 차 빼고 오겠다.

인턴기자가 참 어려가지 일을 한다. 서빙하고 발렛 파킹까지 하는 모양이다. 잘 데리고 왔다.

아까는 나한테 밥도 샀다. 이어서 질문하겠다.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에 이름을 잠시 올렸었는데 다시 국가대표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은 없나.

사실 그때 가서 만족스러운 기량을 다 보여주지는 못했다. 기존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았다. 누구나 다 대표팀에 대한 욕심은 있다. 안정환 선배도 36살의 나이에 태극마크를 달고 남아공월드컵에 갔는데 내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니어도 나 역시 당연히 대표팀에 뽑히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지금 내 기량으로 대표팀에 가면 얼마나 잘 할지는 모르겠지만 불러만 준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보여주고 싶다. 이건 나뿐 아니라 여기 (김)원일이도 마찬가지고 그 어떤 선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표팀은 선수라면 누구나 가고 싶은 곳이다.

이때쯤 풀럼 이적설도 터져 나오지 않았나.

대표팀에 가기 전이었던 2010년 초였다. 챔피언스리그가 끝난 뒤 여러 클럽에서 나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때 풀럼에서 설기현을 대신할 한국인 선수를 찾는다고 전해졌다. 계약서상 한국인 마케팅용 선수가 필요하다는 말도 오갔다. 풀럼이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걸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냥 관심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확실하게 나를 영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면 스카우트도 파견하고 계약서도 보냈겠지만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풀럼 말고도 일본과 중동 여러 구단에서 나에게 관심을 가졌던 걸로 알고 있다.

김원일 인턴기자 : 차 빼주고 왔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질문 하나하겠다. 스틸야드는 노병준교 부흥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기에 그렇게 많은 팬들이 당신의 행동에 열광하나.

에이, 노병준교는 무슨. 당신 응원하는 해병대만 하더라도 몇 명인데 그러나.

그래도 당신한테는 안 된다. 당신이 박수를 유도하면 관중이 다 일어나 박수를 친다.

비결이라고 할 건 없고 항상 그라운드에 서면 내가 주인공이고 나를 보러 온 이들을 위해 사소한 거 하나라도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손 한 번 흔들러 주는 거에 관중은 무척 기뻐하더라. 사실 운동선수들은 숫기가 없어 손 흔드는 것 조차 부끄러워하는데 나는 항상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공을 빼앗기면 다시 빼앗으러가고 안 돼도 끝까지 하고 그런 걸 참 좋게 봐주시는 거 같다.

우리 인턴기자도 관중에게 호응 유도하는 게 무척 어색한가.

김원일 인턴기자 : 내가 호응 유도하면 관중석이 조용하다.

그러고 보면 포항에는 유독 경기 도중 관중에게 호응을 유도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나는 이 모습이 참 멋져 보였다.

파리아스 감독 있을 때는 그런 선수들이 꽤 됐다. 나를 비롯해 김형일, 스테보, 데닐손 등은 코너킥을 얻거나 그럴 때면 관중석을 향해 그런 행동을 자주 했다. 그런데 황선홍 감독님이 오시고는 그런 부분이 좀 줄었다. 다른 선수들한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은 못하지만 이렇게 관중과 호흡하는 선수들이 더 늘었으면 좋겠다. 스틸야드는 경기 도중에도 관중의 목소리 하나까지 다 들린다. “병준이형 파이팅”이라는 응원을 듣고 뒤돌아보면서 박수 한 번 쳐주면 그 주변 관중도 다 즐거워하고 더 열정적으로 응원을 보낸다.

당신은 참 안티가 없는 선수인 것 같다.

아니다. 나도 안티가 있다. 나이 먹고 머리 꼴이 그게 뭐냐고 욕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안티는 다 있는 법이니 당신도 힘내라. 인턴기자는 질문 또 없나.

김원일 인턴기자 : 있다. 정말 궁금한 건데 어떻게 하면 선수 생활을 오래 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 오래하는 선수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마흔까지 하고 싶다고 해도 안 되는 게 운동선수다. 여러 변수가 있다. 하지만 부상을 조심하고 기본에 충실하면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 선수 생활을 할 수도 있다. 내가 해야 하는 게 무언지, 내가 무얼 지켜야하는지 항상 생각해야 한다. 사실 나도 (김)기동이 형 보면서 많이 배운 거다.

당신에게 포항은 어떤 의미인가.

내가 구덩이에 빠져 있을 때 나를 건져준 고마운 팀이다. 다른 팀에서는 구덩이에 빠진 나를 한 번 쓱 쳐다보고 지나갔는데 포항은 나를 살려줬다. 너무 고맙다. 항상 경기장에 들어갈 때면 엠블럼에 입을 맞추는데 요새 들어서는 엠블럼에 키스하는 일이 더 잦아졌다.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고 힘든 상황에서 골을 넣다보니 포항에 더 애착이 간다. 포항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대단한 존재인지 한 번 더 느끼게 됐다. 포항이 나를 원한다면 여기에서 은퇴할 때까지 뛰고 싶다. 이제는 나이도 있는데 다른 팀에 돈 더 많이 받고 가면 좋지만 가서 또 적응하려면 시간도 필요하고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너무 많다. 이제는 포항이라는 동네가 익숙해졌고 아무리 좋은 곳에 가더라도 여기보다 좋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 가족들도 여기에 정이 많이 들었다. 다른 구단에서 100억 원을 준다면 잠깐은 생각해보겠지만 아마도 내가 팀을 옮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응원하고 있는 팬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주로 후반 교체 출장이 많아 그라운드 옆에서 경기 도중 몸을 풀고 있으면 근처 관중들이 항상 뜨거운 응원을 보내준다. 경기장에 들어갈 때면 박수도 많이 쳐주신다. 그런 모습이 나한테는 무척이나 큰 힘이 된다. 항상 경기장에 오면 내가 그 분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언제나 변치 않는 응원 보내주셔서 고맙다. 그 마음에 보답하는 노병준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