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62주년이 되는 날이다. 평화로웠던 일요일 새벽을 깨는 총소리는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남겼다. 무고한 사람들이 단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총칼을 겨눠야 했고 죽여야 했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굶주림과 가난 속에 하루 하루를 버텨야 했다. 62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전쟁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6.25 전쟁 발발 62주년이 되는 오늘은 그래서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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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마크를 단 김호(왼쪽)는 김정남(오른쪽)과 함께 최고의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다. (사진=김호 감독 제공)>

태극마크를 단 형제

김호는 1944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남들이 다 가는 대학에 가지 않고도 오로지 실력 하나로 태극 마크를 달게 된 것이었다. 실업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던 제일모직 축구단에 입단한 김호는 병역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해병대에 입대했고 국가에서 전략적으로 키우는 양지 축구단의 일원이 됐다. 당시 양지 축구단은 국가대표 선수들의 집합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한 축구를 이기기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다.

김호에게는 형과 누나가 한 명씩 있었다. 특히 형은 그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뛰어난 운동신경을 자랑하는 그의 형 김경수는 축구선수로도 재능을 보였다. ‘형처럼만 축구를 하자.’ 김호는 어린 시절부터 형을 보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김경수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서도 축구부 주장으로 활약하며 타고난 실력과 외모로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김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자상한 형이었어요. 제가 축구선수로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죠. 투철한 군인 정신을 가지고 있어 관리도 철저하셨고 좋은 영향을 많은 줬어요. 좋은 형입니다.”

1967년 김경수는 베트남 전쟁에 파병됐다. 집안에서는 한사코 만류했지만 형의 의지는 확고했다. “전쟁을 어서 빨리 끝내야 한다. 우리도 6.25 전쟁 때 다른 나라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베트남도 우리의 도움으로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게 형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김경수는 전선으로 떠나 대한민국을 대표해 싸웠고 김호는 축구선수가 돼 태극마크를 달고 대한민국을 대표해 싸웠다. 처한 상황은 달랐지만 두 명의 형제가 모두 나라를 대표하게 된 것이었다. 김경수는 전쟁에 나서 영어는 물론 베트남어까지 능통해 통역과 대민 지원활동을 주로 했다.

형을 만나러 베트남으로 간 동생

김호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1967년 11월 대표팀이 베트남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이 프랑스에서 독립한 기념으로 여는 축구 대회였다. 김호는 베트남에 가면 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 대회를 무척이나 기다렸다. 1967년 10월 베트남에서 휴가를 나온 형이 서울에 있는 양지 축구단을 찾아 김호를 잠시 만났다가 작별했을 때 “한 달 뒤에 다시 만나니 아쉬워하지 말자”고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베트남전에 나간 백마부대 소대장인 형과 국가대표 축구선수이자 해병대에 복무 중인 동생이 전장에서 만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김호는 인기스타였다. 김호는 당시 주월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에 왔으니 잠시 형을 만나고 싶습니다. 잠깐 형에게 휴가를 주실 수 있으신가요?” 채명신 장군도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온 자랑스러운 동생과 전장에서 상봉하는 모습을 채명신 장군도 바라고 있었다. 채명신 장군은 곧바로 백마부대에 연락해 이렇게 말했다. “김경수 중위에게 특별 휴가를 주게. 동생이 멀리 고향에서 날아왔어. 김호 알지? 한국 최고의 수비수 김호가 형을 보러 여기까지 왔네. 어서 김경수 중위를 사이공으로 보내주게.”

하지만 기다려야 했다. 김경수가 작전에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님. 김경수 소대장은 지금 투항한 베트콩 때문에 출동한 상황입니다. 부대에 복귀하면 곧바로 휴가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채명신 장군은 “복귀 즉시 동생을 만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했다. 김호는 형을 당장 만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며칠만 기다리면 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경기에 나서 상대팀을 격파하며 대표팀도 준결승에까지 어렵지 않게 오른 상황이었다. 김호는 그렇게 형을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 전 서울에서 만났지만 훈련 때문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한 터라 할 말이 무척이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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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고등학교 재학 시절 김호(오른쪽)가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던 형 김경수(왼쪽)씨와 함께 찍은 사진. 그에게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형이었다. (사진=김호 감독 제공)

형제, 한 달 전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

대표팀 숙소로 전화가 왔다. 채명신 장군이었다. 그가 수화기 너머로 무슨 말을 전하자 양지팀 박일갑 감독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참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본 박일갑 감독은 김호를 방으로 불렀다. “형님이 조금 다치셨나봐.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채명신 장군께서 빨리 형님을 만날 수 있도록 특별히 조치를 해주셨어.” 박일갑 감독은 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숙소 밖으로 나가니 헬리콥터 한 대가 준비돼 있었다. 김호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헬기까지 올 정도면 형님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김호는 그렇게 전장의 중심이자 야전병원이 있는 나트랑으로 날아갔다.

형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나트랑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 그냥 조금 다친 거겠지. 아니. 많이 다쳐서 불구가 되도 좋으니 살아만 있었으면 좋겠어.’ 이런 생각을 하며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의무장교의 안내를 받고 형의 얼굴을 보러 갔다. 믿을 수 없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베트남에서 보자”며 환하게 웃던 형이 싸늘한 주검이 돼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형은 말이 없었다. 베트콩의 총을 맞은 형은 이미 하늘로 멀리 떠나고 말았다. 김호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까마득해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어요. 그냥 허망했죠.”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다. 부대에서는 김호가 충격을 받을까봐 이미 전사한 그의 형 소식을 전할 수 없어 부상을 입었다고 한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영어와 베트남어를 능통하게 구사해 대민 지원활동을 펼친 형에게 베트콩이 현상금까지 내걸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베트콩의 투항을 설득하다가 저격병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만 것이었다. 김호는 심하게 자책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특별휴가를 부탁했더라면 형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을 텐데….” 김호는 말이 없는 형의 시신을 보며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했다.

한국으로 간 형, 베트남에 남은 동생

곧바로 전사한 형에게 훈장이 추서됐다. 김호가 하늘로 떠난 형 대신 훈장을 받았다. 채명신 장군이 직접 나서 김호에게 훈장을 주고는 말없이 어깨를 두드렸다. 김호는 형을 만나기 위해 태극마크를 달고 베트남에 왔지만 결국 형과는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이렇게 대신 형의 전사통지서와 훈장을 받아야 했다. 양지팀 박일갑 감독은 큰 충격에 빠진 김호에게 이렇게 말했다. “좀 쉬어도 돼. 형의 죽음이 얼마나 슬프겠어. 남은 경기는 잊고 형 시신과 함께 한국으로 먼저 가. 괜찮아.” 하지만 김호는 고개를 저었다. “남은 경기에 다 나서겠습니다. 형님 훈장과 함께 우승컵도 들고 가야죠.”

박일갑 감독은 한사코 말렸다. “안 그래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김호는 단호했다. “제가 할 일은 다해야 합니다. 태극마크를 달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 사명감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아마 사명감을 안고 여기에 온 형님도 제가 대회를 포기하는 건 원치 않을 겁니다. 하겠습니다. 경기하겠습니다.” 형을 만나기 위해 날아온 동생은 베트남에 남았고 형은 싸늘한 주검이 돼 먼저 한국으로 향했다. 한 달 전 약속은 지키지도 못한 채 그렇게 작별해야 했다. “제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일은 남아서 태극마크를 달고 경기에 나서는 것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김호는 당시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준결승에서 개최국 베트남을 만났다. 김호는 경기 전 하늘을 보며 형을 떠올렸다. ‘보고 있죠? 형이 숨 쉬던 이 땅에서 제가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게요.’ 김호는 이날 홈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는 베트남을 상대로 육탄방어를 선보였다. 경기 도중 발목을 심하게 다쳐 의료진이 “더 이상 뛸 수 없다”며 교체를 권유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뛸게요. 끝까지 뛰겠습니다.” 결국 김호는 한국이 베트남을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수비수로서 단 한 골도 허용하지 않고 완벽한 승리를 이끌었다. 거동조차 쉽지 않았지만 이틀 뒤 열린 호주와의 결승전에도 나섰다. 비록 호주에 1-2로 패해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는 못했지만 그의 아름다운 투혼은 빛났다. 대회가 다 끝난 뒤 김호는 형 생각에 그제서야 대성통곡했다.

전쟁, 아프고 슬프다

46년 전의 일이지만 김호는 여전히 형을 잊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형님이 전사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아요. 현충일이나 6월 25일이 되면 지금도 제 마음이 아파요. 저한테는 참 좋은 형이었거든요. 보고 싶네요.” 김호는 6.25 전쟁이 그래서 더 슬프다. “자유를 위해 이 땅에서, 또는 해외까지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운 분들에 대해 한 번쯤은 떠올려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형님처럼 남의 나라에서 6.25 전쟁 중에 목숨을 잃은 분들도 무척 많습니다. 그 분들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형이었고 좋은 아들이었겠죠. 이 나라를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6.25전쟁 62주년, 오늘은 한 번쯤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