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경기였다. 울산현대가, 아니 한국이 지난 9일 벌어진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1차전 카타르와의 부담스러운 원정경기에서 4-1 완승을 거뒀다. 이 경기가 무척 흥미로웠던 이유는 우리 코치진과 선수들의 장점이 절묘하게 뒤섞였기 때문이다. 최강희 감독은 후반 막판 경기에서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도 공격수 지동원을 투입하며 전북 시절 ‘닥공’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이근호와 김신욱, 곽태휘 등 울산 선수들이 모두 골을 기록하며 ‘철퇴’를 휘둘렀다. K리그의 강호 전북과 울산의 장점을 극대화한 ‘닥치고 철퇴’였다.

나는 사실 고전을 예상했었다. 대표팀은 그동안 경기력이 아닌 에닝요의 귀화 문제와 박주영의 대표팀 승선 여부를 놓고 한 동안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경기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귀화 선수를 총동원해 홈에서 승리를 노리는 카타르의 전력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표팀은 이 위기를 슬기롭게 넘겼다. 특히나 이날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한 이근호는 지난 2010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서 펄펄 날고도 정작 본선 엔트리에 합류하지 못한 한이라도 푸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근호는 더 이상 미완의 대기가 아니다. 김신욱 역시 아시아권에서는 당해낼 적수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경기가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중계 문제 때문이다. 지상파 3사가 중계권 문제로 이 경기를 방송하지 않아 종합편성채널을 통해 중계되고 있는 동안 잠시 채널을 돌리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이 경기를 외면한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같은 시간 유로2012 폴란드와 그리스의 경기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자국이 월드컵에 나갈지 못나갈지를 따지는 중요한 경기대신에 남의 나라 잔치가 지상파를 통해 같은 시간에 방송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거 참 잘 돌아가는 꼴이다. 세상에 그 어떤 나라도 이런 황당한 시츄에이션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지난 주말 우리의 안방에서 벌어졌다.

터무니 없이 높은 중계권료를 요구한 중계권 대행업체도 문제지만 그 동안 K리그는 물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까지 찬밥 취급했던 지상파 방송 3사가 단물만 쏙 빼먹으려 드는 꼴도 보기가 불편하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이 주도적으로 치르는 대회에 투자나 관심도 없으면서 월드컵만 싸게 받아 먹으려고하니 중계권 대행업체가 한국 방송사를 곱게 볼 리가 없다. 지상파 방송 3사는 대한축구협회까지 가 기자회견을 열며 중계권 대행업체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심정을 밝혔지만 이건 “엄마, 쟤네가 나 괴롭히니 혼내줘”라고 고자질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혼내주긴 누굴 혼내주나. 가장 먼저 혼나야 할 건 당신들이었다.

평소에 자국리그와 AFC 주관 대회에 많은 관심을 가져 줬더라면 그렇게 기자회견을 열고 시청자들에게 고자질하지 않아도 아마 시청자들이 먼저 중계권 대행업체를 거세게 비난했을 것이다. 중계권 대행업체가 폭리를 취하려는 행동이 못마땅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금껏 축구 중계를 찬밥 취급하다가 이제 와서 “우리는 중계하고 싶은데 쟤네들이 못하게 한다”면서 책임을 떠넘기는 우리네 방송 현실에 더 화가 난다. 참고로 지상파 방송 3사와 이번에 대립한 중계권 대행업체는 K리그 중계권을 구입해 북미 지역에 되팔 정도로 다양한 축구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지금 이 상황이 과연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평가전도 아니고 한국이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경기를 치르고 있는데 이 경기가 종합편성채널로 밀리고 정작 지상파에서는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폴란드와 그리스 경기가 중계됐다. 아무리 유럽 축구에 환장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거 해외 토픽에 나올 기사다. “월드컵 8회 연속 출전을 노리고 있는 한국 지상파 방송에서는 이 경기를 포기하고 같은 시간 유로2012를 생중계했습니다. 아주 황당한 일이네요. 깔깔깔.”

그 어떤 스포츠도 팬들의 관심 없이 좋은 성적을 거둘 수는 없다. 머나먼 카타르에서 상대 선수, 관중, 무더운 날씨와 싸우는 우리 선수들에게는 ‘고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응원하고 있다’는 게 큰 힘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경기를 접근성이 높은 지상파를 통해 지켜보며 응원하지 못했다. 나는 종합편성채널을 통해 중계된 이 경기를 보면서 팬들이 이 경기에 열띤 응원을 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최선을 다해 훌륭한 결과를 이끌어 낸 선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카타르 원정 4-1 완승은 홀대 받는 환경에서는 사치일 뿐이다. 전국민이 함께 싸워도 모자랄 판국에 우리는 딱 11명만 싸웠다.

중계권이 비싸서 안 샀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이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건 중계권 대행사의 횡포를 떠나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책임이 있다. 이번에는 지상파 방송 3사가 포기한 중계를 종합편성채널이 신속하게 편성해 위기를 넘겼지만 앞으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당연히 중계권 대행업체가 현실성이 부족한 많은 금액을 요구하는 것도 잘못됐지만 방송사 역시 자세를 바꿔야 한다. 방송사는 K리그는 시청률이 안 나와서 중계 못하겠다고 하고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은 중계권이 너무 비싸서 중계 못하겠다고 한다. 그러면 싼 값에 시청률 잘 나오는 것만 찾겠다는 이야기인데 이건 거의 도둑놈 심보 아닌가.

지상파 방송 3사에 묻고 싶다. 지금껏 축구를 ‘안 팔리는 스포츠’로 비춘 게 누구인가. 그래놓고 이제 와서 중계권 대행업체의 요구를 들어주기에는 수익이 너무 안 나온다고 투정 부리는 게 누구인가. 그래 놓고 기자회견 열어 여론 무마용으로 화실을 남에게 돌리는 건 누구인가. 왜 우리가 대표팀의 아시아 최종예선이 아니라 같은 시간 남의 나라 경기를 지켜봐야 하는가. 어머니 환갑 잔치에는 안 가고 같은 날 여자친구 생일이라고 친구한테 돈 빌려 강남 가라오케에서 파티해주는 소리하지 말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지난 주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벌어졌다. 아주 잘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