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4일) K리그 감독과 선수들이 경기도 파주에 모였다. 하지만 그들이 모인 곳은 파주에 위치한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가 아닌 파주시 법원읍 해비타트 현장이었다. 해비타트는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집에서 살 수 있도록 집을 만들고 수리하는 봉사활동이다. 개인 사정으로 불참한 상주 박항서 감독을 제외한 15개 구단 감독과 김상식(전북) 등 16개 구단 선수들은 오전에는 집짓기 봉사활동을 했고 오후에는 축구 클리닉을 열었다. 정몽규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와 김정남 부총재도 참여했다.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프로 선수들이 K리그 휴식기를 통해 이렇게 훈훈한 일을 한다는 점이 참 아름답다. 이런 봉사 활동으로 누군가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 보태고 싶은 건 가난을 딛고 우뚝 선 이들의 이야기다. 어제 K리그에서 소외 계층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에 보태 오늘은 가난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축구선수들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소개하려 한다. 가난은 되물림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이들을 통해 굳게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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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4일) K리그 감독과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사랑의 집고치기 행사를 열었다. 그라운드에서는 적이지만 이날 만큼은 한마음으로 봉사활동에 나선 K리그 감독들의 모습. (사진=프로축구연맹)

탄광 사고로 아버지 잃은 설기현

설기현은 1987년 아버지를 잃었다. 강원도 정선에서 광부로 일하던 그의 아버지는 설기현이 여덟살이던 해 불의의 탄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턱없이 부족한 보상금으로 그의 가족은 강원도 강릉에 오두막을 얻었지만 아들만 넷인 집안에서 가난은 피할 수 없었다. 이때쯤 축구를 시작한 설기현은 매달 1만 원의 회비를 낼 수도 없었고 전지훈련비도 낼 수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축구부 학부모들의 모임이 있을 때도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올 수 없었다. 홀어머니가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간 설기현은 한 번 축구를 포기할 위기에 놓였다. 타지 생활이 너무 힘들어 집으로 찾아가 “나 이제는 축구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무작정 아들을 데리고 공사판으로 가 이렇게 말했다. “축구 아니면 몸으로 먹고사는 건 이 일뿐이다. 축구 그만둘 거면 막노동이나 배워라.” 하지만 설기현은 이틀 만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너무 지루하고 춥고 힘든 일보다는 축구가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이 앞선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축구선수로 키우려 이 공사판에서 몇 년째 막노동을 하셨기 때문이었다. 설기현은 다시 축구부로 들어갔다.

설기현의 어머니는 무려 18년 동안 포장마차와 막노동, 과일 좌판 등으로 생계를 책임졌다. 고생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설기현이 벨기에에 진출하자마자 받은 계약금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어머니에게 집을 마련해 드리는 것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주역으로, 또 성공한 유럽 빅리거로, 지금도 여전히 K리그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영웅으로 남아 있는 설기현은 과거의 가난을 통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과거의 설기현은 가난과 싸우며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지금 설기현은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축구스타다.

막노동 하던 축구선수 안정환

안정환의 힘겨운 유년 시절을 이미 칼럼으로 한 번 소개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이 끝나면 한강 둔치에 가 무당들이 한강 주변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굿을 연 뒤 놓고 간 떡과 과일을 먹으며 허기를 채워야 했던 안정환은 이마저도 없을 때면 배추밭에 가서 배추 밑동을 뽑아 먹었다. 안정환의 외할머니는 “배불리 먹지 못해 또래에 비해 체구가 유난히 작던 (안)정환이의 모습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이모 집에 얹혀 살며 초등학교 시절 학교까지 무려 두 시간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가야했던 그는 몰래 학교 창고에 가 잠을 청하는 외로운 소년이었다.

청소년 대표팀에 합류한 뒤 처음 먹어본 오렌지를 아끼고 아껴 집까지 가져와 외할머니에게 선물하기도 했던 안정환은 운동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합숙을 하면서도 시간이 나면 돈을 벌기 위해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하철 5호선 목동역도 직접 그의 손으로 지었다. 학창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신길동 나이트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갈고 닦은 과일 깎는 솜씨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 곱상한 외모지만 안정환은 막노동부터 웨이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봤다. 이렇게 배고픈 시절을 보낸 안정환은 한국 축구사에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장면을 연출하며 전설이 됐다.

설기현과 안정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누구보다 힘든 유년 시기를 보냈지만 낙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 힘든 시기를 당당하게 넘겼다는 점이다. 만약 이들이 가난을 핑계로 중간에 축구를 포기했더라면 우리는 수많은 명승부의 감동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웃으며 어릴 적 가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이들이 이 시기를 멋지게 극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설기현과 안정환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축구선수들도 부유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딛고 정상에 우뚝 섰다. 오히려 가난했기 때문에 더 간절히 축구에 매진했을지도 모른다.

짝 안 맞는 축구화, 구멍 난 스타킹

송종국도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던 중학교 때 집안에서는 축구부 회비 6만 원이 없어 송종국이 축구하는 걸 반대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다른 친구들이 버린 축구화를 신고 그라운드에 섰다. 짝도 맞지 않는 축구화를 신고 있었지만 송종국은 오로지 축구만 생각했다. 혼자 단칸방 골목에 고무줄을 걸어놓고 발목을 강화하는 훈련을 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축구를 해서 성공하면 맛있는 걸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슈퍼마켓 주인이 되는 게 꿈이었던 송종국은 최고의 자리에 올라 슈퍼마켓이 아니라 대형마트를 차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었다.

이천수 역시 가난과 싸웠다. 회사에서 노조활동을 하다가 아버지가 해고되면서 집안은 더욱 기울었고 아버지는 아들이 계속 축구를 할 수 있도록 부평고등학교 선수단 버스를 직접 운전해야 했다. 7년 동안 빚쟁이에 쫓겨 힘든 시기를 보내던 어린 이천수는 친구들이 신고 버린 구멍 난 스타킹을 몰래 가져와 꿰매 신어야 할 정도였다. 축구화가 닳을까봐 비닐로 축구화를 감싸고 경기에 나선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당당했고 오로지 실력으로 우뚝 섰다. 비록 지금은 임의탈퇴 신분으로 K리그 무대에 설 수 없지만 팬들의 가장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선수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이영표는 아직도 햄을 못 먹는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귀한 음식인 햄을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기를 제대로 먹어본 것도 고등학교 때가 처음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당시 다른 선수들의 부모님이 경기장을 직접 찾아 응원할 때도 그의 부모님은 경기장에 오지 않았다. 이영표의 부모님은 오랜 막노동으로 몸이 불편해 직접 경기장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햄도 못 먹어보고 자란 이영표지만 지금 그는 성실하고 영리한 플레이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햄 공장을 차리고도 남을 만큼 성공한 축구선수가 됐다.

풍족하지 못해 좌절하는 이들에게

축구는 감동의 스포츠다. 승부 자체에도 감동이 있지만 이렇게 역경을 딛고 정상에 우뚝 선 이들 자체로도 충분한 감동을 준다. 나는 언제나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달하는 축구가 그래서 좋다. 또한 축구를 통해 누군가가 평생 고생만 한 어머니께 집을 마련해드리고 행복을 선물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감사하다. 축구를 통해 힘든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많은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비단 축구팬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훌륭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집짓기 봉사활동을 통해 희망을 선물한 K리그 선수들과 감독들, 그리고 오늘 내가 소개한 이 사례를 통해 풍족하지 못한 현실에 좌절하는 이들이 조금이나마 힘을 냈으면 좋겠다. 꼭 축구로 가난을 극복하고 성공하라는 게 아니다. 가난이 부끄러운 게 아니고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 만이라도 오늘 칼럼을 통해 전달됐으면 그걸로 된다. 나도 이번 달 카드 값 밀렸는데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이렇게 당당하게 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