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뛰고 있는 한국 축구선수는 세 명이다. 구자철과 손흥민,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일까. 아마 고개를 갸우뚱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머지 한 명은 바로 윤주태다. 독일 2부리그 FSV프랑크푸르트에서 이적 첫 시즌을 소화한 윤주태는 국내 팬들에게는 구자철과 손흥민만큼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선수다. 유럽 생활 1년을 마무리하고 잠시 귀국한 윤주태를 직접 만나 시즌 정리와 함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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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 윤주태는 지난 1년 간의 독일 무대 도전기를 진솔하게 들려줬다.

반갑다. 잘 생겼다.

나도 반갑다. 잘 생겼다고 하니 쑥스럽다.

독일에서 시즌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나.

친형이 독일에 건너와 내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었다. 시즌이 끝난 뒤 형과 사흘 동안 독일에서 짧은 여행을 하고 귀국했다. 풀더라는 곳과 로렐라이를 다녀왔는데 특히 로렐라이는 여자와 가면 좋겠다고 느꼈다. 딱 데이트하기 좋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형과 함께 가서 사실 아쉬움이 조금 남았다. 한국에 와서는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 가족과 일주일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어머니가 해주신 된장찌개과 수제비를 원 없이 먹었다. 지금은 서울로 올라와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몸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아니, 이제 시즌이 끝난 지 막 2주가 됐는데 벌써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 나 같으면 디아블로3도 하고 나이트클럽도 가서 좀 놀겠다.

독일에서는 비시즌 동안 숙제 비슷한 걸 내준다. 피지컬 트레이너가 비시즌 동안 해야 할 프로그램을 짜주는데 이걸 소화해야 한다. 1년 동안 독일에서 뛰면서 체격을 더 키워야겠다고 생각해 웨이트트레이닝도 병행하고 있다.

안 해도 별로 티 나지 않는 숙제는 안 해놓고 했다고 우기면 그만이다.

팀 동료가 그러는데 그 숙제를 하지 않으면 내년 시즌 경기에 나서는데 지장도 있고 벌금도 문다고 한다. 그리고 시계와 GPS를 차고 프로그램을 소화해야 한다. 몇 킬로미터를 뛰었는데 심박수는 어떤지 모든 게 다 저장된다. 그래서 안 해놓고 했다고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독일 사람들 참 야박하다.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서 기계까지 채워주나.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자. 당신은 다른 유럽파와는 다르게 그리 국내 축구팬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소개 좀 해 달라.

독일 분데스리가 2부리그 FSV프랑크푸르트에서 뛰고 있는 윤주태다.

울산 학성고등학교 시절 ‘쩔었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무려 고교 시절 5번이나 득점왕에 올랐다고 알고 있다.

사실 득점왕에 오른 건 세 번인데 언론 보도를 보니 다섯 번이라고 잘못 알려졌더라.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공격형 미드필더가 아니라 그냥 중앙 미드필더였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감독님이 바뀌면서 포지션에도 변화가 있었다. K리그 심판으로 잘 알려진 최명용 주심이 우리 팀 코치였다가 감독님이 됐는데 나를 공격수로 배치시켰다. 4-4-2 포메이션에서 원톱이던 (조)영철이형 바로 밑 세도우 스트라이커였다. 바뀐 포지션으로 첫 대회에서 득점왕에 올랐는데 골은 내가 많이 넣었지만 결국 결승전에서 딱 한 골 넣은 영철이형이 더 주목받았다. 그리고 3학년 때 두 번 더 득점왕에 올랐었다.

아무나 그렇게 포지션을 바꾼다고 단숨에 득점왕에 오를 수는 없는 일이다.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이 있었나.

최명용 감독님께서 “너는 기술은 좋은데 몸이 약하다”고 하셨다. 사실 고등학교 1학년 때만 하더라도 뼈 밖에 없었다. 그런데 1학년을 마치고 동계훈련 전에 부상을 당해 혼자 재활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자비로 원룸을 얻어놓고 생활하면서 다시 하라면 못할 정도로 독하게 재활센터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밥도 토할 때까지 먹었다. 그렇게 석 달 동안 10킬로그램을 찌웠는데 살이 아니라 근육량이 그만큼 늘은 것이었다. 그리고 첫 대회에서 바로 득점왕에 올랐다. 그때 절실하고 중요한 게 무언지 느꼈다.

나도 살 찌우는 건 자신 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친 이듬해 겨울 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사실 감독님은 서울 올라간다고 하면 제자들이 허튼 짓 할까봐 잘 안 보내주시는데 이미 한 차례 내가 힘을 키워서 좋은 활약을 하는 걸 보고 믿어주셨다. 그냥 보내주신 것도 아니고 후배 두 명도 데리고 가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후배들 데리고 그 겨울 동안 또 10킬로그램을 불렸고 후배들도 나를 따라하더니 몸이 훨씬 좋아졌다. 그리고 첫 대회와 두 번째 대회에서 또 득점왕에 올랐다. 다음 년도에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또 한 번 서울로 올라가 10킬로그램을 찌우면서 몸을 만들었다. 3년 동안 매년 10킬로그램씩을 불린 것이다. 내가 얼마나 그 재활 센터에 단골이 됐냐면 세 번째 갈 때는 공짜로 해주시더라.

독하다. 30킬로그램이나 불렸다는 건 정말 독한 거다. ‘뼈정우’도 당신과 함께라면 근육맨이 될 수 있나.

대학교 때도 선배들이 ‘웨이트트레이닝 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몸 만드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힘을 키워서 좋은 성적을 냈던 걸 직접 느끼니 중독까지 오더라. 경기에 나선 뒤 힘이 조금이라도 빠진 것처럼 느껴지면 곧바로 웨이트트레이닝장에 가 쇳덩이를 들고 하체 운동했다. 몸에 너무 민감해 근육 빠질까봐 친구들이 팔뚝 만지는 것도 못하게 할 정도였다.

나 같은 사람은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치킨 먹고 곧바로 누워서 텔레비전 보는 게 이 세상 최고의 행복이다. 당신 같은 근육남은 인정머리 없어 보인다.

당신 보니 딱 그래 보인다. 사실 독일에서 시즌 끝나고 오랜 만에 한국에 와 만날 친구들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일단은 내 할 일은 다 해놓아야 한다. 1년 농사는 시즌 들어가기 전에 판가름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즌 전에 완벽히 몸을 만들어 놓고 싶다. 그나마 부산에서 가족과 일주일 보낸 것도 많은 시간을 보낸 거다. 원래는 바로 서울에 와 운동을 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무대를 그렇게 평정했는데 조금 더 일찍 프로 무대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

사실 고등학교 3학년이 끝날 때쯤 한 번 제의가 있었다. 이미 연세대학교에 가기로 결정이 난 상황이었는데 서울에서 몸을 만들고 있을 때 최명용 감독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독일의 한 프로팀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연세대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커다란 도전이었는데 유럽 팀에서 제의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은 걸 떠나 멍한 느낌이었다. 감독님께서 “이 제안을 어떻게 하고 싶냐”고 하셨다. 나는 원래 무슨 일이건 나 혼자 결정하는 스타일이지만 그때 만큼은 내가 존경하는 감독님 뜻에 따르고 싶었다. 감독님께서는 “유럽에 일찍 가는 것도 좋지만 네가 앞으로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선수 생활을 위해서도 대학 무대에서 조금 더 경험을 쌓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셨다. 그래서 그 뜻에 따랐다.

그게 독일 어느 팀이었는지는 말해줄 수 있나.

나도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지만 감독님께서는 FC쾰른이라고 하셨다. 쾰른에서 일본 에이전트를 통해 감독님께 제의를 했다고 들었다. 사실 대학교에 가서도 ‘그때 독일에 가걸 그랬나’하는 생각을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대학 생활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대학교에 간 뒤 부상도 당하고 많이 부진했었다. 원톱으로 나서본 적이 없었는데 대학교에서는 원톱에 기용되면서 무언가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2학년 때 남준재 선배가 졸업하면서 10번을 물려받았는데 이게 엄청난 부담이었다. 중학교 때도 10번을 달아본 적이 있었고 그때는 10번이라는 번호에 대한 부담이 없었지만 연세대 10번은 부담감이 상당했다. 선배한테 “나 10번 반납하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마음 잡고 열심히 하려고 하면 부상도 찾아오는 등 잘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힘든 시기가 지금 돌이켜보면 많은 도움이 된다. 부상을 당해도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그때 많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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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태는 유럽으로 날아가 테스트를 거친 뒤 독일 FSV프랑프푸르트 입단을 확정지었다. (사진=FSV프랑프푸르트)

그러다가 당신은 결국 나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연세대를 자퇴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자세히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처음에는 벨기에로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설기현 선배님이 뛰었던 앤트워프와 당시 1부리그 3위였던 겡크였다. 두 구단 다 반응이 좋아서 난 거기에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에이전트 측에서 독일에도 한 번 문을 두드려보자고 했다. 벨기에보다는 독일 축구 수준이 그래도 더 높지 않나. 그렇게 FSV프랑크푸르트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갔는데 사실 거기에서는 내 실력을 많이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 일주일 테스트가 끝난 뒤 감독님께서 날 부르시더니 “계약하자”고 하시더라.

무언가 당신이 구단에 어필한 게 있지 않을까.

테스트를 받으러 갔을 때 감독님께서 가장 먼저 물어본 게 “어느 발을 주로 쓰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양 발 가리지 않고 쓰는 편이라 “둘 다 쓴다”고 했다. 감독님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웃으시더라. 아마 그 모습을 인상적으로 본 것 같다. 당차보였던 모양이다.

유럽파가 된 순간 기분은 어땠나.

벨기에에서 테스트를 받으면서 두 달이라는 시간을 보내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계약을 했다는 사실이 후련했고 비록 2부리그지만 독일이 1부리그와 2부리그의 실력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독일은 관중 역시 1부리그와 2부리그가 그리 큰 차이가 나질 않는다. 우리 홈 구장은 다른 팀에 비해서는 아담한 편이지만 2만 명이 매 경기 꽉 들어찬다. 독일은 축구를 즐기는 문화가 잘 정착돼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는 가족 전체가 홈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으로 응원하러 오는 게 일상이다. 이런 열정적인 곳에서 뛰게 돼 기분이 좋았다.

많은 이들은 당신이 뛰고 있는 FSV프랑크푸르트와 차범근 감독이 뛰던 SG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혼동한다.

나도 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 두 팀은 완전히 다른 팀이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트푸르트는 젊은 팬들이 무척 많고 사실 우리 팀보다는 관중이 더 몰린다. 4만 관중석이 매번 꽉 찬다. 신성처럼 확 떠오른 팀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우리 팀은 팬들의 연령대가 무척 높다. 창단한지 100년이 넘은 팀인데 4부리그에서부터 꾸준히 올라왔다. 예전에 이 팀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분들이 여전히 열정적으로 응원을 해주신다. 이 팀이 못하고 저 팀이 잘한다고 응원하는 팀을 옮기고 그런 게 없다. 옛날부터 똑같은 마음으로 응원해 주는 팬들이 많은 팀이라 더 우리 팀에 정이 간다.

아직도 독일에서는 차범근 감독의 파워가 대단한가. 비록 다른 팀이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한국인으로서 느낀 게 있을 것 같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 아직도 팬들에게는 박지성과 구자철, 손흥민보다는 ‘차붐’이 먼저다. 나이 지긋한 팬들은 “차붐이 최고였다”고 하고 독일에서도 인터뷰를 할 때면 항상 차범근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묻는다. 내가 독일에 있는 한 항상 그 분은 내 이름 앞에 따라다닐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잘 뛰어다녔다고 하시더라. 우리 팀 수석코치가 차범근 감독님과 같은 팀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면서 차범근 감독님에 대한 이야기를 무척 많이 해줬다. 아직도 독일에 오시면 백원 한 장 가져오지 않아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

함께 독일에서 뛰고 있는 구자철, 손흥민과는 서로 친하게 지내나.

손흥민과는 아직까지 교류가 없지만 (구)자철이형과는 연락하면서 지낸다. 독일에서는 모든 팀이 다 모이는 건 아니지만 1,2부리그 팀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 풋살 대회를 하는데 자철이형이 볼프스부르크에 있을 때 그 팀도 온다고 들었다. 풋살 대회에 나가 자철이형이 왔는지 살피고 있었는데 형이 먼저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건네주더라. 사실 독일에 오기 전까지는 자철이형과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그런데 먼저 형이 인사하더니 “연락하면서 지내자”고 해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경기가 겹쳐 자주는 보지 못하지만 얼마 전 자철이형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까지 와 내가 기사 노릇을 좀 해줬고 한 달 뒤에는 반대로 내가 기차를 타고 자철이형네 집까지 놀러가 자고 왔다. 형의 경기 전날이었는데도 맛있는 것도 사주고 이야기도 많이 했다. 외국에서 좋은 형을 만나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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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SV프랑프푸르트는 비록 2부리그 팀이지만 지역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이들은 윤주태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고 있다. (사진=FSV프랑프푸르트)

시즌 개막 후 처음 두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다. 초조한 마음도 있었을 것 같다.

처음 입단했을 때만 하더라도 아직은 경험이 부족해 경기에 나서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반응이었다. 감독이 나를 뽑았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나를 써야하는 건 아니다. 못하면 버려지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그 돈 많은 유럽 구단에서 나 하나 돈 들인 게 뭘 아깝다고 실력도 없는데 쓰겠나. 그런데 감독님께서 나를 안고 가 주셨다. 내가 선발로 나설 것이라는 보도가 나간 뒤 공식 인터뷰에서 감독님이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윤(YOON)이 뛰는 건 무리 아닌가.” 하지만 감독님은 “좋은 모습을 보였는데도 출전 기회를 주지 못했다. 이제 경기에 내보내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반박하셨다. 감독님의 믿음 덕분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즌 개막 후 두 경기에 결장한 다음 곧바로 두 경기 연속으로 선발 출장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이 중요한 시기에 무려 3개월을 쉬어야 했다. 안 풀려도 이렇게 안 풀릴 수가 있나.

경기 도중 충돌해 생긴 부상이 아니라 독일에 가기 전부터 대학교에서 뛸 때 문제가 있던 부위였다. 오른쪽 발목인데 대학교에서 치료를 꾸준히 해 독일에 갈 때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리시즌 때만 하더라도 괜찮아 시즌이 개막한 뒤에도 자신 있었다. 그런데 두 경기에 선발로 나선 뒤 가장 기대하고 있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지역 더비전을 사흘 앞두고 있을 때였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양반 다리를 하다가 뭔가 뼈가 엇갈리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었는데 원래는 금방 통증이 가라앉지만 그날따라 유독 통증이 심했다. 다음날 참고 운동을 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뛸 수가 없어서 구단에 이야기하고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발목 부위에 뼈 조각이 두 개나 있다고 하더라.

저런, 텔레비전보다가 부상 당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냥 안 좋은 줄로만 알았지만 뼈 조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 검사 결과가 나온 순간 무척 허무했다. 시즌 개막할 때 더비전 출전을 목표로 정했었는데 뛸 수가 없게 됐다. 의사 말로는 수술을 해야 하지만 참고 갈 수 있으면 치료로 어느 정도 버티다가 전반기가 끝난 뒤 수술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선택은 내 몫이었다. 욕심 같아서는 참고 버틸 수 있었지만 나는 나이도 어리고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당장 수술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곧바로 수술 날짜를 잡고 더비전을 관중석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의 욕심으로 무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척 현명한 판단을 한 것 같다. 수술은 잘 됐나.

독일에서 워낙 유명한 분께 수술을 받았고 무척 유명한 재활 센터에서 복귀를 준비했다. 재활 센터에 처음 갔더니 이동국 선배님 유니폼이 걸려있고 차범근 감독님과 차두리 선배님 사진도 있었다. 그 분들도 다 여기를 거쳐간 것 같아 믿을 만했는데 알고 보니 여기가 세계 5대 재활 센터라고 하더라. 수술을 하고는 조금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차라리 이렇게 수술과 재활 시설이 좋은 독일에서 부상을 당한 게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그런 ‘정신 승리’좋다.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온다. 타지에서 아프면 참 서러울 텐데 그걸 어떻게 견뎠나.

수술을 하고 병실에 누워 밤 8시쯤 일찍 잠 든 적이 있었다. 그런데 불 꺼진 병실에 누군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프랑크푸르트에 계신 한인분들이 추석이라면서 송편을 비롯한 한국 음식을 잔뜩 싸들고 오신 것이었다. 이 이상한 독일 병원은 환자한테 아침, 저녁으로 빵을 주고 점심에는 소시지를 줘 쪽쪽 말라가고 있었는데 한인분들이 너무 고마웠다.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으로 치킨이나 먹을거리를 잔뜩 챙겨 오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독일에 진출한 뒤 한인분들에게 한 번 인사드리러 간 게 전부였는데 같은 한국 사람이라고 이렇게 잘 챙겨주셔서 무척 감동이었다. 너무나 고마운 분들이 많다.

환자에게 빵을 주는 독일 병원은 별로지만 역시 한국인의 정은 참 대단하다. 그런데 3개월 재활에 매달리는 동안 팀 성적이 좋지 않았다. 지켜보는 심정은 어땠나.

전반기에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감독님이 경질됐다. 나를 직접 뽑았고 너무나 잘 챙겨주시던 분이었는데 경질 소식을 듣고 눈물이 났다. 16위는 3부리그와 승강을 놓고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17위와 18위는 곧바로 강등되는 시스템인데 우리팀은 전반기가 끝날 때 17위에 머물러 있었다.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부상에서 회복한 뒤 새로운 감독 밑에서 또 다시 주전으로 도약했다. 팬들도 많이 생겼다고 들었다.

한 번은 선발 명단에 포함되지 않아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경기 도중에 벤치를 두드리는 것이었다. 돌아보니 한 독일 꼬마팬이 태극기를 건네며 거기에 사인을 해달라고 하더라. 시간이 갈수록 팬들이 나를 조금씩 인정해 주는 느낌을 받았다. 또 한 번은 후반에 교체 투입돼 우리가 계속 공격을 하다가 처음으로 우리 골키퍼가 공을 잡아 딱 뒤를 돌아보는데 울컥했다. 팬들이 내가 투입됐다고 관중석에 초대형 태극기를 펼친 것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이제 어느 정도 팬들이 당신을 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시즌이 끝난 뒤 팬들과의 만남 시간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현지에 내 개인 팬클럽이 생겼더라. 항상 경기장 한 켠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응원하니 앞으로는 자기들을 꼭 지켜봐 달라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외국에 있으면서 태극기를 보니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다. 처음에 독일에 갔을 때는 워낙 카가와 신지가 유명해 꼬마 애들이 나에게 “카가와”라고 불렀지만 이제는 나를 “윤”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무척 많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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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태가 올 시즌 데뷔골을 넣은 뒤 기쁨을 나누는 모습. (사진=FSV프랑프푸르트)

특히 올 시즌 백미는 당신이 시즌 막판 한자 로스토크와의 경기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했을 때다. 정말 깜짝 놀랄만한 대활약이었다. 당시 느낌이 어땠나.

그 경기에서도 전반 초반에 골대를 맞췄다. ‘이번 시즌은 그냥 경기에 뛰는 걸로 만족하자. 골은 정말 안 들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마음을 비우고 후반전에 들어갔는데 항상 내가 선발로 나서면 교체돼 나갈 때쯤 첫 골이 나왔지만 이날은 우리 팀이 먼저 한 골을 넣었는데도 나를 빼지 않았다. 올 시즌 처음으로 풀타임을 소화한 날이었다. 데뷔골을 넣는 순간에는 사실 약간 빗맞은 느낌이었는데 골문으로 공이 쭉 빨려 들어갔다. 골을 넣고 나 때문에 고생한 부모님과 친형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머니는 내가 경기에 나서기 전날에는 산에 있는 절에 가 기도를 하시고 인터넷으로 새벽에도 중계를 다 챙겨보신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이날 내가 골을 넣고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엉엉 우셨단다. 가족이 가장 먼저 떠올라 첫 골을 넣고 결국 약속한 세리머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원래 어떤 세리머니를 하려고 했나.

경기를 앞두고 나와 친한 구단 마사지사가 나를 마사지 해주면서 “오늘은 네가 골을 넣을 것 같다”고 했다. 나이는 나보다 한참 많지만 항상 나와 밥을 같이 먹는 친구다. 그래서 내가 “오늘 세 골 넣겠다. 골 넣으면 너한테 달려가겠다”고 장난을 쳤다. 정말로 첫 골을 넣고 정신이 없어 가족 생각만 하고 동료들과 기쁨을 나눈 뒤 하프라인으로 달려가면서 벤치를 슬쩍 보니 그 마사지사가 보이더라. 내가 자기한테 올 줄 알고 그라운드 앞까지 나와 있었는데 그때야 아차 싶었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골 더 넣은 건가.

그럴 수도 있다. 두 번째 골을 기록한 뒤 동료들이 나한테 안기려고 했는데 내가 “오지 말라”고 하고 곧장 벤치로 달려갔다. 코치님이 나와 하이파이브를 하려고 그라운드 앞까지 나와 있어서 순간적으로 ‘코치님한테 안겨야하나’라고 고민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라 코치님하고는 대충 하이파이브만 하고 모른 척하면서 마사지사한테 가 안겼다. 그 친구가 너무 좋아하더라. 팀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는데 누가 자기를 위해 세리머니를 해준 적은 없다고 했다. 그 친구가 감격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뿌듯했다.

앞으로 골을 많이 넣어서 코치한테도 안기고 감독한테도 안기고 상대팀 골키퍼한테도 안기면 된다.

사실 이전 감독님이 계속 있었으면 골을 넣고 큰절을 한 번 하려고 했다. 그런데 경질이 돼 그러질 못했다. 독일 언론사에서도 골 넣고 인터뷰를 할 때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유난히 윤(YOON)은 전 감독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는 질문을 받았다. 나를 처음 발탁한 것도 그분이고 시즌 초반 많은 이들이 나를 못미더워할 때 신뢰를 보내준 것도 그분이다. 독일 언론을 통해 독일어가 조금 되면 한 번 그분을 찾아가겠다고 대답했다.

유독 그 감독에 대한 애정이 대단한 것 같다. 그 감독 이름이 뭔가.

한스 유르겐 보이젠이다. 시즌이 끝나고 팀 동료가 전부 모여 파티를 했는데 골키퍼가 술에 취해 나에게 말을 걸더라. 그 친구도 전 감독을 무척 그리워하고 연락도 자주 하는 편이었다. 나를 보더니 “감독과 지난 주에 통화를 했는데 네 이야기를 많이 했다. 감독도 그 기사를 읽었다고 하더라”면서 “감독은 네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비록 이번 시즌 성적이 좋지 않아 경질됐지만 우리 팀을 많이 발전시킨 감독이다. 기사를 통해 내 마음이 전달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내 인터뷰 기사 제목이 “윤(YOON)은 아직도 보이젠을 잊지 못한다. 그가 떠날 때 눈물을 흘렸다”였다. 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럴 것 같다. 그러면 지금 감독은 뭐가 되나. 당신 참 사회생활 못한다. 무조건 지금 감독이 최고라고 해야 하지 않나.

사실 인터뷰할 때 지금 감독님에 대해서도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기사 제목 때문에 조금 민망했다.

지금 감독 이름은 뭔가.

아…. 그, 뭐지. 갑자기 물어보니 기억이 안 난다. 뭐였더라.

그것 보라. 지금 감독 이름 모르지 않나. 지금 감독 칭찬도 좀 해 달라. 이름도 모르는 그 분 말이다.

지금 감독도 대단하다. 사실 성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감독 한 명 바뀐다고 뭐가 얼마나 달라질까 했는데 정말 많이 달라졌다. 17위였던 우리가 13위로 시즌을 마감할 수 있었던 건 지금 감독의 역할이 컸다. 우리가 강등 위기에 몰렸는데도 모든 선수를 동일하게 대우했다. 예전 U-17 청소년월드컵에서 나이지리아 대표팀에 발탁돼 골까지 넣었던 크리스 산토스라는 선수가 우리팀에 있는데 그 친구는 무조건 붙박이였다. 그런데 새로 온 감독은 이 친구도 벤치에 앉힐 정도로 과감했고 전술도 팀 특징에 맞게 싹 바꿨다. 훌륭한 지도자다.

당신이 그 감독 이름만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더 이 이야기가 진솔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골을 넣을 때 손흥민도 골을 뽑아내 결국 당신의 활약이 묻히고 말았다.

내가 먼저 넣고 손흥민이 그 다음 날 골을 넣었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손흥민에 이어 윤주태도 골을 넣었다’고 하더라. 신경을 쓰지는 않는데 손흥민이 워낙 한국에서 알려진 선수여서 자극을 받은 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영철이형에게 자극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1부리그에 갈 때까지 더 열심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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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으로 올 시즌 아쉬움 속에 절반의 성공에 머문 윤주태의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사진=FSV프랑프푸르트)

그런데 당신은 올림픽 대표팀에 뽑힐 수 있는 나이다.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욕심은 없나.

누구나 그런 욕심이 있지 않을까. 독일에 오면서 내심 활약을 하면 올림픽 대표팀에 갈 수 있다는 기대와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U-13세 대표 이후로는 한 번도 대표팀에 뽑히질 못했다. 고등학교 때 기회가 있었는데 부상을 당해 대표팀에 가지 못한 적도 있다. 그리고 홍명보 감독님이 청소년 대표와 올림픽 대표를 맡은 뒤에 한 번도 발탁된 적이 없어 이제 곧 올림픽인데 내가 이름을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올림픽 대표에 욕심을 낸 건 그 무대에 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홍명보 감독님 밑에서 한 번 훈련을 받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더 크기 때문이다. 감독님의 훈련 방법은 어떤지, 대표팀 훈련은 뭐가 다른지 느껴보고 싶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한 번 그 분 밑에서 배워볼 날을 기대하고 있다.

보이젠 감독 칭찬하는 것만큼 홍명보 감독한테도 어필 한 번 하라.

구단에서 홈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매치데이 매거진을 만든다. 한 번은 ‘윤주태가 꼽는 베스트11’을 선정해 달라고 해 생각 같아서는 한국 선수로 베스트11을 다 채우고 싶었지만 자제하고 수비진에 홍명보 감독님 이름을 적었다. 그랬더니 구단주와 단장이 나를 찾아와 발음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 사람이 누구냐”고 하더라. 내가 “한국에서 정말 유명한 수비수였고 지금은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다. 존경하는 분”이라고 하니 딱 하나 묻더라. “베켄바우어보다 유명해?” 그래서 “그렇다”고 했다. 구단 사람들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나는 홍명보 감독님을 전세계 베스트11에 뽑은 사람이다. 참고해 주셨으면 한다.

아마 참고가 될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이다. 앞으로 다가올 시즌에 대한 목표가 있다면.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뭔가 보여줘야 할 때다. 첫 시즌에는 7골을 목표로 했는데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면서 2골 2도움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훈련이 끝나고 혼자 남아 슈팅 연습을 하면 코치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훈련을 너무 많이 한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개인 훈련을 할 때면 코치님도 남아 나를 따로 지도해 주신다. 다가올 시즌에는 더 많은 골을 넣고 싶다. 구체적으로는 꼭 두 자리 수 득점을 채우고 싶다.

윤주태는 무척 성실하다. 휴가를 즐겨도 될 법한 이 시기에 벌써부터 다음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은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구자철과 손흥민만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적어도 땀이 배신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윤주태도 더 많은 팬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 더 큰 무대에서 멋진 활약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명의 ‘유럽파’ 윤주태의 멋진 도전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