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명이 넘게 들어찬 관중석에서 함성을 내지른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은 관중의 함성 소리에 더욱 전투적으로 경기에 임한다. 이들을 화려한 경기장 조명이 비춘다. ‘축구 수도’를 자부하는 수원의 홈 경기일까? 아니면 1천만이 넘는 인구를 보유한 서울의 경기일까. 아니다. 놀랍겠지만 내셔널리그 충주 험멜의 지난 주 홈 경기였다. 충주 험멜과 울산 현대미포조선의 ‘신한은행 2012 내셔널리그’ 10라운드가 열린 충주종합운동장에는 1만 4,900명이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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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멜 축구단은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충주에 정착했다. (사진=충주시)

10년 동안 연고지 네 번 옮긴 축구단

충주 험멜은 사실 연고지에 정착하지 못하던 떠돌이 구단이었다. 1999년 창단한 험멜은 K2리그가 출범한 2003년 경기도 의정부시를 연고로 정했다. 서울시 노원구에 위치한 험멜 본사와 가까운 곳을 찾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험멜과 의정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던 험멜과 의정부는 결국 3년 만에 결별했고 헐멜은 2006년 새로운 연고지를 찾아 떠났다. 그렇게 이들은 경기도 이천시에서 ‘이천 험멜’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이천에서도 정착하지 못한 험멜은 결국 2008년 서울시 노원구로 연고지를 다시 옳겼다.

노원구도 험멜의 연고지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내셔널리그 측에서 갈 곳 없는 험멜의 딱한 사정 때문에 잠시 노원구에 머무는 걸 허락했지만 규정상 노원구는 내셔널리그 경기를 치를 수 없는 곳이었다. 내셔널리그는 천연 잔디 구장에서 열려야 하지만 험멜의 홈 경기장인 노원 마들 스타디움은 인조 잔디는 물론 좌석수도 턱없이 부족했다. 냉정히 말해 생활 체육팀이 사용하기에 적합한 경기장에서 내셔널리그가 치러지는 셈이었다. 결국 ‘노원 험멜’은 2년 뒤 다시 새로운 연고지를 찾아 떠나야 했다. 그렇게 다시 정착한 곳이 바로 충주였다.

그리 인지도 있는 팀은 아니었지만 축구팬들은 비난하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무려 네 번이나 연고지를 옮겨 다니는 모습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충주에 정착한 험멜은 이때부터 연고지에 정착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어차피 금방 또 떠날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통해 경기장으로 팬들을 불러 모았고 경품 추첨 행사로 관중에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또한 지역 유소년 축구팀과 엘리트 축구선수 육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충주시 또한 험멜 축구단을 위해 경기장과 훈련장 무상 사용을 약속하고 경기장 내 광고 사용 권한까지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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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스 ‘그린 레지스탕스’가 충주 시내에서 경기 홍보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그린 레지스탕스)

험멜, 충주에 정착하다

연고지를 옮긴 첫 해부터 관중몰이에 성공했다. 충주 시내 대형마트와 시가지에서 홍보 활동을 펼치면서 이때까지 축구에 생소했던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렇게 조촐하게 선수 가족과 지인 몇 명만이 지켜보던 내셔널리그 경기장에 2~3천명의 관중이 몰리기 시작했다. 강릉시청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구름관중을 몰고 다니는 구단이 없던 내셔널리그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한 충주 험멜의 진심을 알게 된 팬들은 자발적으로 서포터스를 조직해 힘을 보탰다. 서포터스 ‘그린 레지스탕스’는 직접 경기 홍보 전단지를 만들어 경기장에서 가까운 아파트 단지와 상가, 학교 등을 돌며 홍보 활동을 펼쳤다. 평균 관중이 2,500여 명에 이르렀다.

충주 험멜은 2부리그 입성을 타진하면서 경기장 시설 개선에 집중했다. 그동안 조명 시설이 부족해 야간 경기를 치를 수 없었던 충주 험멜은 무려 13억 원을 투자해 완벽한 야간 경기 시설을 갖췄다. 1968년 개장한 충주종합운동장은 무려 44년 만에 야간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됐다. 2부리그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첫 야간 경기를 치르는 5월 12일 울산 현대미포조선과의 홈 경기를 ‘디데이’로 잡았다. 관중몰이에 모든 역량을 쏟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2017년 전국체전 유치가 확정되면서 이를 자축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경기 며칠 전부터 충주 시내는 충주 험멜 경기 홍보로 들썩였다.

충주 험멜은 연예인 축구단을 초청하고 인기가수들의 축하 공연까지 마련했다. 또한 관중에게 나눠줄 경품으로 승용차와 세탁기, LCD TV, 자전거, 축구공(사인볼), 험멜티셔츠 등도 준비했다. CCS 충북방송(충북 북부지역 케이블방송사)에서도 연일 방송을 통해 홍보했고 중계 방송 일정을 잡았다. 하지만 관중수 1만 명 돌파가 충주 험멜의 목표였지만 사실 준비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내셔널리그에서 평균 관중수가 가장 많은 구단이지만 평균적으로 경기장을 찾는 2~3천 명과 비교하면 1만 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결전의 날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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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라가 아니다. 전북 현대가 아니다. 브레이브 걸스가 충주 험멜 유니폼을 입고 포즈를 취했다. (사진=충주 험멜)

충주 험멜이 전하는 메시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경기장 밖에는 홍보용 풍선과 인형이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고 경기 시작 세 시간 전부터 경기장 앞이 북적거리더니 경기가 시작되는 7시가 되자 관중석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눈으로 확인해도 믿기지 않는 관중수였다. 무려 14,900명이 경기장을 가득 채운 것이었다. 21만 명이 사는 작은 도시 충주에서 1만 5천 명에 가까운 이들이 경기장을 찾았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2007년 4월 김포에서 안산으로 옮긴 할렐루야의 첫 홈 경기(15,000명)에 이은 내셔널리그 역대 관중 동원 2위의 대기록이었다. 서포터스 규모가 그리 많지 않은 충주 험멜은 일반 관중과 서포터스가 함께 어우러져 신나는 응원 열기를 이어갔다.

충주 험멜 이재철 감독은 이날 경기 관중수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선수들이 무척 흥겹게 뛰었다.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많은 관중의 박수와 함성이 우리 선수들에게 큰 힘을 줬다. 관중이 없는 곳에서 경기를 하는 것과 많은 관중 앞에서 경기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이 정도 관중이 왔다는 건 K리그보다도 더 대단한 일이다. 구단에서 2부리그 입성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는데 이 관중수가 아마 2부리그 입성을 추진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많은 관중은 흥행과 지역 발전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요소다.”

아무리 일회성 이벤트로 경품을 나눠주고 인기가수를 초대한다고 해도 이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자랑하기란 쉽지 않다. 이 전부터 흥행의 잠재력을 보여줬던 충주 험멜은 노력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걸 직접 입증했다. 같은 날 K리그 경남-서울전 관중은 3,100명, 상주-전남전 관중은 1,900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주 험멜의 관중 대박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10년 동안 네 번이나 연고를 옮기면서 팬들에게 적지 않은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지만 일방적인 연고 이전이 아니라 지자체의 협조 부족으로 연고에 정착하지 못했던 ‘찬밥’ 험멜의 놀라운 변신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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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종합운동장을 가득 채운 관중은 한국 축구의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승강제의 핵심, 하부리그를 주목하자

충주 험멜은 앞으로도 지속적인 홍보에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야간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시설을 갖추면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경기 홍보에 나설 예정이다. 또한 CCS 충북방송은 충북 HCN과 공유해 앞으로 도내 모든 지역에 충주 험멜의 홈 경기를 송출하기로 했다. 축구로 들썩이는 작은 도시가 많아진다면 그게 바로 축구 강국이 아닐까. 이날 경기에서 보여준 충주 험멜의 잠재력은 한국 축구의 또 다른 희망이었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동안에도 관중몰이에 끊임 없이 노력하는 많은 구단들에 박수를 보낸다.

승강제와 관련해 K리그의 발자취와 성과를 주목하는 것도 좋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2부리그를 구성할 내셔널리그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충주 험멜과 같이 지역 주민의 사랑을 받고 구름 관중을 이끄는 구단이 많아질수록 성공적인 승강제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날 충주종합운동장의 열기는 뜨거웠고 관중은 많았고 경품은 푸짐했고 브레이브 걸스는 예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