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평생을 축구에 바치고 돌아가셨지만 아무도 그 업적을 기리지 않던 내셔널리그 대전한수원 故배종우 감독에 대한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생소한 이로부터 온 택배를 뜯어보고는 정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인의 형님께서 자필로 쓴 편지에는 “초라한 동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조명해줘 고맙다”면서 직접 재배한 쌀 등을 보내주신 것이었다. 순간 먹먹해졌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그 누구보다 상심이 클 고인의 형님이 이렇게 직접 고마움을 전하니 그 마음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칼럼 보기: "회장님들, 우리 식구는 챙기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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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배종우 감독의 형님께서 직접 나에게 보낸 자필 편지와 택배

감독 위해 500만 원 쾌척한 한 성남 팬

성남 신태용 감독은 지난달 28일 열린 수원과의 경기가 끝난 뒤 심판 판정에 불만을 토로했다가 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500만 원의 벌금 징계를 받았다. 그러자 성남 팬들은 다음 경기인 제주와의 홈 경기를 앞두고 자발적인 모금 운동을 펼쳐 이를 신태용 감독에게 전달했다. “경기 전 한 꼬마가 대신 벌금을 내주겠다고 동전을 꺼내 보였다”는 신태용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모금함을 들고 기자회견장에 들어와 모금함을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 원짜리부터 5만 원짜리까지 신태용 감독의 벌금을 내기 위한 팬들의 사랑이 그대로 느껴졌고 특히 한 봉투에는 10만 원권 수표 50장과 함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신태용 감독은 감격했다.

이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저는 성남의 평범한 팬입니다. 나이 들어 젊은 사람들처럼 앞장서서 응원하지 못했지만 이 500만원은 한국 축구계의 오심 없는 그 날을 위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며 이번 오심에 대한 소리 없는 외침입니다.” 사실 성남은 이미 연맹에 벌금을 완납한 상황이었지만 이 모금 운동으로 팬들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찌됐건 심판 판정 논란이 있던 K리그는 이런 따뜻한 소식을 통해 논란도 감동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제주전 퇴장으로 벌금을 내야 하는 홍철로서도 이 상황을 지켜보며 작은 기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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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 감독이 제주전이 끝난 후 팬들로부터 전달받은 모금함을 열어 보고 있다. (사진=성남일화)

많진 않지만 열정적인 팬 보유한 성남

사실 성남은 그리 많은 팬을 보유한 구단은 아니다. 늘 다른 K리그 팀들로부터 팬이 적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빅매치에도 관중석을 꽉 채우지 못하는 성남을 보고 “K리그의 발전을 막는 구단”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하지만 비록 다른 빅클럽에 비해 팬이 적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열정과 뜨거운 마음까지 부족하지는 않다. 탄천종합운동장에는 젊고 역동적인 서포터스가 다른 경기장에 비해 골대 뒤를 가득 채우지는 못하지만 일반석에서 욕을 걸쭉하게 하며 성남을 응원하는 ‘아저씨 부대’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골대 뒤 서포터스의 규모로만 성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성남이 세련된 이미지는 아니다. 사실 유니폼도 그렇고 경기장도 그렇고 젊은이들이 한 번 접하고 매력을 느낄만한 구단은 아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지켜본 성남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일반석에 자리 잡은 ‘아저씨 부대’는 “내가 신태용이가 꼬마일 때부터 경기를 봤다”면서 너스레를 떨기도하고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가끔 한적할 때면 삼겹살을 구우면서 거나하게 취한 채 응원을 하기도 한다. 젊은이들의 구호로 가득 차고 있는 K리그에서 성남은 무척 구수하다. 다들 대형 마트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때 성남은 푸근한 우리의 동네 시장과 같은 느낌이다. 500만 원을 쾌척한 이도 스스로를 “나이 들어 젊은 사람들처럼 앞장서서 응원하지 못하는 평범한 팬”이라고 밝힌 것처럼 성남에는 이토록 한발 뒤로 물러서 성남을 아끼는 팬들이 많다.

누군가는 K리그가 한줌도 안 되는 서포터스를 위한 무대라고 생각한다. 서포터스 역시 K리그 흥행에 지대한 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서포터스만이 전부는 아니다. 웃통을 벗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는 골대 뒤 젊은 서포터스의 열정도 대단하지만 이번 벌금 모금처럼 조용히 응원하는 나이 지긋한 이들도 많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신태용 감독의 벌금을 대신 내주기 위해 천 원을 낸 어린 아이부터 30만 원을 보탠 팬들도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비록 경기장이 꽉 들어차지는 않지만 성남은 참 복 받은 팀인 것 같다. 여기에 직접 기자회견장으로 모금함을 들고 와 개봉해 감동을 배가시킨 신태용 감독의 센스 또한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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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수원 팬들이 모금 운동을 통해 낸 안정환 응원 신문 광고의 모습.

‘신문 광고 내고 벌금 모금하고’

K리그가 다소 딱딱한 이미지로 느껴질 이들도 있을 것이다. 관중 없고 거칠고 거기에다가 심판 판정이나 불거지는 곳이라는 인식도 상당하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상황이 펼쳐질 때마다 K리그의 가치에 대한 논쟁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이번 모금 운동처럼 그 어느 곳보다 더 정이 넘치는 곳이 바로 K리그다. 우리가 주목하는 건 K리그에서의 사건 사고지만 그 뒤에는 정이 넘치는 훈훈한 일도 많았다. 내가 응원하는 팀을 위해 미약하지만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사실은 K리그의 매력이기도 하다. 지금껏 K리그가 부족한 언론 노출 속에서도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훈훈한 정 때문이었다.

지난 2007년 수원 안정환은 FC서울과의 2군경기에서 상대팀 서포터와 실랑이를 벌이면서 징계를 당했다. 이런 모습에 일부에서는 K리그를 물고 뜯기에 바빴다. 하지만 수원 서포터스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안정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직접 돈을 모아 신문 광고를 냈다. 천 원짜리를 모아 큰 돈을 마련한 수원 팬들은 스포츠신문 전면에 안정환 응원 광고를 내 감동을 선사했다. 이 광고에는 이런 글귀가 써 있었다. “당신 곁에는 40명 푸른전사들과 3만 명의 수원 지지자들과 108만원 수원 시민들과 4,500만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지켜줄 것입니다.” 안정환은 아직도 당시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다. 안정환을 위한 응원 카드섹션도 인상적이었다.

2009년에는 서울 팬들이 힘을 모았다. 심판을 비난하면서 연맹으로부터 벌금 1천만 원의 징계를 받은 귀네슈 감독은 “앞으로 K리그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겠다”면서 마음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서울 팬들이 귀네슈 감독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경기를 앞두고 “귀네슈, 당신은 옳습니다”라고 써 있는 티셔츠를 직접 제작해 판매한 팬들이 벌금을 내신 내주겠다면서 이 수익금 1천만 원을 귀네슈 감독에게 직접 전달한 것이었다. 경기 전부터 응원 영상이 흘러나왔고 “우리를 떠나지 마세요”라는 대형 걸개가 펄럭였다. 귀네슈 감독은 이 말로 팬들의 응원에 화답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터키를 이끌고 3위를 했을 때 감동했는데 오늘은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감동적이다.”

같은 해 전북은 수원과의 경기에서 김형범의 부상에 흥분한 팬들이 물병을 던지면서 700만 원의 벌금 징계를 받았다. 몇몇 팬의 올바르지 못한 응원 문화로 인해 제지하던 경호요원의 머리가 찢어지는 등 불미스러운 사태가 터진 것이었다. 하지만 전북 팬들은 몇몇 사람의 실수에 모두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벌금 모금 운동에 들어갔고 연간회원권을 가진 이들도 직접 표를 구매하면서 팀 재정에 보탬을 줘 감동을 선사했다. 열악한 사정으로 해체 위기에 놓였던 대전시티즌은 지난 2005년 팀을 살리기 위한 모금 운동을 통해 한달 동안 시민주 28억 원을 모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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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 감독을 위해 500만 원이라는 큰 돈을 낸 성남 팬의 자필 편지. (사진=성남일화)

K리그는 여전히 정이 넘친다

이렇듯 K리그는 아직 따뜻하다. 상대팀 서포터와 실랑이를 벌인 축구스타, 심판 판정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낸 감독, 경기장을 폭력으로 물들인 서포터스, 가난한 구단이 즐비한 K리그라고 비난하는 일 이상으로 그 뒤에 이렇게 따뜻한 사연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팬들이 힘을 모아 K리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충분히 자랑스럽게 느껴도 좋을 것이다. 팬들의 따뜻한 손길이 모여 K리그는 이렇게 하나 하나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발전하고 있다.

사실 성남 구단이나 신태용 감독이 벌금 500만 원을 낼 여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팬들은 돈 이상의 애정과 열정을 신태용 감독에게 전달했다. 내가 故배종우 감독의 형님으로부터 큰 울림이 있는 감동을 받은 것처럼 신태용 감독 또한 이번 일을 통해 코끝 찡한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군것질 할 돈으로 성금을 낸 초등학생과 PC방 갈 돈을 아껴 성금을 보탠 청소년들, 술 한 잔의 유혹을 뿌리치고 힘을 더한 젊은이들, 그리고 나이가 많아 앞장 서서 응원하지는 못하지만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며 거금을 보낸 우리의 아저씨들까지…. K리그는 여전히 정이 넘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