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현대가 원정에서 광저우 헝다를 3-1로 제압했다. 전북은 어제(1일) 중국 광저우 티안헤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2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H조 5차전 경기에서 이동국의 두 골과 이승현의 한 골을 묶어 광저우에 3-1로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전북은 2패 뒤 3연승을 기록하면서 승점 9점을 따내 조1위로 올라섰다. 참 통쾌하고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광저우에 미안해지기도 한다. 전북이 광저우에 미안해야 할 이유를 꼽아봤다.

1. 10명이서 싸워 이겨 미안하다

전북은 조성환이 퇴장을 당해 10명이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조성환이었다. 전북의 주장이자 수비의 핵인 조성환이 전반 9분 만에 페널티킥을 내주고 후반 19분에는 경고 누적으로 퇴장을 당했는데도 광저우는 전북을 이기지 못했다. 조성환이 빠진 뒤 10명이 싸운 전북은 내내 수비만 하다가 카운터를 두 방 먹여 3-1로 역전승을 거뒀다. 후반 막판에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필사적인 육탄방어로 실점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 경기를 지켜본 광저우 팬들은 한 명이 더 많은 상황에서도 이기지 못하고, 심지어 비기지도 못한 자신의 팀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10명이서 싸워 이겨서 미안하다.

2. 새로운 경기를 보여주지 못해 미안하다

며칠 전 봤던 경기를 또 보는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와 첼시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경기와 똑같았다. 당시 존 테리의 퇴장 이후 수적 열세에 놓인 첼시는 전원이 수비로 내려와 바르셀로나 공격을 막는데 급급했다. 하지만 결국 웃는 건 첼시였다. 공격 의지가 없어보이던 첼시는 오히려 후반 종료 직전 페르난도 토레스가 골을 뽑아내면서 바르셀로나에 1,2차전 합계 1승 1무를 거둬 결승에 안착했다. 어제 열린 전북-광저우전도 똑같은 양상이었다. 존 테리를 조성환으로, 토레스를 이동국으로, 심지어 디 마테오 감독대행을 이흥실 감독대행으로만 바꾸면 된다. 새로운 축구를 보여주지 못하고 며칠 전 열렸던 경기와 똑같은 축구를 보여준 전북은 광저우에 미안해야 한다.

3. 5명의 팬으로 이겨서 미안하다

이날 경기장에는 무려 5만여 명의 광저우 팬들이 들어찼다. 경기 내내 광저우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간간히 카메라에 잡히는 전북 팬은 딱 5명이었다. 그런데 이런 압도적인 분위기 속에서 결국 전북이 승리를 챙겼다. 특히 두 골을 넣어 5만여 광저우 팬들을 침묵시킨 이동국은 사과의 의미로 그들에게 사인볼이라도 선물해야 한다. ‘1박 2일’에 나서 출연자들에게 전북 점퍼를 선물한 이동국의 따뜻한 마음이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아무리 생일이어도 그렇지 그렇게 적지에서 비수를 꽂는 두 골을 넣은 건 너무했다. 5만여 홈 팬들에 맞서 싸운 5명의 전북 팬들에게도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특히 앞쪽에 반바지 입고 18번 이동국 이름 마킹한 채 가장 열광했던 팬은 정말 수고했다. 원정 응원단이 5명뿐이라 광저우 지역 경제에 도움도 못 줬는데 승점 3점 챙겨 와서 미안하다.

4. 국내선수로 선발 명단 꾸려서 미안하다

에닝요와 루이스, 드로겟 등 전북의 외국인 선수 3인방은 모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흥실 감독대행은 팀 전력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을 모두 선발 명단에서 제외했다. 그는 “한국 축구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 국내 선수들로 선발 명단을 꾸렸다”고 했다. 또한 포백 라인에는 진경선과 김재환, 전광환 등 올 시즌 출장 경험이 적은 선수들이 네 자리 중 세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홈 경기에서 광저우에 무려 5골이나 허용하며 1-5로 무너진 전북으로서는 당당해도 너무 당당했다. 하지만 결국 전북은 우려를 딛고 이날 통쾌한 3-1 승리를 거뒀다. 에닝요와 드로겟이 후반 교체 투입되기는 했지만 선발 명단을 전원 국내 선수로 꾸려 승리를 따냈다는 점은 무척 통쾌하다. 조심스럽게 이흥실 감독대행 명장론을 제기해 본다.

5. 돈도 적게 쓰고 이겨서 미안하다

광저우 공격수 다리오 콘카는 광저우로 이적할 때의 이적료가 무려 128억 원이었고 연봉만 161억 원이다. 한 달에 13억 원, 하루에 4,300만 원씩 받는 셈이다. 평범한 사람은 연봉이 4,300만 원이어도 많이 버는 편인데 콘카는 아프다고 핑계대고 하루 훈련 쉬어도 4,300만 원이 통장에 찍힌다. 여기에 클레오와 무리키까지 포함하면 이들에게 들어가는 돈만 해도 250억 원에 육박한다. 이 세 명의 몸값이 K리그 한 구단의 한 해 예산이 넘을 정도다. 거기다가 전·현직 중국 국가대표가 13명이나 있다. 한 해에만 무려 600억 원 이상을 쓴다. 그런데 전북에 졌다. 아마 광저우 구단주는 돈을 더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북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속설을 깡그리 무시하는 승리를 거뒀다. 돈도 적게 쓰고 이겨서 미안하다.

6. 암표값 20만 원을 아깝게 만들어 미안하다

이날 경기를 보기 위해 찾은 관중으로 경기장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또한 암표가 20만 원에 거래되기도 했단다. 아마 20만 원을 주고 암표를 구입한 이들은 광저우가 화끈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광저우 팬들은 잔뜩 스트레스만 받은 채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5만 원이나 내고 물 좋다는 클럽에 들어갔는데 ‘물 좋은’ 남자들 사이에서 셔플 댄스만 추다가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누구보다 광저우 팬들의 마음을 잘 안다. 광저우가 시원하게 승리를 거뒀어야 본전을 뽑았을 텐데 20만 원을 내고 스트레스만 받게 해 무척이나 미안하다.

7. 중국 방송 도둑 시청해 미안하다

한국은 이런 시시한 경기 따위는 중계 안 한다. 우리의 안목 있는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는 역시나 이런 의미 없고 재미없는 경기는 외면했다. 한국의 축구팬들은 옹기종기 모여 인터넷을 통해 이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중국 방송 덕분에 중계 잘 봤다. 경기 끝나고도 방송 안 끊고 계속 분석 화면 보여줘서 고맙다. 이동국이 결승골을 넣는 순간 중계진은 침묵했지만 눈치 없이 방구석에서 모니터 보고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앞으로도 중계 잘 좀 부탁한다.

전북은 원정에서 광저우를 상대로 의미 있는 승리를 챙겼다. 2연패를 당하면서 흔들렸지만 K리그의 자존심을 세우면서 다시 살아났다. 경기력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승점 3점을 챙겨왔다는 사실 하나로도 무척 뜻 깊은 경기였다. 자금력도 상대에 비해 떨어지고 수적 열세는 물론 열정적인 홈 팬들의 응원과 국내의 저조한 관심 등 여러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빛나는 명승부를 펼친 전북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