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은 무슨 날이었을까. 고개를 갸우뚱 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간 이날은 바로 장애인의 날이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지만 적어도 이날을 통해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조금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오늘은 뇌성마비 장애인 곰두리 축구단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전용기 타고 경기 치르는 축구단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곧장 장애인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됐다. 개최국인 한국으로서는 대회 참가를 위해 뇌성마비 축구단을 급조한 뒤 신철순 감독에게 팀을 맡겼다. 신철순 감독은 양지축구팀을 거쳐 진주고등학교 등지에서 23년 동안 지도자 생활을 해온 축구인이다. 급조된 팀이었지만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호주를 8-0으로 대파하는 등 세계 무대에서도 뒤처지지 않는 실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준결승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결국 올림픽을 4위로 마감한 한국은 3위까지 주어지는 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고 낙담해야 했다.

비장애인 운동선수에게도 연금은 중요하지만 장애인 선수들의 연금은 훨씬 더 중요하다. 뚜렷한 수입을 올리기가 쉽지 않은 장애인 선수들은 연금이 곧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메달 획득에 실패한 장애인 축구대표팀은 올림픽이 끝난 뒤 예정대로 다시 해산할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축구의 매력에 빠진 이들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철순 감독은 선수들에게 말했다. “계속 축구를 하고 싶으면 매주 일요일에 만나자.” 곰두리 축구단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곰두리 축구단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축구단과 친선경기를 치르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던 곰두리 축구단은 공군사관학교와의 경기에서 4-3으로 승리를 거둘 정도로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아 최강으로 우뚝 서기도 했다. 2007년에는 전용기(?)를 타고 원정경기를 치른 적도 있다. 공군 제3훈련비행단과 친선경기를 치르기 위해 공군이 제공한 군 수송기를 타고 경남 사천까지 날아간 것이었다. 1991년 신설된 국내 뇌성마비 장애인 축구대회 역시 이 팀의 이름을 따 ‘곰두리 축구대회’로 지어졌다.

마라카낭에 선 태극전사

곰두리 축구단은 1998년에는 브라질에서 개최된 세계 장애인 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직접 경기에 나서기도 했다. 아직 비장애인 선수들도 밟아보지 못한 꿈의 무대인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뛴 것이다. 대회가 없는 기간에도 스님이 주축이 된 축구단이나 다른 장애니 축구팀과의 교류도 무척 활발하다. 곰두리 축구팀의 창단과 함께 스포츠용품제조회사인 험멜 코리아에서 모든 용품을 무상으로 지원했고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에는 직접 곰두리 축구단을 독일로 보내 선진 축구 경험과 응원 혜택을 주기도 했다.

2009년에는 일본 왕실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를 기념해 2000년부터 한국과 일본의 우호를 위해 곰두리 축구단이 일본 장애인 축구 단체와 함께 교류를 펼친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가끔 곰두리 축구단의 훈련 때 조광래 전 대표팀 감독이 함께 하기도 한다. 곰두리 축구단을 맡고 있는 신철순 감독이 바로 조광래 감독의 진주고 시절 스승이기 때문에 특별한 인연이 시작됐다. 조광래 감독은 현재 곰두리 축구단 특별회원이다. 가끔 선수가 부족하면 직접 그라운드에 서기도 한다.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성일 예비역 대장은 대한장애인축구협회장은 물론 곰두리 축구단 명예회장까지 맡고 있다. 김성일 명예회장의 뜻을 이어받은 공군은 곰두리 축구단에게 각 공군 부대의 축구장은 물론 숙소까지 무료로 제공하면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김성일 명예회장은 이뿐 아니라 세계대회 출전 경비까지 제공한다. 또한 각 항공사 회장들에게 전화를 해 항공권 지원을 받아내기도 했고 정연 스님은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작품을 통해 수익금을 축구단에 지원하고 있다. 참 따뜻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여전히 열악한 환경

하지만 여전히 환경은 열악하다. 한국에 장애인 축구에 대한 저변이 워낙 탄탄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대표에 뽑혀도 훈련 기간 동안 받는 한 달 훈련비 50만 원이 전부다. 그나마 이것도 국가대표 소집이 없으면 받지 못하는 돈이다. 1988년 한국에 0-8로 패했던 호주가 이후 장애인 스포츠 저변 확대에 나서는 동안 한국은 제자리걸음만 해 이제는 호주전 대승이 추억으로만 남아 있다. 저변이 부족하니 선수를 육성해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현재 한국은 곰두리 축구단에만 국가대표가 8명이나 포진해 있는 기형적인 시스템이다.

곰두리 축구단을 비롯한 장애인 축구단에 대한 인식은 아직 부족하다. 좋은 뜻을 품은 여러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고 있고 전·현직 축구인들도 곰두리 축구단에 대해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지만 아직은 좋은 환경에서 운동을 할 수 있는 체계적인 환경이 부족하다. 비장애인 축구경기와 다르게 7인제로 펼쳐지는 장애인 축구는 경기장 규격은 물론 골대의 높이도 다르고 오프사이드도 없다. 비장애인 축구와 똑같은 환경에서 경기를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소년 축구 환경이 좋아지는만큼 장애인 축구에 대한 의식도 개선이 됐으면 한다.
축구를 통해 장애를 극복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