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1998년 프랑스월드컵 신문 스크랩북을 펼쳤다. 가끔 심심할 때면 과거 축구 자료들을 뒤지는데 프랑스월드컵 당시 자료를 꺼내니 웃음부터 나왔다. 대부분의 언론에서 멕시코를 잡고 네덜란드전에서는 전력을 아끼고 벨기에와 비기면 꿈에 그리는 16강 진출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같은 우리의 희망은 멕시코와의 첫 경기에서 1-3으로 패하면서부터 틀어졌고 2차전 네덜란드와의 맞대결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한 역술인도 멕시코에는 이기고 벨기에와 비겨 한국이 골득실에서 앞서 16강에 간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이 역술인 어디 갔나.

큰 대회를 앞두고 항상 흘러나오는 분석이라는 게 이런 거다. 어떤 팀과는 비기고 어떤 팀과는 이기고 어떤 팀에는 전력을 아껴 져도 좋다는 것이다. 말대로 되면 참 좋겠지만 지금까지 이런 목표를 세워서 그대로 실행에 옮긴 적은 단 한 차례도 보지 못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 때도 스페인과 독일이 버거운 상대인 반면 볼리비아가 확실한 1승 제물이라고 했지만 결국 한국은 볼리비아와 0-0으로 비기고 말았다. 상대 전력에 맞춘 시나리오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큰 대회를 앞둔 상황에서 전력 분석이랍시고 언론과 전문가들이 떠드는 이야기가 얼마나 쓸 데 없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런던올림픽, 정말 최상의 조일까?

최근 2012년 런던올림픽 축구 조추첨에서 한국은 멕시코, 가봉, 스위스 등과 함께 B조에 편성됐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에서 벌써부터 시나리오가 쏟아져 나온다. 가봉은 확실한 1승 상대이고 스위스는 충분히 해볼 만하며 멕시코와는 우리가 무승부 이상의 성적을 거두는 게 최고의 시나리오라는 이야기가 지배적이다. 이대로 되면 참 좋겠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바람일 뿐이다. 비기고 싶다고 비기고 이기고 싶다고 이기면 그게 축구인가. 승부조작이지. 과거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브리질과 한 조에 속한 나머지 세 팀이 “브라질과는 무승부를 거두겠다”고 했는데 이게 현실이 됐다면 브라질은 3무승부로 조별예선에서 탈락해야 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이 최상의 조에 편성됐다는 분위기다. 톱시드의 영국이나 스페인, 브라질 등을 피하고 멕시코를 만났으니 나쁘지 않은 조 편성이지만 그렇다고 최상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어차피 우리와 한 조가 된 가봉이나 스위스 등도 톱시드의 영국이나 스페인, 브라질 등 강호를 피해 멕시코와 한 데 묶였으니 우리와 똑같이 최상의 조가 된 셈이다. 우리만 최상의 조에 속했다고 방심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스위스나 멕시코가 우리를 부담스러워하는 만큼 우리도 그들이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가봉에서도 이 정도면 해볼 만한 편성 아닌가.

부정 타게 어떤 팀은 이기고 어떤 팀과는 비기고 어떤 팀과는 져도 좋다는 시나리오는 없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비겨도 조별예선에 통과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에서 패배를 당하며 미끄러진 경우를 숱하게 봐왔다. 내 생각으로는 이기는 것만큼이나 비기는 것도 어려운 것 같다. 어떤 경기이건 그라운드에 나서면 이기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게 맞다. 멕시코가 상대적으로 우리 조의 강팀이니 이 팀 빼고 나머지 팀 잡자는 생각은 애초부터 버리고 시작하자. 우리가 세 경기 중 버려야 하는 경기는 단 한 경기도 없다.

가봉이 확실한 1승 제물?

지난해 세계청소년월드컵 16강전에서 스페인과 승부를 앞둔 우리의 청소년 대표팀 선수들은 경기 전날 모여 미팅을 가졌다. 많은 선수들이 “내일 경기에서 져도 좋으니 최선을 다하자”고 했지만 민상기는 달랐다. 그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내일 전쟁에 나가는 것이다. 질 생각으로 전쟁에 나가는 장수가 어디 있나.” 그러자 동료들 역시 달라진 눈빛으로 파이팅을 외치기 시작했다. 비록 경기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패했지만 최선을 다한 감동적인 한판이었다. 조별예선에 나서기 전부터 승점 계산하며 주판알 튕기는 건 시간 낭비, 칼로리 낭비다.

세 경기 다 이기면 된다. 그러면 다른 팀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원하는 목표를 위해 나아갈 수 있다. 소심하게 “누구는 꼭 잡아야 하고…” 뭐 이런 거 상관하지 말자. 시드 배정상 불가능한 조합이지만 만약 우리가 브라질과 영국, 스페인 등과 함께 한 조에 속했다고 했더라도 똑같은 자세로 경기에 임해야 한다. 브라질과도 승리를 위해 싸워야하고 영국과 스페인을 상대로도 마찬가지로 이기기 위해 뛰어야 한다. 브라질전에서는 힘을 아끼고 스페인과는 비기고 영국을 잡자는 시나리오는 영화에서나 쓰자.

한국과 한 조가 된 가봉을 살펴보자. 딱 들어도 생소한 이 나라는 이름만 들어도 축구를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가봉은 아프리카 예선으로 치러진 U-23 아프리카 챔피언십에서 세네갈과 모로코를 제압하는 등 파죽지세로 우승을 차지했다. 1승 제물? 아프리카 챔피언을 가벼운 1승 제물로 꼽다니 축구 참 쉽다. 이미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확실한 1승 제물로 평가받았던 말리를 만나 고전하다가 탐부라의 환상적인 자책골에 의해 힘겹게 무승부를 기록했던 기억을 벌써 잊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볼리비아와 0-0으로 비길 때부터 국제무대에서 확실한 1승 제물은 없다.

‘닥치고’ 3전 전승 노리자

가봉을 두려워하라는 뜻이 아니다. 가봉이 얼마나 강할지, 반대로 멕시코나 스위스가 얼마나 상대적으로 약할지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의미다. 멕시코나 스위스를 상대할 때만큼 가봉과의 경기에도 집중해야 한다. 자꾸 우리는 가봉을 확실한 1승 제물로 꼽는데 우리나라에서 가봉 축구에 해박한 사람이 누가 있나. 기껏해야 분석한다는 게 가봉의 피파 랭킹이 한참 낮고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해 경험이 떨어진다는 게 전부다. 듣는 가봉 사람 참 섭하겠다. 올림픽 본선 무대에 나설 정도의 실력이라면 참가팀의 전력차는 극히 미세하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떠올려보자. 확률 따지기 좋아하는 도박꾼들은 한국이 속한 D조에서 포르투갈과 폴란드가 16강에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 두 팀은 나란히 일찌감치 짐을 쌌고 결국 한국과 미국이 16강에 올랐다. A조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와 세네갈, 우루과이, 덴마크가 속한 A조의 강자는 누가 봐도 프랑스와 우루과이였다. 대부분이 프랑스와 우루과이가 어렵지 않게 16강에 갈 것이라고 예상다. 하지만 A조 역시 세네갈과 덴마크가 16강에 올랐다. 승점 따져가면서 누구는 피하고 누구는 잡고 그런 게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오래 전부터 결과를 통해 입증됐다.

중요한 건 이번 올림픽에서 만나는 팀들 중에 누가 약체이고 누가 강호인지 따지는 게 아니다. 그 팀을 제대로 파악해 세 경기 모두 이길 전술을 구상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우리가 언제부터 상대 골라가면서 최선을 다 하고 말고 따졌나. 그냥 세 경기 다 이긴다는 마음으로 임하자. 그러다 보면 이길 수도 있고 비길 수도 있고 메달도 딸 수 있다. 홍명보호가 8강에 오를 수 있는 시나리오는 딱 하나다. 아마 이 사실을 홍명보 감독과 선수들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고 믿는다. ‘닥치고’ 3전 전승을 거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