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잘하는 팀은 많다. 하지만 강팀이라고 다 똑같은 강팀은 아니다. 어떤 팀은 막대한 자금을 앞세워 즉시전력감 선수를 영입하지만 또 다른 어떤 팀은 될성 부른 떡잎을 키워 활용한다. 물론 자금력을 갖춰 슈퍼스타를 영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것보다는 후자가 더 체계적이고 발전적이다. 한 명의 선수를 키워내기 위해 10년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인내심 없이는 유소년 육성에 투자할 수가 없다.

오늘은 한국 축구를 이끄는 유소년 육성 시스템의 최고봉인 두 구단을 비교해 보려 한다. 유소년 출신 선수들로만 베스트11을 구성할 수 있을 만큼 두 팀 다 대단하다. 바로 포항스틸러스와 전남드래곤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선수들이 즐비한 이 두 구단은 1년에 유소년 육성을 위해 15억 원~20억 원을 투자할 정도로 어린 선수 발굴에 적극적이다. 이 돈이면 특급 외국인 선수를 영입할 수도 있지만 포항과 전남은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본다. 과연 이 두 팀의 유소년 출신 선수들이 한 그라운드에서 맞붙게 된다면 누가 이길까. 유소년 클럽 출신 선수들로 베스트11을 구성해 봤다.

포항스틸러스 유소년 출신 선수들

GK 신화용

신화용은 포항에서 나고 자랐다. 포철동초등학교와 포철중학교, 포철공고를 거치면서 골키퍼 수업을 받았다. 청주대를 졸업한 뒤 2004년 포항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자리는 없었다. 김병지라는 큰 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화용은 포항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고 2006년 김병지가 떠난 뒤부터 줄곧 포항 골문을 지키고 있다. 포항의 2009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역시 신화용이 이끌어낸 작품이었다. 신화용은 포항에서만 133경기를 뛴 진정한 포항맨이다. 만약 포항이 신화용을 키어내지 않았다면 주전급 골키퍼 영입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어야 할 것이다. 요새는 일확천금을 줘도 주전 골키퍼는 안 내주는 세상인데 포항으로서는 선견지명이 대단했다.

DF 박원재

박원재는 1996년부터 스틸야드와 인연을 맺었다. 포항 유소년 클럽 소속이던 박원재는 포항 홈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볼보이로 그라운드에 섰다. 황선홍과 홍명보를 보면서 언젠가는 선수로서 스틸야드에 서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중학교 시절에는 들것을 맡아 이동국을 실어 날랐다. 박원재는 처음 볼보이로 스틸야드와 인연을 맺은 지 10년이 지난 2007년 포항 유니폼을 입고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에서 연이어 골을 뽑아내는 드라마를 썼다. 당시 박원재는 이런 말을 했다. “이날을 너무 기다렸다. 스틸야드에 서는 게 내 오랜 꿈이었다.” 스틸러스는 누군가에게는 꿈만 같은 곳이다.

DF 신광훈

그는 도둑질을 했다. 포철공고 시절 큰 부상을 당해 1년 동안 쉬었던 신광훈은 부상에서 회복한 뒤 스틸야드로 훈련을 하러 갔다가 구단 공을 슬쩍했다. 포항 유니폼을 입고 성인 무대에 서고 싶었던 신광훈이 선배들이 쓰던 공을 가지고 훈련하면 하루라도 더 빨리 프로 무대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선배들이 차던 공을 훔친 그는 매일 저녁 이 공을 가지고 개인 훈련에 들어갔고 2006년 꿈에 그리던 포항 유니폼을 입고 성인 무대에 설 수 있었다. 2007 U-20 청소년 월드컵과 2008 베이징 올림픽에 나섰던 그는 전북에서 잠시 뛴 뒤 다시 포항으로 돌아와 맹활약 중이다. 특히 2007년 청소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마르세유턴을 선보이던 모습은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다.

DF 이원재

포철동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원재에게 단 하나 뿐인 우상이 다가왔다. 바로 홍명보였다. 홍명보는 이원재에게 “반드시 좋은 선수가 돼라”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원재는 홍명보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포항 유소년 시스템을 거쳐 2007년 성인 무대에 섰다. 비록 1군은 아니었지만 2군리그에서 MVP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2000년 2군리그가 시작된 이래 수비수가 MVP를 받은 건 이원재가 처음이었다. 이원재는 2군리그 마지막 10경기에서 단 3실점이라는 믿기지 않는 수비력을 선보이면서 포항의 압도적인 2군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잠시 전북과 울산으로 이적해 외도를 하기도 했던 그는 지난해 다시 스틸야드로 돌아왔다.

DF 오범석

오범석은 중학교 때까지 울산에서 축구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울산 학성고등학교 감독이었기 때문에 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포철공고로 진학했고 포항은 오범석에게 1년 동안 브라질 축구 유학을 보내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브라질에 다녀온 뒤 기량이 급성장한 오범석은 2003년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 열린 U-20 이하 청소년 월드컵에서 주전을 꿰찼고 2004년 포항의 K리그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활약하다 K리그로 돌아오면서 포항이 아닌 울산을 택해 아직도 포항 팬들에게는 좋지 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스틸야드에서 오범석 이름 잘못 꺼냈다가는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다.

MF 황진성

황진성은 K리그 최고의 테크니션이다. 외국인 선수들도 “K리그에서 가장 기술이 좋은 선수가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황진성”이라고 답할 정도다. 포항 유소년 출신인 황진성은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만개했다. 2003년 성인 무대에 입성했지만 따바레즈와 김기동 등 쟁쟁한 선수들에 가려 주전으로 활약하지 못했지만 다른 팀의 이적 제의에도 불구하고 포항에 잔류한 그는 이제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됐다. 지난 전북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한 황진성 K리그 역대 29번째 30-30 클럽 가입자가 됐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고교 시절 스틸야드에서 뛰는 선배들을 보며 꿈을 키웠다. 후배들도 우리를 보며 스틸야드에서 뛸 그날을 위해 더 노력했으면 좋겠다.”

MF 이명주

포항은 올 시즌 김재성이 군에 입대하면서 중원에 적지 않은 공백이 생겼다. 하지만 이 공백을 ‘신인’ 이명주가 말끔히 메워주고 있다. 포철공고를 거쳐 영남대 2학년 재학 중 포항의 우선지명을 받고 올 시즌 영입한 이명주는 지난 8일 데뷔전에서 성남을 상대로 도움을 기록하는 등 등장부터 화려했다. 황선홍 감독은 “김재성의 대체자를 찾았다. 앞으로도 중요할 생각”이라면서 이명주를 극찬했다. 주축 선수 한 명이 빠져도 이를 대체할 유소년 출신 선수가 있다는 게 참 대단한 일이다. 포항처럼 유소년 선수 육성에 1년 동안 수십억 원을 쏟아 붓는 팀만이 가능한 일이다.

MF 마철준

마철준은 그리 인지도 있는 선수는 아니다. 하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로 힘든 일을 도맡아 한 그는 감독이 참 좋아하는 선수였다. 포항에서 나고 자란 그는 포항 유소년 출신으로 2003년 김포 할렐루야에 입단한 이후 부천SK와 제주유나이티드, 광주상무 등을 거치면서 K리그의 대표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로 인정받았다. 지난 시즌까지 K리그에서 무려 184경기에 나설 정도로 안정된 모습을 선보인 마철준은 큰 부상 한 번 없이 언제나 팀에 보탬을 주는 선수였다. 그가 있어야 화려한 테크니션도 빛나는 법이다.

FW 이동국

이동국은 포항에서 나고 자랐다. 포항제철동초등학교에서 축구를 처음 시작한 이동국은 이후 포철중과 포철공고 등 포항 유소년 클럽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에는 적수가 없을 정도로 놀라운 골 결정력을 선보이면서 팀을 전국대회 3관왕에 올려놓는 등 무시무시한 활약을 선보였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설 만큼 또래들에 비해 압도적인 기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1998년에는 19세의 나이에 U-20 아시아선수권대회 득점왕, K리그 신인상, A매치 데뷔전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기록했다. K리그에서만 121골을 기록한 이동국은 이제 포항의 자랑을 넘어 K리그의 자랑이 됐다. 포항에서는 축구뿐 아니라 외모로도 날렸다는 후문이다.

FW 이용재

천안중학교에서 전국 대회 득점왕을 휩쓸었던 이용재를 포항이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당시 포철공고 김경호 감독은 이용재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이용재도 최고의 훈련 환경을 갖춘 포항행을 선택했다. 포철공고에서 고무열, 배천석 등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이용재는 대한축구협회 우수 선수 해외유학 프로그램에 뽑혀 영국으로 날아간 뒤 2년 후 프랑스 낭트와 4년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비록 포철공고에서 오랜 시간 생활했던 건 아니지만 포항이 이 어린 선수를 뽑은 안목 하나는 대단했다. 언젠간 포항 유니폼을 입은 이용재의 모습을 볼 날을 기대해 본다.

FW 고무열

고무열이 재학 중이던 포철공고는 당대 최강이었다. 고무열을 비롯해 배천석, 최인창 등 쟁쟁한 선수들로 구성된 공격진은 그 어떤 팀도 막을 수가 없었다. 포항 유소년 팀에서 성장한 고무열은 스틸러스에 우선지명을 받은 뒤 숭실대학교로 진학했다. 당장 주전으로 쓸 수 없는 상황에서 2군에 방치하는 것보다는 대학 무대에서 경험을 쌓으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2년 뒤 고무열은 포항의 부름을 받아 대학교를 중퇴하고 돌아왔다. 시즌 초반 잠시 주춤했지만 리그 중반 이후 펄펄 날면서 2011년 시즌 무려 10골을 뽑아내는 신입답지 않은 활약을 선보였다. 황선홍 감독이 직접 현역 시절 자신의 등번호인 18번을 하사할 만큼 기대를 받고 있다.

포항 유소년 출신으로 구성한 베스트11

이용재 이동국 고무열

이명주 황진성 마철준

박원재 이원재 오범석 신광훈

신화용

올 시즌 포항의 선수단 36명 중 포항 유소년 출신 선수가 무려 12명이다. 국내 선수를 모두 자체적으로 육성한 유소년 선수들로 채우겠다는 꿈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포항이 다른 빅클럽에 비해 선수 영입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지 않고도 늘 상위권에 자리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 선수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10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할 만큼 포항의 유소년 육성 정책은 참 대단하다. 물론 학부모들에게는 단 한 푼도 받지 않는다. 참 훌륭한 구단이다.

전남드래곤즈 유소년 출신 선수들

GK 김영광

전남 유소년 클럽인 광양제철고에 진학한 김영광은 최고의 실력을 선보였다. 당시 전국체전에서 결승까지 모두 네 경기를 치렀는데 이 중 세 경기를 승부차기 끝에 이겼을 정도로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 상대팀은 120분 안에 경기를 끝내지 못하고 승부차기에 돌입하면 “이제 졌다”고 탄식할 정도로 김영광의 선방은 눈부셨다. 실력뿐 아니었다. 프로 선수 신분도 아닌 고등학생 시절 전국체전 MVP 상금 50만 원에 자비 250만 원을 더 보태 전라도내 아동복지 시설 21개소에 축구공 300개를 보낼 정도로 지역 사랑에도 앞장섰다. 전남 유소년 시스템이 키워낸 김영광은 이제 한국의 대표적인 골키퍼로 우뚝 섰다.

DF 윤석영

경기도 수원에 사는 윤석영은 초등학교 시절 축구를 위해 전라남도 유학을 떠났다. 장흥초등학교를 거친 윤석영은 장흥중학교를 전국대회 3관왕으로 이끌면서 주목받았다. 당연히 전남 유소년 클럽인 광양제철고에서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까지 공격수로 활약했던 그는 광양제철고에서 생소한 포지션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왼쪽 풀백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윤석영은 2007년 U-17 청소년월드컵을 경험하면서 풀백으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이영표가 대표팀에서 은퇴한 뒤 가장 기대되는 왼쪽 풀백으로 성장했다. 광양제철고에서 그를 공격수로 기용했다면 아마 대한민국 축구 계보도 바뀌었을 것이다.

DF 황도연

황도연은 광양제철중과 광양제철고를 졸업하고 2012년 전남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U-20 청소년대표팀 주전 수비수로도 활약할 만큼 기대를 모았던 황도연은 지난 두 시즌 동안 K리그에서 17경기에 나서며 많은 기회를 얻지 못했다. 결국 올 시즌을 앞두고 전남은 황도연에게 경기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대전으로 임대를 보냈다. 비록 전남에서 즉시 전력감으로 평가되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 충분히 제몫을 다할 수 있는 선수다. 전남은 유망주를 다른 팀으로 임대 보낼 만큼 참 젊고 능력 있는 선수들이 넘치는 구단이다. 유소년 육성 정책을 제대로 실행했기 때문이다.

DF 임유환

중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한 임유환이 처음부터 빛나는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가능성을 인정한 광양제철고는 임유환을 전격적으로 스카우트해 조련하기 시작했다. 훈련은 혹독했다. 중학교와의 연습경기에서는 10골 이상 넣지 못하면 끝나고 집합을 당할 정도였다. 축구를 그만두고 싶어 도망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임유환은 2000년 U-19 아시아선수권에 당시 최연소인 17세의 나이로 참가할 만큼 성장했다. 광양제철고 기영옥 감독은 당시 임유환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3년만 내 밑에 있으면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버티고 일어날 수 있다.” 임유환이 K리그에서 수준급 수비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당시의 혹독한 훈련 덕분이었다.

DF 이규로

이규로는 광양중에서 축구를 했다. 하지만 전남 유소년 클럽인 광양제철중과는 실력의 차이가 있었다. 광양중에서 매번 광양제철중에 패했던 이규로는 광양제철고에 스카우트 되면서 어제의 적들과 동료가 됐다. 그리고 최강의 선수들과 함께한 이규로는 고등학교 무대를 평정했다. 2006년 전국대회 3관왕을 이끈 것이었다. 백운기 대회에서 부상으로 활약하지 못했던 이규로는 특히 3관왕을 완성 짓는 전국체전에서 펄펄 날았다. 4강 포철공고와의 중요한 일전에서 골을 뽑아내며 팀의 2-1 승리를 이끄는 등 이름값을 제대로 했다. 이듬해 전남에 입단해 세 시즌 동안 55경기에 나서 7골 1도움을 기록했던 그는 2010년 서울로 이적한 뒤 부상과 부진으로 주춤하다가 올 시즌 인천으로 이적,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MF 김영욱

김영욱이 활약하던 2009년 당시 광양제철고는 역대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영욱을 비롯해 지동원과 이종호까지 포진해 있었으니 당할 팀이 없었다. 특히 김영욱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고등학교에서는 최고 수준의 플레이를 펼치면서 대교 눈높이배 전국고등리그 왕중왕전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대회 MVP가 바로 김영욱이었다. 특히 챌린지리그 도중 부상을 당한 뒤 청소년 대표팀에 차출돼 이 부위를 또 다쳐 많은 이들이 걱정했지만 왕중왕전에 나서 16강부터 결승까지 모든 경기를 소화하며 펄펄 날아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당시 주장 완장을 찼던 김영욱은 앳된 외모와는 다르게 리더십까지 갖추고 있었다. 우선지명으로 전남의 선택을 받아 K리그를 누비고 있는 김영욱은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선수다.

MF 조용태

전남 순천 출신인 조용태는 순천 중앙초등학교 6학년 때 ‘차범근 축구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유명했다. 당연히 전남 지역에서 가장 공을 잘 찼던 조용태의 선택은 광양제철고였다. 광양제철고에 진학한 조용태는 팀의 역사적인 우승을 이끌면서 또 다시 주목받았다. 1997년 1998년 연속 준우승 이후 6년 만에 무학기 전국중·고축구대회 우승을 노리던 광양제철고는 조용태를 앞세워 그토록 그리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당연히 대회MVP는 조용태의 몫이었다. 이후 연세대에 입학한 그는 3학년을 마치고 자퇴한 뒤 수원의 부름을 받고 K리그에 입성, 현재까지 55경기에 나서 7골 4도움을 기록하고 있다. 전남이 키워 놓으면 K리그 전체가 함 풍성해진다.

MF 박승일

박승일은 고교 시절 가장 빠른 선수였다. 이미 광양제철남초등학교 시절 육상 100m 전남대회 2위를 기록했을 만큼 빨랐다. 그가 치고 달리면 잡을 수 있는 선수가 없었다. 전남 유소년의 엘리트 코스인 광양제철중과 광양제철고에 진학하고 나서도 폭발적인 스피드를 앞세워 팀의 에이스 역할을 했다. 전남이 드래프트에서 그를 지명하려했지만 아마추어 무대에서 더 경험을 쌓고 싶어 경희대학교를 선택한 박승일은 이후 학교를 중퇴하고 2010년 드래프트에서 울산에 6순위로 지명됐다. 입단 초기 2군 생활을 했지만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했고 올 시즌에도 김호곤 감독의 신임을 받고 있다. 전남으로서는 박승일을 잡지 못해 속이 좀 쓰릴 것 같다.

FW 지동원

제주도 오현중에서 축구를 하고 있던 지동원은 이미 중학교 2학년 때 전남 스카우터의 눈에 들었다. 당시 176cm에 이르는 큰 키를 바탕으로 유연한 플레이를 펼치며 독보적인 골 감각을 선보인 지동원을 전남에서 주목한 것이었다. 광양제철고에 진학한 뒤로는 한 단계 더 성장해 이종호, 김영욱과 함께 고교 무대를 평정했다. 특히 2009년 고교 챌린지리그에서는 14경기에서 무려 17골을 뽑아내며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고 청소년 대표팀부터 성인대표팀까지 초고속 성장을 이어갔다. 2010년 전남으로부터 우선지명을 받은 지동원은 결국 국내 선수 중 최연소 프리미어리그 진출이라는 업적을 일궈냈다.

FW 신영준

광양제철고에서 공격수로 꽤 이름을 날렸던 신영준은 성인 무대 입성을 앞둔 2007년 말 ‘보류’ 판정을 받았다. 당시 허정무 감독은 “아직 부족하다. 나중에 부를 때까지 대학에 가 있으라”고 지시했고 결국 신영준은 호남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기울면서 대학을 그만두고 내셔널리그 용인시청으로 가 연봉 3,600만 원을 받으며 집안을 일으켜 세운 그는 2011년 다시 전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는 뛸 준비가 된 것 같다”는 전남 코치진의 ‘합격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이 걸렸지만 자신을 키워준 클럽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지난해 프로 데뷔 두 경기 만에 데뷔골을 기록한 그가 2개월 뒤 2호골을 터뜨리고 교체 아웃되자 광양을 찾은 많은 팬들은 기립박수로 신영준의 귀환을 환영했다.

FW 이종호

이종호는 어릴 적부터 광양전용구장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전남 선수단 조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축구장은 집 만큼이나 편한 곳이었고 전남의 노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은 형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장에 가면 “귀엽다”며 먹을거리를 나눠주는 서포터즈와도 친하게 지냈다. 광양제철중과 광양제철고에 진학하며 전남 유소년 시스템의 혜택을 받은 이종호는 U-12 대표팀부터 차근차근 이름을 올리더니 2005년에는 ‘차범근 축구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U-16 아시아청소년대회 MVP와 2009년 전국고교축구 왕중왕전 득점상을 수상하는 등 무시무시한 공격수로 성장했다. 지난해 3월 서울과의 홈 경기에서 골을 기록한 그는 곧바로 서포터스석으로 달려가 철조망에 매달렸다. 오랜 시절 함께 전남 축구를 지켜본 서포터스 형들에 대한 예의였다.

전남 유소년 출신으로 구성한 베스트11

신영준 지동원 이종호

조용태 김영욱 박승일

윤석영 황도연 임유환 이규로

김영광

전남은 올 시즌 엔트리 36명 중 11명이 자체 유소년 시스템을 통해 길러낸 선수들이다. 특히 이종호와 신영준, 김영욱, 윤석영 등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선수들이라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유망한 중학생을 스카우트해 훌륭한 환경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시켜 키워내는 전남의 능력은 한국 축구 전체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또한 매년 초등학생 공개 테스트를 통해 지역 구분 없이 능력 있는 선수를 육성하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도 무척 돋보인다. 이렇게 꾸준히 유소년 선수 육성에 집중하는 포항과 전남이 있는 한 K리그와 한국 축구의 미래는 무척 밝다. 그나저나, 이 두 팀의 위 베스트11으로 싸우면 누가 이길까. 참 재미있는 승부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