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빨리 불었어야지.” 경기 도중 심판을 향한 포항 황선홍 감독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안방까지 전해졌다. 평소 감독이 심판에게 항의를 할 때 어떤 말을 내뱉는지 궁금했던 이들에게는 참 신선한 장면이었다. 후반 막판 전북이 얻은 프리킥에서 에닝요가 키커로 나서 찰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카메라는 무려 다섯 번이나 앵글을 바꿔 이 장면을 집중 조명했다. 에닝요가 바라보는 수비벽의 모습, 단단히 쌓여진 벽의 모습, 그라운드 높이에서 바라본 모습, 덩그러니 그라운드에 공이 놓여 있는 모습 등 한 장면을 놓고 다섯 대의 카메라가 이 모습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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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선이 중계한 포항-전북전은 황진성의 결승골로 포항이 1-0 승리를 거뒀다. 많은 골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경기력도 훌륭했고 중계 기술도 빛났다. (사진=포항스틸러스)

현장감 넘쳤던 TV조선의 첫 중계

프리미어리그 중계 방송이 아니었다. 아마 이 경기가 새벽에 열렸더라면 나는 프리미어리그 중계를 보고 있는 줄 착각했을 것…이라는 건 조금 오버지만 어제(22일) 열린 2012 현대오일뱅크 K리그 포항스틸러스와 전북현대의 경기 중계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종합편성채널 TV조선에서 처음으로 중계한 이 경기는 의지와 노력만 있다면 K리그도 얼마든지 환상적인 화면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경기였다. 경기 중간 중간 벤치의 모습과 팬들의 반응도 실시간으로 전파를 탔다. 안타까운 장면에서 머리를 쥐어 짜거나 넋 놓고 경기를 보는 팬들의 모습을 프리미어리그가 아닌 K리그에서도 볼 수 있다는 건 신선했다.

지금까지 K리그 중계는 현장감이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현장음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 축구장에서 직접 느끼는 열기를 안방에서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경기장에서 직접 보면 시끄러워서 옆 사람과 대화도 잘 안되는데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되는 K리그 중계는 잠이 올 정도로 조용했다. 하지만 TV조선의 K리그 중계에서는 양 팀 서포터즈의 응원가가 교차돼 안방으로 전달됐다. 환호와 야유, 탄식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여기에 이동국이 언제 면도를 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의 HD화질로 전달됐으니 TV조선이 이날 보여준 중계는 경기장에 직접 찾아간 것 만큼이나 실감났다. 이 중계를 보고도 잠이 왔다면 아마 당신은 우리 아버지 코 고는 소리에도 숙면을 취할 만큼 강인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지난 주 칼럼을 통해 종편채널의 K리그 중계에 대해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당연히 종편채널에서 K리그 중계하는데 반대하는 의견도 많다는 걸 안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중계 자체에 대해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고 했는데 막상 TV조선이 중계한 첫 경기를 보니 중계 자체에 대한 의미보다는 그 기술적인 능력이 무척 뛰어나 더 얻을 게 많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이전까지 종편채널의 K리그 중계를 조심스러운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봤다면 TV조선의 첫 중계 이후에는 긍정적인 효과의 확신이 섰다. 이날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이라는 이름의 세 개 방송사 중 그 어떤 곳에서도 K리그를 중계하지 않았는데 종편채널에서 K리그를 중계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무척 크다.

K리그, 포장되면 더 멋질 콘텐츠

더 나아가 ‘자칭’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이라는 곳들이 여신 운운하면서 어여쁜 처자들 데려다가 눈요기에나 신경 쓸 때 종편채널에서 기술력으로 이런 멋진 스포츠 중계를 선보였다는 것도 참 생각할 게 많아진다. 그동안 K리그가 시청률이 나오질 않아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의 외면을 받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TV조선이 보여준 첫 중계 만큼만 신경 쓰고 노력했더라면 분명히 K리그도 매력적인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TV조선의 첫 K리그 중계는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큼 수준이 높았다.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들이 TV조선의 중계 기술을 보고 배워야 할 만큼 굴욕이다.

그동안 일부 축구팬은 K리그 중계 기술을 지적하면서 너무 낮은 위치에 메인 카메라를 배치해 속도감을 느낄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메인 카메라 위치는 고정돼 있다. 방송사에서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건 K리그가 사용하는 월드컵경기장이 2002년 한일월드컵 때도 지금과 똑같은 위치에 메인 카메라가 자리했다는 점이다. 그 당시 카메라 앵글과 위치 가지고 지적하는 이들은 못 봤다. 결국 축구 중계는 얼마나 많은 카메라가 얼마나 다양한 각도에서 비추느냐가 중요하지 단순히 메인 카메라 위치가 어디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TV조선의 첫 K리그 중계를 통해 이 점도 명확해졌다. 이날 메인 카메라 위치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쪽에 카메라를 위치해 놓고 선수단 벤치를 잡으며 표정 변화 하나 하나까지 안방에 전달하려는 노력은 결국 명품 중계를 이끌어 냈다. TV조선 중계 소식을 듣고 기존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에 비해 중계 노하우가 부족해 다소 걱정이기는 했지만 이런 걱정은 기우였다. 사실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에서 K리그 중계에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으니 노하우랄 것도 별로 없는 거 같긴 하다. 어찌됐건 TV조선은 K리그도 프리미어리그처럼 박진감 넘칠 수 있다는 점과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K리그 중계에 무성의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멋진 중계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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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선 게시판에는 첫 K리그 중계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사진=TV조선 게시판 캡쳐)

TV조선이 극복해야 할 과제

앞으로 TV조선으로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다. 지난 칼럼에서 고민했던 정치적 목적의 채널이라는 선입견을 없애야 한다. K리그 중계를 이용하다가 어느 순간 발을 뺄지도 모른다는 불신의 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속적인 K리그 중계를 통해 TV조선이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게 아니라 K리그의 상품성과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더 끌어 올릴 수 있는 동반자의 느낌을 줘야 한다. 과거 전북 팬들은 전북에 입단한 조재진을 ‘우리 선수’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조만간 팀을 떠날 선수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재진은 친정팀 수원과의 경기에서 상대에 ‘주먹 감자’를 먹인 뒤 전북 팬들로부터 진짜 전북 선수라는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TV조선도 마찬가지다. 진정성 있는 중계를 꾸준히 보여준다면 TV조선의 정치적인 색이 짙어 K리그 중계를 보지 않겠다는 의견도 사라질 것이다. 사실 나도 이번 첫 경기 중계를 보고 TV조선에 대한 선입견을 어느 정도는 거뒀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 이런 명품 중계를 끊임없이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직은 해설진이 구성되지 않았다는 점도 고민일 것이다. 첫 중계는 프리랜서 해설진을 꾸렸지만 보다 안정적인 중계를 위해서는 ‘빵빵한’ 해설진이 반드시 필요하다. 수준 높은 화면에 걸맞은 수준 높은 해설진을 임시방편으로 쓸 게 아니라 안정적으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TV조선 내부에서도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과거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들은 수도권 빅클럽 위주로 중계를 편성했지만 TV조선은 조금 달랐으면 좋겠다. 포항-전북전처럼 수도권 빅클럽이 아니어도 좋은 경기력을 선보일 수 있는 경기를 중계하는 게 훨씬 더 좋은 반응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올 시즌 가장 멋진 광주FC의 경기가 전파를 많이 타지 못한다는 게 아쉽다. 아마 광주FC 경기가 모두 중계됐더라면 우리는 안방에서 ‘K리그에도 명승부가 참 많구나’라고 느꼈을 것이다. 팀 자체의 명성을 떠나 가장 재미있는 경기를 중계하기 위한 의지가 있다면 TV조선의 K리그 중계가 더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멋진 중계,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것

안방에서 중계를 보며 득점이 오프사이드로 선언되자 감독이 대기심에게 발끈하면서 내뱉은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다는 건 무척 행복한 일이다. K리그에서도 감독이 “조금 빨리 불었어야지”라고 대기심에게 했던 말이 전파를 통해 안방까지 전해질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지금까지는 몰랐었다. 우리 수준으로는 프리미어리그처럼 화려하고 현란하면서도 멋진 중계 시설을 바라는 게 사치였다. 하지만 TV조선이 단 한 경기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입증했다. 지금까지 수준 높은 K리그 중계는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거였다.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들이여, 보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