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팬이라면 그의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다 안다. 선수가 고통에 신음하며 그라운드에 쓰러져 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는 최주영 의무팀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94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19년 동안 축구 대표팀을 위해 헌신했던 그가 이제 대표팀 의무팀장에서 은퇴했다. 여민지를 비롯해 수십 명의 부상 선수들이 재활에 한참 매달리고 있는 ‘최주영 스포츠재활클리닉’에서 그를 만났다. 무려 A매치를 300회 이상 치른(?) 최주영 의무팀장이 19년 간 정들었던 대표팀을 떠나는 심정을 들어봤다.

최근 19년 간의 대표팀 생활을 마감한 최주영 의무팀장을 직접 만났다. 그는 여전히 선수들의 재활 치료를 도우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반갑다. 최근 대표팀 의무팀장직을 내놓았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나.

나도 반갑다. 요새는 클리닉에서 선수들 치료와 재활에 몰두하고 있다. 지금도 초·중·고·대학교 선수들이 여기에서 재활 중이다. K리그 선수는 지금 전북 2군에서 뛰고 있는 한 명뿐이고 다들 아마추어 신분이다. 프로팀은 자체적으로 재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정작 우리 손이 더 많이 가야 하는 곳은 어린 아마추어 선수들이다. 이런 선수들에게 더 도움을 줘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또한 을지대학에서 이번 학기에는 건강 관리학을 가르치고 다음 학기에는 스포츠 의학을 가르칠 예정이다. 대한트레이너협회 회장과 명예회장을 거쳐 이제는 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역시 가장 궁금한 건 왜 갑자기 대표팀을 떠났느냐는 것이다. 당신이 없는 대표팀은 무척 어색하다.

대표팀에서 나올 때 두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우리 후배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고 싶었다. 나를 빼고 지금 대표팀 의무팀에는 7명이나 더 있다. 이제는 이 젊은 피들이 남녀 연령별 국가대표 축구팀을 책임져야 한다. 이쪽에서 현장 일만 30년 가까이 해 왔는데 정말 야생마처럼 뛰어다녔다. 그런데 이제는 경험으로 얻어진 많은 지식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후진 양성을 위해 대학에 가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고 이 계통에 뜻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 정보와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아마추어 선수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재활에 매달리고 있는데 이제는 그들에게 좋은 치료와 재활 여건을 갖춰주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런 큰 뜻이 있는 줄은 몰랐다. 원래 전공이 뭐였나.

대학에서 물리치료를 전공했다. 이후 병원에 취직해 잠깐 물리치료에 관한 일을 했고 나머지 인생의 전부를 선수 재활 트레이너로 살았다. 이제 거의 30년이 됐다.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눠보자. 처음에는 1982년부터 1991년까지 9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카타르 배구 대표팀 의무진으로 활동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시작한 일이었나.

그때 생각을 하면 내가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 놀랍다. 당시 우리나라는 스포츠 의학의 불모지였다.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그런데 평소 알고 지내던 분이 제안을 해왔다. 대한탁구협회 부회장님으로 있던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카타르에서 스포츠 의학 쪽으로 일 할 사람을 구하는데 한 번 해보지 않겠소?” 사실 나는 이 일에 대해 뭘 해야 하는지도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국내도 아니고 외국에 혼자 갈 용기가 어떻게 났는지 모르겠다. “가겠다”고 했더니 카타르 배구협회 전무이사가 나를 보러 한국으로 찾아왔다. 호텔에서 만나 면접을 보고 카타르에 진출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선수 트레이너로 첫 발을 내딛은 것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머나먼 카타르로 날아가 고생도 많이 했을 것 같다.

처음 카타르로 갈 때 언어 문제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카타르가 과거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여서 어른들은 영어를 곧잘 한다. 몇 마디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생활을 이어가다가 정식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어린 선수들을 치료할 때는 소통이 잘 되지 않아 통역이 따로 붙었는데 정말 답답했다. 어디가 아픈지, 어떻게 다쳤는지, 언제 다쳤는지 하나 하나를 다 통역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중점적으로 아랍어를 배웠다. 어린 선수들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는 언어로 인한 문제는 없었다.

언어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도 컸을 텐데.

우리와 문화가 굉장히 다르다. 카타르는 꼭 낮잠 시간이 있다. 아침부터 낮 12시까지 일한 뒤 다 집에 가서 오후 4시까지 잔다. 그리고 4시에 다시 회사로 돌아와 일하다가 6시가 되면 퇴근한다. 이 시간에 일 때문에 관공서에 가면 아무도 없다. 대낮에 날씨가 너무 더우니까 그 시간에는 나라 전체가 ‘올스톱’이다. 반바지도 못 입고 돌아다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해서는 개방적인 나라였지만 이슬람권 문화라 많은 통제가 따르기도 한다. 12월이 되면 우리의 가을 날씨 정도되는데 두꺼운 가죽 점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도 신기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한 팀에서 쭉 일해 왔는데 어떻게 축구 대표팀과 인연을 맺게 됐나.

1992년 동생과 건축 관련 사업을 하려고 한국에 돌아왔다. 물론 카타르 배구협회에서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걸 말렸다. 10년 동안 함께 해 정도 들었지만 사업을 위해 과감히 사표를 냈다. 그런데 한 1년 지나니 몸이 근질근질하고 하늘의 비행기만 보면 ‘아, 내가 가끔씩 비행기 타고 여기저기 많이 다녔었는데’하는 생각이 들더라. 과거 미국에서 선수 트레이너 공부를 마치고 김정남 부회장 등 축구 원로들이 선수 생활할 때 가끔 팀 닥터로 대표팀에 봉사하시던 은사님께 인사를 하러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당시 창단하는 현대 야구단이 트레이너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지원서를 넣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은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축구 대표팀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동시에 현대 야구단에서도 연락이 왔는데 고민하다가 축구 대표팀을 선택하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한 상태에서 잘된 일이었다. 사업은 이때 접었다.

1994년 대표팀 트레이너를 시작해 무려 19년 동안 축구와 함께 했다. 굵직한 대회에서 당신 모습을 본 기억이 참 많다.

월드컵과 올림픽, 아시안컵에만 네 번씩 참가했고 아시안게임에는 다섯 번 나갔다.

평생 한 번 나가기도 힘든 대회를 그렇게나 많이 나갔다니 대단하고 부럽다. 그런데 보통 축구선수들의 A매치 출장 기록을 세는데 당신의 A매치 기록을 센다면 얼마나 될까.

세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나를 따라올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1994년부터 내가 빠진 A매치가 거의 없다. A매치에 포함되지 않는 청소년 대회나 올림픽까지 포함하면 더 어마어마할 것이다.

내가 한 번 집에 가 세어보겠다.

재미있을 것 같다. 나도 내가 A매치에 얼마나 참석했는지 참 궁금하다. (확인해보니 최주영 의무팀장이 대표팀과 인연을 맺은 1994년 9월부터 최근까지 펼쳐진 A매치는 310회가 넘는다. 몇 경기 빠졌다고 쳐도 그가 참여한 A매치는 적어도 300경기가 넘을 것이다.)

항상 궁금한 게 있었다. 부상을 당해 그라운드에 누워 있는 선수에게 전력질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달리기 연습을 따로 하는 편인가. 무척 빠르다.

체력 관리는 자부한다. 카타르에 있을 때는 매일 한 시간 동안 12km를 뛰었고 테니스와 골프도 꾸준히 했다. 한국에서 축구 대표팀을 맡은 뒤에도 헬스장에서 꾸준히 운동을 했다. 은퇴하기 전까지 선수들이 재활하면 그 시간 동안은 같이 뛰었다. 물론 선수들하고 똑같이 뛸 수는 없지만 한 시간 반이면 그 시간 동안 선수 옆에서 할 건 다 한다. 선수가 부상을 당했을 때 그라운드로 빠르게 달릴 수 있었던 것도 평소에 운동을 한 덕분이었다. 사람들이 “아니, 어떻게 옛날하고 그렇게 똑같이 잘 뛰느냐”고 하는데 운동을 평소에 안 했으면 나이 먹고 아마 체력적인 한계가 왔을 것이다.

나는 사실 당신이 이제 그라운드로 전력질주 할 체력이 없어서 대표팀을 떠난 줄 알았다.

그건 절대 아니다. 내가 항상 그라운드로 빠르게 달려 나간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사실 처음에는 무조건 빨리 달렸다. 넓은 운동장에 누가 넘어져 있을 때 내가 그라운드로 달려 나가면 관중들이 나만 보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수가 다쳐서 다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데 나만 뛰어 들어가면 얼마나 쑥스럽겠나. 그래서 빨리 뛰었다. 물론 빨리 아픈 선수를 낫게 해주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쑥스러운 마음이 컸다. 조금 경험이 쌓인 뒤에는 이기고 있거나 반드시 무승부 이상 거둬야 하는 경기에서는 일부러 천천히 들어간다. 시간을 끌기 위해 속력을 조절하는 것이다. 나도 팀의 일원 아닌가. 나도 늦추고 땡기고 전략적으로 한다.

카타르에 있을 때 그런 시간 끌기는 더 확실하게 배웠어야 했다. 그런데 또 궁금한 게 있다. 당신이 그라운드에 뛰어갈 때 챙기는 가방에는 뭐가 들어있나. 보통 보면 타박이건 뭐건 부상 부위에 다 시원한 얼음물만 뿌리는 거 같다.

정말 현장에서 필요한 것들은 가방에 다 들었다. 피 흘리는 상황을 대비해 거즈가 들었고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 연고도 들었다.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지만 땀이 나 반창고가 떨어지는 일이 많아 붕대도 챙겨야 한다. 타박에 필요한 냉각 스프레이와 심각하게 골절을 당했을 경우를 대비해 부목도 들었다. 그리고 가위 등 나머지 필요한 물품도 더 챙긴다. 뿐만 아니라 응급 상황에 대비해 심장 마사지를 할 수 있는 기구까지 있다. 현장에서 이뤄질 수 있는 건 그 안에 다 들어있다. 시원한 얼음물만 든 게 아니다.

나는 얼마전 조기축구에 나갔더니 무릎이 까졌는데 파스를 뿌려주더라. 그나저나 지금의 아내를 소개 받은 지 19일 만에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난 지 19일 만에 프로포즈를 한 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만난 지 19일 만에 호적에 올렸다. 결혼식만 안 했을 뿐 19일 만에 부부가 된 것이다.

정말 화끈한 남자다. 뭐가 그렇게 급했나.

카타르에 있을 때였는데 한국에 머물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한 달 정도 한국에 머무는데 귀국하자마자 누굴 바로 만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한국에 열흘 정도 있다가 지인이 학교 선생님이라는 여성을 소개해줬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 참 괜찮더라. 나는 수다스럽고 활동적인데 그녀는 참 조용했다. 결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흐지부지되면 끝 아닌가. 1년 뒤에도 이 만남이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때 내가 한국에 다시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서둘렀다. 만난 지 19일 만에 약혼식을 하고 호적에 그녀 이름을 올렸다. 그래야 내가 카타르에 돌아가 초청을 할 수 있었다. 그 다음 해에 한국에 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지금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내가 오늘 누굴 만나 4월 17일에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참 실감이 나질 않는다. 대표팀 생활을 하다보면 외국에 나가는 경우도 많다. 가정에는 소홀하지 않았나.

많은 이들은 밖에서 나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쪽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대표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고 영광을 누리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나. 그것도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대표팀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절제해야 하고 봉사정신과 희생정신을 갖춰야 한다. 내 모든 걸 내려놓고 팀만을 생각해야 한다. 다른 사람하고 낮에 똑같이 일하고 남들 다 쉴 때도 밤 11시까지 선수들 몸 상태 챙겨야 한다. 이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또 팀이 하나면 말도 안 한다. 연령별 대표팀이 다 따로 있는데 내가 일하던 초창기에는 이걸 다 관리하는 사람이 나하고 후배, 딱 두 명이었다. 연령별 대표팀 다 챙기다보니 1년에 집에 딱 두 달 들어간 적도 있었다. 정말 몸은 피곤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이런 생각 없이는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아내가 무척 불만이 많았을 것 같다.

당연하다. 항상 나에게 “그만두면 안 되겠느냐”는 말을 했다. 나도 사실 ‘아, 이번 대회까지만 하고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마음 속으로 사표를 한두 번 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둘째 아들이 지금 이 일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내가 교수로 있는 학교에 제자다. 4학년인데 물리치료를 전공해 내가 걸어온 길을 걸어간다고 해 무척 기분이 좋다. 아들이 둘인데 그래도 둘 중 하나는 이쪽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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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은 이 부상으로 1998년 프랑스월드컵 출전 꿈이 날아갔다. 결국 황선홍을 프랑스월드컵에서 단 1분이라고 투입하려던 노력도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사진=대한축구협회)

당신은 항상 부상을 당한 선수에게 ‘어머니의 약손’ 같은 존재다. 특히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을 당한 황선….

아휴, 당시 황선홍 이야기를 하면 지금도 안타깝다. 모든 선수의 부상이 나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마 어떤 부상이 가장 마음 아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민 없이 1998년 황선홍의 부상을 꼽을 것이다. 프랑스에 함께 날아가 치료와 재활만 하고 결국 한 경기도 못 뛴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회 중간부터라도 뛸 수 있었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아쉽다.

아마 모든 축구팬이 그랬을 것이다. 황선홍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당신의 심정은 어땠나.

중국과 평가전을 치르고 곧바로 다음 날 프랑스로 날아가는 일정이었는데 다들 알다시피 중국전에서 황선홍이 큰 부상을 당했다. 중국전이 끝나고 밤새도록 치료에 매달렸지만 시간의 한계가 있었다. 또한 다음날 출국을 위해 짐도 싸야하고 치료 기구도 싹 다 챙겨야했다. 거의 전쟁이었다. 공항까지 가는 길에도 치료하고 약 먹이고 비행기 안에서도 온 정성을 기울였다. 기압 차이로 부상 부위가 부어 오르면 통증이 더 생기기 때문에 비행 도중에도 계속 얼음 찜질을 해줬다. 프랑스에 도착해서도 재활에만 매달렸는데 결국 재활만 하다 돌아오게 됐다. 본인도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황선홍이 “뛸 수 있다, 뛸 수 없다” 말이 많았다. 당시 직접 치료와 재활을 담당한 입장에서 황선홍이 그라운드에 나서는 게 가능하리라고 믿었나.

그때는 1%의 가능성을 위해 모든 걸 걸었다. 불가능은 절대 없다는 생각으로 치료와 재활에 임했는데…. 결국 아쉽게 됐다.

당시 벨기에전에서 이임생의 붕대 투혼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당신이 직접 붕대를 감아주지 않았나.

그러게 말이다. 나의 첫 월드컵이었는데 상황이 급박했다. 우리가 이전 두 경기에서 참패를 당하면서 국민들 앞에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엄청난 원성을 들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벨기에전을 치르는데 이임생의 얼굴에 피가 줄줄 흘렀다. 치료를 위해 이임생에게 달려갔는데 나도 급했고 이임생도 급했다. 이임생이 계속 “선생님, 빨리 빨리”를 외쳤다. 그때 우리 스포츠 의약품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른 나라 선수들은 다 좋은 붕대를 쓰는데 우리가 쓰는 붕대는 팔 다쳤을 때 감는 그냥 보통 탄력 붕대였다. 이임생이 다시 경기에 나섰는데 그게 벗겨지는 거였다. 주심이 다시 붕대를 감고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골문 뒤로 전력 질주해 다시 붕대를 감아줬다. 그때는 임원이나 선수들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나도 엄청 흥분해 있었다. 1초라도 아끼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당신의 두 번째 월드컵인 2002년 한일월드컵은 신화가 됐다. 기분이 어땠나.

나에게는 엄청난 축복이다. 그런 역사의 한 가운데에서 함께 했다는 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우리 조상님이 월드컵 4강 신화의 한 구성원이었다”는 이야기는 시간이 흘러도 우리 집안에 대대손손 물려줄 이야기 아닌가.

보는 우리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는데 당신은 오죽했을까. 그런데 이 대회에서도 참 부상 선수가 많았다. 1998년 이임생에 이어 이 대회에서는 황선홍이 또 다시 붕대 투혼을 선보였다.

나 참. 또 다칠 줄 알았나. 그런데 사실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는 있었다. 이임생에게 붕대를 감아줬던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다른 나라 선수는 일명 ‘양파자루’라는 붕대를 썼다. ‘서지넷’이라고 하는 건데 원래 이게 머리에 쓰는 용도는 아니다. 보통 침대에 누워 팔을 위로 고정할 때 쓰는 거다. 그런데 프랑스월드컵 때 어느 선수가 이걸 쓴 모습을 보고 나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월드컵을 앞두고 ‘서지넷’ 한 개와 안 쪽에 끈끈이가 달려있는 탄력 붕대 한 개를 준비했다. 그리고 미국전에서 황선홍의 이마가 찢어졌을 때 재빨리 달려가 가방에 손을 넣고 붕대를 꺼냈는데 ‘서지넷’을 준비해 놓고도 내 손에 잡힌 건 일반 탄력 붕대였다. 급한 상황이라 익숙한 붕대에 손이 간 모양이다. ‘서지넷’을 준비했지만 결국 그걸 쓰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임생이 감던 붕대보다는 업그레이드 돼 안 쪽에 끈끈이가 있어서 황선홍이 경기에 나서는 데는 사실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비화를 들을 수 있다니 참 흥미롭다. 그런데 당시 박지성도 미국전 이후 부상으로 고생했다.

정말 마음 졸였다. 나뿐 아니라 히딩크 감독도 박지성의 부상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미국전에서 박지성이 왼발 아킬레스 바깥쪽 복사뼈가 부어 올랐다. 집중적으로 치료를 해 다음날 가벼운 조깅을 할 수 있게 됐고 그 다음 날에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됐다. 잘 치료가 돼 붓기는 빠졌지만 테이핑을 하지 않고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테이핑을 하고 치료를 해줬다. 정말 초조한 마음으로 재활을 도왔다. 그리고 근육 부상으로 폴란드전과 미국전에 나서지 못했던 이영표도 재활을 통해 포르투갈전에 처음으로 나섰는데 이영표가 어시스트를 하고 박지성이 결승골을 넣는 순간 전율이 왔다.

하지만 박지성은 골을 넣고 당신이 아니라 히딩크 감독 품으로 달려갔다.

내가 치료해준 저 발로 어시스트를 하고 골을 넣었다고 생각하니 감동 그 자체였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팀이 골을 넣었다는 기쁨이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더한 기쁨이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지성아, 나한테도 와서 안기렴.’ 그런데 나한테는 안기지 않더라.

2002 한일월드컵은 참 많은 추억을 선사한 거 같다.

그렇다. 안정환과의 에피소드도 잊을 수 없다.

무슨 에피소드인지 소개해 달라.

사실 안정환도 당시 발목이 좋지 않았다. 최종 엔트리 확정 직전에 발목을 다쳤는데 조금만 더 심했으면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대회 내내 발목 관리를 해줬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 시작하기 전에 라커룸에서 내가 직접 테이핑을 해줬다. 그런데 발목에 테이프를 감는 도중에 이 테이프가 갑자기 ‘북’ 찢어지는 거다. 나는 기독교인이라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 테이핑을 하다가 이게 찢어지지는 않는다. 가뜩이나 예민한 선수들은 이런 거 하나에도 무척 민감하다. 내가 살짝 당황하다가 빨리 위기를 벗어나고 안정환을 안심시키기 위해 감았던 테이프를 다 풀어버렸다. 그러면서 “이 테이프 이거 완전 불량이구만”했다. 그냥 감던 테이프가 끊어졌으면 그 위에다가 다시 테이프를 감으면 되는데 다 풀어버리고 새 테이프를 뜯어 새로 테이핑을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안정환이 전반전에 페널티킥을 놓치고 말았다. 혼자 전반전 내내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혹시 그 테이프 때문일까? 혹시 정환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지만 안정환은 연장전에 일을 내지 않았나.

전반전이 끝나고 하프타임 때 안정환이 라커룸에 들어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뭔가 힘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차마 안정환한테 다가갈 수가 없었다. 후반전을 위해 그라운드로 나갈 때 “정환아, 나가서 즐겨”라는 말을 간신히 했다. 다행히 설기현이 동점골을 넣고 안정환이 정말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돋는 극적인 골든골을 성공시켜서 이탈리아를 물리쳤다. 안정환이 반지 키스를 하는데 나는 정말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기뻤다. 안정환도 그랬겠지만 나도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만약 안정환이 골을 넣지 못하고 경기가 끝났다면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안정환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 속에 평생 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 그때는 ‘우와, 살았다’라고 가슴 속으로 몇 번이고 외쳤다.

안정환의 골든골에 환호하지 않은 대한민국 국민이 없지만 당신 만큼 간절했던 사람도 또 없었을 것 같다. 당시 김태영의 마스크도 화제였다.

김태영이 이탈리아전에서 코뼈를 다쳤다. 그런데 일본 선수가 안면 마스크를 하고 월드컵에 나선 걸 봤다. 그래서 그게 딱 떠올랐는데 그냥 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아예 구할 수가 없어서 당시 일본에서 뛰던 유상철에게 물었다. “일본 선수가 마스크를 하던데 우리도 저걸 좀 구해보자.” 유상철이 도움을 줘 김태영이 다친 날 곧바로 일본 관계자와 직접 통화를 했다. 나는 일본에서 그냥 돈 주고 사 오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선수의 얼굴 형태에 따라 제작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면 마스크 제작하는 사람 좀 빨리 섭외해서 나하고 통화하게 해달라”고 했고 결국 연결이 돼 제작자 두 명이 다음날 아침 곧바로 한국으로 왔다. 당시 우리가 대전에 묵고 있었는데 방을 두 개 잡아줬다. 하나는 자는 방이었고 하나는 작업실이었다. 본을 뜨고 다시 만들고 다시 가공하고 밤을 새 무려 7시간 동안 이걸 만들었다. 하나는 연습용, 하나는 시합용이었다. 그래서 김태영이 이탈리아전이 끝나고 이틀 뒤부터 이걸 쓰고 훈련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게 인터넷 쇼핑몰 같은 데서 그냥 파는 건줄 알았다. 택배 아저씨가 배달해 주는 건줄 알았다. 2006년 독일월드컵 때도 또 붕대를 감을 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최진철이었다.

참 이상한 게 평소에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꼭 월드컵 본선 무대에만 가면 세 대회 연속으로 얼굴에 피를 흘리는 일이 생겼다. 올림픽 때도 없었고 월드컵 예선전 때도 없었는데 이상하다. 다치는 일이 없는 게 가장 좋지만 2006년 독일월드컵 때는 이미 두 번이나 부상 선수한테 일반 탄력 붕대를 감아준 게 미안해 이번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서지넷’을 사용하겠다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래서 최진철한테는 ‘서지넷’을 썼다. 또한 조재진이 헤딩 경합을 하다가 떨어지는 과정에서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보자마자 ‘아, 이건 정말 큰 부상이구나. 못 뛸 것 같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다행히 엉덩이 근육 타박이었다. 만약에 그때 허리를 다쳤다면 정말 큰 일 날 뻔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신의 마지막 월드컵인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

박지성이 남아공에 들어가기 전 오스트리아 캠프에서 허벅지 뒤쪽 근육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스페인과의 마지막 평가전에 나서지 못했다. 재활에 매달렸고 철저하게 근육 관리에 들어갔다. 남아공에 들어가서도 힘줄을 일일이 손으로 다 만지면서 뭉친 부분이 있는지 다 찾아내 해결해주고 근육 보강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짜 개인 운동을 시켜 다행히 큰 무리 없이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이동국도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햄스트링 부상을 당했는데 근육이 약간 찢어졌었다. 허정무 감독님이 “23명 엔트리를 정하는 건 오스트리아에서 마지막에 결정하겠다”면서 “시간이 있으니 최대한 치료에 몰두해 달라”고 했다. 사실 완치가 쉽지 않은 부상이었는데 치료와 재활에 매달린 끝에 결국 3주 만에 회복했다. 정말 정성을 들였다. 보강 훈련을 하고 기계적인 테스트를 해 자료를 뽑아 감독님께 보여드렸고 결국 이동국도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라운드로 뛰어 들어가면 선수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나.

나이지리아전 때였다.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나이지리아 골키퍼가 이청용에게 발로 타박상을 입혔다. 정말 강하게 맞았다. 그래서 내가 뛰어 들어가 이청용에게 물었다. “청용아, 어디가 아파?” 그랬더니 이청용이 떠듬거리면서 “아파. 아파” 이 말밖에 못하더라. 속으로 큰일 났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밖에 나와서 보니 타박이었다. 뭐 이런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선수들의 부상을 지켜보는 마음이 남다를 것 같다. 항상 부상으로 힘들어하는 선수들과 마주한다는 게 보통일은 아닌 것 같다. 당신의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

2010년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이란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김정우와 기성용, 이청용, 조용형 등 대표팀 주축 선수가 무려 네 명이나 부상을 당했었다. 이들은 다 선발 멤버였다. 그런데 이 네 선수를 집중적으로 치료해 모두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물론 다 100% 완쾌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 선수들이 참 잘해줘서 1-1 무승부를 거둘 수 있었다. 선수 몸 관리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움직임 하나 하나까지 다 신경써야 하고 계속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또한 요새는 대표팀에 어린 선수들이 참 많다. 기성용과 이청용도 의젓할 뿐이지 나이는 어리다. 더군다나 남태희나 손흥민 같은 선수들은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우리 아들 같고 아기 같아서 더 안쓰럽다.

19년 동안 대표팀과 함께 했는데 거쳐 간 감독도 무척 많다. 감독들도 다 특징이 있을 것 같다.

그렇다. 히딩크 감독은 임원은 임원대로, 선수는 선수대로 자기가 밀고 당기기를 정말 잘한다. 대처 능력이 대단하다. 뭐 히딩크 감독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명장이라는 걸 다 알지 않나. 반대로 가장 안타까웠던 이는 본프레레 감독이었다. 임원들이나 선수들한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지 못했다. 선수와 임원을 믿어줘야 하는데 혼자만 생각을 갖고 있고 다른 사람을 믿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코치들까지도 믿어주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나에게는 독일을 3-1로 격파한 본프레레 감독이 영원한 명장이다. 그렇다면 국내 감독들은 어땠나.

다들 잘 맞았다. 다른 감독들 역시 임원들을 잘 믿어줬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차범근 감독이 참 잘 맞았다. 의료진에 대한 신뢰도 좋았다. 비록 오랜 시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박종환 감독이나 김호곤 감독도 내가 선수들의 몸상태를 파악해 안 된다고 하면 그걸 전적으로 믿어줬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선수가 부상 중이라면 내가 몸 상태를 점검한 뒤 “이 선수가 테이핑을 하면 20~30분 정도는 뛸 수 있다”고 보고하면 그에 맞는 전술을 구상하면서 의료진을 믿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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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는 정든 대표팀 트레이닝복을 벗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하지만 아직 축구를 위해 할 일이 많다.

나에게는 ‘대표팀의 어머니’처럼 보이지만 정작 선수들 사이에서는 마귀, 사탄, 저승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얼마나 독하게 하기에 그러나.

내가 재활시키려고 걸어가면 선수들이 “저승사자 온다”고 할 정도였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부상을 당한 이영표의 재활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하고 태릉선수촌에서 둘이 매일 개인 훈련을 했다. 그 초롱초롱한 눈에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혹독하게 시켰다. 정말 피눈물 나는 재활이었다. 나중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이를 악물고 독기를 품더라. 눈으로 마음을 읽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되는 건가’ 그런 눈빛이었다. 째려보는데 원망 어린 시선이 확 느껴졌다. 그런데 이영표가 이 힘든 재활을 이겨내고 예선전에서 골도 넣고 펄펄 날았다. 나중에는 나한테 와서 “그때 너무 고마웠다”고 하더라.

19년 동안 대표팀과 인연을 맺은 당신에게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나고 안정환이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에게 월드컵이 끝날 때 이런 말을 했었다. “정환아, 혹시 어디 가서 운동하기 마땅치 않으면 나한테 연락해. 내가 도와줄게.” 그리고 2주 정도 지나 안정환의 진로를 놓고 엄청난 추측이 시작됐다. 안정환이 기자들한테 얼마나 시달렸겠나. 안정환한테서 직접 연락이 왔다. “선생님 저 운동 좀 도와주세요.” 파주에서 단 둘이 운동을 시작했다. 웨이트트레이닝 30분 하고 운동장에 나가 개인운동을 하는데 거취 문제로 머리가 복잡한 상태라 운동에만 ‘올인’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비를 쫄딱 맞으면서 둘이 강훈련을 했는데 운동이 끝난 뒤에 안정환이 그 자리에서 뻗을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부산아시안게임 준비 때문에 대표팀에 합류했고 안정환은 일본에 진출하게 됐다. 만약 안정환이 방황할 때 누가 옆에서 운동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 방황이 길어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안정환은 소속팀이 없는 와중에도 개인 훈련으로 이미 몸이 다 만들어진 상태에서 일본에 가자마자 맹활약을 했다. 다시 대표팀에 뽑혀 입국하는데 어떤 기자가 안정환에게 물었다. “2002년 월드컵 4강 당시 멤버 중 누가 가장 보고 싶느냐”고 말이다. 그때 안정환이 그런 말을 했다. “최주영 선생님이 가장 보고 싶어요.” 참 감동적이었다.

우리는 대표팀 선수를 인정하지만 대표팀 선수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당신은 참 멋진 사람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프로선수들은 나름대로 의료 혜택을 받고 있지만 아마추어 선수들은 부상을 당해도 올바르게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선수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리고 후진 양성을 위해서 대학에서 열심히 제자들을 지도할 계획이고 현재 운영 중인 ‘최주영 스포츠재활 치료 연구소’에서 많은 연구위원들이 운동선수 재활을 위한 좋은 논문을 발표해 학문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나중에는 스포츠의학 석·박사를 배출하는 전문 대학원과 대학교를 설립하는 게 목표다. 지금까지 약 30년간 야생마처럼 현장에서 뛰었다면 이제는 학문적인 길로 방향을 틀어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

최주영 의무팀장을 이제 더 이상 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다. 19년 동안 태극마크를 단 이들이 있다면 어디든 함께 하던 그가 있었기에 선수들이 부상 걱정 없이 그라운드를 휘저을 수 있었다. 무려 300번이 넘는 A매치에서 선수들과 함께 달려온 최주영 의무팀장은 한국 축구의 ‘약손’이었다. 그가 벤치를 향해 손으로 크게 가위 표시를 하면 걱정부터 앞섰고 큰 동그라미를 그리면 안심이 됐다.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선수들에게 집중되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한 그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그가 있어 한국 축구는 아프지 않았다.